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운전자의 시각범위는 보행자와는 다르다. 일본 사토 마사루 교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운전자는 2-3°의 좁은 범위밖에 볼 수 없다. 사진은 운전자의 시각범위를 체험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전시회 장면.
‘간판쟁이’라는 비속어처럼 우리에게 간판은 누구나 쉽게 만들어 ‘대충’ 걸면 되는 존재 정도로 여겨져 왔다. 그저 보이기 쉽게 크게 만들어 건물의 외벽에 설치하면 끝이었다. 이에 따라 거리의 간판 대부분은 겉모양이 화려하거나 큼직한 규모를 갖게 됐다. 또한 광고주의 ‘메시지’를 좀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간판은 건물의 하단은 물론 전체를 도배하게 됐고, 인도 위를 장악하며 심지어 옥상까지 지배하고 있다. 이제 간판은 광고와 표지의 기능을 넘어 거리의 시각공해가 돼버렸다. 하지만 최근 인간의 응시 습성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건물 전체를 도배하고 있는 화려하고 거대한 간판이 오히려 ‘홍보’면에서는 덜 효율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 큐슈 예술공과대의 사토 마사루 교수는 보행자의 주시 특성에 관한 실험을 했다. 아이카메라를 장착한 보행자가 일본의 텐진 거리를 시속 4km의 속도로 걸을 때 나타나는 보행자의 안구운동을 측정한 것이다. 조사는 맑은 토요일과 일요일 보행자가 많은 시간대를 선정해 이뤄졌다.
보행자의 안구운동은 아이카메라에 장착된 16mm필름에 기록됐다. 이 필름의 화면을 분석해 보행자의 시야가 한곳에 머무는 시간을 측정했다. 조사 결과 보행자의 진행방향과 평행하게 왼편에 건물이 있는 경우는 왼쪽 약간 위를 향하여 수직방향 12°, 수평방향 20° 정도의 범위에서 시점 분포가 가장 많이 나타났으며, 진행방향과 직각인 건물의 경우는 수직방향 14°, 수평방향 26° 범위에서 보행자의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물렀다.
사토 교수는 자동차 운전자의 안구운동 상태도 같은 방법으로 조사했다. 조사는 교통량이 많은 맑은 날의 토요일 오후에 실시했으며, 자동차는 시속 40km로 주행했다. 아이카메라의 필름 분석 결과, 자동차 운전자의 시점이 이동하기 쉬운 범위는 시각 2-3°로 나타났다.
사토 교수의 이같은 실험은 간판의 설치 범위에 대해 매우 중요한 점을 말해준다. 신호등이나 도로정보 표지판 같이 운전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정보는 운전자 시각 2-3°내에 설치해야 한다. 너무 높거나 낮아서는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운전자의 시각 2-3°는 지상에서 높이 10m에 해당하므로, 앞 차에 의해 보이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일반 건물의 2-3층 부분이다. 따라서 운전자에게 효과적인 간판의 설치 높이는 건물의 2-3층 높이에 해당한다.
사토 교수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보행자에게 지각되기 쉬운 시각매체는 보행 도로측의 높이 0-5m, 건너편 도로측 높이 5-10m 부분에 표시되는 것이다. 따라서 걸어가는 방향에서 5m 이상의 높이에 표지되는 옥외광고물은 의미 없으며, 도로측에서 5m 이하나 10m 이상의 높이에 표시된 간판은 사람들에게 보일 기회가 많지 않다. 결국 5m 이하에서는 그 도로를 걷고 있는 보행자에 대해 정보를 표시하고, 5m 이상 10m 이하에서는 건물과 평행으로 도로측을 향해 표시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읽을 수 있는 최대 글자는 15자
효과적인 간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선이 머무는 범위뿐 아니라 간판에 표기되는 정보가 판독되는 시간을 파악해야 한다. 순간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글자의 수는 사람에 따라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시점은 항상 두리번거리며 한곳에 머물러 있는 경우는 드물다. 흥미를 갖게 된 것은 몇번이고 보겠지만, 일반적으로 두리번거리는 경향이 강하므로 간판의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짧은 순간에 최소한의 정보를 전할 필요가 있다. 시점이 머무는 시간은 보행자의 경우 0.2-0.5초, 자동차 운전자의 경우 0.1-0.4초다. 즉 0.3초 전후로 읽을 수 있는 정보량을 포함하는 간판이 좋은 간판이라 할 수 있다.
사토 교수는 인간의 시점이 머무는 시간 내에 읽을 수 있는 글자수를 조사하기 위해 ‘순간자극 제시장치’를 이용한 실험을 했다. 순간자극 제시장치는 슬라이드 프로젝트의 렌즈 앞에 특정 문자가 새겨진 셔터를 장착해 피실험자에게 순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토 교수는 ‘ROYAL HOST’ ‘커피’ ‘모닝서비스’ 등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보를 피실험자에게 순간적(0.3초)으로 보여준 뒤, 이 글자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지 조사했다. 실험 결과 0.3초 내에 판독할 수 있는 정보량은 약 15자(일본어의 경우) 정도로 나타났다. 즉 좀더 쓰고 싶은 것이 있어도 간단하게 표현하는 것이 효과적이며 이 한계를 넘으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간판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경우, 필요 이상으로 큰 간판은 기능면에서도 그리 효과 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옥외광고물에는 객관적으로 요약된 적정한 정보가 표시돼야 한다. 낯선 곳에서 길을 물었을 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여기에서 북쪽으로 50m 가서 제일병원 오른쪽으로 돌아 작은 다리를 건너서 언덕을 오르면 길이 넓어지고 신호가 있는 교차점이 있으니까 그 곳의 편의점을 좌로 돌아서 다섯번째, 큰 소나무가 있는 곳이 디자인센터입니다. 가깝지요.”라고 안내한다면 본인은 친절하게 가르쳐준 것이라도 듣는 사람은 혼란스러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인간에게는 간단하게 기억할 수 있는 정보량에 한계가 있는데, 3항목 정도다. 또한 처음 방문한 사람은 방위를 알기 어려우며 거리 감각도 개인차가 크다. 시골에서 ‘가깝다’고 말해서 가보면 1km가 넘는 거리였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앞으로 가면 병원이 있으니까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신호를 만나 좌로 꺾은 곳입니다. 걸어서 3분 정도입니다”라는 설명을 들으면 쉽게 알 수 있다. 잡음이 많은 정보라면 필요한 것만 요약하면 된다. 따라서 좋은 간판의 정보량은 타이틀인 경우 15자 이내가 원칙이며, 좀더 긴 해설문의 경우는 3항목 2백자 이내로 해야 한다.
최적 색깔 찾는 프로그램
간판에 표기되는 글자수는 무조건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0.3초 내에 판독할 수 있는 15자 내외의 글자가 보행자가 이해할 수 있는 최대 한계다.
간판을 디자인할 때 고려해야할 또다른 사항은 색채다. 흔히 간판 자체의 색깔을 빨강이나 파랑 등 원색계열의 색을 써 ‘튀게’ 만들면 더 잘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간판은 거리의 전체 환경을 조성하는 하나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자신만 튀게 할 경우, 정보 전달에 있어 그리 효과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거리 전체의 경관에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간판이 훨씬 큰 홍보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따라서 간판을 디자인할 때는 그 지역의 전체 색채를 고려해 이에 어울리는 색깔을 선택해야 한다.
대부분 유럽의 건물에는 화려한 옥외광고물이 거의 설치돼 있지 않다. 파리, 런던, 쮜리히, 로마가 그렇다. 일부 번화가를 제외하고는 작은 마을이라도 이같은 관습이 지켜지고 있다. 해당 지역의 기업들이 화려한 옥외광고물을 자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카디리 서커스와 밀라노의 대성당 광장은 네온사인에 뒤덮여 있다. 대부분 한국과 일본 기업의 광고물이다. 그렇다면 유럽의 기업은 왜 화려한 네온을 사용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광고를 해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밀라노의 세계적 기업 올리베티는 네온 간판을 디자인하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색깔을 선택한다. 언젠가 독일의 평범한 마을에 일본의 모 카메라회사가 입간판을 세웠는데 비판이 쏟아져 철거한 적이 있다. 이렇듯 간판의 색채를 결정할 때는 거리 전체의 통일된 느낌을 위해 거리와 같은 계통의 색상 또는 같은 계통의 톤으로 통일시킴으로써 전체적으로 정리된 느낌을 만들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건축물에 붙어있는 간판, 거리의 의자, 쓰레기통 등의 색채를 조절하면 그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살린 거리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렇듯 최근의 간판 디자인은 거리 전체의 색깔을 파악한 뒤, 여기에 어울리는 간판 색채를 과학적으로 조절한다. 이때는 ‘경관색채 분석프로그램’이라는 과학적 방법을 이용한다. 일본 농림부가 개발한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거리 전체의 색채와 간판의 색깔을 모니터 상에서 조절함으로써 가장 적합한 간판 색채를 찾아낼 수 있다.
먼저, 촬영된 지역의 사진을 분석해 조사지역이 어떤 환경색채로 구성돼 있는지 파악한다. 파노라마로 촬영된 화상을 작은 단위로 잘라 모자이크 상태로 변환시켜 알기 쉬운 이미지 데이터로 자동 변환하면 분석 작업 준비가 끝난다. 이렇게 만들어진 모자이크 환경에 원하는 간판의 색채를 차례로 대입하면서 전체와의 조화를 검증하면 가장 적합한 간판 색깔을 찾아낼 수 있다. 이때 한국인의 ‘색채이미지’를 이용하면 좀더 효율적인 간판색을 찾을 수 있다. 색채이미지는 색깔에 따라 한국인이 느끼는 감정을 정리한 색채표다.
시각장애인 위한 듣는 간판
현대의 간판은 시각 요소뿐 아니라 들리는 소리로써 정보를 전달하는 ‘사인음’(signature sound)의 형태로까지 개발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사인음을 공공영역으로 확장시켜 ‘보는 간판’이 아닌 ‘듣는 간판’의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
사인음을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어떤 음색과 멜로디를 어떤 템포로 구성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특히 사인음은 열린 공간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장소에 따른 소음 등의 환경과 이용자의 심리적 영향 등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분야를 소리(sound)와 풍경(landscape)의 합성어인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 디자인이라 한다.
보통 공적 공간에서는 상황에 따라 사람 소리나 지하철 소리 등의 소음이 발생하는데, 이 때 소음원이 되는 배경음이 크다고 해서 사인음의 음량을 터무니없이 높이면 안된다. 이럴 경우 청각장애인의 불쾌감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가능한 공간에 균일한 음량을 제공할 수 있도록 스피커를 분산 배치해 음향의 울림을 최소화시켜야 한다. 또한 소음원이 갖고 있는 동일한 주파수 영역대의 음(音)으로 사인음을 디자인한다면 소리의 겹침으로 잘 들리지 않는 ‘마스킹’(masking) 효과에 의해 사인음이 갖는 고유의 정보를 전달할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상점가의 경우는 5백Hz-1kHz의 소리가 가장 많다. 또한 지하철역 등에서는 모터의 음과 압축공기의 음 등 4kHz보다 높은 음이 단발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 영역대를 피해 사인음을 디자인하는게 적당하다.
사운드스케이프 디자인은 지역의 심벌로써 소리가 나오는 기념비를 도입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 일본 요코하마 국제경기장에 설치된 음환경 디자인이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이 기념비는 시간과 계절에 따라 소리와 빛, 분수의 연출 변화로 다양한 디자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또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향교통신호기의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다. 횡단보도의 사인음 디자인은 기존의 단조로운 멜로디와 음성안내를 탈피하고 횡단보도 주변의 음환경 조사와 소음원의 최소화, 정확한 방향제시의 정보전달을 위해 과학적으로 설계한다.
극지향성스피커를 통해 음을 차례로 방출해 사용자를 안전하게 유도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극지향성스피커는 일반스피커보다 음폭이 적은 것을 말한다. 일반스피커가 40°정도의 음폭으로 음을 방출한다면, 극지향성스피커는 약 20°정도의 음폭으로 음을 방출해 특정 지역의 사용자에게만 음이 들리도록 만드는 스피커다. 또한 이때의 사인음은 교통소음 영역대와 다른 영역대의 음원으로 제작한다.
과학적 기준 마련 시급
요코하마 국제경기장 음환경 디자인. 이 기념비는 소리와 빛, 분수의 연출로 시간과 계절, 이벤트에 따라 디자인 내용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에게 간판은 아직 공적인 영역이라는 생각이 많이 결여돼 있다. 하지만 간판은 사유물이면서 하나하나의 조화가 전체의 공공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시각을 갖춰야 할 때가 됐다.
지난 1998년부터 옥외광고물 정비사업이 시작되면서 간판 규제정책과 ‘옥외광고사’ 자격시험 등이 지속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특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근본적인 문제점 파악과 그 해결 방침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간판에 대한 사토 교수의 과학적 분석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간판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다. 인간의 눈은 보행시 시각 20。, 운전시에는 2-3。 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한번에 읽을 수 있는 최대 글자수는 15자 내외이며 간판 색채는 주위 경관을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
이제는 간판에 대한 과학적 분석 방법을 활용해 우리도 아름답고 보기 좋은 거리 환경을 위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야 한다. 이 기준이 상황에 따라 적용·활용될 때 우리의 시각 환경은 개성 있고 아름다운 쾌적한 환경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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