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집짓기 - 고명근의 작품세계
고명근은 세계 곳곳에서 채집한 사진 이미지를 재구성하여 입체로 구축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오고 있다. 그가 작업의 재료로 활용하기 위해 축적해 놓은 이미지들은 나무와 구름, 하늘과 바다 등 자연을 비롯하여 건물, 조각, 벽 등의 인공물에 이르기까지 실로 방대하다. 그의 관심은 채집한 사진을 건축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구성하는 데에 있다. 자연과 사물의 이미지를 채집하는 사진 작업만으로는 도무지 성이 차지 않는 것이다. 세계를 관찰하고 기록하며 그 이미지를 수집하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것은 형상을 주조해내고자 하는 욕망과 양립하기 어렵다. 그런 까닭에 그는 두 가지 욕망을 같이 만족시키는 방법을 찾는다. 그렇게 그의 상상력은 이미지가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동원된다. 그것은 한없이 날아오르기만 하는 상상력이 아니라 이미지의 집을 만드는 구축적 상상력이다. 그 상상력은 또한 열정에 들떠 부풀어 오르는 상상력이 아니라 차분하고 이지적인 상상력이다. 작가는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공간 자체보다는 오히려 시각의 위치에 따라 공간 속에서 주어지는 이미지의 변화에 관심을 두는 듯 해 보인다. 예를 들면 연작에서 보여주었듯이 한쪽 면에 새겨진 이미지가 뒤쪽 면의 이미지와 겹치고 중첩되어 만들어내는 새로운 이미지에, 즉 시각의 위치에 따라 이미지가 변하는 현상에 흥미를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관찰자의 능동적인 시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작업이 연작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몸을 시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세계를 알아나가기 위한 한 방편이다. 몸은 인간의 것이지만 동시에 세계의 일부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처럼 몸은 기억, 감정, 의지를 담은 인간의 외피로서 의식이 거주하는 집이다. 몸은 물질성을 지닌 세계에 속하는 까닭에, 끊임없이 세계와 접촉하는 까닭에 비물질적인 의식과 물질적인 세계를 중재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런 몸이 몸의 일부인 시각의 대상으로 주어져 있다. 결국 그의 작업은 시각 연구이자 몸 연구이며 나아가 세계에 대한 연구이다. 몸은 물질성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욕망 속에서 비로소 아름답다. 몸의 유한성은 궁극의 한계이지만 욕망덩어리의 몸은 그 한계를 순순히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다. 물질성을 탈피하려 꿈틀대는 몸이야말로 진정한 몸이다. 작가는 투명성을 통해 몸의 그러한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물질이 형상 없이는 실체에 도달하지 못하듯 몸은 유한한 형상 없이는 물질성마저도 갖지 못한다. 형상이란 사물의 한계여서 형상 없는 사물은 존재에 이르지 못한다. 형상은 또한 시각이 부딪쳐 멈추는 지점을 가리키는 까닭에 투명한 공간은 형상을 갖지 못한다. 반대로 시각은 공간을 가로질러 한없이 나아갈 뿐이다. 그런 까닭에 시각은 형상을 붙잡지만 공간은 붙들지 못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투명한 몸은 그래서 형상이 아니며 시야에 붙들리지도 않는다. 앞면에 나타난 몸을 보려하는 순간 시각은 즉각 그 몸을 지나쳐 뒤편에 새로이 출현하는 또 다른 몸과 만난다. 하지만 어느 것도 시각에 붙잡히는 형상으로서의 몸이 아니어서 시각은 끝없이 표류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시각은 몸의 이미지가 구축하고 있는 투명한 공간에 갇히고 만다. 고명근의 작업은 형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시각의 한계를 근원에서부터 드러내 보여주려 한다. 자신의 작업도 결국은 그 한계에 부딪치고야 말지만 그것은 의미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가 시작하는 지점이다. 그런 점에서 시각의 한계와 맞서는 그의 작업은 시각예술의 조건을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글 / 박평종(사진비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