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동묘(萬東廟) - 1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화양계곡 내에 위치한 사당으로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 萬曆帝)과 明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崇禎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만동묘는 사적 제417호, 萬東廟庭碑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화양서원(화양동서원) 내부에 있던 시설로 화양서원은 서원철폐 이후 터만 남았다가 1999년 사적으로 지정 후 2001년부터 2004년까지 만동묘와 승삼문, 송자사등 일부 건물을 복원했다. 만동묘라는 이름의 유래는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긴 선조의 어필 만절필동(萬折必東)을 모본하여 화양리 바위에 새겼는데, 그 첫 글자와 끝 글자에서 취해 '만동묘'라고 하였다.
만동묘 설립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조때 민정중이 청나라에서 구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 숭정제의 친필 '비례부동(非禮不動)'을 전해 받은 송시열이 그 글씨를 화양동의 암벽에 새기고 현종 15년(1674) 화양리에 운한각, 화양서원 등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다. 이후 송시열은 숙종15년(1689) 사사될 지경에 처하자, 당시 이미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멸망한 지 50여 년이 지났건만,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와 의종 숭정제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라고 제자 권상하(1641-1721)에게 유명으로 남겼다.
권상하는 명나라가 멸망한 지 꼭 환갑이 되는 숙종 30년(1704) 인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화양서원 내 만동묘를 창건하고 스승의 유언대로 만력제와 숭정제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를 올렸다. 이후 조선 임금들도 만동묘를 융숭하게 대우하였다. 영조 2년(1726) 나라에서 만동묘에 제전과 노비를 내려주었고 그 후에도 예조에서 90명이 돌아가며 묘우를 지키게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지원했다. 정조는 직접 사필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그러나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만동묘는 이후 서원폐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받았다. 지역의 백성들에게 역을 빼주겠다고 강요하여 돈을 받아내고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케 하고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만행이 심했다. 심지어 거스르는 백성을 멋대로 사형시켜도 처벌받지 않을 지경이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삼정승),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 심지어 젊은 시절 흥선대원군이 이곳을 참배하려다가 만동묘지기(혹은 지역 유생)에게 얻어맞는 등 고초를 당했다는 야사도 있다.결국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 당시 만동묘를 철폐하고 대보단으로 신주와 편액을 옮겼다가 고종 10년(1873) 부활했으나 고종은 만동묘만 복구해주곤 나머지 서원의 복구 요구는 씹었다. 그나마 만동묘 복구도 제사를 국가가 주관하게 하여 예전과 달리 만동묘 좨주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았다. 이후 1907년에는 의병을 토벌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환장암과 운한각을 불태웠으며, 이듬해에는 만동묘를 철폐하는 동시에 만동묘에 소속된 재산을 국가와 지방 관청에 귀속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