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유형진
식탁 위에 싹 자란 감자 하나, 옆에는 오래전 흘린 알 수 없는 국물, 눈물처럼 말라있다. 멍든 무릎 같은 감자는 얽은 눈에서부터 싹이 자란다. 싹은 보라색 뿔이 되어 빈방에 상처를 낸다.
어느 날 내 머릿속 눈이 저렇게 싹을 틔운다면?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보자기는 가위를 가위는 바위를 바위는 보자기를 이기지 못하지. 숨바꼭질 술래를 정하면서 아이들은 삶의 부조리를 배운다. 무궁화꽃이 아무리 피어도 술래는 움직이지 못한다. 얼마나 오래된 것들을 저장해야 저렇게 동그래질까? 추억은 때로 독이 되어서 요리할 때는 반드시 잘라내야 한다. 싹이 틀 때 감자는 얼마나 아플까?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시 읽기>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유형진
시인 유형진이 2005년 여름 첫 시집 『피터레빗 저격사건』을 출간하였습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등단작품 가운데 하나인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와 위의 시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가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눈에 선뜻 들어왔다.
제목이 꽤 긴 그러나 신선한 그의 등단작 <내가 가장 예뻣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는 제가 이미 몇 년 전에 보았던 작품입니다. 그때 저는 조금 멋쩍기는 합니다만, 《현대문학》에서 신인을 등단시키는 자리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했고 유형진 시인의 이 작품이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유형진 시인의 등단작품인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가 말하듯이 한 사람이 이 땅에서 가장 예뻤을 때는 어느 때일까요? 서너살 때일까요? 유치원 시절일까요? 아니면 초등학교 시절일까요?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배추 속처럼 안쪽이 차기 시작하는 대학 시절일까요? 물론 이들 가운데 어느 한 시기를 주저 없이 선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성장기가 25세까지라면, 인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25세가 되는 대학 졸업반 시절까지의 기간 모두가 실은 인간에게 ‘가장 예쁜 시절’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셈법이 너무 거칠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선은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인 초등하교 시절까지를, 그리고 다음은 하이틴 시절까지를 우리가 이 땅에서 가장 예쁜 시절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예쁜 시절에, 위의 시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가 말해 주듯이, 우리의 존재 속에서는 세상을 향한 싹이 트기 시작합니다. 감자의 눈에서 싹이 트듯, 우리의 몸에서도 생명의 싹이, 삶의 싹이 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적인 나르시시즘에 기대어 ‘희망의 싹’이라 부르기도 하고, ‘생명력의 찬란한 움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흥분합니다. 희망과 생명력이 우리를 밝은 미래로 이끌어 갈 것이라고 마음껏 상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유형진은 위 시의 첫 부분부터 감자에 싹이 난 것을 보고 마냥 희망에 부풀어 흥분하지만은 않고, 조금 냉정하게 존재의 움틈에 대해 생각합니다. 존재의 움틈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는 눈물처럼 국물이 말라붙어 있는 식탁 위에서, 얽은 눈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싹을 틔운 감자를 바라보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와 생명 속에 깃든 움틈과 생명애의 아이러니를 직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와 생명의 움틈과 그 생명애는 한편으로 엄청난 희망의 상징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감당해야 할 아픔의 이음동의어이자 그림자와 같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인의 눈에 식탁 위에서 눈트고 있는 감자의 싹은 보라색 뿔이 되어 빈방에 아픈 상처를 낸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위와 같이 시작되는 유형진의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는 몇 가지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우선은 시의 제목이자 작품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이 표현은 의미도 모른 채 초현실주의자의 주문처럼 외치고 다니던 뜻 없던 유년기의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언어의 심오한 뜻에 저당 잡혀 사는 어른들의 현실에 비추어보면 이와 같은 뜻 없는 놀이언어의 명랑한 외침은 가볍고 환한 삶의 한 페이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음은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감자의 눈에 돋아난 싹을 보면서 자신의 머릿속에 싹이 트는 광경을 상상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머리와 같이 생긴 감자, 그 감자에서 돋아나는 싹은 우리들의 둥근 머리와 그 안에서 움트는 사유의 싹들을 연상하도록 하기에 충분합니다.
또 있습니다. 위 시의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이 땅에서 가장 예뻤을 때 하는 놀이 가운데 하나인 가위바위보 놀이를 감자의 싹틈으로부터, 더 나아가 존재 일반의 싹이 트는 광경으로부터 상상해낸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어린 시절의 가위바위보 놀이를 기억할 것입니다.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묵찌빠’라는 주문을 전력을 다하여, 합창을 하듯 외치고 나서는, 각자가 숨겨놓은 비밀의 패를 불현듯 앞으로 내밀며 순간의 운명을 결정하듯 비장해지고, 이 놀이를 하느라 저녁이 온 줄도 모르고 흥분했던 일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놀이는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아 늘 동네가 시끌벅적했던 일을 말입니다.
저는 지금도 모릅니다. 왜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기 위하여 ‘잠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묵찌빠’라는 그 주문과 같은 소절을 모두가 그토록 비장하게, 그토록 힘차게 함께 외쳤는가 하는 점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놀이가 왜 그렇게 재미있으며, 이 놀이가 어떻게 하여 요즘까지 어린이들에게 전승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와 같은 흥미로운 점을 가진 위 시에서 식탁 위의 감자에 싹이 난 것을 바라보며 촉발된 시인의 상상력은 가위바위보 놀이와 술래잡기 놀이에 담긴 생의 의미를 천착하는 데로 깊숙이 이어집니다. 위 시에 따르면 우리가 존재의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 가장 예쁜 시절에 하는 이 가위바위보 놀이와 술래잡기 놀이에는 이미 삶의 부조리가 무엇인지를 배우도록 하는 비리의 원형이 고스란히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철없는 아이들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놀이에 탐닉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놀이 속에서 그들은 이 세상에서 누구도 영원히 승자일 수도, 패자일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노력과 필연만이 아닌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우연으로 이루어진 생의 조합에 의하여 이 땅에서의 승자와 패자가 수시로 갈린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디 이뿐인가요 이 놀이를 통하여 아이들은 가위바위보 놀이나 술래잡기 놀이처럼 우리가 만들어놓은 규칙에 의하여 우리들의 삶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만들어진 규칙이자 놀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아니 절대적 진리라고 간주하며 우리의 생을 그곳에 몰입하듯 밀어넣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될 것입니다.
놀이의 규칙은 무서운 것이어서 가위는 바위 앞에 숨죽이고, 바위는 보자기 앞에 숨죽이며, 보자기는 가위 앞에 숨죽입니다. 그리고 술래는 무궁화꽃이 피었어도 그것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본다면 거기엔 고통스런 벌칙이 뒤따릅니다.
사회구성주의적 시각이나 그 이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삶은 규칙놀이의 일종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냉정하며, 많은 경우 부조리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냉정한 규칙과 그 부조리를 온전히 수용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생을 의도적으로든 자연적으로든 마감하지 않는 한, 사회를 탈출할 용기와 능력이 없는 한, 그 규칙과 부조리들은 삶의 모든 갈피마다 끼어 있고 우리는 그것을 따를 수박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유발하는 위 시는 표면상으로 어린이들의 놀이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매우 심각합니다.
위 시를 읽다보면 이처럼 규칙으로 이루어진 세상과 그 속에 깃든 알 수 없는 부조리한 삶을 이야기하던 시인의 상상력은 갑자기(?) 감자의 둥근 몸으로 그 시선을 옮깁니다. 식탁 위의 감자가 보여준 싹의 움틈도 여러 가지로 생의 의미를 풀어내며 관심을 끌게 하지만, 감자의 유난히 둥근 몸도 또한 예사롭지 않은 생의 의미를 오랫동안 곱씹게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감자의 둥근 몸을 보며 “얼마나 오래된 것들을 저장해야 저렇게 동그래질까?”라고 놀라운 발견 속에서 스스로에게 자문합니다. 시인의 자문 속에서 시사받을 수 있듯이 감자의 둥근 몸 속엔 정말로 오래된 많은 것들이 안으로 깊이 저장돼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안은 어둡지만 꽉 차 있고, 볼 수 없지만 단단한 세계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시인의 상상력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충격을 주면서 감자의 둥근 몸 속에 담긴 추억이 어쩌면 아름답고 궁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독과 같은 어둠도 있을 것이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추억과 둥근 세계를 긍정의 상상으로만 읽어내는 일에 익숙했던 우리들이 편견과 선입견에 균열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에겐 둥근 세계 속에 담긴 추억조차도 아름다우면서도 거추장스러운 것, 자원이면서도 생의 짐인 것, 인생의 동반자이면서도 버리고 싶은 것, 그런 이중성의 실체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런 이원성과 모순성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인간이고 생명들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생의 가장 예쁜 시기를 거치며 겨드랑이가 가려운 병아리처럼 그들이 몸에 막무가내로 생명의 싹을, 희망의 날개를 틔우고 성장시킵니다. 그러는 맹목성과 열정 속에서 그들의 젊음은 빠른 시간과 요동치는 흥분 속에서 고속으로 흘러가고, 그에 따라 삶의 부조리와 아이러니도 함께 왕성해지며 그들에 동반되고, 그러는 사이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들을 내면화하면서 감자의 둥근 몸처럼 그들의 몸을 원만하게 만들어 가는 일을 익히게 됩니다. 그러나 외형상으로 그렇게 원만히 보이는 둥근 몸과 표정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속에는 공개하기 싫은 아픔과 어둠과 그림자들도 가득히 들어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누구도 생을 완벽하게 공개하며 시비를 가릴 수 없으며,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니 우리는 그저 원만한 모습 그대로 ‘봉합’하며 조심스럽게 생을 운영해 갑니다.
생이 이렇더라도 식탁 위의 마른 감자조차도 싹을 틔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그렇게 이미 틔워버린 싹은 자라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착실하게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감자는 또다른 감자를 낳고, 그 감자는 또다시 싹을 틔우고, 그 속에선 또다시 엄마아빠가 즐겼던 가위바위보 놀이가 계속되고, 그리하여 골목길은 그들의 놀리로 대책없이 왁자지껄해지고, 부조리는 인간의 동행자가 되어 생의 길에서 이탈하는 일이 없지만, 아들딸들은 부모가 그랬듯이 생의 아이러니들을 ‘봉합’하며 원만한 삶을 익혀 갑니다.
위 시를 보면 이런 생각을 가진 시인의 눈엔 식탁 위의 눈물 자국같은 얼룩 옆에서 감자가 싹을 틔우는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고, 그는 이 감자에서 싹이 틀 때 감자의 몸은 무척이나 아팠을 것이라는 상상을 합니다. 그러나 감자는 멍든 무릎 같은 몸으로도, 얽은 눈에서라도 싹을 틔우니 이런 생명의 신비와 부조리는 인간인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세계에 존재하고 그 속에서 작동하나 봅니다.
지금도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어디선가 아픈 싹을 틔우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싹을 키우고, 가위바위보 놀이를 즐기고, 부조리를 또한 익히며, 그들의 생을 원만하게 영위해 가고자 애를 쓸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그들은 때로 맹목적인 희망에 설레다가, 때로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에 눈을 감다가, 때로 운명이라고 순응하다가, 때로 신비라고 놀라워하다가, 마침내 그 모든 것이 다 삶의 둥근 원형 속에 내재된 것이라는 점을 그대로 수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며 누군가 시를 쓰고 있을 것입니다.
유형진 시인이 위 시의 마지막 부분을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라고 열린 구조로 맺은 것처럼, 이 일은 영원히 열려 있는 것입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