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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설오스님의 티벳문화원 혜등정사 (http://cafe.daum.net/dharmalamp)
티베트불교 체험기-머릿말
티벳불교를 처음 알게된 것은 대만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였다. 한참 정토신앙에 심취해 있는데 때마침 한 신도분이 티베트린포체가 오셔서 임종시에 의식을 극락정토로 바로 옮길수 있는 포와수행을 전수하신다며 가보자고 열성을 부렸다. 관심은 없었지만 거절하기도 그렇고 해서 건성으로 그러자고 대답만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기를 세 번째 하던날 그 신도분이 사람이 죽은 후 사십구일간의 중음상태에서 일어나게 되는 적정존과 분노존의 모습을 그린 사진을 보여주며 그 티벳린포체께서 중음상태에 대한 상세한 가르침과 함께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은 물론 타인의 영혼까지도 바로 극락정토로 보낼 수 있는 구체적인 가르침을 전수하신다는 것이었다. 중음에 대한 이야기와 그와 관련된 사진은 큰 충격으로 내게 전해졌다. 왜냐하면 사후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그림이나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출가후 도통하고 성불하는 것도 큰 과제였지만 무엇보다도 승려라면 죽음의 세계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했으나 사후의 세계는 안개 속처럼 모호하기만 했다. 죽음을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죽어 가는 과정을 두려움과 공포의 순간이 아닌 가장 좋은 수행성취의 기회로 사용할 수 있다는 데에 깊이 매료되어 티벳불교 즉 서장밀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사실상 밀교라는 언어 그대로 밀종수행이란 비밀히 구전을 통해서 일대일로 직접 전수되는 것이지 수행의 내용이나 만트라를 공개하거나 서면으로 소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법이 시절인연과 근기에 맞게 전수되어야지 근기에 맞지 않으면 법을 설하는 법사도 받는 제자도 다 업을 짓게 되기 때문에 때와 근기에 따라 직접 전수되어야 중생들이 업을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국민학생과 대학생을 함께 놓고 대학생에 맞는 수준의 가르침을 주게되면 국민학생은 자신의 수준이 못미친다는 생각은 않하고 가르치는 선생님을 이상하다하며 쓸데없는 의심과 비방을 일으켜서 허물을 짓게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초등학생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에게 는 비밀히 하고 대학생만 따로 놓고 직접 개인지도를 하게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생을 보호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직접 전수하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밀교라 하면 남녀의 쌍신수행이나 옴마니반메훔같은 주술만을 하는 진언불교 내지는 무당불교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쌍신수행을 주로하는 左道밀교도 있고 舊派인 닝마파에서는 쌍신수행을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티벳사람들은 달라이라마를 관음의화신으로 굳게 믿고 있고 포탈라궁을 관음의 성지로 믿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옴마니반메훔을 열심히하며 아침저녁으로 사원을 돌거나 탑을 도는 것을 일과로 하고 있다. 그들은 매월 음력 보름날이 되면 마니데이(옴마니반메훔하는 날이라는 뜻)라하여 직장이나 학교가 다 쉰다. 그리고는 절이나 마을의 공동 수행터에 모여 하루종일 옴마니반메훔을 하고 법문을 청해 들으며 육식을 하지 않고 공동으로 식사를 한다.
인간의 몸과 우주는 본래 하나이어서 보름이 되면 우주의 기운이 최고로 상승함으로 사람의 몸도 따라서 최고의 에너지를 낼 수 있는 데 이 날 나쁜 일을 하게 되면 악업도 그만큼 크게 작용하고 선업을 짓게 되면 평소에 일만배이상의 효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보름날은 일부러 보시도 많이하고 거지들에게 먹을 것과 돈도 주면서 하루종일 수행만 하는 날로 정하고 있다. 또한 정월달은 「붐줄다와」라 하여새해의 첫 달에는 무슨 수행을 하던지 십만배이상의 효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정월 한달동안 집에 스님들을 모셔서 기도도 하고 열심히 만트라를 하면서 지낸다. 음력 사월은 석가세존께서 탄생하신 달이라 하여 「사캬다와」, 즉 부처님의 달이라 정하고 이 달에는 한달내내 육식을 금한다. 그리고 이 달에 공덕을 짓거나 수행을 하게 되면 백만배이상의 효력이 있다하여 스님들게 공양청도 많이하고 한달내내 만트라를 하면서 열심히 수행도 하고 사원을 위한 보시나 일도 많이 한다. 이와 같이 야만민족이었던 티벳의 유목민들이 오늘날 가장 순수한 불교왕국이 되기까지 많은 선지식들이 善巧방편으로 백성들을 잘 이끌어왔음을 보고 필자는 많은 감동을 받았다.
티벳밀교에서는 사람마다 자신과 전생부터 특히 인연이 깊은 불보살님이 있는데 그 분을 본존으로 삼아 믿고 의지하면 훨신 수행을 쉽고 빠르게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보살님중에 본존을 한분 정해서 그 본존의 심주인 만트라를 일생동안 지송한다. 그렇다고 해서 티벳불교가 본존만트라를 모시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티벳불교는 대소승의 어느 불교보다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편을 가지고 중생들을 때와 근기에 맞게 접인하고 있다.
수행에 있어서 구체적이고 세밀한 안내서와 함께 안내자까지 붙여주는 불교가 티벳불교라고 누군가 말했다. 오늘날 미국이나 구라파쪽에 많은 불교인구를 섭수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특색 때문이 아닌가 싶다. 티베트 불교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세세히 소개하기는 어렵겠지만 몇 가지 특색을 들어 관심 있는 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귀의
법을 전수하는 티벳사원에 참석하게 되면 법사께서는 제일 먼저 귀의의 중요성과 함께 순수한 보리심에 대한 가르침을 설하신다. 귀의란 불교도와 비불교도 즉 內道와 외도를 구분짖는 관건이다. 어린아이가 무서운 개한테 쫓기어 어머니 품안으로 달려오듯이 불법승 삼보님만이 두렵고 엄청난 윤회의 고통에서 나를 구해주실수 있다고 확실한 신뢰를 갖고 온전히 삼보님께 몸과 마음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티벳사람들은 차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사고의 위험에 직면했을 때에도 귀의금강상사 귀의불 귀의법 귀의승하고 귀의문을 간절히 모시는 것을 자주 보게된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운세가 안좋다고 느끼거나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되어 큰스님께 해결책을 상의하러오면 귀의문을 많이 모시는 기도를 주시는 것을 자주 보았다. 이와 비슷한 고사는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 석가모니불께 수발타라라는 한 제자가 있었다. 그는 집이 빈곤한데다 아무도 의지할이 없이 외롭게 살다가 괴로움이 극도에 달하자 부처님께로 가서 출가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부처님께서는 외출중이셨는데 여러 큰제자들이 그의 과거인연을 관해보니 팔만겁동안 선근을 심은일이 없었다. 그래서 머무르는 것을 허락치않고 돌려보냈다.
수발타라는 괴로움이 극에 달해서 성밖으로 나갔다. 업장이 이렇게 두터우니 차라리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막 자살하려고 하는데 부처님께서 어느 결에 나타나셔서 까닭을 물으셨다. 수발타라가 자초지종을 고하니 부처님께서는 그를 제자로 받아주셔서 7일만에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제자들이 그 연유를 여쭈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단지 팔만겁 안의 일만 알고 팔만겁 이전에 일찍이 그가 선근을 심은 것을 모른다.그때 역시 그는 가난하여 나무를 해다 팔면서 살았다. 하루는 산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도망칠 곳이 없어서 급히 나무위로 올라갔다. 호랑이가 나무둥치를 밑에서 물어뜯고 흔들어서 나무가 부러지려고 했다. 그는 마음이 다급했지만 누구하나 구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 때 문득 대각부처님께서는 자비력이 있어 능히 모든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신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나무불! 빨리 저를 구해주십시요!?하였다. 호랑이가 ?나무불?소리를 듣더니 멀찍이 떠나가서 목숨을 다치지 않았다. 이 때에 그는 깨달음의 바른 종자를 심어서 오늘날 인연이 성숙되어 과위를 증득한 것이다.?하셨다. 여러 제자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수희찬탄하였다. 위 고사에서와 같이 티벳사람들도 귀의를 수행과 기도의 일환으로 중요시하고 있으며 실천생활화하여 귀의와 관계된 많은 영험담이 있다. 수행에 입문하게되면 먼저 기초사가행 수행을 하게 하는 데 그 중에 제일 먼저 귀의대예배를 십만번해야한다.
귀의의 대상을 모신 탕카(구루트리 혹은 歸依境이라 함)를 앞에 모셔 놓고 전신으로 오체투지를 하면서 입으로는 귀의문을 모시고 마음으로는 나 혼자만이 아닌 허공과 같이 많은 육도의 중생들을 다 내 어머니라고 생각하며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삼보님께 귀의를 한다. 티벳불교에서는 귀의의 대상을 불법승삼보님 뿐만아니라 삼근본이라하여 가피의 근본으로 스승님과 그법을 전수해오신 전승조사들, 성취의 근본으로서 그 법의 수호본존이신 각파의 본존들과 외호의 근본이라하여 남녀호법신인 다카다키니와 자량을 구족케하는 재신들을 다 귀의의 대상으로하고 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삼보님과 삼근본께 진정코 귀의하고자하는 신심이 생겼을 때에야 비로서 윤회의 고통에서 해탈할 수 있는 불법의 수행에 입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 삼보에 귀의를 할 수 있게 되는데는 무엇보다도 윤회의 고통을 뼈속 깊이 느끼고 알아서 윤회계를 벗어나고자하는 간절한 바램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을 염리심 혹은 출리심이라 하는 데 윤회계의 모든 것은 고통이 본질임을 알아서 두려운 마음을 내어 마음을 불법에 향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저하는 간절한 염리심이 일어났을때에야 비로소 수행에 입문케됨으로 염리심을 道의 시작이요 수행자의 머리라 한 것이다.
발보리심
염리심을 수행자의 머리라 한다면 보리심은 수행자의 마음이라고 구루께서는 항상 말씀하셨다. 우리가 도를 성취코자하는 목적은 일체중생을 해탈케하고자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과거생에 나의 부모가 아니였던 중생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일체중생이 곧 나의 부모이자 가장 은혜로운 어머니라는 것이다.
용수보살은 〈보행왕정론〉에서 말씀하셨다한다.
"이 지구의 흙을 다 부수어 노간주나무 씨앗만한 크기의 환을 만든다해도 한 사람이
무수한 삶을 되풀이하며 인연맺었던 어머니의 숫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온 우주에 가득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머니와 같은 중생들이 윤회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데 어찌 방관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티벳불교에서는 무엇보다도 보리심을 강조하고 있으며 수행의 궁극목적으로 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보리심은 깨달음의 전제이자 뿌리이다. 그것은 관용이라는 고갈되지 않는 보물에 비유된다. 그래서 티벳에서는 수행의 마치기 전에 반드시 보리심을 일으키고 長養하는 기도를 한다.
보리심의 보배를
일으키지 못한 자는 일어나게 하시고
이미 일어난 자는
더욱 더 증장케하소서
보리심을 발하는 데에는 세가지 류형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양치는 목자와 같은 발심이고,
둘째는 뱃사공과 같은 발심,
셋째는 왕과 같은 발심이다.
양치는 목자는 양들을 다 앞에 보내고 자신은 맨 뒤에 따라간다. 그와 같이 일체중생을 다 성불시킨 후에 자신이 성불하겠다는 발심이다. 뱃사공은 손님을 모두 배에 싣고 함께 강을 건넌다. 중생과 내가 함께 성불코저하는 발심이다. 왕은 항상 자신을 만 백성의 위에 놓는다. 곧 내가 먼저 성불한 후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발심이다. 물론 구루께서는 목자와 같은 발심이 가장 수승한 보리심이라 말씀하신다.
그러나 수행성취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살행을 한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두팔이 없는 어머니가 아기가 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물에 뛰어드는 것과 같아서 함께 죽을 뿐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력보살의 환생자가 아닌 대부분 근기의 사람들은 자비와 방편, 공성과 지혜의 두 팔을 자라날 수 있게끔 먼저 적정처에서 수행을 하여 힘을 얻어야하는 것이다. 다만 수행의 전제는 일체중생을 하나도 빠짐없이 성불케 하겠다는 보리심을 먼저 굳건히 발해야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보리심의 자비를 베푼다는 것이 실제적인 상황에 부딪쳤을 때 쉬운 일이 아님은 누구나 한번쯤 체험했을 것이다. 〈모든 이익과 기쁨을 남한테 주고 모든 손실과 고통을 자기자신이 취하라〉이 두 글귀가 보리심의 내용 전부를 함축하고 있다.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자비이다. 병원에서 불치의 병으로 죽어 가는 환자의 고통과 병을 대신 받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성불하기를 바란다면 이 가르침대로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티벳불교에서는 보리심을 증장시키기 위해 자비심을 기르는 구체적인 수행방편을 많이 시설해놓고 많은 역대의 스승들이 그러한 방편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했으며 오늘날까지도 널리 전수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세생생 자기자신만을 위하여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행복하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있다면 자신만을 위했던 삶의 방식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이야말로 그 방법을 바꿀 때가 아닐까?> 자비야말로 행복코저 하는 소망을 실현시켜주는 보배로 그 축복의 빛은 온 우주에 두루 미치는 것이다.
소걀린포체는 말씀하신다. <자비는 동정보다 훨씬 위대하고 고귀하다. 동정은 두려움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건방진 우월감에 젖은 듯한 느낌이 베어있기도 한다. 자비심을 기르면 모든 중생이 똑같이 비슷한 방식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고,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중생을 섬기게 되고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어느 누구보다 우월하지 않음도 알게 된다. 따라서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서 처음 반응은 단순한 동정이기보다는 자비심이어야 한다.
그를 존중해야하며 감사의 마음까지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고통을 겪으면서 우리에게 자비심이 솟아나게 해준 거룩한 선물을 준 것이고 영적인 깨달음에 가장 필요한 자질이 계발되도록 우리를 도와준 것이기 때문이다.>하셨다. 다람살라에는 무수한 문둥병환자와 거지들이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다. 티벳인들이 초하루 보름이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면 피부가 닿을 까 두려운 문둥병 환자나 거지들이 우리의 성불을 돕기 위한 부처의 화현이라고 믿고 열심히 보시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사무량심
발보리심과 함께 수행의 전제가 되는 마음이 사무량심이다. 사무량심은 慈悲喜捨의 네가지 무량한 마음이다. 성불을 하기위해서는 먼저 일체법이 자성이 없음을 깨달아 공성을 증득해야 하는데 그러한 공성과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리심을 내어야 한다. 보리심은 사무량심을 통해서 증장이 되는 것이다. 慈의 대상은 고통은 크게 없으나 행복을 얻지 못한 중생들을 자애하는 마음이고 悲의 대상은 병이나 어려움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을 대상으로 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喜란 이미 행복을 갖춘 중생들의 행복을 함께 기뻐하고 그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捨란 평등한 마음으로 일체중생들에게 탐착이나 진심을 내는 등의 불평등한 마음이 없이 모든 중생을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다. 자애로운 마음을 냄으로서 다른 이를 해치고자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듯 자애로운 마음은 자연히 중생들에게 해를 끼치고자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한다.
비심을 냄으로서 중생들을 해치는 직접적인 행위를 하지 않게되는 것이다. 희심을 냄으로서 중생들을 질투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평등사의 마음을 냄으로서 일체중생을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이 평등히 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청정심으로 성불에 이르는 복덕자량을 가장 빠르게 쌓는 길이다. 티벳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 방식으로 사무량심을 익혀야 보리심을 낼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첫째, 중생들이 다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원하는 마음을 내고,
둘째, 중생들을 다 행복하게 해주어야겠다고 맹세를 하며,
셋째, 중생들이 다 행복하기를 바랍니다하는 기원과 함께
넷째, 중생들이 다 행복할 수 있도록 가호를 드리우소서!
이와 같이 자비희사의 무한히 넓은 마음을 하나씩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그러한 마음을 반복하여 일으킬 때 진정한 보리심이 일어날 것이라고 수행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티베트의 불교에서는 강조하여 가르친다.
생기차제와 원만차제
티벳불교 수행은 크게 생기차제와 원만차제 두 단계를 구분 짓고 있다. 이 두 차제는 모두 깨달음의 지혜을 얻기 위한 방편이다. 생기차제에서는 본존불 수행의 관상과 진언을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因을 심게 하고 원만차제에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 자리에서 직지인심 견성성불케 해주는 법이다. 원만차제에서는 중생과 부처가 둘인 상대적인 경계를 인정치 않는 일체 유정이 다 본래부처라는 지견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방편을 빌리지 않고 본연의 절대적 진리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다. 근기가 아주 수승한 사람은 생기차제의 수행을 거칠 필요없이 직접 원만차제의 수행을 하게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기차제의 수행을 거쳐서 업장을 정화하고 불보살님을 관상함으로써 부처의 본래면목을 회복하게된다고 티벳의 스승들은 가르치신다. 그래서 대부분의 티벳사람들이 자신과 특히 상응하는 본존불을 정하여 관상하고 진언을 모신다.
티벳불교 안에는 각파마다 고유한 전승을 가진 수행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공통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수행이 본존을 관하는 본존수행, 즉 본존요가이다. 시방에 본래 계시는 불보살님을 본존불인 지혜존으로 모시고 자신의 몸을 수행의 대상으로 정한 불보살님과 똑 같은 모습을 관상하는 것을 삼마야존, 혹은 계율존(계율의 대상인 부처님)이라 부른다.
자신인 삼마야존을 선명히 관상하여 본존 만트라를 모시고 자신이 진실로 본존불과 똑 같은 부처라는 자만심과 신심이 확고해졌을 때 지혜존인 본존불과 상응할 수 있게되고 그의 가피를 잘 받아들일 수 있게되는 것이다. 지혜존과 삼마야존이 잘 상응하여 가피가 충만해졌을 때 자타가 둘이 아닌 不二의 공성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데 이 단계를 원만차제의 단계라한다. 이를 테면 한가지 수행안에 생기차제 원만차제가 다 포함되어있다. 다만 원만차제 수행만을 할 때는 성성적적한 광명의 상태로 생기차제를 대신한다.
원만차제수행을 대표하는 법으로 마하무드라라불리우는 까규파의 大手印수행과 마하무디라 불리우는 닝마파의 대원만수행을 들 수 있다. 이 두 수행안에는 止觀의 두 수행을 다 포함하고 있으며 한국의 참선법과 흡사한 면도 많이 있다. 그러나 티벳불교에서는 이러한 원만차제수행은 스승이 직접 제자에게 자성의 본모습을 보게해주고 가르켜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제자가 근기가 익지 않았을 때에는 스승이 많은 방편을 빌려서 제자에게 자성의 본모습을 인지할 수 있도록 자상하게 이끌어 주신다.
원만차제의 이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모습으로 남녀교합상인 부모불 즉 쌍신의 모습을 한 불상을 많이 보게된다. 티벳불교를 처음 접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쌍신상을 보고 음란한 성행위나 하는 사교로 여기거나 쾌락주의적인 종교로 오해하는 일이 종종 있다. 티벳불교에서 보여지는 불상들의 여러 가지 모습과 장엄물은 다 부처의 완전한 경지를 표상화하여 상징적으로 可視화 한 것이다.
특히 무서운 모습으로 나투시는 분노존의 예를 들면 이마에 있는 다섯해골은 탐진치만의의 오독번뇌가 다 정화되어 법계체성지 대원경지 평등성지 묘관찰지 성소작지등 다섯지혜를 구족함을 상징하고 여러개의 팔은 육반라밀 내지는 삼십칠조도품을 상징하며 세 얼굴은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을 구족했음을, 세 눈은 시방을 두루 살핌을, 발아래 밟고 있는 마구니는 번뇌마, 죽음의 마, 오온의 마와 天魔외도의 마구니를 다 조복받았음을 상징한다.
그와 같이 남녀의 교합상인 부모불은 모든 번뇌를 조복받고 일체종지를 성취하여 자비와 방편, 지혜와 공성이 하나가 된 空樂不二의 온전한 존재임을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방편과 자비는 남성으로 지혜와 공성은 여성으로 표상화한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며 번뇌를 기초로 하는 성적인 쾌락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다. 온전한 깨달음이란 지혜와 방편이 하나된, 공성과 자비가 둘이 아닌 모습으로 양날개가 온전한 비행기가 많은 사람들을 수월케 목적지로 실어다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티벳트 불교가 다른 불교와 다른 점 중에 하나는 다른 불교는 자비로운 부처님의 상만을 모시는데 비하여 티베트 불교에는 대부분의 불보살님들이 자비존과 분노존의 두가지 모습을 나투신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고 가르칠 때 자애로운 사랑을 베푸실 때도 있고 때로는 간절한 사랑으로 가슴 아프게 회초리를 들고 엄하게 질책하시는 모습을 보이시듯이 중생을 성불시키기 위한 대자대비하신 마음으로 나쁜 습기와 불법에 장애가 되는 마장을 없애기 위해 분노하신 무서운 형상을 보이시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관음보살은 마하카라라는 온 몸이 검은 분노존을 나투시고 문수보살은 야만타카를 대세지보살은 금강수라는 분노존을 나투신다.
금강살타수행
금강살타 수행은 생기차제의 대표적인 수행이라 할 수 있다. 이 수행은 티베트 불교의 각 파에서 필수로 하고 있는 정화수행으로서 기초 사가행중에서 귀의 대예배 다음에 두 번째로 거쳐야 하는 필수과정이다. 많은 성취자들에 의해 강조되어지는 이 수행은 수행의 시작이자 구경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수행을 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업장을 청정히 하여 오독번뇌로 물들여진 法器를 완전히 정화시키고 나서야 비로서 法水가 담겨서 성불에 이를 수 있는 것인데 업장 소멸을 위한 수행으로서 금강살타가 가장 효율적으로 쓰여지고 있다. 업장이 다 소멸되면 본연의 불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구경의 금강살타라고 말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번잡한 관상과 만트라를 모셔야 하는 생기차제 수행보다는 그대로 자성의 본 모습을 관조하는 언 듯 듣기에 무척 간단하게 느껴지는 원만차제 수행만을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황달에 걸린 환자의 눈에는 흰 그릇도 누렇게 보인다. 그런 환자에게 그릇이 흰색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황달을 고쳐서 스스로 흰 것을 희게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적절한 방법일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가 본래 부처이지만 무시이래의 업장에 가려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그 업장을 정화하여 본래 부처임을 스스로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생기차제 수행이요, 그 중에서도 가장 수승하고 효율적인 수행이 금강살타로서 중요시되고 있다.
금강살타 만트라는 그 음절이 백개라 하여 일명 百字明이라고 불리워진다. 불보살님들의 모든 만트라가 이 백자명에서 파생되어 나갔기 때문에 이 진언을 지송 하게 되면 모든 불보살의 心呪를 모시는 것과 같아서 가피의 힘도 그 만큼 크다고 한다. 나는 인도 따시종 사원에 있으면서 한국 스님들이나 많은 외국인들이 기초 수행을 하는 단계에서 특히 금강살타 수행을 할 때에 실제로든 꿈으로 든 자신들의 업장이 많이 정화되는 것을 느끼고 환희하는 경험담을 많이 들었다.
이 사원에서 근래에 최고 성취자이셨던 독댄 암잠께서는 일생동안 금강살타 수행을 위주로 하셨는 데 무문관을 들어가기에 앞서 간신히 자신의 몸 하나 들어가는 벼랑 위 좁은 동굴에서 거의 잠을 자지 않고 보리 가루만 드시면서 육년간에 걸쳐 이 백자명 만트라를 백만독씩 백번을 하셨다 한다. 그 이후 삼매를 얻으셔서 잠을 조복 받고 무문관을 성취하실 수 있는 힘을 얻은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그래서 인지 이곳의 티베트 스님들은 무문관을 하기에 앞서 백자명만트라를 백만독하고 무문관에 들어가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 금강살타 진언을 한글로 표기하면 아래와 같다.
옴 벤자 싸또싸마야 마누 빠라야
벤쟈 싸또띠노빠
티타디또 메바와
쑤또쇼 메바와
아누라또 메바와
쑤뽀쇼 메바와
싸르와 씨띠 메빠야차
싸르와 깔마 쑤짜메
찌땀 씨리얌 꾸루훔
하하하하호
바가완 싸르와 타타가따
벤자 마메무짜 벤자 바하와
마하 싸마야 싸또아‘
금강살타 부처님을 정수리에 관상하고 이 만트라를 지성으로 하게 되면 꿈에 목욕을 한다든지 빨래를 한다든지 흰 옷을 입거나, 하늘을 나른다든지 설산에 오르거나 몸에서 고름이나 독충 혹은 벌래나 오물이 빠져나가는 등의 꿈을 꾸게 되는 데 그것은 업장이나 장애 병등이 소멸되는 징조라고 말한다. 특히 수행자가 계율을 범한 허물을 정화시켜주는 데 비구 비구니가 바라이죄를 범한 허물조차도 금강살타 수행을 통해서 정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자신의 허물을 간절히 뉘우치고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는 강한 결심이 전제가 된 마음 상태라야 이 수행이 효과가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 수행은 자신의 업장뿐만 아니라 죽은 영혼의 업장을 정화시켜 주기 위해서도 사용되며 특히 수행중에 오는 장애나 병등을 막아준다고 한다. 그리고 수행 중에 여법치 못했던 부분이나 내용을 빠트렸거나 산란했던 부분들을 보궐하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수행뒤에는 마지막으로 반드시 이 진언을 일곱 번이나 스물한번을 하여 보궐진언을 대신한다.
구루요가
티벳불교 수행의 진수는 구루요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루요가란 참된 스승을 찾아서 스승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진리의 가르침대로 따라 사는 것이다. 즉 구루의 본성과 하나가 되기 위한 수행법으로 이 수행을 통해서 스승의 깨달은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계합되는 방법을 얻게 되는 것이다. 티벳의 많은 성취자들은 현재 자신이 많은 제자들의 스승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위대한 스승들의 제자로 남아 있다. 그들은 그러한 스승에 대한 온전한 헌신을 통해서 구경의 성취에 오른다. 구루요가도 기초 사가행중에 한 부분이지만 티베트 불교 수행의 핵심이라 할 수있다.
구루에 대한 진정한 신심과 헌신이 마음에서 일어나 스승의 존재가 부처의 화현이라 믿어지고 모든 불보살님의 존재와 위신력을 한 몸에 구족하신 분이라고 저절로 마음에서 깨달아 질 때 내 안에 있는 자신인 법신의 구루와 대면케 되는 것이다. 즉 외적인 스승의 존재에 대한 신심과 헌신의 마음이 생겨났을 때 내 안에 본래 구족한 스승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소걀린포체는 말씀하셨다.
우리의 불성은 능동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우리를 가르켜 일깨우고 진리로 되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내적인 스승의 모습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여 미혹에 빠지려는 순간 자신의 참된 모습과 영광스런 광명의 길로 되돌리기 위해 애쓴다. 우리가 오랫동안 수많은 삶을 통해서 진리를 염원하고 갈망해왔을 때 우리의 업장이 충분히 정화되었을 때 우리와 언제나 함께 있었던 내적인 스승이 어느 날 갑자기 외적인 스승의 모습으로 자신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 외적인 스승은 다름 아닌 자신의 내적인 스승이 몸과 목소리를 얻어 밖으로 형체를 드러낸 것이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그 어떤 사람보다 사랑하는 스승, 인간의 형상과 목소리를 지닌 우리의 외적인 스승은 바로 우리 자신의 내적 진리의 신비가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인도에 처음으로 배낭여행을 왔을 때 잠자는 성자, 즉 슬리핑 라마로 불리워지는 닝마파의 최고성취자이신 민링틴진린포체를 찾아뵈었다. 제가 언제쯤 구루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여쭈었더니 머지않아 네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스승을 만날 것인데 그 분이 곧 너의 구루이다 하셨다.
그 당시 나는 그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 후 나는 전생의 구루인 듯 느껴지는 세속의 나이로 일곱살되신 까루린포체의 환생자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 그 분을 뵙자마자 마치 마법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의 온 영혼이 눈물로써 환희하고 모든 것을 다 바치고자하는 헌신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났다. 그래서 두달간 린포체의 법회를 오직 헌신과 환희심으로 모시고 다녔는 데 그 때에 무한한 가피의 힘이 내게 새로운 영적인 세계를 체험케 해주었고 현재 티베트 불교 수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도록 가호하심을 체험하고는 비로소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티벳에서는 모든 깨달음의 근원을 스승이라고 여긴다. 스승은 부처의 화현으로서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나투신 존재로 인간의 얼굴을 한 절대자이며 자신이 원한다면 모든 붓다와 깨달은 존재들과 대화하도록 만들어 주는 매개체이며, 모든 붓다가 지니고 있는 지혜의 결정체이며, 언제나 자신을 향하고 있는 붓다의 자비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현현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부처님의 자비와 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지만, 미혹 때문에 우리는 부처와 직접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스승을 직접 만날 수 있다. 스승은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 함께 살고 숨쉬고 말하고 행동한다.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이 마음에서 생겨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불의 문턱에 이른 것이다. 근대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셨던 딩고켄체린포체께서 말씀하셨다.
헌신이야말로 道의 정수이다. 만일 우리가 오직 구루만을 마음에 두고 열정적으 로 헌신한다면, 무슨일이 일어나든 그것을 스승의 축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렇게 계속해서 헌신하는 마음으로 수행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기도이다. 구루에 대한 헌신이 모든 생각에 스며들면, 무슨일이 일어나든지 그가 보살피고 있으리라고 믿게 된다. 자기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구루를 지향하게 되고 상스럽 고 음흉한 모든 생각이 헌신으로 가득하게 된다. 그때 모든 것은 마치 하늘에서 매듭이 풀려나듯 저절로 그 절대적인 본성 가운데에서 풀려나게 되리라.
티베트 사람들이 늘 하는 이야기 중에 혼자 열심히 노력 정진하는 사람이 이 생에 성취를 할 수 있을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으나 구루에 대한 온전한 헌신을 내는 사람은 금생에 반드시 성취할 수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 있다. <열렬한 헌신의 햇살이 스승의 눈덮인 산 위에서 빛날 때, 축복의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 제자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준다>고 말한다.
그러한 축북의 물줄기 속에는 각 파의 전승에서 그 수행을 성취하시고 전수하신 전승조사들의 가피도 또한 포함된다. 티베트의 스승들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스승의 제자로서 남아 있으면서 항상 스승에게 가피를 청하는 기도를 하기 때문에 그 들의 머리 위에는 스승들의 전승이 황금의 염주가 되어 가피의 물줄기를 쏟아 내리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스승을 정수리에 관상하고 아래와 같이 기도한다.
모든 불보살님을 한 몸에 구족하신 근본상사시여!!
신구의 삼문을 다 바쳐서 간절히 기원하옵나니
자신의 본래면목을 인지케하시고
금생에 성불할 수 있도록 가피하소서.
아울러 항상 <아버지시여!! 당신과 같이 될 수 있도록 가피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구루에 대해 온전한 신심과 헌신의 마음을 일으키기란 말처럼 쉽지는 않다. 살아 숨쉬는 어느 한 존재를 부처의 존재로 인식하고 헌신의 마음을 일으키려면 그 만큼 그 사람이 정화되어 있고 충분히 준비되어 있을 때 구루와의 만남과 계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헌신이란 어떤 것인가. 맹목적이고 지각없는 숭배가 아닌 경건한 마음에 뿌리를 둔 명쾌하면서도 지성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한 내적인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스승이 내 자신의 존재 안에 깨달음과 지혜의 마음을 체현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될 때 터질 듯한 감사의 물결이 파도처럼 일어나 헌신이라는 말로 스승을 향해 흘러갈 것이다. 딜고켄제 린포체는 말했다. 처음에 이러한 헌신은 자연스럽거나 자발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제나 스승의 뛰어난 점, 특히 그의 자비롭고 자상함을 기억해야 한다. 믿음, 스승에 대한 존중, 그리고 그를 향한 헌신을 반복함으로써 그의 이름이 언급되거나 그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기만 해도 우리의 모든 일상적 행위가 멈춰질 때가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를 부처 자체로 보게 될 것이다.
스승을 인간이 아닌 부처로서 보게되면 가장 온전한 가피를 얻게 되는 것이다. 티벳불교에서는 말한다. 스승을 부처로 대하면 부처의 축복을 얻게되고, 스승을 인간으로 대하면 인간의 축복을 얻게 된다고. 스승을 부처로 대하기만하면 부처의 지혜로 충만한 스승의 마음이 그대로 자신에게 흘러들어올 것이라는 것이다. 스승에게 헌신의 마음을 낼수록 가르침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열리게 되고 마음이 열릴수록 그 가르침이 마음과 정신을 꿰뚫어 완벽한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기가 쉬워진다고 말한다.
제자의 마음을 정화시켜 헌신의 마음을 일으켜 스승님과 계합하고 뜻이 상응케 하는 방편수행이 구루요가이다. 닝마파의 현존하시는 성취자이신 쟈달린포체께서는 제자들에게 구루요가 만트라만 천만독씩 하도록 하신다. 천주교 신자가 많은 아르헨티나에서 온 한 청년이 그 린포체의 제자가 되어 구루요가 만트라를 백만독씩 열 번해야 한다며 두문불출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도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까규파의 성취자인 나로바께서 나란다대학의 승정의 위치를 사임하고 구루 틸로빠를 찾아 나섰다. 그는 먼저 헤루까 만트라를 칠십만번 하고 나서 간절히 구루를 만날 수 있기를 염원하면서 길을 떠났다. 도중에 많은 어려움과 강도와 거렁뱅이들에 시달리면서 몇 년을 헤메었으나 결국 구루와의 만남은 기약이 없게 되자 자신이 얼마나 박복하고 업장이 두터운가를 한탄하면서 자살을 결심한다. 벼랑에서 몸을 강물로 던졌을 때 띨로빠가 나타나 구해주신다.
나로바가 띨로빠임을 알고 원망을하니, 띨로바께서 <네가 나를 찾아 나선 그 순간부터 나는 너를 잠시도 떠난 적이 없다. 다만 네가 네 아상에 가려서 나를 보지 못했을 뿐이다. 네가 도중에 만났던 거지와 강도들이 다 나의 화신이였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 나로바는 띨로바에게서 열세차례에 걸친 아상을 없애는 혹독한 시련을 거친 후 수행을 성취하여 까규파의 주 수행법인 <나로바 육성취법>을 남긴다. 지금도 까규파의 무문관에서는 이 수행법을 위주로 전수하고 있다.
나는 대만에서 티벳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우연히 나로바 육성취법에 대한 서적을 몇권 발견했다. 본래부터 기공이나 무술에 관심이 많았던터 인지라 몸과 마음을 함께 닦는 논리 정연하고 구체적인 수행법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이 수행법이 아직도 전수되고 있는지 실제로 성취자가 존재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매일 나름대로 열심히 책도 보고 기도도 하면서 이 수행을 전수하는 도량과 성취자와 인연만 된다면 이 한 생을 다 바쳐서라도 그 수행을 해보고자 합니다라고 간절히 염했다.
나로바 육성취법을 전수해 주실 구루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확실한 기대도 없이 인도에 있는 티벳의 임시정부 소재지인 다람살라로 갔다. 티벳불교 도서관에서 티벳어 연수를 하던 중 따시종에 위치한 까규파의 전통수행도량인 캄바카 사원을 방문케되었는 데 그 곳의 책임자이신 도종린포체를 통해서 나로바 육성취법을 전수하는 무문관이 그 도량 내에 시설되어 있고 성취자이신 독덴 암틴께서 지도를 해주신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선지식을 뵙게 해달라고 청을 드렸다. 그러나 지금 무문관 중이시라며 좀처럼 쉽게 뵙기가 어려운 듯했다.
한 달 남짓 후에 이 사원에 제일 큰 행사인 파드마삼바바의 기도법회와 함께 라마댄싱이 열렸다. 그 때에 성취자이신 독댄 암틴께서도 밖으로 나오셔서 라마댄싱을 참관하시면서 손에는 티벳사람들이 거의 매일 손에 들고 돌리는 만트라와 경전이 든 마니륜이라는 통을 돌리고 계셨다. 마을 사람들 중에 하나가 저 분이 무문관을 지도하시는 성취자이시고 지금 행사 중에 비가 오지 못하도록 진언을 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다른 티벳인과는 달리 유난히 피부가 희고 빛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누구에게나 유쾌한 느낌을 주는 힘찬 모습은 칠십 노인이라 믿기 어려웠다. 뵙기를 청해서 처소로 찾아뵈었다.
너무도 누추한 좁은 방에 낮으막한 나무의자 놓고 두 사람과 통역 한사람 앉으니 방안이 가득찼다. 암틴은 꾀좨좨한 어깨 런링에 흰치마를 걸치신 모습이 첫 눈에 우리 시골집 할아버지를 방불케 했다. 밖에서 가사에 법복을 다 갖추신 여법한 모습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나는 그 곳에 오게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아무 것도 모르지만 나로바 육성취법을 수행하기를 원한다고 말씀드렸다. 의외로 수월케 법에 이르는 차제가 있는 데 먼저 네가지 기초수행을 십만번씩 다 마치고 본존 관정을 거쳐서 무문관을 하고 나면 나로육법을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아직도 업장이 두터운 나는 법을 주실 수 있다는 말씀과 그 예비단계에 대한 말씀을 듣긴 했지만 왠지 좀 싱거웠다.
티벳의 성취자라면 좀더 신비롭고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어떤 비범함이 있어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기초수행에 대한 법을 청하기를 차일피일 미루고 다른 사원에 혹시 더 좋은 환경과 선지식이 있는 지를 찾아다녔다. 마침 한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세라부링이라는 마을에 다른 까규파 사원이 있는 데 비구니들을 위한 무문관이 시설되어 있고 나로육법도 전수하고 있다고 했다. 그 곳에서 티베트 비구니 스님들 무문관을 지도하신다는 밍귤린포체를 찾아뵈었다. 이제 겨우 스물한살의 나이와는 달리 태산같이 묵중하고 말씀을 하실 때는 강물처럼 부드럽고 자상하셨다. 그야말로 비범하신 환생자요 연꽃 속에 보석같이 빛나는 모습이셨다.
나는 두 생각도 없이 그곳으로 옮겨와 수행코저 한다는 말씀드렸다. 린포체께서는 캄바카사원에는 독댄이라는 성취자들이 아주 훌륭하시고 보배로운 존재라면서 그 곳에서 수행하기를 권하셨다. 나는 막무가내로 그 곳으로 옮겨와서 린포체를 모시고 수행하고 싶다며 받아주시기를 청했다. 린포체께서는 더 이상 말리지를 않으셨다. 그 곳에서 수행할 수 있는 외국인을 위한 집 한 채를 예약해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따시종으로 돌아왔다.
산 어귀에 이르렀을 때 이웃집에 사는 외국인 여자가 무덤에서 금방 일어난 듯한 창백한 얼굴을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는 당신에게 아주 나쁜 소식을 알려주어야만 한다고 했다. 내가 거주하고 있던 집이 불에 다 타버렸다는 것이였다. 나는 순간 멍청해졌다. 아침에 멀쩡하던 집이 몇 시간 나갔다 온 사이에 다 타버리다니.... 믿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많은 인도 사람들과 몇 명의 라마들이 타다 남은 물건들을 쌓아놓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함께 나간 도반스님은 자신의 돈지갑부터 찾았다. 적어도 이삼년간 공부하고자 준비해온 전재산을 방안에 두고 나갔던 것이었다.
백 불 짜리 육십 여장이나 넣어놓았던 전대는 다 타버리고 허리끈부분만 약간 남아있었다. 물건을 챙겨놓았던 이십 여개나 되는 가방들과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해 준비했던 오리털 파카와 슬리핑백 등산화등이 불에 타다 말은 찌꺼기만 남아있었다. 불을 꺼준 마을 사람들에게 사례를 해서 돌려보내고 도반스님과 둘만 남았다. 우선 옆에 있는 겨우 한사람 살 수 있는 작은 토굴로 쓸 수 있는 짐만 옮겼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려하니 이불이 다 타버리고 없었다. 서글프고 처량한 마음에 말문이 막혔다. 얼마나 두터운 업장이 있길레 이역 만리 낯선 인도 땅까지 와서 남의 집까지 다 태워먹는단 말인가! 아직까지 이 따시종 마을에서 그렇게 큰 화재는 없었다한다.
아르헨티나 사람이 겨울철에 와서 수행하기 위해서 지어놓은 집이 여름에는 비어있으므로 잠시 빌려들어 갔던 것인데 남의 집에 불을 내어 훼손을 시켜놓았으니 고쳐주어야 했다. 마침 라마가 슬리핑백과 담요 하나를 들고 왔다. 영국 비구니스님 하나가 T셔츠 두 개도 갖다 주었다. 잠을 청하고 누웠으나 눈 앞에 불길이 활활 타는 영상과 함께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만감이 교차하고 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어지럽혔다. 부처님께서 제행이 무상하다하셨던가! 아침까지 멀쩡하고 많은 인도인들과 티베트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좋은 물건들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지금은 이불하나 헌 옷가지를 얻어 입어야하는 신세가 되다니.... 먼저 남의 집을 태웠으니 수리를 해주어야 했다. 일단 세라부링으로 거처를 옮기고저 했던 계획을 미루고 화재의 뒷수습을 하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밤새 뜬 눈으로 새우고는 아침에 독댄 암틴을 찾아뵈었다. 내게 남아있던 딸러 이천오백불중에서 이천불을 봉투에 넣어 올리고는 말씀드렸다. <제가 업장이 두터워 법을 구하러왔다가는 불만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잿더미를 보고 모든 것이 무상함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방황하고 분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제가 업장이 두텁고 근기가 약해서 법을 받기 어렵다면 더 많은 공양을 준비해 올리고 참회기도를 하고저 하오니 빠른 시일내에 수행의 길에 들어서도록 인도해 주십시요.>했다. 암틴노장님께서 만면에 자상한 미소를 띠우시며 너희가 이미 火供으로써 많은 공양물을 불 속에 태워 올렸으니 그보다 많은 공양이 어찌 필요하겠느냐하시며 다음날부터 법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 다음날부터 한편으로는 불에 탄 집을 티베트사람들의 도움으로 보수하면서 한편으로는 구루 암틴으로 부터 기초수행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둡고 좁은 방에 쭈그리고 앉아서 구루께서 한 마디 한 마디 윤회의 고통에 대해 세세히 일러주시고 염리심을 일으켜서 마음이 법을 향해 성숙해져야 한다고 노파심절하게 말씀하실 때마다 가슴깊은 곳에서부터 무한한 환희와 감동이 용솟음쳤다. 인도의 오월은 그야말로 숨조차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더웠다. 게다가 따시종은 물이 부족하여 몸 안에 수분이 부족해서 오는 풍토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줌소태에 걸린다.
그 무더운 인도에서의 첫 여름을 구루 암틴의 좁은 방에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비록 풍토병과 탈수로 고생하긴 했지만 오체투지 십만번을 환희심과 간절함으로 마칠 수가 있었다. 그 사이에 육개월만 돌아보고 대만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마음이 어느 새 사라지고 더 이상 방황하고 헐덕이는 마음을 쉬고 내생을 위해 이생을 포기하고 수행만을 위해 매진하기로 마음이 굳혀져 갔다.
어느 날 구루의 좁은 방에서 대만에서 온 제자 두 사람과 놀이가 벌어져 있었다. 그것은 <미라레바 십만송>이라는 책을 놓고 제자가 마음대로 책을 펼치면 스승님께서 읽어주시면서 인연도 보고 때에 맞는 법문도 해주시는 놀이였다. 때마침 내가 들어가니 나한테도 책을 주며 펼쳐 보라 했다. 내가 임의로 펼쳐서 스승님께 드리니 구루와 통역자이신 라마가 박장대소하며 너무도 딱 맞는 구절이라 하시며 즐거워 하셨다. 나는 영문을 몰라 통역을 청하니 그 대목은 미라레바와 두 번째 수제자인 레충바에 얽힌 고사였다. 레충바는 스승 미라레바를 떠나 인도로 법을 구하러 떠났다. 인도에서 많은 스승들을 만나 논리학등 많은 학문을 익히고 많은 서적들을 구해 돌아왔다.
내심 스승이신 미라레바는 무식한데 자신이 더욱 박식해진 것을 은근히 자만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물을 길러 가지고 오는 데 종이 타는 냄새가 났다. 아마 스승님께서 공양을 짓고 있는가 보다 생각하고 들어가니 미라레바는 레충바가 인도에서 가져온 서적들을 다 태우고 있었다. 레충바가 미친 듯이 분노하여 항의를 하니 미라레바는 너무나 가벼운 마음으로 웃으시면서 이 책들을 다 보려면 네가 죽을 때까지 보아야 함으로 나는 네가 죽었다 생각하고 너를 위해 이 책들을 다 태우는 것이다 하셨다. 그리고는 레충바의 헐덕이는 마음을 쉬도록 해주기 위해서 많은 신통력을 보이시는 대목이었다. 그 내용과 나에게 일어난 화재가 같은 상황이라면서 너무도 즐거워하셨다.
나는 불이 난 덕분에 헐덕하는 마음을 쉬고 법으로 마음이 향하게 되어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스승님께서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시면서 정색을 하시고는<한 번 더 태울까?> 하고 물으셨다. 그 말씀은 순간 나를 멍하게 했다. 그렇다면 그 화재는 우연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 날 이후 어쩌면 그 사건은 스승님께서 나를 법으로 인도하시고저 자비로 내리신 가장 큰 가피 일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신심을 갖게 되었다. 구루께서는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다 스승님께서 나를 성불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가피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따시종에 찾아 오는 다른 나라의 외국인들이 가끔 부러운 눈으로 내게 묻곤 한다. 외국인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티베트 불교 수행에 깊이 들어 올 수 있었느냐고... 나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로케트나 원자탄이 빨리 멀리 날 수 있는 것은 꽁무니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라고....
티벳불교에서 구루의 존재는 그 제자에게 있어 가피의 근본인 부처요 가장 자애로운 의지처인 아버지시며 모든 번뇌와 장애를 없애어 성취를 내리시는 수호본존이며 고통과 슬픔을 어루만져주시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현장스님의 염불선 이야기에서 이런 글귀를 본 적이 있다. 고향을 생각하고 어머니를 생각할 때 인간은 안온함을 느끼듯이 그러한 자연의 품에 안길 때 평안함을 얻게 된다. 번뇌의 인간이 침묵의 대자연 속에서 평안을 느끼듯이 내면의 공을 체험하고 침묵의 공간을 간직한 선지식의 존재는 우리를 근원적인 평안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청정승보는 번뇌와 죄업으로 오염된 중생들에게 최상의 복전이요, 으뜸가는 보배라고 부르는 것이다. 침묵의 공간을 성취한 선지식은 끝없는 자비의 파동으로 중생의 번뇌를 흡수하는 자석과 같은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내면의 공성을 체득하여 태양과 같은 자비와 지혜광명을 구족하신 구루께서는 끝없는 자비와 방편으로서 제자의 번뇌를 정화하여 불과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한 구루를 만났을 때 제자는 다만 신심으로 고무되어 수행만 하면 되는 것이다. 소걀린포체는 말씀하신다. 스승을 만나기란 그리 어렵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승을 참으로 믿고 따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르침 또는 스승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본질적인 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 통찰력을 발견하고 그 가르침과 스승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따르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다.
어떠한 어려움과 좌절, 모순과 결함에 직면하더라도 굴복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유치한 감정에 속지 말고 자신의 선택을 위하여 그 길을 끝까지 따르는 인내, 지혜, 용기, 겸양을 길러야 한다. 더더구나 조급하게 굴어 진리와 멀어져서도 않된다. 빨리 가고자 하다가 도달치 못하는 사람들이 흔히 있다. 티베트에서는 물론 역대의 불교선종사에서 기록에 남은 많은 성취자들이 오랜 시간동안 스승 곁에서 헌신의 마음으로 시봉을 하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도의 위대한 스승 사라하는 말했다.
마음 속에 스승의 말씀이 들어 간 사람은
손 안에 보물처럼 진리를 보리라.
뉵네수행
티벳불교 수행 중에 어떤 수행이 가장 실질적이고 효과적이냐고 묻는다면 많은 종류의 수행이 있겠지만 필자가 경험한 가운데에 제일 먼저 뉵네수행을 소개하고 싶다. 티벳어로 뉵네란 뉵메샘, 즉 불성자리에 안주한다는 뜻으로 평소에 번뇌와 상응하던 신구의 三門을 거두어들여서 본래의 청정무구한 자성자리인 깨달음의 상태와 상응케 한다는 의미이다.
티벳사원에서는 새해를 맞이한 정월대보름을 기점으로 하여 세 차례 이 수행을 하는데 한차례에 이박삼일간 먼저 八關齋戒를 받고 절에서 숙식을 함께 하면서 이 때만큼은 오후에 음식을 먹지 않고 여덟가지 계율을 청정히 지키면서 절하고 만트라하는 외에 일절 잡담과 세간의 잡사를 금한다. 첫날 점심을 먹고 나서는 저녁에 우유등 마실 것을 주고 나서부터는 하루가 지난 그 다음날 아침까지 일체 음식은 물론 물도 입에 대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는 묵언을 하면서 대중이 함께 기도를 하는 데, 기도하는 내용은 천수천안관세음기도로서 신묘장구대다라니와 옴마니반메훔 만트라를 위주로 하고 특히 천수관음을 찬탄하면서 전신 오체투지하는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서른 여섯 시간동안 밥은 물론 물도 안 먹은 데다가 계속 오체투지를 대중이 함께 하기 때문에 위장은 비어서 열이 나고 입이 무척 마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지막날 밤에는 입술이 새까맣게 타고 혈색이 창백해진다.
묵언을 해야하기 때문에 절대로 입을 열어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 가운데 누군가 견디기 어렵다고 하소연을 하기라도 한다면 대부분이 못견딜 지경이다. 다행히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묵묵히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정초에 많은 티벳사람들은 라마들과 함께 이 수행에 동참하는데 청정한 마음으로 이 뉵네수행을 열두차례 참석할 수 있다면 初地인 환희지의 보살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연달아 세차례 다 참석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고 대부분은 가족이 번갈아가며 교대로 참석한다.
나는 대만에서 1992년 겨울에 죽첸린포체가 주관하시는 뉵네수행에 처음 참석하였다. 그 때는 뉵네의 의미도 모르고 누군가 삼악도에 과보를 앞땅겨 받는 고통스런 수행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보현보살께서도 허공을 덮고도 남을 업장이 있다하셨는데 내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업장이 좀 많겠나 싶어서 약간은 호기심어린 기분으로 참석하였다. 둑바까규파의 최고 수장이신 법왕이라 불리우는 린포체께서 직접 이끄시는 기도는 엄중하고 가피가 충만한 듯했다.
마지막날 밤이 되니 모두들 입술부위가 새까맣게되고 얼굴은 창백하여 탈진상태였다. 회향하는 날 새벽 두시에 일어나서 기도를 세 시간동안하고 금식과 묵언을 트는 의미의 감로수를 받아 마시게 된다. 그 때에 그 한 방울의 감로수가 얼마나 달고 감사하던지..... 마지막날밤 나는 온 몸에 기운은 하나도 없는데 머리는 너무 맑아서 거의 잠이 오지를 않았다. 비몽사몽간에 누군가 삼악도의 과보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 했다. 순간 세계지도가 눈앞에 펼쳐지더니 우리 나라 지도와 함께 아비지옥이라는 글씨가 나타나더니 잠시 후 나의 속가의 아버님이 나타났다.
깜짝 놀라 자세히 보려하니 그러한 정경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깨어나니 갑자기 집안에 부모님 소식이 궁금해지면서 불안해졌다. 기도를 마치고 처소로 돌아와 한국으로 전화를 몇 차례 했으나 속가집에는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가까운 친척집에 전화를 하니 어떻게 알고 전화를 했느냐며 처사님이 이틀 전에 밤중에 귀가하시다 공사중인 맨 홀에 빠져서 얼굴에 심한 상처가 나서 입원중이시라 했다.
티벳불교에서 중음의 상태에서 어두운 구덩이로 빠지는 느낌이 들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 아버님이 아비지옥에 가실 뻔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왜냐하면 평소에도 술을 많이 드시던 아버님은 내가 집안에 맏딸로써 도움이 되기는커녕 중이 되어버리자 거의 자포자기하시고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는 식구들을 괴롭히고 삼보를 비방했다. 나는 자신의 출가로 인하여 가족들이 고통 속에서 불행한 나날을 보내야하고 아버님이 악업을 끊임없이 짓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으나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나는 친척의 도움으로 어머니와 통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뉵네기도에 참석한 내용과 함께 아버님이 지옥에 갈 뻔한 것을 내가 기도에 참석한 공덕으로 돌아가시지 않고 그만한 것이고 죽은 후에 사십구재 잘 지내는 것보다 지금 아버님을 위해 기도를 해드리는 것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평소에도 불심이 깊으신 어머니는 곧 통장으로 오십만원을 넣어주셨다.
나는 오십만원을 비자카드로 인출하여 곧 네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남부지방에 계시는 죽첸린포체를 찾아뵈었다. 뉵네수행하는 동안에 가족에게 생긴 일을 말씀드리고 아버님이 아직도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니 아버님께서 지옥에 갈 과보를 면하고 이 생에 업장이 녹아서 불심이 생겨나도록 가피를주십사고 말씀드렸다. 린포체께서는 별다른 기도를 하라는 말씀도 않으시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셨다. 별로 신심이 없는 나의 표정을 보시더니 웃으시며 가방에서 매듭을 지어놓은 끈을 꺼내어 후후 입김을 몇 번 불어 넣으시더니 아버님께 보내드리라고 하셨다.
미심쩍은 마음으로 아버님을 위하여 아미타불상 조성과 사리탑공양 인등 공양등을 올리고는 타이페이에 있는 숙소로 밤차를 타고 돌아 왔다. 처소에 도착하자마자 피곤에 지쳐서 잠깐사이에 잠이 들었다. 꿈에 너무도 생생하게 내가 한국의 속가집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다. 길목에서 아버님이 너무도 환한 미소를 띠고 나를 반겼다. 고지식한 시골 농부인 아버님은 내가 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소에 나에게는 거의 밝은 표정을 선사하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삼학년 때까지도 혹시 친아버지가 아닌가하고 의심을 일으키곤 했다.
그런 분이 꿈속에서 너무도 밝은 미소로 나를 반기며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버님이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어서 뵈러 왔노라하니 상처가 아문 듯한 얼굴에 난 갈색흉터를 보여 주시면서 다 나았으니 걱정 말고 대만으로 돌아가서 본인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오히려 격려를 하셨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시고 농사일을 많이 하신지라 얼굴빛이 검고 붉은 색 이셨는데 꿈 속에서는 갈색이 든 상처부위를 제외하고는 얼굴이 희고 빛나는 모습이었다. 어머니를 뵙고 가야겠다고 하니 어머니도 건강하시고 편안하시니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하셔서 그냥 대만으로 돌아오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꿈이 너무도 생생하여 속가로 전화를 했더니 수술결과가 좋아서 퇴원을 하시기로 했다 하셨다. 그 이후로 뉵네 수행을 몇 번 더 참석하였는데 그 때마다 가족들이 가피를 입고 원수진 이들과의 원결이 풀리는 좋은 징조들이 있었다. 감사하게도 그 이후로 아버님은 내가 스님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친척들과 이웃에게 말씀하시게 되었고 집에 조그마한 불단을 마련하여 향과 다기물도 올리고 삼배도 드리며 공양드시기 전에는 반드시 합장하고 십념 나무아미타불하신 후 드시게 되었다.
함께 뉵네수행에 참석한 서른 살쯤 되어보이는 유난히 얼굴이 희다고 느껴지는 해맑은 대만 청년이 있었다. 그는 이 수행을 거의 매달에 한번씩 하는 도량에서 스무 차례나 참석을 했다한다. 그는 원래 의사에게서 백혈병이라는 사형선고를 받고는 친구의 소개로 이 수행에 참석케 되었는데 수행을 마치고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니 백혈구의 숫자가 정상이 되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 이후로 신심이 나서 몇 번 더 참석을 하니 건강이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그래서 이만하면 죽을 염려는 없겠다 싶어서 참석을 안했더니 다시 백혈구의 숫자에 이상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한달에 한 차례씩 꼭 뉵네수행에 동참을 하는 것이라고 대중에게 뉵네수행의 수승함을 증명했다.
氣脈明點 수행
기맥명점수행은 원만차제 수행의 하나이다. 이 수행의 목적은 중맥을 열어서 좌우맥으로 흐르는 분별의 기를 정화하여 중맥으로 들어가게 함으로서 지혜의 기로 바뀌게 하는 데에 있다. 단전에 있는 배꼽불을 일깨워서 그 불의 힘을 이용하여 중맥을 여는 뚬모수행과 직접 가슴차크라를 열어서 상대적개념을 정화하는 금강염송의 두 수행이 기맥성취수행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달라이라마 계통인 황교의 창시자인 종카파대사는 금강염송 수행의 성취자로 알려져 있다.
미라레바는 뚬모수행의 성취자로 히말라야 설산에서 무명옷만 걸치고 때로는 벌거벗은 몸으로 일생을 사셨다. 미라레바의 해와 같은 제자로 불리워지는 감포바는 꺄규파 수행을 체계화한 성취자이다. 그가 처음 스승인 밀라레바를 찾아 뵙고 자신의 수행을 말씀드린다. 그 중에 자신이 경율론 삼장을 두루 섭렵하고 선정을 닦았는 데 십삼일간 깊은 선정에 들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말씀드린다. 그 때에 미라레바는 보리 가루를 버터와 뜨거운 차를 섞어 먹으려고 주무르고 계셨다. 뭉친 보리 가루를 들어 보이시면서 네가 그 동안 해 온 수행은 이 짬바(보리가루)만도 못하다. 나에게 뚬모를 배워라. 하고 말씀하신다.
뚬모란 우리 몸 안에 내재해 있는 신비의 열을 단전에서 일으켜서 그 열을 이용해 몸을 정화하고 몸 안의 氣脈과 각 차크라를 다 열어서 상대적 사유를 정화하여 절대적 경지로 들어가게 하는 수행이다. 산만하게 온 몸으로 흐르는 분별망상의 기를 중맥 안으로 끌어들여서 중맥에 안주하게 하여 중맥에서 기를 융화함으로서 정수리에 있는 감로를 녹아 내리게 하여 구생의 희열을 증득하고 지복과 空性이 하나가 되는 空樂不二의 완전한 경계를 성취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기맥성취 수행은 주로 호흡법을 통하여 수행하며 육체적인 요가도 곁들여 하고 있다. 뚬모의 열은 반드시 단전에서 일어나 중맥 안에서만 움직여야 기를 중맥에서 안주하고 녹아들게 하여 구경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만약 급한 마음에 조급히 수행하여 중맥 안이 아닌 신체의 다른 부분에서 열이 느껴지게 되면 오히려 진정한 뚬모의 열이 일어나는 데에 장애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반드시 차분하고 안정된 태도로 천천히 이 수행에 임해야 하는 데 티벳의 대부분의 위대한 성취자들이 사오년 내지 일생동안 이 수행을 하여 성취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많은 티벳사원에 무문관제도를 시설하고 있는 데 거의 대부분이 이 뚬모 수행을 위주로 한 나로바 육성취법을 가르치고 있다. 나로바 육성취법이란 인도의 성취자의 나로빠에 의해 체계화된 수행법으로 뚬모수행을 근간으로 해서 幻身을 성취하고 꿈 수행을 통해 법신 보신 화신을 성취한다. 正光明의 수행을 통해서 무명의 어둠을 밝히고 遷識법을 통해서 의식의 천이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힘을 얻고 대수인을 통해 본래의 자성광명을 인지하는 수행법이다.
이 모든 수행의 모태를 뚬모 즉 배꼽불 수행에 두고 있다. 그 중에서도 幻身성취란 뚬모 수행이 안정되면 기가 미세해져서 거친 육신이 아닌 미세한 기로 이루어진 환신이 생겨나게 된다. 선정상태에서 생겨나는 意生身과도 흡사한 이 환신을 증득함으로서 천강에 달 그림자가 다 비추듯이 중생들의 필요에 따라 천백억 화신을 나툴 수 있게 된다.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삼대 아승지겁을 통해 복덕자량을 쌓아야 성불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 데 환신을 성취하여 천백억 화신으로 중생들의 수요에 응할 수 있음으로 한생에 삼대 아승지겁도안 쌓을 수 있는 복덕자량을 구족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밀종에서 한 생에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한다.
밀라레바 전기에 보면 밀라레바가 설산에서 고행을 할 때 스승인 마루빠를 간절히 염원하면 마루빠가 현신하여 가르침을 내리시는 대목이 가끔 있다. 실제로 역대 티벳조사들의 전기에서 이런 류형의 일화는 자주 접할 수 있으며 현재에도 많은 제자들이 스승들의 이러한 현신을 많이 체험한다고 한다. 이것은 현재에도 뚬모 수행을 성취한 성취자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실제로 환신이나 분신을 통해서 제자들을 접인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 것이다.
꿈 수행이란 말 그대로 깨어있을 때 뿐 만 아니라 꿈속에서도 수행을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성불하기 전에 정화되어야할 업장이 네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깨어있을 때 분별망상을 일으키는 무명의 장애이다. 둘째는 깊은 잠의 어둠의 장애이다. 잠에 깊이 들면 꿈도 안 꾸고 죽은 듯이 자게 되는 데 이것도 당연히 정화되어야 할 업장중에 하나이다.
셋째는 잠이 조금 엷어지면 꿈을 꾸게 되는 데 이러한 꿈의 장애도 광명으로 정화되어야 한다. 智者 無夢의 경계로서 이미 낮에 분별망상의 업장이 다해서 꿈을 꾸는 습기까지도 다 정화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남녀의 성욕의 장애이다. 우리가 업신을 받게되는 근본인 애욕의 장애가 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네 번째 장애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한 쪽에서는 定障이라 하여 無想의 깊은 선정에 빠지는 장애를 정화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꿈 수행이란 낮에 이미 상당한 수행에 힘을 얻어서 꿈의 경계까지도 자유자재하게 바꿀 수도 있고 심지어는 흔히 말하는 유체이탈을 하여 부처님의 정토에 가서 법문을 듣는다든지, 이미 가신 선지식들을 뵙고 법을 청하는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는 상태이다. 이러한 꿈 수행을 할 수 있는 조건은 이미 낮동안의 수행에 상당히 힘을 얻어 분별망상이 어느 정도까지 정화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충분히 잠을 잘 수 있어야 한다. 옛날 나란다대학에서 어떤 성취자는 먹고 배설하고 잠자는 일밖에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꿈 수행을 위주로 했던 것이다. 현존해 계신 성취자로 닝마파의 민링틴친 린포체가 계신다. 티베트에 드공까규파의 체닥라마는 꿈 속에 나로빠를 만나야 겠다는 염력을 지어서 그날 밤 꿈 속에서 인도에 가서 나로빠를 만났다. 나로빠를 뵙고 법을 청하니 육성취법을 다 듣기를 원하는 가고 물으셨다. 체닥라마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을 알고는 육성취법을 다 들으려면 시간이 충분치 않으리라 생각하여 나로빠 육성취법 가운데에 뚬모 수행과 천식법 부분만을 청해서 직접 전수 받아온 법본이 지금도 전수되고 있다.
正光明수행이란 낮에 무명의 장애와 깊은 잠의 어둠의 장애, 꿈의 장애등이 다 정화되어 항상 무명의 어둠이 없는 자성광명 가운데 있을 수 있도록 광명상태를 인지하고 수련하는 수행이다. 이 수행도 뚬모에 완전히 힘을 얻고 나서 꿈의 습기까지도 다 정화하기 위해 상당히 수행에 힘을 얻은 단계에서 하는 수행이다. 빛이 있음으로서 어둠이 단박에 사라지듯이 정광명수행을 통해서 무명의 어둠을 흔적도 없이 밝힐 수 있으므로 卽身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遷識法은 의식을 자유자재로 옮길 수 있는 수행으로 나란다대학 시절만 해도 이 수행의 성취자가 인도에 많이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화로서 위진 남북조시대에 달마대사가 중국에 불법을 전수하러 오실 때 도중에 큰 구렁이가 죽어서 썪는 냄새가 역하게 났다. 너무도 큰 놈이어서 들 수가 없어서 자신의 의식을 옮겨 구렁이 몸으로 들어가 산에다 버리고 돌아오니 자신이 벗어 놓은 잘 생긴 육신은 온데 간데 없고 아주 사납고 추한 모습의 육신이 남아있었다.
한 선인이 그 근처를 날아다니다가 멋지고 잘 생긴 육신이 벗어져 있는 걸보고 자신의 못 생긴 육신을 벗어 놓고 바꿔 입고 갔던 것이다. 달마대사는 할 수 없이 그 선인의 육신을 입고 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늘 날 달마대사의 초상이 그렇게 험상궂은 모습이라 한다. 이 고사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인도에서는 천식법의 성취자가 많이 있었나 보다. 그러나 현재 티벳에서도 이렇게 동물의 몸에까지도 자유로이 들어갈 수 있는 천식법은 失傳되었고 아미타 극락정토로 의식을 옮기는 포와법으로 대치하고 있다.
눈 밝은 스승을 의지하여 윤회가 고통의 본질임을 알아서 出離心을 내고 자비심과 보리심을 일으켜서 空觀의 正見에 의지하여 아집을 여위고 차제로 수행하면 나로바 육성취법의 마지막 성취의 단계인 大手印을 증득하게 된다. 밀종에서의 대수인은 최고의 果位로서 見惑과 思惑이 다하고 자성 본연의 대원경지를 증득함을 말한다. 근기가 익은 제자를 스승께서 禪機활발하게 단박에 一分 무명을 파해서 깨닫게 해주는 일화가 많이 있다.
이러한 접인 방식은 중국이나 한국 선종에서 쓰는 가풍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상근기의 제자는 스승이 눈 한번 깜짝하는 사이에 깨달아 버리지만 중하근기의 제자에게는 생기차제를 거쳐서 원만차제 수행에 들어가서 시절인연이 도래했을 때 直指人心하여 견성성불 할 수 있도록 지혜와 방편으로 이끌어 주신다. 제자가 스승에 대한 진정한 신심과 헌신을 내고 그 가르침에 따르기만 하면 스승은 그 제자를 마음의 본성을 깨달아 성불할 수 있도록 책임져주신다고 티베트 사람들은 믿고 있다.
포와수행법
포와란 의식을 遷移한다는 뜻으로 앞에서 설명한 나로바 육성취법의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티벳사람들이 죽을 때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수행법이다. 사람이 죽으면 의식이 육신의 아홉 구멍을 통해서 나가게 되는 데 이 아홉 개의 구멍을 윤회에 드는 문이라 한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가피를 믿고 평소에 포와법을 수행하면 정수리에 梵血이 열려서 의식이 그 통로를 통하여 극락세계로 왕생하게 되는 데 이 범혈을 성인에 드는 문이라고 말한다.
이 수행은 아주 보편적인 수행법으로 요즈음 외국인들에게도 티벳 린포체들에 의해 많이 전수되고 있다. 이 수행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임종을 도와줄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수행법이다. 포와법을 수행하게 되면 범혈이 열렸는지 여부를 린포체들께서 직접 검증해 주신다. 내가 대만에 있을 때에 밀종에 신심을 내고 있던 한 신도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때 마침 티베트 린포체께서 대만을 방문중이어서 포와를 청했다 한다. 린포체께서 돌아가신 분를 위해 포와 수행을 하신 후에 관을 열어 시신의 정수리부분을 검사하니 범혈 부분만 머리가 빠지더라는 이야기를 직접들은 적이 있다.
신심이 나서 포와 수행을 전수하시는 안양린포체를 찾아 뵙고 도반 스님 둘과 함께 포와 수행을 전수 받았다. 삼일이 지난 후에 정수리 부분에 전에 없던 다른 氣感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에 도반 스님 둘과 함께 린포체께서 다 범혈이 열렸다는 검증을 해 주셨다. 더욱 신심이 나서 일년에 한번씩 인도의 보드가야 성지에서 열리는 포와 수행을 보름간 참석하였다. 함께 수행하던 티베트 사람들과 서양사람들이 범혈이 열리고 간혹 아미타불을 직접 친견하곤 하였다.
구루 암틴의 무문관 도반중에서 정진을 아주 잘 하시는 독댄이 계셨다 한다. 그 분은 티베트가 중공에 함락된 후에 인도로 피신을 못하셔서 많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중공군에게 끌려가게 되었다. 도중에 황야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 독댄은 눕지를 않으시고 바위를 등지고 않아 계셨다. 다음날 아침 같이 가던 마을사람들은 그가 앉은 상태에서 포와를 해서 극락세계로 가버리신 것을 발견했다고 구루 암틴께서는 가끔 말씀하셨다.
소걀린포체는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한 가장 가치 있고 효과적인 수행이 포와 수행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수행을 활용하기를 원하는 누구든지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포와 수행의 핵심을 <티베트의 지혜>(민음사 刊)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바르도의 가르침
히말라야 설산에서 흘러나온 가장 진귀한 가르침 중에 하나는 무엇보다도 바르도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상세한 가르침일 것이다. 「바르도」란 중간상태란 뜻으로 흔히 삶과 죽음사이에 생겨나는 중음의 상태를 말한다. 깨달은 안목에서 보는 죽음은 시작도 끝도 없는 흐름의 일부로서 온전한 전체의 맥락 가운데 일부로 보는 것이다. 그러한 삶과 죽음사이에 흐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바르도 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양상과 해탈할 수 있는 비전등이 티베트 스승들의 깨달음을 통해서 전수되어 졌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도 중음의 상태는 경험할 수 있다. 선정상태에서 意生身을 일으키는 선정중음이 있고 잠잘 때에 꿈 속에서 활동하는 夢中중음이 있다. 이 세가지 중음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거의 유사하지만 스승으로부터 바르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티벳에서는 죽는 과정과 죽은 이후의 바르도 상태에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인식하여 친숙해지기 위해서 살아있을 때에 스승을 의지하여 상세한 가르침을 받고 끊임없이 마음의 본성을 자각하려고 노력하고 잠 잘 때와 꿈을 꿀 때등의 다양한 국면들을 수행에 활용한다.
티베트 사람들은 살아 있으면서 죽음에 대한 준비를 가장 열심히 하는 민족일 것이다. 그들은 죽을 때 극적으로 혹은 수행자로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죽기를 염원한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때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 혹은 죽은 후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많이 사유한다. 그런 연고로 한국에서 일찍이 유통되어진 파드마삼바바의「死者의 書」와 같은 저술들이 생겨난 것이다. 전 세계에 널리 번역되어 서양의 과학문명을 놀라게 했던 이 책은 사람이 죽은 후에 다음 생의 몸을 받기 전까지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또 어떻게 죽어 가는 사람을 도울 것인지를 기록한 경전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육신을 벗어버린 중음의 상태에서 구경의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맞게된다고 이 책에서는 말하고 있다. 쥐덫에 걸려있던 쥐가 덫에서 풀려난 듯 육신의 굴레를 벗어버린 영혼은 살아서 육신을 입고 있을 때보다 일곱배 이상의 힘과 영민함을 발휘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때 수행을 통해 그토록 갈망했던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이 때에 주어진다고 한다. 종카바 대사를 비롯한 티벳의 많은 성취자들이 구경의 해탈을 죽음의 순간에 성취했다고 전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티벳에서는 스승들의 태어난 날은 기념하지 않고 그가 죽은 날, 즉 최후의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기념한다고 한다.
바르도 가르침의 독특함과 힘은 죽음의 실제과정을 지극히 명료하게 제시함으로써 해탈 방편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데에 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과 죽은 이후 바르도 과정에서 일어나는 단계등을 상세히 진술하고 있는 데, 법신성취를 할 수 있는 광명의 단계와 보신 성취를 할 수 있는 달마다투 즉 법성에서 광휘의 불꽃이 일어나는 단계와 화신 성취를 할 수 있는 자비로운 모습을 한 불보살님들과 무서운 모습을 한 본존불과 호법신장들이 나타나는 세 단계로 크게 나누고 있다.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던 地水火風 四大가 쇠락하여 차례로 근원으로 섭수된 후에 어머니에게서 받은 붉은 명점과 아버지에게서 받은 흰색 명점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깜깜한 암흑과 함께 외호흡이 끊어지는 데 이 때에 가장 먼저 근원적 광명인 법신 광명이 나타나게 된다. 생전에 수행을 잘 했거나 스승으로부터 바르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이러한 법신 광명을 인지하여 해탈을 하게 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광명을 인지하지 못하고 무의식 상태에 들게된다고 한다.
수행자가 마음을 본성 가운데에서 흩어짐 없이 쉴 수 있는 한 이 광명은 유지되는 데 보통의 경우 손가락을 퉁길 정도의 짧은 기간동안 지속되거나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동안만큼 지속된다 한다. 그래서 티벳에서는 성취하신 수행자가 열반하게 되면 삼일에서 오일동안 시신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선정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아주 고요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그러다가 시신이 고개를 떨구거나 코에서 액체가 흘러나오면 의식이 몸에서 떠난 징조라 하여 그제서야 염을 하고 화장할 준비를 하게 된다.
내가 캄바가 사원에 있는 동안 무문관을 지도하시던 독댄 안잠이 돌아가셨다. 이 분은 평소에 고행으로 일관하시면서 정진력이 뛰어나셔서 이 절의 전 대중으로부터 신망과 존경을 받으셨다. 여든 두 살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시봉을 받지않고 무문관에서 대중과 똑같이 공양을 받아드시고 무문관하시는 라마들을 지도하시는 일 외에 혼자서 묵묵히 불상에 복장을 하시는 일과 정진하고 기도하시는 일로 하루를 보내셨다. 열반하시기 일주일 전까지도 대중기도에 참석하시고 평소와 다름없이 불상 복장도 하시었다.
그러나 본인은 물론 온 대중이 다 그 분이 돌아가실 날이 머지 않았음을 감지하고 마음속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안잠은 고요히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받아드리고 계셨다. 새벽에 구루 암틴께서 안잠의 부름을 받고 두 분이 몇마디 나누시더니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그 시간이후 암틴은 오일간 안잠의 시신을 선정상태에서 고요히 계실 수 있도록 곁에서 지키셨다. 그 오일동안 시신에서는 전혀 역겨운 냄새가 나지 않았다고 암틴께서는 말씀하셨다. 오일이 지나고 무문관 법당에서 기도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암잠을 위한 기도의식이 있던 날 맑은 하늘에 너무도 찬란한 쌍무지개가 나타났다. 다비식 날 온 대중과 마을 사람들이 안잠의 시신에 마지막 하직인사를 올리는 카다(흰 명주수건)를 올렸다. 다비식은 세 시간에 걸쳐 대중라마들의 기도와 함께 이루어졌다. 그 날 저녁 잿더미 속에서 안잠의 심장과 혀가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고 사리 백오십여과가 수습되었다. 후에 안잠의 심장과 혀는 무문관 법당에 사리탑을 조성하여 안치되었고 사리와 유골은 법당 마당 옆에 사리탑을 조성하여 안치하였다.
티벳에서는 일반 사람의 시신이라도 사흘이 지나기 전에는 옮기지 않는다한다. 왜냐하면 그가 깨달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고 그의 의식이 언제 떠날 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만일 시신에 손을 대게 되면 의식이 손을 댄 부분 쪽으로 쏠리게 되어 정수리 쪽의 천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나가게 되어 불행하게 태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특히 신중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대만의 큰스님들께서는 의식이 육체를 떠나는 데 여덟 시간이상 걸린다고 주장한다. 티벳에서는 대부분 삼일이상 걸린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시신의 검사나 화장은 삼일이 지난 후에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만약 그 전에 시신을 옮기거나 만져야 될 경우에는 만지기 전에 포와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깨달은 수행자는 죽음의 순간에 근원적인 광명을 인지하여 법신 성취를 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일생동안 수행과 지속적인 정진을 통해서 스승께서 알려주신 광명의 상태와 본연인 자성광명을 합일시키는 수행을 계속했을 때 죽는 순간 그 광명을 인지 할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뉴욕 공항에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누군가가 마중을 나왔을 때 사전에 소개해 준 사람으로부터 그 사람의 인상착의나 사진을 가지고 갔다면 그 많은 인파 가운데서도 그를 찾아내고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전지식이 없다면 그가 곁에 있다해도 알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일단 마음의 본성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 인지할 수 있게 되면 나중에 그 본성을 알아볼 수 있는 열쇠를 확보한 셈이다. 사진이 있다하더라도 몇 번이고 자세히 보고 익혀두어야 그 사람이 스쳐지나갈 때 곧 알 수 있듯이 평소에 꾸준히 수행하여 마음의 본성에 대한 인지를 한층 깊고 확고하게 해두어야 바르도 상태에서 많은 경계가 일어 나는 중에도 바로 근원적인 광명을 인지하여 법신 성취를 하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근원적 광명의 발생은 동트기 바로 직전 텅빈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과 마찬가지다. 그러한 상태에서 점차적으로 태양이 모든 방향으로 윤곽을 드러내면서 광채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 때에 죽은 영혼은 소리, 빛, 색이 흐르면서 진동을 의식함과 동시에 찬란하게 밝은 빛이 여러 가지 색체를 띠고 아른거리면서 끊임없이 요동함을 느끼게 된다. 마치 한 낮의 땡볕아래 신기루와 같은 현상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듯한 현상을 보게되는 것이다. 이 때에 이 법성의 빛에 대한 인식이 있는 수행자는 이러한 광휘가 매우 안정되게 일어나게 되고 이를 활용해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티벳불교에서 닝마파의 대원만 수행 가운데에 ?토갈 수행?이 있는 데 이 수행은 法性의 참뜻과 실제적인 의미를 알려주고 이 법성을 인지하고 안정시킬 수 있도록 중점을 두어 가르치고 있다. 이 수행을 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法性의 빛은 단지 번쩍거리는 번갯불이나 반딧불에 불과할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현상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르고 지나칠 것이다. 오직 토갈 수행자만이 그러한 찬란한 빛의 현현이 자신의 마음의 본성에서 일어난 것임을 인지하여 해탈을 얻어 보신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
만일 법성의 찬란한 빛이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난 자성의 빛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다음으로 단순한 빛과 색깔들이 크고 작은 물방울무늬와 밝은 점으로 나타나다가 하나로 통합되어 합쳐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거대한 광명체 속에 천여 마리의 용이 한꺼번에 포효하듯한 소리와 함께 눈을 멀게할 정도의 밝은 빛 속에 42 분의 자비한 모습의 불보살님들과 58분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한 분노의 불보살님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바르도 상태에서 나타나는 백명의 자비존과 분노존들을 중국에서는 文武百尊이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文武百尊의 출현은 며칠에 걸쳐서 계속되는 데 생전에 바르도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文武百尊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그러한 모습들은 자신을 위협하고 놀라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더 없는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육도 윤회로 우리를 인도하는 희미한 빛 속으로 숨게 된다고 한다. 사실상 文武百尊가운데에 자비존 42분의 자신의 가슴차크라에서 현현한 모습이고 58분의 분노존은 자신의 대뇌 즉 정수리 차크라에서 현현한 모습이라고 한다.
대략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자비존 가운데에 아미타불을 위시한 五方佛은 五蘊이 정화되어 대원경지등 다섯가지 지혜가 현현한 모습이고 관음보살을 비롯한 八大보살 八識이 정화된 모습이며 그 배우자인 불모의 모습은 八識의 대상인 경계가 정화된 모습이다. 이와 같이 자비존과 분노존의 모습이 자신의 번뇌와 집착이 정화된 모습인 줄 알아서 그것이 바로 내 마음의 본성인 줄을 알아차림으로서 해탈을 이루어 화신성취를 하게 되는 것이다. 티베트에서나 대만사람들은 이러한 바르도의 文武百尊에 대한 사전지식을 확고히 하여 중음의 상태에서 화신성취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백 분의 자비존과 분노존에 대한 탱화를 그리거나 사진으로 모시기도하고 불상을 조성하여 법당에 안치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文武百尊이 죽은 후에 바르도 상태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닝마파의 족첸 수행을 하게 되면 선정 상태에서도 근원적 광명의 상태를 거쳐서 법성의 광휘가 현전하고 그 다음에 文武百尊이 현전하는 단계를 체험함으로서 법신, 보신, 화신의 성취를 원만하게 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수행의 단계를 四相이라하여 첫째 자성의 본질인 법성의 빛을 실제로 보게되는 法性現前상과 바같경계를 반연해서 지혜가 일어나고 미혹한 분별망상을 여윈 청정한 지혜가 증장되는 證悟증장상, 이 상태에서 더욱 정진하면 모든 청정치 못한 현상들이 사라져서 오색 빛을 띤 현상들이 세간에 가득차고 오방불을 비롯한 자비존과 분노존들의 만다라가
세간에 가득 차서 부처님들 가슴에서 미세한 빛줄기가 자신의 가슴으로 연결되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번뇌에서 해탈하여 모든 습기가 끊어지고 모든 幻의 현상들이 사라지고 지혜가 늘어 각종 신통의 경계가 열리게 된다. 이 때에는 실체의 현상들이 법성으로 정화되어 법신 보신 화신과 정토를 증득케 되는 데 이러한 경계를 세 번째 단계인 明智如量相이라 한다. 거기에서 더욱 용맹스럽게 정진하면 모든 번뇌와 미혹한 현상들이 스스로 정화되어 원초적인 不二법계에서 보리를 증득케 되는 데 이 때에는 법력의 부사의한 힘이 법계에 두루 편만해져서 위신력을 나툴 수 있는 힘이 온전해진다. 마치 하나의 달이 천강에 달 그림자를 나투듯이 온 법계에 화신을 나투어 중생들을 위한 불사를 지을 수 있게 되는 데 이러한 경계를 구경의 法性遍盡상이라 한다.
이와 같이 자성을 인지하여 구경의 해탈에 이르는 과정은 사후의 바르도 상태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살아 생전에 수행에 마음을 두고 열심히 정진했을 때에야 바르도 상태에서도 해탈할 수 있는 능력과 지견이 갖추어 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티베트 불교에서는 죽음의 순간에 해탈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살아 있을 때에 스승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정진하며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맺음말
이상에서 소개한 티베트 불교의 수행 법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서면으로 소개되어진 보편적인 수행 외에도 각 파에서 비밀리에 구전으로만 전수되어지는 비밀하고도 수승한 수행들이 많이 있다. 물론 티베트의 불교라 해서라마들에 의해 티베트화 하여 만들어진 불교는 아니다. 불교가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소승, 대승으로 발전해 가던 과정에서 金剛乘으로 발전되어진 순수한 불교이다. 가장 후기에 발전되어진 불교로서 말법시대의 중생들의 근기와 상응하여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설하신 법이라고 한다.
인도에서는 7세기부터 사오백년간 중관, 유식파와 대승불교학에 근간을 둔 밀교가 성행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에 나란다 대학을 비롯한 여섯 개의 유명한 불교대학들이 모두 밀교 수행과 불교학의 중심지로서 밀교가 황금기를 맞게 되는 주요 역할을 하였다. 이 즈음 티베트에서는 토속신앙인 본교를 누르고 불교를 국교화하려는 노력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어지고 있었다. 티송데우첸왕은 번역가 세명을 인도로 보내어 당시 밀교 수행의 성취자로서 많은 이적을 보이고 있었던 파드마삼바바를 청하여 밀교 수행을 받아들여 수 없이 많은 우여 곡절과 수난을 겪은 끝에 국교화 되었다.
티베트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히말라야 설산의 고요함과 평온함 속에서 빛나고 있던 티베트불교가 다시 한번 나라를 통채로 짓밟히는 커다란 고통을 겪고 전 세계로 흩어져 나오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시절 인연과 불보살님들의 큰 원력이 숨어있으리라. 티베트 불교의 수행차제와 구루들의 고요하고 평온한 텅 빈 지혜에 매료되어 어느 덧 육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자신을 돌아보면 여전히 정화되어지지 않은 모습에 실망하곤 하지만 이 글을 통해서 인연 있는 누군가가 히말라야에서 온 행복의 열쇠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끝으로 모든 중생들의 영원한 행복과 불법이 항상하기를 바라면서 이 지구상에 모든 선지식들이 장수하시고 정법의 법륜을 항상 굴리시기를 기원하면서 낮은 지식으로 쓴 글을 마무리한다.
자료: 설오스님의 티벳문화원 혜등정사 (http://cafe.daum.net/dharmalamp)
첫댓글 감사히잘읽었습니다많은공부가돼었습니다앞으로도몆번더읽어보겠습니다석가모니불석가모니불석가모니불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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