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65
3월15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T5PM2SY9Wk (오영환 아브라함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에게는 아버지이자 형제인 사목자, 온유하고 참을성 있으며 자비로운 사목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꽤나 거친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속이 뜨끔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말씀 한 말씀의 지향점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저희 사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교부들의 해석은 더욱 신랄하고 강경합니다.
“신분으로 사제인 자는 많으나 행동으로 사제인 자는 적습니다. 자리가 사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제가 자리를 만듭니다. 장소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장소를 거룩하게 만듭니다. 모든 사제가 다 거룩한 것은 아니지만 거룩한 이는 모두 사제입니다. 그러므로 사악한 사제는 자신의 사제직에 의해 유죄를 선고받을 것이며, 사제직에서 오는 영예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거짓 사제들은 철저하게 이중적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는 그 어떤 관용도 베풀지 않고 극도로 엄격한 삶의 규율을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는 그다지 엄격하게 굴지 않습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과 관련된 일에는 엄격하고 준엄한 재판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온화하고 관용을 베풀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눈과 심기를 거슬렀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보인 눈꼴 사나운 모습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입고 다니던 요란한 옷에 성구갑을 넓게 만들어 매단 것, 그리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어트린 것입니다. 그렇게 웃기는 짬뽕 같은 옷차림을 하고는, 어딜 가던지 거들먹거리면서 상석에 앉고 싶어 혈안이 된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참 제자들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요란스러운 의상이나 장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내용과 본질에 충실했기에, 외적인 것, 부차적인 대상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손에 묶은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가르침을 묵상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영혼의 눈으로 볼 때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옷자락 술은 자신들이 추구하던 예수님의 덕행이었습니다.
“사목자들! 우리에게는 진정한 사목자들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이자 형제인 사목자, 온유하고 참을성 있으며 자비로운 사목자를 원합니다. 내적으로는 물론 외적으로도 가난하며,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을 즐기는 사목자를 찾습니다. 만일 한 사목자가 군주의 사고방식을 지니고 행동한다면, 우리 교회에 그보다 더 큰 악몽은 없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9ALKjXd3fI
++++++++++++++++++
<나는 이웃을 대하는 본성으로 하느님께 나아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무거운 율법의 짐을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사람들에게 아버지나 스승, 선생으로 불리지 않도록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아버지나 스승, 선생으로 대하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결론지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결론적으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문제는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깔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웃에게 영광을 추구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하느님 공경이 위선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저도 봉사자들을 어쩔 수 없이 평가해야 할 때 저에게 대하는 모습을 보지 않고 더 아래 봉사자에게 하는 모습을 봅니다. 저에게는 사제이기에 모두 잘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본심이라기보다는 저를 이용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랫사람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 ‘아, 저 사람은 자아가 강하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사람이 저에게 잘하는 모습을 보면 믿지 않습니다. 물론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아랫사람을 더 공경하고 높여줄 수 있는 봉사자가 되도록 인도하려고 합니다.
제일 겁나는 것은 저 자신입니다. 저도 제가 신자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하느님을 대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신자들에게 아버지라 불리고 스승이라 불리려는 모습을 보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다를 게 없음을 발견하곤 합니다.
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본성과 윗사람을 대하는 본성이 다를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남편을 대하는 모습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남편을 대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자신의 불만족을 채우기 위해 자녀를 이용하는 아내라면 남편에게 다르게 대할 수 있을까요? 그런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따르는 본성은 하나입니다.
동물원 우리 속의 곰은 매우 유순해 보이고 심지어 귀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곰을 본인이 키워보려 하다가 뼈만 남게 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러시아의 한 사냥꾼이 자신의 마당에 있는 케이지에서 애완용으로 키우고 있던 불곰에게 잡아먹힌 일이 있습니다. 4년 전 사냥 중이던 세르게이는 새끼 곰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자신이 키웠습니다. 그 곰은 자신의 마당에서 개들과 함께 자랐습니다.작은 곰은 빠르게 성장을 하고 야생성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르게이는 곰을 자신이 키워준 덕분에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곰은 성장하면서 세르게이를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곰을 보호소로 보내라고 하였지만, 세르게이는 충고를 무시하고 곰을 계속 데리고 다녔습니다. 곰을 길들이며 산다는 일종의 과시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르게이는 보이지 않았고 곰의 우리가 열려 있었습니다. 세르게이와 세 마리의 개 모두 잡아먹혔습니다. 그중 한 마리의 개는 뼈도 남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맛을 본 곰은 또 인간을 노릴 것이기에 경찰들은 흔적을 쫓아 곰을 찾아 사살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배은망덕한 불곰의 탓일까요, 아니면 곰의 본성을 무시하고 자신 뜻대로 커 주리라 여긴 주인의 잘못일까요? 본성은 본인이 인간이라고 믿기 전까지, 그러니까 두 발로 걸으려고 시도하기 전까지는 변한 게 아닙니다. 2003년 곰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야생에 들어갔다가 곰에게 잡아먹힌 티모시 그레드웰은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즐리맨’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만약 겁먹으면 나는 아마 죽거나 다칠 겁니다. 이 땅에 있으려면 정신을 꽉 잡고 있어야 해요.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들은 날 갈기갈기 찢을 거예요. 그러면 전 죽습니다.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보호하며 그들을 위해 죽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죽을 거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날카로운 야생에서 싸우며 강해질 것이고 나는 그들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마스터(스승)가 될 것입니다.”
그의 이 말에는 상대는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자만심이 들어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상대를 내 의지에 따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언제나 자기 본성에 따라 움직입니다. 속으면 큰일입니다. 왜 다른 것을 잡아먹는 곰이 자신은 안 잡아먹을 것이라 여기는 것일까요? 아무리 개가 아기들을 잘 돌봐준다고 하더라도 절대 개와 아기 둘만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개가 고기의 맛을 안다면 다시 늑대처럼 언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성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본성으로 본다면 그 사람은 그 하나의 본성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볼 것이고 그 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자신도 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어머니가 자녀와 온전한 관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인간이라 믿으면 난 언제나 곰과 같은 모습입니다. 언제든 나를 키워준 주님을 먹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나의 본성은 내가 하느님이라 믿을 때, 그래서 하느님처럼 할 수 있고 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도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본성으로 보시기 때문에 그 전에 당신을 보여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믿지 않으면 관상기도로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는 단계에서도 내가 자녀에게 이 믿음을 주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가 자녀에게 하느님과 같은 본성임을 깨우쳐주지 않는다면 나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내가 자녀에게 하느님과 같은 본성임을 알려주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걱정, 근심하고 또 경쟁하며 살도록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께 맡기면 다 잘 될 것이라 믿을 것입니다. 자녀 때문에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하느님을 걱정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상대를 어떤 본성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내가 하느님을 어떤 본성으로 대하느냐가 결정됩니다.
‘옥사나 말라야’는 개에게 키워졌습니다. 그리고 개 우리에서 5년 동안 키워졌지만 20년이 지나도 본인은 개라고 믿습니다. 끝까지 본인이 개라고 믿으면 사람과 관계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사람에게 “너는 사람이야!”라고 보아주고 말해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사람의 본성을 가진 게 아닙니다. 이웃을 대하는 본성이 나의 본성입니다.
예능 프로그램인 ‘꽃보다 누나’ 촬영 때 4년간의 암 투병을 숨기고 활동하던 김자옥 씨가 자그레브 대성당을 들어가자마자 신자도 아닌데 눈물을 철철 흘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당은 그저 그녀에겐 돌과 유리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김자옥 씨는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무언가 기도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이 돌로 지어진 건물 안에 나보다 더 위대한 누군가의 존재가 함께하고 있음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이웃이 그저 돌집처럼 보여도 주님의 존재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주님과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은 모든 사람을 하느님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대하면서도 하느님을 대하는 것처럼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사람을 하느님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나도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내가 하느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녀에게 대하는 모습이 남편에게 대하는 모습이고, 아랫사람을 대하는 모습이 윗사람을 대하는 모습이고, 이웃을 대하는 모습이 주님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대하는 본성을 알고 싶거든 내가 이웃을 어떤 본성으로 여기는지 살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3,1-12 :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2절) 칭호 만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사제여야 한다. 자리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거룩하게 만든다. 사제는 거룩하여야 한다. 자리에 앉아 훌륭히 처신하는 이는 누구든지 그로 말미암아 영예를 받을 것이다. 자리에서 나쁘게 처신하는 이는 누구나 그 자리에 해를 입히는 사제가 되고 만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3절) 나쁘게 처신하는 사제들 때문에 훌륭한 사제들까지 매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선을 이루려다 의로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보다는 의인들을 지켜주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버려진 땅에서도 귀한 금이 나올 수 있다. 그 금이 버려진 땅에서 나왔다고 금을 버리느냐? 금만을 취한다. 우리도 그들의 가르침은 취하고 그들의 행실은 버릴 수 있으면 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얹어 놓고는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중에는 말하기 전에 행하고 현명하게 이야기 하며 혼란에 빠진 자들을 인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자애로운 짐을 얹는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스스로 먼저 가장 무거운 짐을 진다. 주님은 이들을 두고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파멸을 불러 올 허영을 꾸짖으신다. 이 허영은 그들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였고 오로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끄는 일을 하게 하였고 그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들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에 목을 맨다. 성구갑과 옷자락 술이 그들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5절)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직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해 행하였고, 그들의 손에 묶은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8절)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9절)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누구도 스승님이나 아버지로 불려서는 안 된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그분만이 아버지이시다. 또한 그리스도만이 스승님이시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만들어지고,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본성상 사용하는 아버지와 스승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11절) 먼저 우리 신앙인들이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고 세상을 위하여 섬기는 사람들이 될 때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낮은 자리는 바로 봉사하기 위한 자리이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은총을 청하자.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 같은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고, ‘어린이 같은 사람들’만 살고 있는 나라입니다.(마태 18,3; 19,14ㄹ) “왜?” 라고 물으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하느님 나라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전의 순수했던 상태가 원상 복구된 나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말씀은, 우리에게는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훈계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위선자들’을 뜻합니다. 그런 ‘위선자들’은 ‘어린이들’의 반대쪽에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만, ‘위선자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묵시록을 보면,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묵시 21,27ㄱ)라는 말이 나옵니다. ‘위선자들’은 ‘거짓을 일삼는 자들’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모세의 자리’는 회당에서 설교를 하거나 율법을 가르칠 때 앉는 자리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바리사이파에 속한 율법학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설교를 하거나 율법을 가르치는 권한을 누구에게서, 또는 어디에서 받았을까? 원래 ‘사제직’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직무이고, 사제들은 하느님께서 임명하신 사람들이지만(탈출 28,1-5), 율법학자라는 직무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직무도 아니고, 그들은 하느님의 임명을 받은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냥 인간의 전통과 관례에 따른 직무일 뿐입니다. 따라서 율법학자가 하는 일을 ‘합법적인’ 권한과 역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의 권한과 직무를 인정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는 ‘모세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강한 비판’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의 말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누가, 어디에서 말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은 그 자체로 진리이고, 누구나 지켜야 하는 ‘하느님의 법’입니다.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처럼 살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따라 하면 안 되는 행실을 하는 자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으면 안 됩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은 위선자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실행하지 않는 말은 ‘빈말’이고, ‘죽은 말’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 자체가 ‘빈말’이나 ‘죽은 말’이 되는 것은 아니고,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위선자들 자신들에게만 ‘빈말’과 ‘죽은 말’이 됩니다. (위선자들의 행실을 따라 하는 사람들에게도 ‘빈말’과 ‘죽은 말’이 됩니다.) 그런 자들에게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어떻든 위선자들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빈말’과 ‘죽은 말’로 만드는 것은 대단히 ‘큰 죄’입니다. <‘빈말’과 ‘죽은 말’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위선 때문에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생명력을 받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말씀들은 위선자들의 위선을 구체적으로 예를 든 말씀들입니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4-7)
이 말씀은, 위선자들의 위선, 교만, 허영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은 ‘말로만’ 신앙생활을 하고 실제로는 하지 않는 자들이고,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만 신경 쓰는 자들이고, 잘난 체 하고, 우쭐거리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8-10)
이 말씀은, 하느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성경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고, 정확하게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만, 해석은 해석일 뿐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말씀’ 자체의 힘과 권위는 주님의 것이고, 우리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말씀’ 자체를 비판하면서 주님보다 위에 서려고 하는 것은 신앙인으로 살지 않겠다는 뜻이 될 뿐입니다. (오늘날의 일부 성서학자들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우리는 이 말씀의 표현이 아니라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높아지기 위해서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남을 섬기는’ 종이 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남을 섬기기만 하는 사람도 없고, 섬김을 받기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사랑을 나누는 나라입니다. ‘높이다. 낮추다. 높아지다. 낮아지다.’라는 말은, ‘같아지는’ 과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랑은 같아지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청에 있을 때입니다. 직원이 출산을 앞두고 육아휴직을 신청했습니다. 다행히 임시로 일할 수 있는 직원을 구할 수 있었고, 직원은 출산과 육아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여자 직원의 육아휴직은 들어보았지만 남편의 육아휴직은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좋은생각 2월호에서 남편의 육아휴직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신청했을 때, 회사의 동료들은 모두 말렸다고 합니다. 복직해서 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육아휴직을 신청했고, 아내와 아들과 1년을 함께 보냈습니다. 함께 여행을 다녀왔고,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위해서 기꺼이 시간을 내서 병간호도 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인터넷 블러그에 틈틈이 글을 썼습니다. 남편이 아이와 함께 읽은 동화책이 281권이었다고 합니다. 아이와 함께 지낸 이야기를 기록한 육아일기가 516편, 조용한 새벽을 틈타서 혼자 읽은 책 383권의 독서일기까지 1,180개의 추억을 글로 남겼다고 합니다. 가정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게임에 몰두하고, 기도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물질적인 뒷받침은 하지만, 아이와 함께 정서적으로 지내지 못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1년간 육아휴직을 낸 남편의 결단을 존경합니다. 그 시간 온전히 가족을 위해서 헌신한 남편의 행동을 존경합니다.
저도 사제생활 27년을 지내면서 1년간 안식년을 신청했습니다. 3개월은 제주도에서 중견사제 연수를 했습니다. 2개월은 미국에 있는 동창 신부 성당에서 미사를 도와주었습니다. 틈틈이 강의를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돌로미테로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북유럽으로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1년간의 안식년이 물 흐르듯이 지나갔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육아휴직을 신청했던 남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부끄러웠습니다.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했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매일 강론을 준비했지만 책 읽는 시간이 적었습니다. 27년 사제생활을 돌아볼 성찰의 시간도 적었습니다. 피정과 기도의 시간도 갖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위선과 교만을 나무라십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본 받을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따라하지 말하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우리가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배울 수 있다면,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핀다면 비록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
[의정부교구 김효준 레오 신부님]
<첫 마음>
사제품을 받고 첫 본당에서 사목을 시작할 때 저는 더위가 한창인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반드시 수단을 입었습니다. 미사 시작 30분 전에는 늘 고해소에 들어가 앉아 있었습니다.
미사 경본을 읽을 때는 한 구절 한 마디를 또박또박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면담을 요청하는 교우들이 있으면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든지 만나서 함께 고민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수단이 어느 옷장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해소는 너무 답답하게만 느껴집니다. 미사 경본을 읽을 때 실수로 한 페이지를 건너뛰고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면담을 요청하는 이가 있으면 가슴부터 덜컥 내려앉습니다.
10년 동안 저는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좋지 않은 모습으로 너무 변했습니다. 10년이라고 하는 시간이, 그 시간 동안 쌓아올린 많은 지식과 경험들이, 약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많은 지식과 경험이 나를 완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완덕으로 이끄는 힘은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려는 내 의지이며 자세입니다.
=====================
[의정부교구 허윤석 세례자요한 신부님]
<시이소오>
겸손할 때보면 나 혼자 겸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시이소오를 타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 어떨까 내가 낮아지기 위해서 내 무게감을 줄인답시고 내려간다고 하지만 저 큰양반은 나를 내리기위해서 내려지기 위해서 얼마나 무거운 사람이 다리에 힘을 주면서 꼳꼳하게 십자가상에서 일어나서 이렇게 일어나야 되는가
그리고 또 내가 높아지고 행복해질 때 예수님은 얼마나 또 고통스럽게 내려가시는가. 그리고 내가 높아진 모습을 보면서.. 왜냐하면 당신이 낮아지고 시이소오에 있던 무게감 작은 우리를 혹시 시이소오를 이탈할까봐 염려하시는 그 모습 ....
겸손하다 하면 오로지 자신의 덕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겸손이라는 덕이 상당히 하느님과의 덕으로서 연대성으로 이해가 되어야 된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을 볼때는 하느님의 배려하심... 저사람이 저렇게 겸손한 모습을 보이고..
내가 참 부러울정도로 겸손한 사람을 보면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겸손한 사람을 보면 아름다운데 그래서 우리는 겸손한 사람 봐 줄때도 겸손한 사람 볼 때에도 그냥 저사람 좋고 겸손하고 참 순명적이고 느낌이 올 때 보는 사람 수준도 시이소오를 타는 아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아빠까지 보는 것처럼..... 그렇게 만들어주신 하느님 .... 그렇게 보는 것이 인생 요령이 아닐까?
반면에 교만한 나 자신을 볼 때 그냥 거기서 실망하는 걸로 그치지 않고 가능성을 봐야지요. 교만한 나를 올라가 있는 나를 보면서 그래도 낮게 자리하시는 분.
결론적으로 겸손한 사람과 교만한 사람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정말 순수하게 우리가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그런 모든 점을 하느님께 봉헌하여야 된다는 것을 느끼면서 우리는 높은 사람 되어야 됩니다.
마음을 드높이 적어도 하느님을 향한 마음만큼은 눈을 들어서 높아져야 되는데 그 방법이 낮아야 되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쪽 길을 가는 것이지..... 확실히 낮아지는 목적의식을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
[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앞에 우열 없이>
지금도 교만하지만 옛날 더 교만하던 때 저는 비교를 하려면 하느님하고 비교하던지 적어도 聖人하고 해야지 다른 인간하고 비교하여 잘 났다 못 났다 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옛날 신분제가 있을 때 도련님을 머슴 아들과 비교하여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면 칭찬을 들은 도련님이 머슴 아들과의 비교 자체를 수치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심사겠지요.
그런가 하면 대단히 속물적으로 용의 꼬리가 되느니 닭의 머리가 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런 이율배반이 당시 저의 주제였지요.
그러니 그 당시에는 비록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저의 세속성을 뛰어넘으려는 좋은 뜻도 있었지만 그 안에는 지독한 교만이 숨어 있었음을 저도 몰랐던 것입니다.
진정 제가 인간과의 비교를 초월한 그런 경지에 있었다면 그저 하느님 앞에 있을 뿐 아예 비교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여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 자존심 상하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 우위에 서려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겸손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그래서 탁월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씀하듯 우리는 진정 누가 우월하고 누가 열등하지 않은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형제로서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존재이고 하느님 앞에 같이 서 있는 존재입니다. 같이 하느님을 흠숭하고 같이 하느님 뜻을 받드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같이 하느님을 흠숭하고 받든다는 말은 ‘함께’라는, 즉 공동체성을 포함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누구는 하느님을 더 잘 흠숭하고 받들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는, 그런 것이 없이 ‘모두 똑같이’라는, 즉 평등성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어제는 수도원 당가 형제께 외국에 나가 있는 어른께 보낼 선물 좀 사다달라고 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본다면 시장가는 김에 사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지만 가만히 속을 들여다보면 한 번도 그런 것을 제 손으로 산적이 없는 저의 무의식 안에는 ‘나는 그런 것 살 줄 몰라’ 하면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손가락 하나 까닥하려 하지 않음이 숨어있었습니다. 부탁해도 되는 사람 따로 있고, 부탁 받아도 되는 사람 따로 있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자기 손가락은 하나 까닥하지 않고 다른 사람 어깨에 큰 짐을 올려놓는 것이 그저 시장바구니 정도라면 그래도 낫겠는데, 그것이 자기 십자가든, 공동체의 십자가든, 하느님께서 제게 맡기신 그래서 제가 져야 할 십자가가 아닌지 두렵고 걱정이 됩니다.
십자가는 지지 않고 칭찬과 영광만 받으려는 그 날도둑놈의 심보가 있지 않은지 오늘 복음을 통해 들여다보는 오늘입니다.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곧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둘째>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곧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셋째>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곧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첫째> 그는 가르치되, 언행불일치하는 이가 아니며, 남에게 짐 지우지 않는 이입니다. 곧 언행일치, 실천궁행하는 이, 곧 말씀을 성취하는 이요, 타인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타인의 짐마저 짊어지는 이입니다.
<둘째> 그는 일하되, 표리부동과 위선이 없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닌 자신을 보낸 분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이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 일을 바치는 이입니다.
<셋째>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되 자만과 허영이 없는 이입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이요, 섬김을 받으려하기보다 섬기는 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 것일까를 물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가?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이제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스승’으로 대우받고자 하였는데, 나는 지금 누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섬김의 종이신 예수님의 자리인가? 그리고 섬김을 배우는 제자의 자리인가? 아니면 섬김을 받고자 하며, 가르치며 스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실행함으로써 행복하라>
살아가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루아침에 낭패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족시켜 주면 줄수록 그 요구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아지려다가 오히려 푹 떨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높’ 자를 거꾸로 하면 ‘푹’ 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공자께서도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망친다고 합니다. 그러니 높아지려고 애쓰며 남을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요즘 정치인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자기만 잘났다고 하며 상대의 소리는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하고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기보다 남들이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삶이 뒷받침될 때 자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2-3)고 하셨습니다.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의 요구를 채워줄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넉넉해지고 자상한 어른이 되어야 하거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부끄러움만 더해갑니다. 마음은 열고 입은 닫아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지만 나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듣고 살아갑니다.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길을 서슴없이 가는지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8). 고 말씀하신 대로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삶으로 사랑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해야 합니다. 누가 먼저 인사하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인사할 수 있는 날,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기보다는 솔선수범하는 날,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먼저 베푸는 은총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는데 오늘만큼은 행동함으로써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 23장은 21─22장에서 소개된 적대자들과 맞선 충돌을 요약하고, 26─27장에서 다루어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준비합니다. 이 장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 중심이 되고 있는데, 그들을 향한 비판을 넘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교육함으로써 공동체의 정체성과 가치를 규정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23장 1-12절에서 시작된 비판은 이어지는 23장 13-36절에서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유다교 안에서 합법적 교사로서 그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역할과 권한을 인정하십니다.(23,1-3 참조) 그러나 그들은 위선 때문에 예수님의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23,3 참조) 그들은 권력자의 힘과 지위를 이용하여 짐을 지우고, 특별한 표지를 지니고 다니며 특권을 요구하고 대중 속에서 영예를 찾습니다.(23,4-7 참조)
예수님께서는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만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지켜야 할 가르침을 제시하십니다.(23,8-12 참조) 예수님의 제자라면 결코 ‘스승’이나 ‘아버지’나 ‘선생님’으로 불리지 않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하느님을 위하여, 그리고 ‘선생님’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유보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을 낮추고 서로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제자들의 교육을 위한 부정적 본보기로 이용하십니다. 잘못된 행위와 태도는 성장과 발전을 위한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들을 섬기려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마태23,3)
<나는 참 신자인가?>
오늘 복음(마태23,1-12)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강하게 꾸짖으십니다.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키되,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누구를 지지하며 따라가고 있는가?'
'예수님인가? 아니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인가?'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의 모습인가? 아니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인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겉모습은 믿는 사람처럼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속 모습은 그리스도의 적처럼 살아가는 신자는 아닌가?'
'껍데기만 신자이고, 속은 신자가 아닌 위선자는 아닌가?'
'우리의 참 모습'은 '고통 앞에서' 온전하게 드러나고, '돈이나 명예나 권력의 유혹 앞에서'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저는 치열했던 이번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어느 정도는 '참 신자들과 거짓 신자들'이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문재인(티모테오) 대통령께서 천주교 신자로서, 하느님의 평화와 공정을 위해 나름 수고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부정하는 천주교 신자들과 심한 욕설까지 마구 해대면서 무속 행위를 한다는 후보, 신천지 이단자들과 함께 한다는 후보를 적극 지지하는 천주교 신자들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회개'는 '거짓 신자에서 벗어나 참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순 시기'는 '거짓의 탈을 벗고, 참의 탈을 쓰는 시기'입니다.
우리 안에 제대로 믿는 '참 신자'가 더 많아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1,16-17)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제 방에 공기청정기가 있습니다. 공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책상 옆에 두고 작동시켜 두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제 주위의 공기가 제일 깨끗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공기청정기가 있는 방에서 공기 오염도가 가장 높은 곳은 공기청정기 옆이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공기청정기는 오염된 공기를 정화하여 신선한 공기로 바꾸는 장치이지요. 따라서 오염된 공기가 어디로 모일까요? 공기청정기 옆으로 모이고, 그래서 가장 오염도가 높은 장소가 되기에 공기청정기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게 유익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것들이 세상에는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재물이 많으면 좋을 것 같지만, 이 재물 때문에 가족이 갈라져서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불법을 통해서라도 돈을 모으겠다고 애를 쓰다가 결국 법적 처벌을 받는 경우도 봅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온갖 행동을 다 하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사람도 보게 됩니다. 공기청정기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더 좋은 것처럼,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이 작용할 수 있는 것에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분명 좋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도록 하는 계도권을 가지고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르치는 것을 다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로만 가르치고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행실을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들의 행실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구갑을 이마나 팔에 달고 다니는 것, 옷단에 술을 길게 달고 다니는 것, 높은 자리에 앉는 것,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것 등은 열성의 표시가 아니라 인간적인 허영의 표일 뿐이었습니다. 자기들의 경건성을 보이고, 사람들의 신뢰심을 얻기 위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위선과 이기심이 하느님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한 형제이며, 하느님의 아버지의 똑같은 자녀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선생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우리를 가르쳐 인도해 주시는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래서 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따라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은 선택이다>
- 섬김의 선택, 섬김의 훈련 -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종과 섬김의 영성이라 강조했던 적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영어에서 보다시피 같은 어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들은 우선적으로 섬김의 직무, 즉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여기 요셉 수도원 초창기 30년전 수도사제생활 초창기에 있었던 벼락같은, 참 끄러웠던 깨달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여러 차례 강론에 인용했던 일화입니다. 이때는 제가 40대 초반 수도원 원장으로서 주방장, 손님접대, 피정집관리, 일체의 면담과 고백성사 등 1인5역으로 참 분주할 때였습니다.
한밤중 늦게 피정 신청 전화를 받았고 잠에서 깨어난 저는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던 듯 합니다. “수도원에 사시는 분이 왜 그렇게 불친절하느냐?”는 격렬한 항의를 받았고, 즉시 사과를 했습니다. 바로 이때의 즉각적인 깨달음이 서비스업의 3대 요소입니다.
‘아, 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구나. 서비스업, 즉 섬김의 직무를 지닌 이들은 세 필수요소를 명심해야 하겠구나. 첫째, 사람이 좋아야 하고, 둘째, 실력이 있어 유능해야 하고, 셋째, 내외적 환경이 좋아야 하겠구나!’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식당이나 병원, 학교에 종사하는 이들의 경우만 봐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식당이 잘되려면 주인이 친절하고 좋아야 하며 유능하여 음식 솜씨가 좋고 식당 환경이 편안하고 청결해야 할 것입니다. 병원의 경우라면 의사 역시 친절하고 실력이 있어 유능하여 잘 치료해야 하며 병원의 환경도 편안하고 쾌적해야 할 것입니다. 교사의 경우 역시 친절하고 실력이 있어 유능하여 잘 가르쳐야 하고 교실내의 환경도 편안하고 아늑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나 수도원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주님의 서비스업에 종사하면서 피정집을 운영하는 수도원의 수도자들이라면 모름지기 사람이 좋아 친절하고 영적 실력이 뛰어나 유능해야 하며 수도원 피정집의 환경도 고요하고 편안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좋은 사람, 좋은 실력, 좋은 환경이 서비스업의 3대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요셉수도원은 이 세 조건을 전부 갖추었나 깊이 자성했습니다. 정주와 환대의 영성을 살아가야 하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필수요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당신 수도원을 주님의 섬기는 학원이라 명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 바이다.”(성규 머리말;46)
베네딕도 성인의 참 멋지고 매력적인 섬김의 영성입니다. 수도원은 바로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인 학원으로 졸업이 없이 평생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학교라는 것입니다. 섬김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핵심적 덕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 섬김의 리더쉽,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 섬김의 영성등 끝이 없습니다. 참으로 섬김과 종의 영성이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적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오늘 복음 말씀은 만인이 형제들이고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선언이자 모든 우상들을 타파하는 참 멋진 선언입니다. 스승이자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며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 한분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어 겸손한 섬기는 종이 될 것을 당부하는 주님이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바로 겸손의 섬김으로 낮아질 때 높아지고 교만으로 높아질 때 낮아진다는 역설적 영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의 결정적 모범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겸손으로 자신을 완전히 낮추시고 비우시어 하늘 높이 올라가시어 아버지곁에 영원히 살아 자리 잡으시니 바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런 섬김의 영원한 모범인 예수님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십니다. 이런 진리를 깊이 깨달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이라 정의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자신을 가리켜 ‘세계 총대주교’라고 칭하자, 이에 반발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즉시 교황의 신원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 정의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 시몬베드로 아빠스님이 취임시 자신을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라 명명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비단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모든 이들이 명심해야 할 진리입니다. 국가든 사회든 가정이든 수도원이든 책임자는 물론 모두가 주님의 심부름꾼이자 종으로 생각하여 섬김의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권위도 섬김의 권위 하나뿐이요, 참된 리더쉽도 섬김의 리더쉽 하나뿐입니다. 세속적 지배와 통치의 권위가 아니라 섬김의 권위가 참권위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물론 일국의 좋은 대통령이라면 지배와 통치의 “왕王”이 아니라 참으로 모두를 충실히 섬기는 종, 공복公僕이요 충복忠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처신, 즉 겸손한 섬김의 사랑에 대해 강조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 역시 소돔의 지도자들은 물로 백성들에게 경청과 섬김의 구체적 실천 내용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자신을 깨끗이 하여라.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은 물론 모든 국가, 사회 지도자들이 명심해야 할 참 멋지고 적절한 가르침입니다. 새삼 섬김과 종의 영성과 자세야 말로 복음의 핵심이자, 온인류의 보편적 본질적 영성이자 자세임을 깨닫습니다.
겸손한 섬김은 바로 참 영성의 잣대입니다. 섬김의 한가운데 섬김의 모범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구원은 멀리 있지 않으며 거창하지도 않습니다. 구원은 선택이며 훈련입니다. 바로 평범한 일상 가까운데서부터 주님을 닮아 부단히 섬김의 삶을 선택하여 훈련하여 습관화 할 때 구원이요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섬김과 종의 영성을 충실히 살게 하십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t4A8JbANtuk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 3)
농사를 짓는
농부의 실행이
따뜻한
봄의 문을
활짝 연다.
바뀌어야
할 것은
우리의
실행이다.
우리의 생활에서
실행하지 않음을
회개하는
사순이다.
바르게
실행할 때
진정 믿음은
믿음다우며
아름답다.
믿고 있는
기쁨은
우리가
실행하는
기쁨으로
드러난다.
구원의 여정은
우리가
진실해지는
겸손의
여정에 있다.
겸손은
좋은 뜻을
품고 기도에
의지하여
기쁘게
생활하는
것이다.
겸손은
부질없는
자기과시를
경계한다.
교만은
우리의
믿음마저
허물어 버린다.
교만하지만
않으면
어느 때고
길을 다시
찾게된다.
겸손하신
스승
예수님에게서
삶의 길을
다시
만나게 된다.
십자가로
더 낮은
곳에서
사랑을 기쁘게
실행하신다.
삶의 중심은
나무의 뿌리처럼
낮은 곳에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다.
겸손이란
나무의
뿌리 같은
것이며
실행의
원동력이
된다.
겸손과
실행으로
만나는
모든 것들은
삶의 축복이
된다.
참된 진리는
참된 실행에
있음을
다시 깨닫는
봄날이다.
진실과 힘은
실행을 통해
주어지는
삶의 축복이다.
사랑도
실행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
(2)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 3)
신앙 또한
유사품에
주의 하십시오.
너무도 빨리
너무나 쉽게
썩어가고
썩을 수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무너뜨리고
허물어버려야 할
이중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부패와 타락은
하느님을 잃어버린
우리들 마음에서
먼저 시작합니다.
하느님보다
욕심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패의 끝은
우리 모두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어 문드러진
우리 양심을 당신의
섬기는 사랑으로
모순 덩어리인 우리를
정화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내면을
먼저 들여다보게
하십니다.
이 사순시기가
우리 영혼을 되찾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무엇을
잘라내야 할지를
고민하고 실행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시대의
모순과 거짓
부정직을 이제는
잘라냅시다.
그것이 낮아지고
작아지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간절한 뜻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