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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Ð 자유게시판 스크랩 헌인릉(2012.01.02)
지리사나 추천 1 조회 41 13.01.14 12: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오후 반일연가를 내어 집사람과 함께 헌인릉을 찾았다.

내 개인적으로 손꼽는 조선왕조 왕 가운데 최고의 왕이 태종(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다.

물론 개개인의 판단과 생각은 지극히 편린될 수 있음을 인정하며, 그렇다 할 지라도 존중되어져야 한다고 사료된다.

고려말 충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척살하고, 조선 건국의 초석을 만든 장본인 정도전도 죽이고, 이복형제는 물론 처남

네명까지 죽인 폭군처럼 비쳐지지만 조선왕조의 왕권을 굳건히 반석위에 올려 놓은 이가 태종 이방원이다.

역사는 후세에서 판단되어진다고 하지만, 태종의 치적은 조선조 어느 왕의 치적과 비교할 바가 아닐 정도로 위대하다.

나의 견지에서는 세종은 아버지의 판고르기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거져 태평성대를 누리다 간 왕에 불과하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같은 이는 백성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무능한 왕이었다. 

 

 

서울 강남에 선정릉 이외에 또 다른 왕릉이 있다. 바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인릉.

 

헌릉에는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그의 정비 원경왕후가 잠들어 있고,

인릉에는 순조와 정비 순원왕후가 영면을 취하고 있다.

 

헌인릉 위쪽으로는 국가정보원이 , 주차장은 국가정보원과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태종은 재위 당시 지관의 도움을 받아 이곳 대모산에 능지를 정한다.

세종 2년 1420년 원경왕후가 승하하자 이곳에 안장하고 2년 후 자신도 이곳에 묻힌다. 대모산에는 물이 많아 능지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대모산에는 유독 약수터가 많은데 후 용두천, 구룡천, 대룡천 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이름이 붙은 약수터만 20여 곳이 넘는다고 한다.

 

헌인릉에는 아직 왕릉 역사관이 없다.

재실도 주차장 건너편에 있어 자칫 간과하고 넘어가기 쉽다.

매표소와 주차장을 재실 밖으로 빼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매표소를 지나 입장을 하면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인 인릉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홍살문과 정자각이 보이고 능침으로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다. 공개되지 않은 능이다.

 

입구에서 인릉에 오르는 진입로 옆쪽으로 오리나무 군락지가 있다.

현인릉의 오리나무 숲은 서울시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옛날 오리마다 거리를 표시하기 위해 심었던 나무라서 오리나무라고 한다.

 

오리나무 숲을 지나 계속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드디어 헌릉이 나온다.

구조가 왼편으로 먼저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어 홍살문과 정자각을 보기 전에 능침으로 올라갈 수 있다.

 

반대편에도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으니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과 비각을 먼저 보고 오른편 관람로를 올라 봉분에 오르는 코스가 더 추천할 만하다.

 

헌릉의 비각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왕의 치적을 세운 비석인데 처음 세워진 신도비가 파손되어 후에 다시 신도비를 세워 2기의 신도비가 비각 내부에 있다.

 

 

신도비는 세조 때 영의정 정인지 등이 왕의 치적은 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니 따로 신도비를 세우지 말자 한 건의에 따라 5대 임금부터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현재 비각에 신도비가 있는 능은 태조 건원릉, 헌릉, 북한의 후릉이 있다.

구 영릉에도 있다하나 현재는 어떤지 모르겠다.

 

헌릉은 쌍릉이다.

한 언덕에 두 개의 능을 나란히 조성하고, 두 릉 사이에 지대석을 세워 연결하였다.

헌릉에는 문인석과 무인석, 석호, 석마, 석양, 장명등 등 모두 2기씩 조성되어 있다.

석물이 무려 16개나 된다.

 

헌릉에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이 또 있다. 바로 태종우이다.

태종은 죽으면서, 나라에 가뭄이 심하게 들면 자신이 죽어서 비를 내리게 하겠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여 그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 경이면 비가 내리는데 이를 ‘태종우’라고 한다. 혼유석 아래 밑 하전석의 네모난 홈 속에 ‘태종우’가 고인다.

 

또 정자각 오른편 위쪽에 제를 올린 후 축문을 태우는 ‘예감’이 남아 있다.

 

태종은 조선 3대 임금으로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사이에서 난 다섯 번째 아들이다.

생전에 아버지를 도와 조선 건국에 많은 공을 세웠지만, 태조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와의 사이에서 난 여덟 번째 아들 방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두 번의 왕자의 난을 일으킨 끝에 왕위에 오른 야망과 권력욕 등이 대단한 전투적인 군주이다.

자신의 경험을 뒤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일찌감치 장남 양녕군을 세자 자리에 앉히지만, 결국 왕위에 오른 것은 셋째 아들 충녕군, 바로 세종이다.

 

어쩌면 역사는 이렇듯 한낱 인간의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 거대한 흐름이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가 고향 함흥에 묻어달라는 유언도 무시하고 동구릉에 모셨다.

신덕왕후 강씨의 능은 태조가 승하하자마자 현재의 정릉 자리고 옮기고 봉분을 깍아버리고 석물들은 청계천 광통교 수리에 사용했다. 능을 묘로 강등했다.

 

태종은 모두 10명의 부인을 두었다. 태종의 정비인 원경왕후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많은 공을 세웠고 금술도 좋았었다. 그러나 태종이 왕위에 오르고 9명이 넘는 후궁을 두자 투기도 심해지고, 왕권을 넘보는 민씨의 네 명의 남동생들을 처형해 버렸다. 이토록 살아 생전 서로 원망하는 사이였으나 죽어서 또 나란히 묻히니 인간사 죽어서까지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싶다. 함께 묻히고 싶어하던 아버지 태조와 신덕왕후 강씨는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고, 자신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원경왕후와 함께 묻혀 있다.

 

 

 

 

 

 

 

 

 

 

 

 

 

 

 

 

 

 

 

 

 

 

 

 

 

 

 

 

 

 

 

 

 

 

 

 

 

 

 

 

 

 

 

 

 

 

 

 

 

 

 

▼ 나는 오늘 헌릉을 보러온 것이다.

▼ 내게 인릉은 단지 헌릉에 딸려 있는 일개 왕릉에 불과하고, 더불어 주어진 볼거리 일 뿐이다.

▼ 헌인릉 매표소(입장료 : 천원)를 통과하면 곧바로 마주하는 것이 인릉이다.

    홍살문에서 집사람 한 컷. 홍살문 뒤로, 정자각 그뒤로 인릉이 보인다.

▼ 인릉 정자각

 

▼ 인릉 신도비

▼ 조선국, 순조대왕인릉이라 씌어 있다.

 

 

▼ 헌릉 상설도

▼ 눈내린 계단을 올라 능까지 올라가 본다.

 

 

 

 

 

 

 

 

 

 

 

 

▼ 능에서 내려와 헌릉 홍살문에서 정자각과 헌릉이 나란히 보인다.

▼ 헌릉 홍살문에서 한 컷

 

 

 

▼ 헌릉 신도비

 

 

 

▼ 헌릉을 한바퀴 돌아보고, 1코스 한바퀴 돌다. 2코스는 통제중. 그러나 눈길에 발자국이 보인다.

 

▼ 쉼터1

 

▼ 다시 헌릉을 뒤쪽으로 올라본다.  하얀 솜이불로 능을 덥은듯 포근해 보인다.

▼ 이따금 기를 받으러(?) 올 생각이다. 

 

▼ 3시에 예약되어 있는 국정원 안보전시관 견학을 마치고, 퇴근시간과 겹칠까 서둘러 인천으로 향하다.

   전시관에서 친절하게도 부부 사진 한 컷 제공. 

   음지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항상 성원하겠습니다. 

▼ 절대시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 방문자 스키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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