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개 26권, 13년(1672 임자 / 청 강희(康熙) 11년) 12월 5일(병오)
전 의정부 좌참찬 겸 성균관 좨주 세자찬선 송준길(宋浚吉)이 집에서 졸하였다.
상이 즉시 정원에 하교하기를,
“참찬 송준길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으니, 놀랍고 슬퍼 마음을 가눌 수 없다.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관곽(棺槨)·조묘군(造墓軍) 및 미진한 상수(喪需)들을 모두 즉시 제급(題給)토록 하라.”
하였고, 후에 또 하교하여【계축년 2월 8일.】 추모하고 슬퍼하는 뜻을 보이고 특별히 영의정에 증직하였다.
준길은 자(字)가 명보(明甫)이고 은진(恩津) 사람이다.
그의 아비인 군수(郡守) 송이창(宋爾昌)은 젊어서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어미 김씨(金氏)는 곧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종매(從妹)이다.
이 때문에 일찌감치 이이의 풍도를 듣고 학문에 뜻을 두고서 약관(弱冠)에 장생을 좇아 학문을 닦으니, 장생이 매우 중히 여기고서 일찍이
“이 애가 장차 예가(禮家)의 큰 인물이 될 것이다.”
하였으며, 또 부옹(婦翁 아내의 친정 아버지) 정경세(鄭經世)에게 공부하면서 의심나는 곳을 질문하니 경세도 기대를 매우 중하게 가졌다.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까지 하였다가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서, 더욱 강학(講學)에 전심하니 좋은 평판이 크게 드날렸다.,
인조조(仁祖朝) 때 처음 세마(洗馬)에 제수하고 병자년에 특명으로 예산 현감(禮山縣監)에 제수하였으며, 계미년에 또 지평에 발탁 제수하였으나, 모두 취직하지 않았다.
소현 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소를 올려 한시바삐 원손(元孫)을 책봉하여 인망(人望)을 붙들어 매도록 청하였는데, 소를 들였으나 아무런 비답이 없었고, 효묘(孝廟) 초년에 맨 먼저 소지(召旨)를 받고 비로소 조정에 나아가 자주 예우를 입었으며, 누차 천거를 받아 집의에 이르렀다.
이어 역적 김자점(金自點) 및 그의 패거리를 논핵하여 미움과 원망을 몹시 받았는데, 몰래 북쪽 오랑캐를 사주하여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어가던 차에, 효묘의 훌륭하신 결단에 힘입어 일이 풀릴 수 있었다.
급기야 자점이 역모죄로 주벌되고 그의 패거리들도 사형되거나 유배를 당하게 되자, 상의 예우가 다시 융숭해지고 은소(恩召)가 계속 잇따랐으며 교자(轎子)를 타고서 나아오라고 명하시기까지 하였다.
정유년에 비로소 이조 참의 겸 찬선으로 서울에 들어와 양연(兩筵)【경연 서연.】을 시강(侍講)하니 특명으로 이조 참판에 제수하였고, 그 이듬해에 다시 입조(入朝)하여 도헌(都憲 대사헌) 으로서 좨주를 겸임하였으며, 기해년에 또 병조 판서에 발탁·제수하였다.
이때 송시열도 소명에 나아와 총재(冢宰 이조판서)를 맡고 있었으므로 사림이 기대에 부풀고 중외가 희망을 가졌으나, 곧이어 효묘가 승하하였다.
시열과 더불어 함께 고명(顧命 임금의 유언)을 받았고 또 시열을 대신해 천조(天曹 이조)의 판서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체직되었다.
경자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그 후로 혹은 상의 하교가 빈번하고 간절함으로 인하거나 혹은 나라에 큰 일이 있는 까닭에 애써 조정에 들어가기는 하였으나, 모두 오래지 않아 금세 돌아왔다.
을사년에 온양의 어가 수행을 따라 나섰다가 그 길로 원자 보양관에 제배되어 서너달 머무르다가 돌아왔다.
경자년의 예송(禮訟)이 화의 덫으로 변하면서부터 군소배들이 기어코 틈을 타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여 윤선도(尹善道) 같은 무리들이 전후로 잇따라 나왔으나, 상의 은혜와 예우는 끝까지 변함이 없었는데 허적을 논척하자 비로소 변하기 시작했고 이때 졸하니 향년 67세이다.
유소(遺疏)를 남겨 권계(勸誡)하였고, 태학(太學)의 유생들이 서로 거느리고 거애(擧哀)를 하였으며, 관서(官署)이건 초야(草野)이건 서로 조문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여기저기서 장례식에 모인 자들이 거의 1천 인이었다.
준길은 타고난 자질이 온후·순수하고 예법과 태도가 탁트여 그를 바라보면 빙옥(氷玉)과 같았고, 그가 학문에 힘을 얻은 곳은 무엇보다도 《심경》·《근사록》 등의 서적에 있었는데, 염·낙(濂洛 주돈이의 고향인 염계와 정호 형제의 고향인 낙양)의 연원(淵源)을 따라 연구했다. 본조의 선현(先賢)에 있어서는 이 문순공 황(李文純公滉)을 평생 사법(師法)으로 삼았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일에는 각기 그 도리를 다하여 모두 모범이 될 만하였고, 두 조정에서 받은 예우는 멀리 천고에 뛰어 났으며, 성의와 지혜를 다해 들어가서는 도덕(道德)을 논하고 나와서는 임금의 계획을 도우면서 미상불 옛날 선철왕(先哲王)이 되기를 임금에게 요구하였다.
그가 진퇴를 할 경우에는 또 반드시 시세를 생각하고 의리를 헤아린 다음에야 행동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누차 조정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끝까지 오랜 기간 머무르지는 않았으며, 그의 언론은 차분하면서도 명확하여 모난 데가 없었다.
일을 대해서는 올바르고 적절하게 처리할 뿐 이해를 돌아보지 않았고, 특히 사정(邪正)의 변별에 엄절하여 끝내는 사후에 관작이 추탈(追奪)되었다.
송시열과는 동종(同宗)인데다 또 중표 형제(中表兄弟)가 되고 함께 김장생·김집(金集) 부자를 사사(師事)하여 덕망(德望)이 서로 엇비슷하였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양송(兩宋)’이라 칭하였고 학자들은 그를 존경하여 ‘동춘당 선생(同春堂先生)’이라고 하였다.
금상(今上) 경신년에 장곡강(張曲江) 고사(故事)를 적용하여 관원을 보내 그의 묘소에 제사하고 ‘문정(文正)’의 시호를 추증하라고 명하였다.
【송준길이 기축년 초에 임금을 모시고 강학할 때, 글뜻을 분명하게 아뢰고 예의에 익숙하니, 함께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너나없이 다들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하였다.
조경(趙絅) 역시 그 자리를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복공(愚伏公)이 전에 ‘내가 송 아무개라는 사위를 두었는데 그 사람이 매우 어질다. 반드시 장차 크게 성취할 것이다.’고 하더니만, 지금 보고 나니 우복공은 사람을 알아본다고 말할 만하다.”고 하였다. 우복은 곧 정경세의 호이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준길의 친우 이유태(李惟泰)가 소를 올려 조경을 몹시 심하게 논척하였는바, 그 상소에 “경서(經書)의 가르침을 견강부회하여 간사한 말을 얼버무리고 꾸며댔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병술년 강옥(姜獄 소현 세자빈 강씨의 옥사를 말함) 때 소를 올려 영합(迎合)한 일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에 조경은 준길 등의 뜻도 유태와 더불어 마찬가지일 것으로 의심을 하였는데, 준길이 정유년에 조정에 나아갔을 때 조경과 담을 사이에 두고 살면서도 끝까지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정두경(鄭斗卿)이 조경과 문자(文字)로써 평소 친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준길을 방문하여 그의 어질다는 것을 극구 말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게 하려 하였으나, 준길은 웃기만 할 뿐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유태가 소를 올려 조경을 논척하고서부터 상은 유태가 강옥(姜獄)을 두둔하고 나서는 것을 꺼리어 오랫동안 수용(收用)하지 않았는데, 송시열이 그의 어짐을 극력 천거하면서 “이유태의 상소 내의 여덟 자는 강씨를 위해서도 아니고 또한 그 혼자만의 견해도 아닙니다. 신 등의 의견도 모두 그러합니다.” 하니, 상이 비로소 불러들였다.
조경은 이로 말미암아 준길 등에게 원망을 품더니, 후에 마침내 윤선도의 뒤를 이어 글을 올려 공박하였다.】
* 숙종초 남인이 펴낸 현종실록에는 송준길의 졸기를 아예 기록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