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어머니,
2010년 8월 16일 82세로 타계하신 우리 어머니,
그 시대의 그 어느 어머니가 그러하지 않겠습니까만 우리 어머니도 정말 파란만장한 일생을 사
신 분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경남 고성군 거류면 용산의 수원 백씨 가문의 2남 4녀중 장녀로 태어나셨습니다.
문재가 뛰어나고 재리에 밝으셨던 외조부님은 어머님을 아들 이상의 인재로 키우실 생각으로 당
시엔 드물게 소학교(요즘 초등학교) 교육을 시키셨고 그 후 당신의 불의의 죽음이 없었다면 어머
니는 중학교 이상을 공부한 '신여성'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외조부님의 별세와 외조모님의 남아선호 사상으로 어머니는 초등학교 졸업후 농삿일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당시 우리 외가는 백씨 집안의 종답을 제공할 정도로 잘 살았던 것으로 기억
합니다.
그리고 19살,율대리의 가난하지만 글재주가 있는 저희 아버지께 시집을 오신 것이 그후 오래 계
속될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셋째 며느리로 시집와 49년 첫딸을 낳고 바로 6.25 전쟁을 만났으며
그 와중에 첫째,둘째 손위 동서들은 일본으로 다 떠나셔서 졸지에 큰 며느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51년 첫 아들이 나고 남편마저 일본으로 가자 시부모님과 시동생 그리고 젖먹이 아이 둘
을 키우는 청상 아닌 청상이 되셨습니다.
몇마지기 되지 않는 농사만으로는 살림을 꾸려갈 수가 없어 외가의 도움을 조금 받아 고성초등학
교 앞에 서점을 내서 운영하셨고 일본의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전답을 조금 늘려 율대리로 다시
옮겨 농삿일을 계속하셨습니다.
1960년 일본에 간 아버님이 영주귀국하셨지만 그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병들어 더 이상 살아갈 희
망이 없어 고국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해야겠다는 처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치명적인
폐결핵 3기였는데 다행히 귀국후 이런저런 민간요법으로 치료한 것이 조금 효과를 거두어 호전이
되셨고 61년 둘째,62년 셋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고생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결핵치료제로 검증이 되지 않았던 마이신 부
작용으로 아버님이 귀가 멀어지자 어머니의 생활은 다시 암흑 그것이었습니다.일본으로부터의 약
간의 지원이 있었다고 하지만 형편이 어려워 큰 딸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를 시키고,큰 아들도
대학 보내기가 부담스러워 전문학교에 보내는 선택을 했습니다.
큰 며느리 아닌 큰 며느리로 30년을 모신 시아버님이 1973년 84세로 타계하시고 4년후 시어머님
마저 세상을 뜨시자 어머니 인생은 조금 여유가 생기는 듯 했습니다.
자식들 다 객지에 보내고,큰 아들이 사업에 조금 자리가 잡힐 무렵인 1988년 아버님은 위암으로 세
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1년 남짓,홀로 남으신 어머니는 삶의 의욕을 잃으신 것 같았습니다. 논밭일 하시고 식사는
대충 막걸리 한잔으로 때우시고 날로 여위어가시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 서울로 모시기로 한
순간 어머니의 삶의 중심은 무너진 것 같았습니다. 3-4년이면 적응할 것 같았던 도회지 생활 20
년을 어머니는 영원히 시골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자식들을,손자들을 보는 재미 외엔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생활을 그냥 시간만 죽여가며 사시지 않
았나 하는 그런 회한이 듭니다.
2007년말 부산에서 낙상하시어 이곳저곳 골절이 생겨 이곳 원주수병원에 입원하실 때만 해도 우
리는 뼈만 치료하면 다시 예전의 어머니로 돌아올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3년,
어머니는 누웠던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82세의 생을 마감을 하셨습니다.
인생 82세, 어머니 연세에 결코 적게 한 수라고 할 수 없지만 살아오신 기막힌 과거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너무 큽니다. 휠체어라도 태워 고향땅 한 번 보게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후회도.
이제 훌훌 털어버리시고 아버님과 다시 오붓한 명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실 때는 그렇게 고생 되지 않는 곳에 나시길 기원합니다.
너무 어렵게 살다보니 내 식구 외에 남을 배려하는 면이 좀 부족하셨습니다. 정말 한푼도 아끼려
애를 쓰셨고. 그래서 일본에서 사준 전답을 고스란히 유지를 하셨고 그것을 최근 10년 차례로 처
분하여 당신의 병원비로, 가족묘를 마련하는 비용으로 썼습니다. 그러고도 3억여원이 남았습니다.
이 돈을 저는 어머니 이름을 건 장학재단을 마련하는 데 쓸까 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고향이었던
고성의 어린 싹들이 자라는 데 조금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모친상이라 하여 화환 받고 조의금 받을 처지는 아니었습니다만 미쳐 그런 것을 고지할 시간도
없었다는 점과 쓰고 남은 돈은 위의 장학기금에 보탤 것이라는 점을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집안 대소사가 있을 수 있지만 더 이상 여러 사람에게 빚지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께 큰 빚을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무슨 말씀인들 위로와 위안이 되겠습니까.허지만 하루속히 마음을 추스리시어 고인의 유지를 기리셔 뜻깊은 사업이 열매를 맺기 바랍니다.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나도 어머님이 보고 싶다.)
당신의 어머님은 한 인간 으로써 우리 한국 여성상 그대로 그야말로 정말 훌륭한 삶을 사신 아름다운 분 이었습니다 그 아들 또한 훌륭 하였습니다 생전에 어머님께 하는걸 보고 나는 부끄러움을 느낄때도 가끔 있었읍니다 너무 슬퍼 하지 말고 곱고 깨끗한 마음으로 명복을 비십시오 ..............내가 당신이 위로 받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것 미안 하게 생각 하고............다시한번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사랑합니다..........
어머님의 회고록을 읽고 감명받았습니다. 생전의 어머님의 깊어신 뜻을 잘 기를 수 있도록 바랍니다.
슬픔을 한 자리에서 같이 하지못해 마음 아픕니다. 한번 더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라 어찌 휼륭하지 않겠습니까.정말 큰일치르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다시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의 어머니도 금년 90세로 수원백씨 람니다.외가댁은 고성상리 부포라는 동네고요.
연세가 들다보니 요즘 생활에 문제가 생기는군요.나머지 부분은 상상으로........
어머님의 삶을 회고한 오늘의 그 허전함을 어찌 다 표현 할 수 있으오리까 만은 평소 정말 훌륭하신 어머님의 인자하신 모습과 우리친구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주시던 고운 심성과 따뜻한 마음을 잊을 수가 없내요! 높은신 유지를 받들어 좋은 일을 하신다니 대대로 사업이 번창하고 길이 빛날 유업을 영원 히길 빕니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머님의 삶과 나의 어머님의 삶을 다시 되돌아보게 합니다. '청출어람' 의 뜻을 생각하게 하며 장학재단을 만든다니 가장 반가워요! 편안한 마음으로 사업도 번창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