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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81
11월21일[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연중 제3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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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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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e2HkClcFYw?si=DwTFgBRhGekGGYAR
[서울대교구 나종진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사목국 노인사목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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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극한 겸손과 순명으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옥좌가 되신 성모님!>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이요 정점인 성체성사의 아름다움과 가치, 중요성과 참된 의미를 잘 소개하는 영성서적이 출간되었습니다. '성체성사의 일곱가지 비밀'(비니플린저, 성바오로, 구입: 02-944-8300, www.paolo.kr)입니다. 성체성사에 대한 정통 가톨릭 교회 교리는 물론 성체성사를 사랑했던 성인들의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다른 여러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다.(교회헌장, 사제생활 교령)
모든 미사에 성모 마리아께서 모든 천사와 천상 궁정 전체와 함께 현존하십니다. 미사때 마다 저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광휘가 빛나며 천사들과 성인들이 영광 속에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오상의 성 비오 신부)
한번은 거룩한 영성체 뒤에 이러한 말이 들렸다. "너는 우리의 거처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내 영혼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 거룩한 삼위께서 현존하심을 느꼈다.(성녀 파우스티나)
미사에 갈 때 우리는 천국에 가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상징이나 은유가 아니며, 우화나 비유도 아니다. 이것은 실제다. 우리는 미사에 갈 때 정말로 천국에 가는 것이다. 이는 음악의 수준이라든가 강론의 열정과는 상관없다. 우리가 참석하는 모든 미사에 해당하는 진실이다. 미사는, 정말로 각각의 모든 미사는 지상에 현존하는 천국이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을 맞는 우리에게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가르침은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영성체를 위해 제대 가까이 나아가며 펼치는 우리의 손에 대한 설명인데……, 묵상해 보니, 그 순간 표현되는 우리의 손 모양은 다름 아닌 성모님의 삶 그 자체입니다.
영성체 때 신자들은 두 손으로 옥좌를 만드는 동시에 십자가 형태를 만들어야 합니다. 너무도 곱고 너무도 심오한 이 상징적 행동이야말로 그분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의 두 손이 십자가를 형성하고, 이 십자가는 옥좌가 되어 왕께서 그 위에 앉습니다. 그러므로 펼쳐서 내민 손은 한 사람이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방식의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을 향해 두 손을 펼쳐 보이면 그 두 손은 이 세상에서 그분 현존의 도구가 되고 그분 자비의 옥좌가 됩니다.
주님께 온전히 봉헌되신 성모님의 한평생은 마치 영성체 순간 우리가 펼친 손과도 같았습니다. 지극한 겸손과 순명의 덕으로 무장한 성모님의 일생은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 그리스도의 옥좌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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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5kWhIlQt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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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의 봉헌은 새장의 문을 열어주는 것>
오늘은 성모님께서 성전에 봉헌된 날입니다. 전통에 따르면 성모님은 세 살 때 요아킴과 안나에 의해 성전에 봉헌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16세 정도로 추정되는 나이에 결혼하기 전까지 성전에서 살았습니다. 책 <하느님이시요,사람이신,그리스도의 시> 에 의하면 당시 메시아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예언을 바탕으로 다윗의 후손 여인들을 성전에서 교육하며 키웠다고 합니다. 이때 가장 예쁠 나이의 귀여운 딸을 성전에 봉헌해야 하는 늙은 요아킴과 안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팔을 한쪽 잘라내는 것보다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유대인들의 전통은 아이들을 나의 것이 아닌 하느님 것으로 돌려드림으로써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락해야만 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태어나고 길러져서 부모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은혜에 보답하려 하기에 부모가 놓아주지 않으면 새장에 갇힌 새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새장에서는 나는 법을 배울 수 없고 나는 법을 배울 수 없다면 큰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괴물 대신 쓰레기로 2층까지 꽉 찬 트레시 홈’이란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한 이층집이 온갖 쓰레기로 덮여 있는 것입니다. 주인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막내아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자 아들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모으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병원에 실려 가면서도 꼭 필요한 것들은 치우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부모는 착하지만,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아이를 긍정하면서 본인들도 병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저희 본당 이번 주 주일 교중 미사에서 아이들의 첫영성체와 견진성사를 동시에 진행합니다. 이때 특별 순서로 부모들이 자녀들을 제단에 봉헌하고 ‘요게벳의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요게벳은 모세의 어머니입니다. 누구든 이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수많은 시련을 겪어야 합니다. 요게벳은 어쩔 수 없이 모세를 바구니에 넣어 나일강으로 떠내려 보냈습니다. 이것이 봉헌입니다. 바구니는 악어에게 먹힐 수도 있고 지나가는 배에 깔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라오 공주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자라며 더 넓은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참 소명을 깨닫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하는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만약 요게벳이 아이를 자기 품에만 안고 있으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하느님께도, 모세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게벳의 노래 가사를 살펴봅시다. “작은 갈대 상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네.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흘러. 동그란 눈으로 엄마를 보고 있는 아이와 입을 맞추고, 상자를 덮고 강가에 띄우며 간절히 기도했겠지. 정처 없이 강물에 흔들흔들, 흘러 가는 그 상자를 보며, 눈을 감아도 보이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겠지.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느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를 이끄시는 주, 하느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흘러.”
만약 이태석 신부님을 어머니가 말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태석 신부가 지금까지 쌓아 주님께 가져간 보화를 얻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는 이태석 신부를 진정으로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에서도 상을 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에게 “너는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자격이 있다!” 여야지, “우리가 있으니 우리 품 안에 있으면 안전해!”여서는 안 됩니다. 이는 자녀를 새 장 속의 새처럼 자신들의 크기 안에 규정하는 일이지, 절대 자녀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이 세상이 아닌 천국에 살 수 있다는 자존감을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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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지난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에 부르클린 성당 공동체에서 가을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소풍을 가기 전에 ‘일기예보’에 대한 걱정이 있었습니다. 1주일 전부터 ‘비’ 소식이 있었습니다. 10월 31일 하루 전에도 ‘비’에 대한 예보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에 ‘미사’를 하기로 했는데 그것도 걱정이고, 소풍 날 비가 오면 그 또한 걱정이었습니다. 심지어 당일 아침에도 비가 조금 내렸습니다. 걱정을 가득 안고 있는데 교우들은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성당으로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의 걱정을 아셨는지 출발하면서 비는 그쳤고, 목적지에 도착하니 구름 속에 밝은 태양이 있었습니다. 일기예보와는 달리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였고, 준비했던 도시락을 맛나게 먹었습니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호숫가를 걸었고, 고구마와 옥수수를 구워서 간식으로 먹었습니다. 저도 비가 내리지 않도록 기도했지만 많은 분들이 간절함을 담아 기도했다고 합니다. 소풍을 주관했던 ‘성모회’는 임원들 모두가 비가 내리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합니다. 돌아보니 몇 번의 야외행사가 있었는데 비는 한 번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으로 맺어지는 가족의 ‘틀’을 과감하게 무너트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이라는 ‘틀’도 과감하게 무너트리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따라서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면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신앙 안에서 어머니들의 삶을 돌아봅니다.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의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남편 황사영은 순교하였고, 정난주 마리아는 2살 된 아들과 제주도로 유배를 갔습니다. 정난주 마리아는 관비가 되어서 유배를 갔기 때문에 2살 아들 황경한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제주도 최초의 신앙인이었던 정난주 마리아는 그 모든 슬픔을 가슴에 담고,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최방제 프란치스코 신학생의 어머니 황 안나의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함께 유학을 갔던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는 사제가 되어서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아들 최방제 프란치스코는 먼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식을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컷을 것입니다. 다른 두 아들까지도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던 황 안나는 오직 충실한 신앙으로 모든 것을 참아냈다고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수호천사’입니다. 그분들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형제와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성모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성모님께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영원하신 성부의 아드님을 잉태하신 동정 마리아는 복되시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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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2,46-50: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오늘 축일은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세워진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이 날,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충만히 내리신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이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당신을 바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가 세 살 되던 해에 성전에 봉헌하였는데, 세 살 된 마리아가 성전으로 올라갈 때, 계단에는 성모님의 발자국마다 장미가 피어났다고 한다.
오늘 복음에서 악마는 교활하게, 예수님의 육에 따른 친척들을 등장시킨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그 친척들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절). 이 말은 인간에게서 태어난 이가 하느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며,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늘에서 왔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절) 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49절) 하신다. 그분은 말씀을 따르는 이들을 가리키신다. 말씀을 실천하는 관계로 당신과 맺어진 이들에게 가족관계에 따른 모든 명칭을 붙인다.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며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신앙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바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분의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주님을 낳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이웃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사람이 어머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셨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육신이시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진리이시며,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이시다. 그분의 어머니이신 것은 그 진리를, 말씀을 실천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말씀을 실천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리아를 닮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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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대한 신심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에 대한 단서를 발견합니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실 때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방문합니다. 고대 근동 지방과 성경 전통에서 “형제”라는 말은 한 어머니의 자식들뿐 아니라 가까운 친족까지 포괄합니다.
이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라고 서술하는데, 직역하면 ‘그러고서는 당신의 제자들 위로 당신의 손을 뻗으시며 또 이르셨다.’가 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과 말씀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이는 제자 공동체가 스승 예수님의 새로운 가정 공동체라는 신학적 의미로 풀이됩니다. 이 구절에서 ‘하느님’ 대신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제자 공동체가 지닌 가정으로서의 새로운 신원과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혈육으로 이루어진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만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이 구성된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포함한 친족에게 면박을 주시기보다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사명을 더욱 강조하시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이며 그분의 가정 공동체에 속합니다. 이 공동체의 본질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며, 이것이 곧 존재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그 뜻을 삶에서 실천하도록 초대받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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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참 가족>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0-21)
예수님의 친척들이 들었다는 ‘소문’은 율법학자들이 퍼뜨린 소문일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마르 3,22)
여기서 ‘미쳤다.’라는 말은, ‘제 정신이 아니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마귀 들렸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자 성모님을 모시고 다시 왔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완전히 일치되어서 사신 분이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과 예수님을 잘 알고 계셨고, 그래서 아마도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직접 본 다음에,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들을 직접 들은 다음에 잘 판단하라고 친척들을 타이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안 믿는 형제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2-5)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는 말씀과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는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당신을 믿지 않는 형제들(친척들)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는 질문은, “어떻게 살아야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는가?”, 즉 “어떻게 사는 사람이 구원받는가?”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사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은 ‘같은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일까? ‘하느님의 뜻’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마태 18,14; 요한 3,17) 그래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그 구원을 얻기를 희망하고,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구원받게 되고,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됩니다. 믿지 않고, 희망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서 허무하게 끝나게 됩니다.>
‘아버지의 뜻’이라는 말에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뜻은(바람은), 아들들이 모두 아버지의 집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면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루카 15,32) 그런데 ‘작은아들’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뜻을 외면하고, 방종한 생활을 하기를 원해서 먼 고장으로 떠났습니다.(루카 15,13)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와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석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실행하기 시작한 일입니다.
‘큰아들’의 경우에는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성실하게 일하긴 했지만, 그는 자신이 종처럼 노동만 한다고 생각해서 기쁨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루카 15,29) 그것은 겉으로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 것이어서, 제대로 실행한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큰아들은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했습니다.(루카 15,28)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른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나에게’ 바라시는 것은, ‘내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고 내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는 것이고, 하느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일입니다. 사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 생활이 바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생활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생활입니다. 그런 나를(우리를) 보시면서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때, 나는(우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더욱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바로 그 기쁨이 곧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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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모님께서 자신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S. Maria Nuova)의 봉헌일(543년)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날 동방과 서방의 교회는 함께, 원죄 없으신 잉태의 순간부터 성령으로 가득 차셨던 성모님께서, 어린 시절에도 성령의 영감으로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했던 것을 기념합니다. 그래서 또한 이 축일은 동서방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도 매우 뜻깊은 축제입니다.
성모님의 어린 시절과 오늘 기념하는 봉헌의 사실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많은 전승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부모님이 이미 봉헌한 약속에 따라, 세 살 때 다른 소녀들과 함께 손에 등불을 들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의 안내에 따라 성전으로 인도됩니다. 마리아는 아직 어렸지만, 성전의 열다섯 층계를 올라갔고, 다른 소녀들과 함께 앉지 않고, 대사제들이 일 년에 한 번 자리하는 지성소에 앉았다고 교회의 전승은 알려 줍니다.
마리아의 봉헌은 실제로는 훨씬 더 겸손하면서도 영광스러웠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친 이 봉헌을 통하여, 마리아는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특히 마음을,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려고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 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다.”라는 말씀을 새겼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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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행동을 하십니다. 모처럼 어머니와 친척 형제들이 찾아왔는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신 다음,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과 친척들을 무시하려는 의도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요. 혈연관계를 부인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혈연보다도 더 중요한,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주님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우리는 모두 혈연만큼 강한, 신앙으로 굳게 맺어진 새로운 형제자매라 하겠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가 저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실천하려면 서로 도와주고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아울러 오늘 묵상하고 싶은 점은, 세례를 받았다는 자체로 하느님 나라가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실천이 따르지 않은 채, 그저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데 그친다면, 주님의 참된 자녀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신앙으로 맺어진 새로운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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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개신교 신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교회의 전통을 받아들여 복음의 순수함을 잃었다고 비난하곤 합니다. 특히 성모님을 공경하는 전통은 오직 믿음과 은총, 성경만을 강조해 온 한국 개신교계가 우리를 가장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복음에 등장하는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란 표현에서 성모님의 평생 동정을 의심하거나, 아들을 만나러 온 어머니와 가족을 박대하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고 반문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토대로 성모님에 대한 우리의 공경심을 비하하기도 합니다.
가톨릭 신앙도 성경을 신앙의 최고 규범으로 삼습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이 성령의 감도를 받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칩니다. 누구나 성령을 받아 성경의 말씀을 삶에서 체험할 수는 있지만, 성경의 유권적 해석에 관해서만큼은 교도권, 곧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의 가르침에 맡겨져 있다고 가톨릭 교회는 가르칩니다.
그것은 교회의 권력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사도전승의 참된 의미를 지켜 가기 위함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형제들은 마리아의 다른 자식이 아닌 ‘친척들’이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미 사도들과 함께 사시며 오순절 성령 강림 때 교회가 세상에 선포되는 순간부터 언제나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성모님께서 공경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그분만큼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간직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분이 역사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육을 취하신 말씀을 잉태하셨고, 그분의 믿음의 응답을 통하여 말씀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교리적 논쟁을 떠나, 예수님의 성심과 결합되어 십자가의 길을 평생 함께 걸어가신 성모님께서는 참으로 위대하고 공경받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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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잘났건 못났건, 경건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을 수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죄인들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고 병자들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하셨습니다.
악령을 쫓아내시고 그야말로 파격적인 행동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예수님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은‘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잡으려 나서기도 하였습니다.(마르 3,21)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고 반문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가족은 더 이상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에 기반을 둡니다.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 학연, 지연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그분의 참다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지닌 복된 분으로서 사셨습니다.
그 믿음에 흔들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속하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서 행복하신 분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지킨 분으로 참 가족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성모님보다 더 잘 실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예수님의 잉태를 받아들였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이집트로 피난 생활을 하셨으며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아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했고 제자들과 더불어 다락방에서 기도에 전념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과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행하신 분이십니다. 어느 누가 그분의 모범과 표양에 앞설 수 있겠습니까?
비록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따라서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들보다 영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먼저입니다.
하느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 4,24)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 예수님의 참가족이 됩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어 가족이기도 하지만, 믿음에 따르는 행실로 형성되는 새 가족의 품위를 지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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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현재 인간의 종은 ‘호모 사피엔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생존 시기가 겹치는 다른 종도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바로 ‘네안데르탈인’입니다. 이들은 신체적으로 ‘호모 사피엔스’보다 아주 우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뇌 용량이 1.8리터로 1.4리터에 불과했던 ‘호모 사피엔스’보다 훨씬 컸습니다. 또한 매머드나 고래 등을 사냥할 수 있을 정도로 몸집도 컸지요. 이런 외적 조선을 보면, 멸종해야 할 종은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인 현 인류 종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멸종의 주인공이 바뀌었을까요?
‘호모 사피엔스’ 종이 남은 것은 ‘다정한 종’이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유력합니다. ‘다정함’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했고, 모든 어려움과 시련을 다정함으로 함께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우월한 ‘네안데르탈인’은 함께 하는 다정함이 없어서 멸종했다는 것입니다. 개개인으로는 뛰어나도 함께하지 못한다면 살아날 수 없음을 인류의 역사를 통해 알게 됩니다.
요즘의 사회를 보면, 현 인류 종인 ‘호모 사피엔스’의 고유 특징인 ‘다정함’이 점차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어갑니다. 함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함께하는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는 ‘다정함’을 표현하는 것을 왜 어려워할까요?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밝은 미소를 짓는 것, 긍정적이고 희망의 말을 전하는 것, 남에 대한 배려가 담긴 행동을 하는 것 등은 일상 안에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 종의 고유한 특성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를 힘들게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인간의 고유 특성을 잃어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멸종의 위기를 겪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은총을 가득히 채워주신 그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께서 아기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시는 것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바로 아기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셨다는 것은 아기 때부터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모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아기 예수님을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받아들이지요. 그 어떤 인간보다도 커다란 ‘다정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정함이 하느님의 뜻도 함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다정함’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작은 호의를 다정함에 담아서 서로 주고받아야 하겠습니다. 삶의 품격을 지키면서 남은 생을 멋지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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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대하듯이>
마태오 12,46-50 (예수님의 참가족)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 대하듯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12,50)
하느님 모신 이는
하느님 모신 이를
하느님 대하듯이
모시지요
하느님 따른 이는
하느님 따른 이를
하느님 대하듯이
따르지요
하느님 닮은 이는
하느님 닮은 이를
하느님 대하듯이
닮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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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봉헌하여 은총을 얻는>
오늘은 성모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스스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날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다신 자신을 스스로 봉헌하신 것을 우리가 그리 대단하게 생각할 것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드님을 봉헌하신 분이 당신을 봉헌하신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성모님 성가 가운데 ‘아드님이 가신 길 함께 걸으셨네’라는 성가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가사처럼 성모님이 아드님과 함께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함께하셨지만 오늘 우리가 특별히 기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을 위해 봉헌하신 것보다 우리를 위해 봉헌하신 점입니다.
아들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시는 것은 성모님이 아니어도 하는, 다시 말해서 다른 엄마들도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다른 엄마와 다른 것은 인류를 위해 봉헌하신 것이고, 그것은 아들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신 것과 함께하신 거였지요.
그렇습니다. 아들 예수님의 봉헌은, 아버지 하느님께는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뚝뚝 흘리는 순종의 봉헌이고 다른 한편 우리 인간을 위해서는 십자가 위에서 심장이 찔리어 피와 물을 쏟기까지 당신을 전부 내어 주시는 희생 제사의 봉헌입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봉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전해졌을 때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지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봉헌이었고,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심장이 찔리신 것을 아들을 성전에서 봉헌하실 때 당신 심장도 미리 꿰 찔리시며 아들을 인류를 위해 내어 주신 봉헌이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아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전부 내어 주신 것이고, 어머니 마리아는 당신 아들을 몽땅 우리 인간에게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오늘 미사의 봉헌기도는 이렇게 축원합니다. “주님, 주님 백성의 기도와 희생제물을 받으시고 성자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봉헌하여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시고, 청원하여 응답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는 오늘 복음 말씀에 근거하여 이렇게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들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성모님이 자신을 봉헌하여 아드님을 잉태하는 어머니가 되셨다면 우리는 자신을 봉헌하여 말씀을 잉태하는 어머니가 되라는 권고인데, 이렇게 봉헌하면 은총을 받지 못하는 이가 없을 거라고 오늘 봉헌송은 노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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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성모님 예찬-
요즘 만추의 새벽 밤하늘 한복판에 맑고 밝게 빛나는 북두칠성을 바라볼 때 마다 마음이 상쾌합니다. 우리 영혼 역시 초롱초롱 빛나는 만추의 별들처럼 깨어 기도하며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의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40,9)
시편 말씀대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참기쁨이요 참행복입니다. 우리 마음 깊이에 하느님의 법이, 가르침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의 11월19일 주일 베드로 광장에서 삼종기도후 강론은 성모님의 전구로 끝맺습니다. 이날뿐 아니라 삼종기도후 강론은 언제나 성모님의 전구로 끝맺습니다. 성모님의 전구가 으뜸이기 때문입니다.
“복되신 마리아께 무서움을 극복하도록-결코 하느님을 무서워하지 않고! 경외하도록-,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도록 도움을 청합시다.”
강론 후 주일미사처럼 세계 곳곳에서 시급한 도움이 필요한 곳들을 언급하며 청원기도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끝에는 다음의 말마디가 꼭 뒤따릅니다. 아마도 매번 반복되는 끝맺음의 내용일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복된 주일이 되기를 빕니다. 꼭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잊지 않도록, 점심 잘 드시고 목적지에 잘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성모님의 전구와 이웃의 기도를 청하는 교황님입니다. 아마도 교황님처럼 기도의 도움을 많이 받는 분도 없을 것입니다. 저 또한 기상후 집무실에 들어서면 만세육창시 꼭 “성모님 만세!” 기도합니다. 육신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도 내 영신의 어머니신 성모님은 언제나 함께 계셔서 전구하시며 돌보신다는 믿음에 산책시 자주 “어머니 은혜”대신 “성모님 은혜”로 바꿔 기도 노래로 바치기도 합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 것 같애.”
살아 있는, 죽는 그 날까지 여전히 영적으로 우리를 여전히 낳으시고 기르시는 성모님 은혜임을 믿습니다. 이어지는 2절입니다.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 게 또 하나 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 것 같애.”
평생 공부가 사람되는 공부, 하느님의 사람되는 공부요 부단히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사람되라 이르시는 성모님을 묵상하면 힘이 납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예수님 마음이며 하느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 제13처에서의 주님의 시신을 품에 안으신 성모님 모습은 미칼렌젤로의 “피에타의 성모님”을 연상케 하며 늘 감동하게 됩니다. 여기 나오는 기도문도 참 좋습니다.
“구세주 예수님,
주님의 시신을 십자가에 내려 품에 안으신
성모님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성모님 품 안에서
효성스러운 자녀로 살다가
마침내 그 품 안에서 죽게 하소서.”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복음서에 언급되지 않고 2세기의 위경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내용인즉 성모 마리아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세 살된 아기 마리아를 하느님께 봉헌한 사실과 함께, 마리아께서 당신 자신을 스스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고,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봉헌의 삶으로 초대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봉헌과 더불어 우리의 봉헌된 삶을 깊이 묵상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런 성모님의 효성스러운 자녀로 살 때 참행복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성모 마리아의 봉헌을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543년 11월21일 축성하였다 전해 집니다. 동방에서 시작된 이 축일은 서방에도 전래되어 마침내 1585년 식스토 5세 교황이 축일을 전 교회의 축일로 재 제정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축일의 역사가 얼마나 깊은지요!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에서 “외경적인 요소는 차치하더라도, 탁월하고 모범적인 가치를 보이고 있는 이 축일은 특히 동방에서 기원하여 유서 깊은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마리아 공경, 8항) 가르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예수님 잉태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아드님의 시신을 직접 당신 품으로 안으실 때까지, 온갖 고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절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역시 미사를 드릴 때 마다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이 봉헌할 때마다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모님은 이런 분입니다. 이런 사실을 전제로 하여 오늘 복음에 접근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가르치고 계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주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다는 전갈을 들었을 때 주님의 반응입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 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주님은 즉시 반문하시고 참 답을 주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주님은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을 중심한 하느님의 참가족의 정체를 알려줍니다. 혈연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는,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을 중심한 하느님의 한가족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깨닫는 진리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참가족 중심에 예수님과 더불어 성모님이 계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데 성모님을 능가할분은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중에 으뜸가는 제자가 바로 어머니이자 제자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모전자전 예수님 역시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모님께로부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법을 평생 보고 배웠음이 분명합니다.
어머니는 가정 공동체의 중심입니다. 성모님처럼 신심 깊은 어머니들은 또 하나의 성모님들이요 이 어머니들을 통해 그대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을 배우는 자녀들입니다. 예수님 곁에서 늘 함께 계시며 전구하고 계시는 성모님은 바로 우리 믿음의 영원한 모범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 예수님의 참가족이 된 분들인 성모님을 비롯한 우리 하나하나가, 제1독서 즈카르야 예언자가 말하는 딸 시온입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딸 시온이 상징하는바 성모님이요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자발적으로 실행하는 모든 이들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시어 우리에게 온갖 필요한 은총을 주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모시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 예수님의 참가족, 한가족이 되어 성모님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생활하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루카1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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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마태12,49)
<참어머니!'>
오늘 복음(마태12,46-50)은 '예수님의 참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49-50)
어제 여러분들의 기도 덕분에 지리산 천왕봉을 잘 다녀왔습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설레이는 마음과 아름다움을 더해 주었지만, 날씨가 따뜻해서 등산을 힘들게 했답니다. 정상에서 바라본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그 아래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은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생태계의 주보 성인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그가 노래한 하느님의 피조물의 찬가인 태양의 찬가의 노랫말에도 나오는 것처럼, 프란치스코는 땅을 어머니로 찬미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피조물보다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더 잘 순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은 성령의 감도로 세 살 무렵에 요아킴과 안나 부모에 의해 하느님께 바쳐졌다고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낳아주신 하느님의 어머니요 주님의 어머니이시고, 또한 우리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은 '참어머니'이십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그분이 참어머니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충실하게 실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참어머니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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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4rKpnGhdPvg?si=SRZHD4firip2j9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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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마태 12, 49)
똑같은
일상이지만
봉헌의 마음은
다릅니다.
생활과 봉헌은
떼어놓을 수 없는
한 몸입니다.
우리 자신으로
시작되는
봉헌입니다.
하느님의
깊은 체험으로
이끄는 것이
우리 자신의
봉헌입니다.
열린 마음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바로
봉헌입니다.
봉헌은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활짝 열어줍니다.
타인들의
추켜줌과
깔봄에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며
어떤 심적인
그림자의 작용에도
냉철하게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봉헌의 삶입니다.
봉헌의 생활은
이와같이
외적인 것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놀음과
외적인 신앙에만
머물러 있는
껍데기 신앙에서
우리 자신이
나오는 것이
봉헌의 삶입니다.
이렇듯
가장 아름다운
말씀의 실행은
우리 자신을
기꺼이
하느님께
봉헌하는
봉헌의 여정을
우리가
성모님과 함께
기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기쁨의 봉헌은
오염된
우리 마음을
정화하여 줍니다.
밝은 빛으로
나가는 것이
봉헌입니다.
봉헌으로
삶에서
겪게 되는
시련과 역경
고통과 실패가
하느님의 선물이
됩니다.
삶이 선물이고
십자가가
은총인 것은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봉헌이 있기
때문입니다.
봉헌이 맑아지면
삶도 맑아집니다.
마음 쓰는 법이
봉헌입니다.
봉헌의 영성이
성모님의
영성입니다.
바깥만 보지 말고
마음을 먼저
보라고
봉헌의 삶이
있습니다.
봉헌은 십자가로
이어지고 부활로
꽃을 피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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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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