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차례의 꽃샘추위가 지나갔고 아직도 약간의 추위가 도시의 곳곳을 배회하고 있었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꽃샘추위는 사람을 주눅들게 하였다.
더욱이나 산 동네의 허름한 집에서 겨울나기를 힘겹게 지냈던 서민들에게 있어서 봄은 반가운 희망을 던져 준다.그러나 그 봄이 어떤 이에게 있어서 잔인하게 다가 올때도 있다.
80년 3월 이었다. 민우식은 1년여의 칩거에서 깨어나 실로 오랜만에 교복을 입고 거울 앞에서 한참이나 서성거리고 있었다. 꾹 눌러선 창달린 모자는 왠지 낯설었다.
실로 일년만에 입어 보는 교복 이었다.그가 고향에 있는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선발 되었지만 도시를 동경하다 마침 둘째형이 있는 부산으로 작년 가을에 왔었다.
철새처럼 이곳저곳을 전전 해야만 하는 직업군인 이었던 그의 큰 형이 부산에 근무 하다 강원도로 전근을 가면서 민우식을 부산으로 전입시켜 놓고 둘째형에게 부탁을 하였던 모양 이었다. 시골에 있는 학교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우식의 고집을 결국 꺾지 못하고 부산에 거주 하여야만 입학이 허가되는 인문계고등학교에 대한 교육청의 규정에 맞춰 전입을 시켜었다. 우식이도 이젠 제법 철이 들었고 중학교 시절엔 공부를 제법 잘 했고 입선경력이 있을만큼 문예창작에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에 다니던 당시 그의 바로 위의 형은 마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아버지 없는 집안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할아버지는 우식이 중학교 2학년이 되던해에 세상을 하직 하였다. 고향에서 농사일을 거들어야 하는 집안형편에 따른 묵시적 연유에 의해 그는 고향에 소재하고 있는 고등학교에 원서를 내었고 장학생에 선발되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입학을 포기했다.
그래서 그는 일년을 집에서 농사를 거들다 벼베기를 마친 작년 늦가을에 부산에 와서 생활하다 연합고사에 합격하여 오늘 입학하는 것 이었다.그가 다녔던 K 고등학교는 중학교와는 사뭇 달랐다.우선 분위기 마저 냉랭 하였다. 시골학교에 다닐때는 공부에 관심있는 사람과 무관심한 사람이 뒤섞여 그나마 학습분위기가 약간은 허트러저 있었지만 그곳은 모든 학생들이 눈에 빛을내며 생생한 생기를 쏟아놓고 있었다. 입학식을 마친 뒤 각자의 반이 정해져 간단한 담임선생의 소개가 끝난 뒤 민우식은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정이 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우선 그들의 피부 부터가 촌과는 달랐다. 차림새와 생김새 까지 한결같이 귀공자 풍이었고 그나마 눈빛 마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얼른 가방을 메고 집으로
향했다. 길가에서는 막 개나리 잎망울이 파릇파릇 꽃망울을 내밀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둘째 형수가 애기 젖병을 물리고 이제 막 도착한 그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형은 아직 공장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그는 인사도 하지않고 그만의 공간인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1평 남짓한 다락방에선 매캐한 곰팡이 냄새가 났고 곳곳에 그의 옷이 널부러져 있었다.그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걸었다. 2년전에 둘째형과 결혼한 그의 형수와 민우식은 벌써 사이가 많이 소원 해진 터였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공장에 다니던 형의 무능력도 한 몫 거들었다.
(26)
민우식은 오늘 있었던 일을 곰곰이 되짚어 보고 있었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락방에서 기거해야 하는 그의 처지가 한심하여 지기도 하였다. 괜히 부산으로 올라 왔다는 후회가 막심하게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락방에서 생활한 것은 아니었다. 맨 처음 부산에 올라왔을 때 그래도 제법 큰 방이 두 개가 되는 전세방을 큰 형이 박봉에서 전세값을 지불하고서 얻어 주었지만 둘째형이 전세금을 절반이나 소진하고 겨우 방 한칸 짜리 방을 구해 이사를 왔던 것이다. 철공소에 다니다 군 제대후 촌에서 농사를 거들던 그의 둘째형은 장가를 가기위해 부산에 근무하고 있던 그의 형집에서 기거하면서 공장에 다니다 결혼을 하였고 학벌이 낮아 생활은 그나마 근근이 밥 치레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형편에 큰 형마저 강원도로 전근해 버리자 그나마 생활이 더욱 어려워져 있었다. 그 와중에 동생마저 학교에 다닌다고 집에 와 있는 것이었다. 당연히 동생과의 갈등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나마 가난한 형편에 우애마저 깃들 공간이 없었다.
다락방에 누워 공상을 떨고 있던 그를 형이 불러 내렸다. 형이 막 공장에서 돌아왔던 모양 이었다.
" 우식아. 밥먹자"
" 형님. 다녀 오셨습니까?"
그들은 허술하게 차려진 밥상앞에 앉아 밥을 먹었다. 그 옆에선 형수가 우는 애기를 달래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그날 오전에 학교 입학식도 있었지만 그일에 대한 형은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날 오전에 입학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그들이 교복을 입고 차례로 지어 줄을 서 있는 뒷편에는 많은 학부형이 운집해 있었다. 교장이 막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 친애하는 입학생 여러분. 정말 여러분을 환영 합니다."
연설은 한참이나 계속 되었고 지루한 삼심여분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식은 그 지루한 연설이 빨리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연설이 끝나자 그때까지 연설을 지켜보고 있던 학부형들이 우르르 몰려와 카메라 샤트를 누르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시골에서 학교를 다닐때는 거의 볼 수 없는 진풍경 이었다.
우식은 그들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아직까지 학교의 행사나 아니라면 다른 이유로서든 그의 부모님이 학교에 온적은 몇번인가 되지 않았다. 무료하기만 한 농촌생활에 있어서 학교의 가을운동회는 온 마을의 축제였고 간혹 어머니와 우식이 발에다 줄을 매달고 달리는 시합에 같이 급우들과 겨룬적이 있었고 달리기 시합을 할 때 시합라인 밖 군중속에서 '우식이 잘한다. 우식이 잘한다' 하고 응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몇번
달리는 와중에서도 들은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졸업식때 시골에서는 몇몇 부유한 학부모만 참석 했었다. 그런데 이곳 도시의 학교풍습은 사뭇 달랐다. 우식의 가슴속에서는 벌써 소외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입학후 몇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제 점심시간후 교정을 둘러보니 벌써 개나리가 꽃망울 을 드러낸 곳도 보였다.
(27)
5교시가 끝나고 교실에서 급우들과 잡담을 하고 있던 때 였다.
"야. 제는 재수생 출신에다 시골에서 올라 왔단다."
무리중 누군가가 옆에 있는 급우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우식에게도 들려왔다. 우식은 못 들은척 잠자코 있었다. 다음시간은 지루한 수학 시간이었다. 수학선생이 문제 몇 문제를 흑판에다 적은 뒤 풀수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하였다. 우식이 문제를 쳐다보니한 문제도 자신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급우 무리중에서는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었지만 도시 학생들은 중학교 졸업후 입학하기전 과외수업을 하여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을 마치고 오는 학생이 부지기수 였다. 특히 영어,수학은 필수였고 국어도 상당한 수준에 있는 학생이 여럿 있었다. 민우식이 다니던 시골학교에서 과외수업을 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 했었다. 간혹 상급생인 형이나 누나가 동생을 가르치는 것은 많이 보아 왔지만.
매주 월요일만 되면 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우식의 성적은 중 상위권을 맴 돌았다.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그의 성적은 상위권 이었는데 지금은 자신감 마저도 상실했다. 게다가 젊은 신혼부부가 살고 있는 신혼부부의 방위로 나 있는 나무계단을 기어올라가 있는 그의 다락방
에선 답답하고 공부도 되지 않았다. 시골에서 학교에 다녔던 그로서는 동네 곳곳에 있는 독서실의 존재 마저도 알 수 없었다. 점점 그는 가깝한 현실이 그를 짓누르고 있음을 깨달았다.도시의 학교 특히 인문교교는 아침 8시까지 도착하여 자습에 들어가야 했다.
안 그래도 그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그의 형수는 밥도 해주지 않았다. 민우식은 손수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다녔다. 얼마전 점심시간에 급우들의 도시락을 옆에서 곁눈질 하고선 깜짝 놀랐었다.그는 소시지에다 계란을 발라 만든 맛있는 음식도 그곳에서 처음으로 존재하는 것을 알았다. 거기다 그들의 밥위에는 한결같이 익은 계란이 구미를 당기게 얹혀져 있었다. 시골에서는 거의 다 김치 일색이었다. 물론 더 나은 반찬을 가져 가기도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그래서 그는 그들을 흉내내어 계란을 밥위에다 얹고서 학교로 막 나가면서 방을 힐끔 쳐다보았지만 형과 형수는 아직 자고 있었다.
집을 나와보니 아직도 찬 바람이 차갑게 얼굴에 묻히는 것을 느끼며 그는 학교를 향해 가고 있었다. 갑자기 소외감이 물밀 듯이 그를 감싸는걸 느꼈다.
그날 점심 무렵 이었다. 급우중 누군가의 입에서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경수와 찬우는 국어선생한테 과외수업을 받는단다. 우리도 한번 해 보지 않을래"
" 그러면 문제라도 입수 될 수 있을까?"
" 그정도는 아니라도 추정될 수 있는 문제정도는 입수되지 않을까?"
그러면서 그들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금액은 얼마냐? 야 그 정도면 비싼데.
나는 차라리 학원에 다닐란다. 등등의 그런 소리가 우식의 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우식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금액 이었다. 지금 그로서는 용돈은 고사하고 공납금 마저도 겨우 어머니가 식당에 다니면서 보내오고 있다는데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금액 이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누구는 영어,수학 과외선생으로 의과대학생을 모시고 있다는 뜬금없는 소리도 전해졌다. 한결같이 우식으로서는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먼나라의 얘기였다. 그런데 선생이 과외선생 노릇을 한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 들여졌다. 민우식이 다니던 학교는 사립학교 였다.
(28)
선생과 학생이 공생관계가 될 수 있나? 몇번이나 반문하여 보았다.
인간사회에서도 공생관계는 존재하고 있다. 사채업자와 폭력배, 도박꾼과 도박장소제공자,술집사장과 삐끼등.
동물사회에서도 악어와 악어새, 개미와 진딧물 등.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너무 사정이 달랐다. 위의 공생관계들은 적어도 남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는다. 설사 주더라도 피해의 해악은 극히 미미하다. 우식은 참으로 실망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소식 이었다.
그렇게 몇일을 고민하면서 차츰 학교생활에 적응하여 갔다. 이제는 교정앞 언덕배기에 있는 개나리가 활짝 만개하여 완연한 봄 소식을 알려주는 듯 했다. 일요일 이었다. 그는 점심시간이 지난후 친구 김경우의 집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김경우는 그와 같이 시골출신에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년을 쉬다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사연으로 서로 죽이 잘 맞았고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는 친구였다. 거기다가 그도 형집에 거주하고 있었다. 오후 1시 무렵에 약속한 장소에 가보니 경우도 막 그곳에 도착
하고 있었다. 경우는 성경책을 끼고 있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성경을 끼고 지나가는 일단의 신도들의 무리들도 보였다.
" 벌써 도착했구나."
경우가 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 너 교회 다니는 구나."
우식이 의외 라는 듯 말했다.
" 그래. 나 시골에 있을 때 1년정도 다녔고 입학후부터 줄곧 다니고 있지. 그리고 이곳에 이렇게 있을것이 아니라 우리집에 놀러가자"
경우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 그러자.경우야."
우식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경우는 걸어서 오분쯤 거리에 있는곳에 말끔하게 손질된 정원이 갖춰진 양옥집으로 우식을 안내했다.
" 야.너거집 잘 사는구나."
우식이 부러운 듯 말했다.
"우리집은 아니고 형님집 이지."
그들은 현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경우의 형과 형수가 T.V를 보다가 그들을 반겼다.
"어서들 오너라."
경우의 형이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형수도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이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자 형수가 과일을 깎아가지고 왔다.
" 도련님 드세요. 그리고 친구분도 참 반가와요. 인상이 참 좋네요. 자주놀러 오세요."
형수는 행복한 모습을 지어 보였다. 순간 민우식은 갈등에 휩싸였다. 그가 살고 있는 형집의 풍경도 떠올라 자꾸만 가슴속으로 열등감이 몰려왔다. 우식은 과일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서 시간을 보내다 경우의 방으로 갔다. 잘 정돈된 책상과 넓은방이 아늑하게 그들을 반기고
(29)
있었다. 순간 우식의 얼굴에서 근심의 빛이 잠시 머물다 갔다. 그의 앉은뱅이 책상의 모습이 떠올라 우식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 졌다.
" 너. 어디 몸이 안좋니?"
경우가 걱정섞인 얼굴로 물어왔다.
" 아니. 그게 아니고. 그냥 좀 그래. 조금 있으면 괜찮아 질꺼야."
우식은 약간 찌푸린 얼굴로 대답했다.
"근데. 경우야. 저기......,"
우식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뭔데? 말해봐."
"아니. 그냥 . 아니야."
" 녀석. 싱겁긴"
그러면서도 경우는 몹씨 궁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저녁이 오고 있었다. 하늘은 온통 암홍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락방에 있는 조그만 창문틈으로 밖을보니 서산으로 노을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우식은 자신의 처지가 창살안에 갇힌 들짐승과 같이 느껴졌다. '들짐승은 갇혀 있으면 안되는데' 우식의 입에서 말이 새어 나왔다. 온 몸으로 공허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고독도 우수도 갖은 상처입은
마음도 온통 자신을 짓누르고 있음을 문득 깨닫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불공평으로 가득차 있었다. 자신의 처지보다 못한 것이 이 세상에 그 어느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문득 느끼고 있었다. 이런저런 슬픔으로 저녁도 먹는둥 마는둥하고 공부도 하지 못하고 그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주초고사를 치렀다.이제는 아는 문제도 거의 없어
보였고 자신감도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그날 점심후 쉬는 시간 이었다. 멀리 해운대의 바다가 건물 옆 모퉁이로 살짜기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무슨 호텔을 짓고 있는지 앙상한 건물이 속을 드러낸 채 몸짓을 불려가고 있었다.
"경우야.저......,"
우식이 잠시 머뭇 거리며 말을 꺼냈다.
"뭐."
경우가 몹씨 궁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 우리 어디 놀러 가지 않을래?"
우식이 약간 자신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
경우가 얼른 이해를 못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 내말은 그게 아니고.저기.나 사실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그래서 나 어딘가 가고
싶어."
두식은 힘없이 말했다.
경우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무슨말을 할지 한참 생각하는 모습 이었다. 문득 경우가
해답을 얻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다음주 일요일에 너 시간 있지?"
(30)
" 지금으로선 특별한 일은 없는데"
우식이 힘없이 말했다.
몇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동안 우식과 형은 사소한 일을 놓고서 싸우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다. 그들은 힘든 숨바꼭질을 하듯 밀고당기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식은 이제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었고 그럴 때 마다 그의 형은 손찌검이라도 하려는 듯 손을들다 내려 놓았다.
경우와 약속한 일요일 이었다. 우식은 약속한 10시50분 무렵에 경우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약속한 장소에 가보니 경우가 성경책을 끼고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 설마.너. 교회에 같이 가자는 것 아니지?"
우식이 두려운 얼굴을 하면서 말했다. 사실 그는 시골에서 부모님을 따라 몇번인가 절에
간 적이 있었다.
"우식아. 그냥 한번만 같이 가보자.너 요즘 꽤 힘들어 하는데 그곳에 가면 마음이 많이
편안해 질거야."
경우는 그렇게 말하며 우식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우식은 마지못해 그를 따라갔다. 십여분을 걸어가니 교회의 입구가 나타났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주머니 두분이 교회입구 양옆에 서서 그들을 반겼다. 예배당으로 들어섰다. 목사가 막 설교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형제 자매 여려분. 이제 4월의 첫째 주일입니다. 자 .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의 설교의 요지는 대강 이러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였던 시인 T.S 엘리어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직후 그의 시 '황무지' 를 발표했는데 , 그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이 시는 4월이 오면 사람들이 낭만적인 감성에 젖어들어 읊어보는 구절이지만 그 내용의 실상은 밝지 못하다.
겨울지나 새봄이 오면, 겨울내 잠자던 만물들은
긴잠에서 깨어나, 활발하게 활동하는 재생과 부활의
기쁨이 있지만, 오직 현대 인간들의 문명은 황폐화 하여
4월의 새봄이 오더라도 결코 새로운 생명을 피워낼수 없는
황무지와 같다
위와 같이 노래하면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말은 유럽세계의 정신적 황폐와 형식화 해버린 기독교 신앙부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동서양의 역사속에서도 4월에는 유독 가슴아픈 일이 많았고 우리나라의 경우도 제주도에서 있었던 4.3사건이 4월에 있었고 젊은이들이 피를 흘려 민주화의 기틀을 마련한 4.19도 4월에 있었고 임진왜란도 4월에 있었다.
(31)
또한 외국의 경우에는 흑인해방의 아버지 에이브람 링컨이 사망한 때도 4월, 복음전파와 흑인들의 인권신장의 산 증인 이었던 마틴 루터킹이 사망한 때도 4월, 이 모든 것이 4월에 있었다. 그러나 세계사에 나타난 가장 잔인한 4월의 압권(壓卷)은 죄없이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역사 이었다. 우리들 인간의 죄상(罪狀)은 가장 신선한
분을 못 박아 죽이는 최대의 극악범죄를 저질렀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정의의 죽음이요, 인간 행복의 죽음임과 동시에 인간성의 죽음이다 라는 요지의 설교였다.
그리고 그는 덧 붙여 신도들에게 물었다.
" 현재 당신의 4월은 여전히 잔인한 봄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부활의 봄입니까?"
신도들은 한결같이 부활의 봄이라고 답했다. 옆에 있던 경우는 아멘이라는 말로 답에 갈음했다. 설교도중 우식은 기독교에 대해서 문외한이라 별로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었지만 경우는 연신 아멘 이라고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우식은 마음 한켠으로 여전히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기독교 마저도 그의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별로 현실에 와 닿지 않는 내용 이었다. 당장에 먹을 밥이 없다해도 인간들이 그렇게 마음을 가질까 하는 의문도 가져 보았다.
화요일 점심시간 이었다. 한 낯선 학생한명이 교실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그는 차츰 시비조로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빈정대고 있었다. 그러더니 대뜸 교실에 있던 학생들을 상대로 이제는 드러내놓고 시비를 걸고 있었다. 우식이 화장실에 막 나가려는 순간 그는 교실입구를 가로 막았다. 순간 우식의 눈에서는 핏발이 곤두섰다. 우식은 그를 노려 보았다.
그도 가소롭다는 듯 빈정거리고 있었다. 우식은 당시 최악의 상태였고 모든 현실이 힘든 상태에서 누군가를 상대로 폭발할 시한폭탄 같은 상황이었다.
" 야.비껴줄래?"
우식이 말했다.
" 안 비껴주면 울짤낀데.씹쌔야."
그가 우쭐대며 말했다.
"씨팔"
우식은 자신도 모르게 말이 세어 나왔다. 순간 흑곰은 주먹을 날렸다. 그들은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그러나 녀석은 대단한 거한 이었다. 거기다 날렵하기 까지 했다. 우식의 입이 찢어져 피가 나기 시작했다. 교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 야. 임마. 내가 누군줄 아나? 내가 바로 흑곰이다. 니 까불면 오늘
교문통으로 내 똘마니 부를끼다. 니 오늘 나 한번 잘 만났다."
흑곰은 그러면서 우식을 마구잡이로 때리기 시작했다. 우식은 상대해 보았지만 역부족 이었다. 그는 시골에서 자랄때도 싸움따위는 하지 않았던 온순한 사람 이었다. 그러나 그 즈음의 그의 환경은 극단으로 몰아 붙이고 있었다. 그는 의자로 유리창을 부수던지 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머리속으로 그려 보았지만 시골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참았다. 그의 어머니는
(32)
'차라리 맞고 다니거라'라고 주입하면서 그를 그렇게 키웠다.
평화지상주의자 였다. 평화지상주의자는 그렇게 엄청난 패배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용기를 갖기에는 흑곰의 완력이 너무나 대단 했던 것이었다.우식이 한참을 맞은 뒤 교실벽에 힘없이 기대고 있었다.그러나 눈물마저 나오지 않았다. 흑곰은 그런 우식을 바라보다 재빠르게 그곳을 빠져
나갔다. 그때 경우가 다가와 손수건을 건네 주었다. 우식의 코와 입은 핏물이 범벅되어 있었다. 그때 급우중 누군가가 저 흑곰은 자기반 10명을 상대로 싸워 이겼다는 말이 발빠르게 들려왔다. 우식만 그 소문을 못 들었던 모양이었다. 모든 것이 자신만 소외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모든 급우들에게도 동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하루였다.
시골에서는 적어도 몇 명 정도는 나설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점점 급우들이 싫어졌다. 우식은 김경우의 호의를 뿌리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묻혀있는 흔적을 말끔이 세척하면서 마음속으로 급우들의 모습도 완전히 지워 버렸다. 겉으로만 심각해 보이는 척 하는 도시의 귀공자들의 모습도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학교가 싫어져 견딜수가 없었고 얼른 벗어나야 된다는 생각만이 그를 지배했다.
그날오후 수업이 있었지만 우식은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렇게 수업을 마치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표정으로 집으로 갔다.설사 그런일이 있었다고 얘기 해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다는 것이 옳았다. 그때서야 상처난 얼굴이 아려왔다.그러나 모든 것을 속으로 삭이고만 있었다. 그날 저녁을 형과 함께 먹었지만 그는 상처난 자국에 대해서도 별다른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
그는 고향집으로 연락을 취하여 따로 방을 구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시장에서 제법 크게 장사를 하고 있는 고모와 숙모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골에 있는 어머니는 돈도 없지만 괜히 학교와 지척에 살고있는 형을 두고서 방을 따로 얻음으로써 어긋날 우애를 염려할 것이 뻔했고 때때로 명절이 될 때마다 만원정도를 그저 의례인양 쥐어주던 그의 친척들은 오래전부터 남처럼 대해왔고 살아오던 터 였다. 아니 남들보다 못한 존재 들이었다.학교 입학후 한번도 책을 사게 용돈을 준 경우도 없었고 관심마저도 없는 존재였다. 그저 촌놈이 시골에서 학교에 다니지는 않고 부산에 괜히 올랐왔다는 냥 성가신 존재로 받으들이고 있는 눈치였다.그렇게 그는 철저하게 혼자였던 것이었다.그리고 얼마후 부턴가 그는 완전히 말문을 닫아버리고 살고 있었다. 학교생활에서도 늘 혼자 였다. 가까웠던 친구 경우가 옆에와도 살짝 어색한 웃음만 지어보이고 애써 외면했다. 그러던 어느날 국어시간이 되었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일어서서 낭독을 시키는 스타일의 선생이었지만 인간성이 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였고 학생들에게 인기도 있었다. 한번은 정한숙의 금당벽화를 낭독하는 차례가 우식에게 주어졌다. 몇 명의 급우들이 읽은 뒤 였다.
(33)
번민에 찬 담징은 염주를 들고 대웅전을 찾았다. 불을 밝히고 마음을
가다듬어 합장을 했지만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가 없었다. 몰아치는
바람에 법당의 불이 꺼졌다.마치 풍전등화와도 같은 조국의 현실에
대한 암시인 듯하여 그의 고뇌는 극에 달했다. 조국에 도움이 못되
면서 또 자신의 포부도 펼치지 못한 자책감. 그는 법당을 나서 다
가 주지 스님과 마주쳤다. 주지는 고구려의 승전보를 알려주었
다. 담징은 복받쳐 오르는 희열과 함께 비로소 자비로운 불심을
느낄수 있었다.
이렇게 그가 교과서를 읽기 시작 했을 때 교실은 온통 술렁이기 시작했다. 국어선생도 수업이 끝날 때 까지 중지 시키지 않았다. 우식은 책을 읽는 와중에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놀랐다. 한결같이 놀라운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우식은 시골에서 부산으로 올라가 힘들땐 집 뒷동산에 올라가 김민부의 작시 장일남 작곡 '기다리는마음'을 부르면서 목을 튀어었다. 변성기를 지난 그의 목소리는 이제 청아 하면서도 청음이었다.거기다가 굵기도 했다. 오늘 교과서를 읽으면서 그때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수업이 끝나자 많은 급우들이 그에게 몰려와 장래꿈이 아나운서냐고 물었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그만큼 그의 목소리는 남 달랐다.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런것에 관심이 없었다. 또한 저 귀공자 같은 도시의 아이
들에게도 저런 면도 있었냐 하는 미묘한 감정이 그에게 자리잡고 있었다. 겉과 속이 다른 이율배반을 느끼며 그들에게서 이미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오로지 그에게는 학교를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또한 집을 떠나야 겠다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남보라는 듯 출세하여 시골에 계시는 불쌍한 어머니께 호강을 시켜 보자는 생각이 자꾸만 그를 짓 누르고 있었다. 그날 저녁 결국 형과 싸움이 벌어졌다. 밥도 해주지 않는 형수의 모습을 이미 알면서도 아무런 제재도 해주지 못하는 형에 대한 반감과 이제는 떠나야 한다는 어쩌면 절박한 상황이 그를 싸우도록 이끌고 있었다.
" 형님. 형님은 도대체 뭐하는 겁니까?"
우식이 그렇게 아무런 사유도 밝히지 않고 말하자 형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옆에서 앉아있던 형수도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왠지 형제간 싸움을 유도하는 묘한 표정이었다. 한편으론 빈정거리는 듯한 모습 이었다.
" 뭐.임마."
형이 대뜸 말했다.
"동생이 밥을 해먹고 다니는지 어디서 맞고나 다니는지 학교에 다니기라도 하는지 관심이
있기나 한 겁니까?"
우식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그래서."
형은 거두절미 하고 말했다.
"이젠 이 집이 진저리가 납니다.아침밥도 해주지 않는 저따위 여자는 이젠 제게 형수가
아닙니다."
우식이 말했다.
"뭐야.이새끼가"
드디어 그의 형의 입에서는 욕설이 튀어져 나왔고 주먹이 날라왔다.그는 피하지 않고 맞고 있었다.입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다. 그리고 얼마 뒤 우식은 말했다.
" 좋습니다. 이제 나가겠습니다. 이 거름뱅이 굴속 같은 집에서는 살수 없다고요.씨팔.
적어도 저는 형님처럼 이렇게 구차하게 살기는 싫다고요."
"오냐.얼마나 잘되는지 두고 보자."
그의 형이 가소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
형수는 말릴 생각도 하지않고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었다.
(34)
우식이 짐을 챙겨 막 나가려고 하자 형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이것 놓으세요. 그리고 두분 잘 사십시오. 저도 이제는 도저히 참을수가 없다고요.제가
이곳에서 없어지길 그렇게도 원하지 않았던가요?"
우식은 그렇게 말하며 형의 손을 뿌리치고 나왔다.마음속에는 출세해서 보자는 식의 오기의 감정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밤하늘은 총총이 별들로 가득차 있었다. 제법 차가운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해운대백사장으로 이어지는 거리에는 많은 인파가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 해운대백사장에 내려 갔다. 뛰엄뛰엄 연인 들이 흩어져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그가 앉아있는 백사장 옆에서 앉아있던 연인들이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힐끗 쳐다 보고는 재빨리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그는 이제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속이 후련해져 왔다.급하게 챙겨온 옷을 꺼내 이불을 감싸듯이 하고서 그는 그 자리에 벌렁 드러 누웠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이다.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도 형들도. 또한 학교와 급우들도.오로지 혼자라고 그들이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봄은 그에게 커다란 상처만 안긴채 시작되고 있었다.그에게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