갈매기를 보면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 조나단>에 나오는 유명한
경구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가 떠오릅니다. 나는 이 책을 처음 읽은 중학교 시절부터 그 경구를 삶의 교훈으로 삼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조나단이 꼭 높이 날아야만 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고, 높이 날지
않는 갈매기들도 역시 갈매기의 삶을 충분히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높이 나는 일도 의미 있는 것이지만 모든 갈매기가 높이
날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과 더불어 힘의 논리 혹은 강자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해 주는 책이 아닌가 의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 김민수
겨울바다에 서면 갈매기들이 갯바위에서 쉬고 있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동틀 무렵과 해거름에 날갯짓을 하는 갈매기들은 잠자기 전과 잠에서 깨어난 후 몸에 피를 돌게 하기 위해 기지개를 켜는 듯합니다. 푸른 하늘을
날아도, 갯바위에서 쉬고 있어도, 잠시 먹이를 잡기 위해 비상을 해도 갈매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더 높이 날아라, 더 멀리
봐야 한다'고 강요한 것은 아닌지요?
가장 높이 난 갈매기 조나단이 행복했을까요?
우리의 아이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최선의 삶이라 생각하고 가르치는 것들이 우리 아이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그리고 결국 우리 자신도 힘들게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사교육비를 충당하느라 힘들고, 학교교육도 모자라 학원과 학교를 오가며 늘 경쟁하며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을 보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 아이만 안 하면 뒤처질 것 같아서….' '다 자식들을 위하는
일이지요.'
이것이 부모들의 핑계입니다. 그렇다면, 남들이 안 하면 우리 아이 학원 안 보내고 과외를 안 시킬까요? 근본적으로 내
자식을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낫게 키워보겠다는 생각이 과외공화국, 학원공화국을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닌지요? 내 자식이 다른 자식들보다 더
높이 날기를 바라고, 더 멀리 보길 바라는 마음이 왜곡되어 나타난 것은 아닌지요. 우리 아이들에게 갈매기 조나단이 되어야만 한다고, 그저 하루
먹고사는 데 만족하는 갈매기들은 멍청한 갈매기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아닌지요.
ⓒ 김민수
가장 높이 난 갈매기 조나단만 행복했을까요? 그보다 낮은 곳을 날아다니던
갈매기들은 행복하지 못했던 것이며, 실패한 삶일까요?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날았던지 그 높이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었을 터이고, 그 높이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었을 터이니 어쩌면 정말 갈매기답게 살아간 것은 특별한 조나단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살아가던 평범한 갈매기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 삶의 아름다운
모습
꿈이라는 것, 더 높게 날겠다는 것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먹고사는 문제에 매몰되어 사는 게 저급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가진 자들, 이미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 그것은 삶의 한
모습이요, 삶이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 김민수
꽃샘 추위가 한풀 꺾이니 새벽바다도 따스합니다. 그 따스함이 절실하게
감사한 것은 칼바람 불어오는 바다에 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이들은 어쩌면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또 살다보면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알기에 감사하는 이들도
있겠지요.
모두가 높이 나는 갈매기가 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삶의 목표가 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꿈을 갖고 살 수 있고, 또 그런 꿈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어야겠지요. 그러나 오직 높이 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만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지면 안 되겠지요.
농사꾼이 과연 부끄러운 꿈인가?
어릴 적,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이나 과학자 정도를 이야기해야 아이들이 "우와!"할 터인데 '농사꾼'이라고 했더니 다를 킥킥 웃습니다. 나중에 담임선생님이
저를 불러서 꿈을 크게 가지라고 했습니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나의 꿈이 아버지와 같은 농사꾼이었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 꿈은 내 꿈 목록에서 지워져 버렸습니다. 어른이 되어서야 땅을 가꾸며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았고,
어떤 아픔도 감수해야 하는지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농사꾼이라는 꿈이 그리 부끄러운 꿈이 아니라는 것도 말입니다. 물론 지금의 나에 대해서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때 담임선생님이 "그래, 네 꿈도 소중한 거야"라고 토닥거려 주셨다면 농사꾼이 되지 않았더라도 내가 꾸었던 그
꿈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 땅의 농민을 바라보는 눈도 달랐을 것입니다.
ⓒ 김민수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들, 만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갈매기 조나단 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사실은 특별한 삶입니다. 그 평범함 속에
들어 있는 특별함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갈매기 조나단, 그래서 대다수의 높이 날지 못하는 갈매기들은 하릴없는 갈매기들인 것처럼
은연중에 내면화시킨다면 그만큼 왜곡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겠죠.
크고 높은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크고 높은 꿈이 그 꿈과는 다른 꿈이거나 그 꿈보다는 못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천시하는 그런 꿈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어떤 꿈이든 꿈을 꾸고 있기에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 갈매기 조나단의 꿈만
꿈이 아니라 그저 바다를 낮게 날며 그 날의 먹이를 얻는 일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갈매기들의 꿈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갈매기 조나단의 꿈을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 갈매기, 그래서 조나단이 다른 갈매기처럼 살아가기를 바랐던 엄마
갈매기를 닮아야 할 분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전가하며 쉴 틈조차 주지 않으며 더 높이 날기를 강요하는 이 땅의
어머니들,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 땅의 아버지들이 닮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갈매기를 보면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 조나단>에 나오는 유명한
경구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가 떠오릅니다. 나는 이 책을 처음 읽은 중학교 시절부터 그 경구를 삶의 교훈으로 삼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조나단이 꼭 높이 날아야만 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고, 높이 날지
않는 갈매기들도 역시 갈매기의 삶을 충분히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높이 나는 일도 의미 있는 것이지만 모든 갈매기가 높이
날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과 더불어 힘의 논리 혹은 강자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해 주는 책이 아닌가 의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 김민수
겨울바다에 서면 갈매기들이 갯바위에서 쉬고 있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동틀 무렵과 해거름에 날갯짓을 하는 갈매기들은 잠자기 전과 잠에서 깨어난 후 몸에 피를 돌게 하기 위해 기지개를 켜는 듯합니다. 푸른 하늘을
날아도, 갯바위에서 쉬고 있어도, 잠시 먹이를 잡기 위해 비상을 해도 갈매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더 높이 날아라, 더 멀리
봐야 한다'고 강요한 것은 아닌지요?
가장 높이 난 갈매기 조나단이 행복했을까요?
우리의 아이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최선의 삶이라 생각하고 가르치는 것들이 우리 아이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그리고 결국 우리 자신도 힘들게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사교육비를 충당하느라 힘들고, 학교교육도 모자라 학원과 학교를 오가며 늘 경쟁하며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을 보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 아이만 안 하면 뒤처질 것 같아서….' '다 자식들을 위하는
일이지요.'
이것이 부모들의 핑계입니다. 그렇다면, 남들이 안 하면 우리 아이 학원 안 보내고 과외를 안 시킬까요? 근본적으로 내
자식을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낫게 키워보겠다는 생각이 과외공화국, 학원공화국을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닌지요? 내 자식이 다른 자식들보다 더
높이 날기를 바라고, 더 멀리 보길 바라는 마음이 왜곡되어 나타난 것은 아닌지요. 우리 아이들에게 갈매기 조나단이 되어야만 한다고, 그저 하루
먹고사는 데 만족하는 갈매기들은 멍청한 갈매기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아닌지요.
ⓒ 김민수
가장 높이 난 갈매기 조나단만 행복했을까요? 그보다 낮은 곳을 날아다니던
갈매기들은 행복하지 못했던 것이며, 실패한 삶일까요?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날았던지 그 높이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었을 터이고, 그 높이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었을 터이니 어쩌면 정말 갈매기답게 살아간 것은 특별한 조나단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살아가던 평범한 갈매기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 삶의 아름다운
모습
꿈이라는 것, 더 높게 날겠다는 것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먹고사는 문제에 매몰되어 사는 게 저급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가진 자들, 이미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 그것은 삶의 한
모습이요, 삶이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 김민수
꽃샘 추위가 한풀 꺾이니 새벽바다도 따스합니다. 그 따스함이 절실하게
감사한 것은 칼바람 불어오는 바다에 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이들은 어쩌면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또 살다보면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알기에 감사하는 이들도
있겠지요.
모두가 높이 나는 갈매기가 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삶의 목표가 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꿈을 갖고 살 수 있고, 또 그런 꿈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어야겠지요. 그러나 오직 높이 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만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지면 안 되겠지요.
농사꾼이 과연 부끄러운 꿈인가?
어릴 적,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이나 과학자 정도를 이야기해야 아이들이 "우와!"할 터인데 '농사꾼'이라고 했더니 다를 킥킥 웃습니다. 나중에 담임선생님이
저를 불러서 꿈을 크게 가지라고 했습니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나의 꿈이 아버지와 같은 농사꾼이었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 꿈은 내 꿈 목록에서 지워져 버렸습니다. 어른이 되어서야 땅을 가꾸며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았고,
어떤 아픔도 감수해야 하는지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농사꾼이라는 꿈이 그리 부끄러운 꿈이 아니라는 것도 말입니다. 물론 지금의 나에 대해서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때 담임선생님이 "그래, 네 꿈도 소중한 거야"라고 토닥거려 주셨다면 농사꾼이 되지 않았더라도 내가 꾸었던 그
꿈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 땅의 농민을 바라보는 눈도 달랐을 것입니다.
ⓒ 김민수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들, 만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갈매기 조나단 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사실은 특별한 삶입니다. 그 평범함 속에
들어 있는 특별함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갈매기 조나단, 그래서 대다수의 높이 날지 못하는 갈매기들은 하릴없는 갈매기들인 것처럼
은연중에 내면화시킨다면 그만큼 왜곡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겠죠.
크고 높은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크고 높은 꿈이 그 꿈과는 다른 꿈이거나 그 꿈보다는 못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천시하는 그런 꿈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어떤 꿈이든 꿈을 꾸고 있기에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 갈매기 조나단의 꿈만
꿈이 아니라 그저 바다를 낮게 날며 그 날의 먹이를 얻는 일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갈매기들의 꿈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갈매기 조나단의 꿈을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 갈매기, 그래서 조나단이 다른 갈매기처럼 살아가기를 바랐던 엄마
갈매기를 닮아야 할 분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전가하며 쉴 틈조차 주지 않으며 더 높이 날기를 강요하는 이 땅의
어머니들,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 땅의 아버지들이 닮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첫댓글높이 날아 오르는 갈매기가 반드시 최고이며 능력이 앞서 간다고 단정 지울 수는 없겠지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모여서 사는 세상은 결국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굴러가고 새롭게 변화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높이 날아 오르는 갈매기, 앞서 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요?
첫댓글 높이 날아 오르는 갈매기가 반드시 최고이며 능력이 앞서 간다고 단정 지울 수는 없겠지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모여서 사는 세상은 결국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굴러가고 새롭게 변화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높이 날아 오르는 갈매기, 앞서 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요?
좋은 글 소개해주셨습니다. 도전의 이데 이던 패자 혹은 은자의 이데이던 , 그건 각자의선택이 아닐까요? 선택할수있을때까지 능력을 길러 주는게, 부모와 교육의 몫이고, 나머지는 놈의 몫이지...... 아닌가 ??? (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