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한혜경 / 작가, 前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20-04-02
얼마 전에 40대 초반의 지인 A가 한참 하소연을 하고 갔다. 엄청 활달하고 명랑해서 내가 부러워하는 성격인데, 가끔 나를 ‘왕언니’로 모시는 척하면서 은근히 늙은이 취급하고 모임에서도 자기 또래하고만 어울리는 등 좀 얄미운 데가 있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와서는 땅이 꺼지게 한숨부터 쉬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40대가 아니에요. 나도 내가 생각했던 내가 아니고, 아무튼 사는 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달라요."
처음에는 요즘 시국이 시국인지라 우울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나도 이렇게 힘든데 40대의 현역들은 얼마나 더할까, 얼마나 혼란스럽고 복잡할까,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왜 그래? 인생이 뭐 다 그런 거 아냐?"
그런데, A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글쎄, 제 나이가 마흔하나도 아니고, 마흔둘도 아니고, 마흔넷이에요! 곧 오십이라고요!"
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 하나? ‘야, 지금 내 앞에서 농담하냐?’고 소리라도 치려는 찰나, 눈물까지 글썽이며 심각한 얼굴을 보니 이거야 원 웃을 수도 없다.
그런데 자세히 얘기를 들어보니 A가 나이 타령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녀 밑에서 일하고 있는 젊은 남자 직원들이 그녀를 자기들의 엄마랑 비교하는 듯한 표현을 했던 것이다. A는 나이에 비해서도 빨리 성공한, 실력도 있고 씩씩한 '알파걸'이지만, 속으로는 여리고 외로움도 많이 타는 '골드 미스'다. 그런데 그 남자 직원들이, 바빠서 남자 만나기도 힘든 그녀가 자기들을 ‘연애 가능한 연하남’으로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이다.
"어라, 꼭 우리 엄마처럼 말씀하시네?"
“팀장님 보면 우리 엄마 같아요.”
그들의 말에 충격을 받은 A는 자기가 나이 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너무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사실, 따져보니까 내 나이가 그들의 엄마 나이랑 별로 차이도 나지 않더라구요."
마흔넷의 나이에 너무 늙은 것 같다고 눈물까지 흘리는 A를 보고 있자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겉으로야 물론 "어머 정말 속상했겠다. 쯧쯧, 참 안타깝네." 라며 위로의 말을 잔뜩 해줬지만, 마음 한편으론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엄청난 위로를 받았고 안심도 되었다. 위로? 안심? 이상한 얘기지만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거봐, 40대 초반인데도 저렇게 늙었다고 속상해하잖아. 그러니 내가 힘든 건 당연한 거야. 그래. 요즘 내가 힘들고 우울해지는 건 나이 때문만은 아니라구.’
그런데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나이 드는 걸 싫어하면서도 꼭 나이를 올려서 말한다.
"내 나이가 낼모레면..."
50이 넘으면 60으로, 60이 넘으면 70으로, 참 반올림을 잘도 한다.
노인복지관 같은 데서 만난 어르신들도 그랬다. 나이를 물어보면 올려 말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나이는 일흔다섯인데도 "내 나이? 내일모레면 팔십이지." 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헷갈렸다. 70대지만 마음은 80대에 가 있다는 뜻인가? 나이 많은 게 뭐 좋다고 저렇게 올려 말하실까? 알쏭달쏭했다.
문제는 ‘내 나이가 낼모레면...’이라는 말 뒤에 뭔가 긍정적인 단어가 따라오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점이다.
"내 나이가 낼모레면 80인데, 피아노를 배우고 싶지 뭐예요. 그래서 요즘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답니다."
이렇게 귀엽게 말하는 70대를 만날 확률은 크지 않다.
그보다는 부정적인 뜻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뭔가를 시작하고 싶지만, 아니면 이제라도 좀 다르게 살고 싶지만, 너무 늦었다고 핑계를 댈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에이, 내 나이가 낼모레면 60인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내 나이가 낼모레면 70인데, 피아노를 처음 배운다고 하면 모두 비웃겠죠?"
이제 겨우 서른셋 밖에 안 된 제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묻기도 한다.
"제 나이가 낼모레면 마흔인데, 이제 공부해도 될까요? 자격증을 딸 수 있을까요?"
친구들 중에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꼭 한 명씩 있다. 유행에 민감하고 옷차림도 젊어서 겉으로는 50대처럼 보이는데, 누군가 모처럼 뭘 좀 같이 해보자고 생산적인 아이디어를 내면 꼭 이렇게 말해서 산통을 깨는 친구 말이다.
"아이고, 낼모레면 70인데, 무슨 책을 읽어? 눈도 안 보이는데... 에이, 그렇게 골치 아픈 거 하지 말고 그냥 영화나 보고 맛있는 거나 먹으러 다니자."
나이 들어서 좋은 점 하나는 지나온 나이의 의미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스물, 서른, 마흔이라는 나이가 어땠는지 정확히 기억한다. 쉰과 쉰 다섯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더 나이 들면 60대와 70대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지나온 나이는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다. 가끔은 그 나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즐기기도 한다. 10대들이 가득한 문방구에서 그 시절에 돈이 없어서 사지 못했던 문구류를 사보기도 하고, 스무 살쯤에 입고 싶었던 옷을 만져보기도 한다(다행히 사진 않는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한참 빠져있던 서른 무렵의 열정을 되새겨 볼 때도 있다.
그런데 어느 연령대부터는 어휴, 그 나이가 지나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전보다 훨씬 안정되고 행복해졌다고 착각했던 30대, 지옥과 천국을 오갔던 40대의 기억, 바쁘게 일했던 그만큼 내리막길이 고통스러웠던 50대의 기억이 그렇다.
특히 얼마 전에 서랍 속에 깊숙이 들어있던 과거 일기장과 모닝페이지를 정리하면서도 느낀 건데, 마흔 무렵부터 왜 그렇게 힘든 이야기가 많고, 노상 어떤 고비 앞에 서 있었는지, 걱정은 왜 그리 많이 했는지, 돈이나 인간관계에 관한 고민 외에도 맡은 일의 마감을 지킬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 염려 등등 온갖 걱정을 일기장에 쏟아놓으며 하느님께 기도하고 간청했었다. 하느님도 참 피곤하셨을 것이다.
지금은 그때의 나를 ‘토닥토닥’ 안아주고 싶다.
'아~그거? 지금은 괜찮아. 모든 게 많이 나아졌어.'
무엇보다 신기한 건 그 모든 마감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켰다는 사실이다. 그때 그렇게 속 썩였던 사람들도 이젠 모두 떠났다. 다만 한가지, 자신이 나이 들었다고 눈물까지 글썽이는 마흔넷의 지인처럼, 나도 40대 초반부터 '아, 이렇게 속절없이 늙어가는구나. 여기저기 아프고 쑤시고... ' 라며 의기소침했었는데(하하하, 가소로웠다), 그것만은 어쩔 수가 없구나, 그건 내 소관이 아니구나 싶다.
가끔 잘 나가던 때도 없었던 건 아니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난 너무나 뭘 몰랐고, 뭘 모른 채 기고만장했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20대 후반에 찍은 사진 속의 내가 잘 웃고 제일 행복해 보인다는 건 인생의 역설이다. 요즘엔 행복할 때도 얼굴은 불행해 보이니 너무 안타깝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너무나 불행했고/ 나는 너무나 안절부절/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라는 구절이 들어간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시를 보고 내 이야기 같아서 깜짝 놀랐다.
해서, 혹시 산신령 같은 분이 나타나서 나한테 젊은 나이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우선, 혹시 지금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아는 상태에서 젊은 나이로 돌아갈 수 있는지 공손하게 여쭤보겠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뭘 모르던 그 시절로 돌아가서 또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네요. 그냥 지금의 제 나이에서 최선을 다하려고요."
어느 나이든 '내 나이가 낼모레면..' 이라고 나이를 올리면서까지 한숨 쉴 필요는 없다. 마흔넷은 마흔넷일 뿐, 쉰도 아니고, 예순은 더더욱 아니다. 미리 앞날을 살 필요는 없다. 미리 앞날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지금의 내 욕망을 돌보며, 현재의 하루하루를 사는 게 더 중요하다.
그날, 난 A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 생각해보니까 마흔넷은 반짝이는 나이야."
내 말에 A는 눈까지 반짝거렸다.
"정말요?"
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가끔(때로는 심하게) 흔들려서 그렇지 반짝이는 나이인 건 사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