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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세기_2부 제국 국가
6 계획
나는 위대한 계획과 사상, 관심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 내 어깨에 젊어진 보편적인 역사적 임무를 나 자신의 문제와 동일시하는 것이 쩨쩨하다는 점 또한 알고 있다.
-니콜라이 부하린. 스탈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우리는 소중한 아버지, 당신의 손을 흔듭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준 행복을 위해.
당신은 생명의 원천을 이루는 햇살입니다.
그리고 이제 농민은 잘 먹고삽니다.
전사는 전투에서 굳셉니다.
-남세오세티아 자치주 노동자들이 스탈린에게 보낸 시
우리는 늙은 볼세비키든 아니든, 적을 죽일 것이다. 우리는 적의 가족까지도 멸망시킬 것이다.
-스탈린이 축배를 들며 한 말
* 1차 세계대전 발발은 이미 왕족 정치의 무력함과 쇠락을 보여줬다. 이는 이미 시대사조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음을 지적하며 그 결과가 전쟁 발발이다. 시대가 바뀌어 가고 있음으로 전후에 새로운 정치•금융 체계가 요구되고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 영국과 미국 : 인플레이션 -> 디플레이션 -> 대공황(원인) -> 문제는 노동자의 실업 -> 은행 연쇄부도로 심화 -> 해결 방법, 전통적인 정책 실패 -> 금본위제 폐지로 통화의 평가절하 -> 경기 회복.
전쟁 중, 공업과 상업의 기록적인 호황을 맞았다. 그리고 전후 미국에서 나타난 향락적 분위기는 자유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특히 째즈와 블루스는 미시시피 삼각주의 흑인 집단(해방을 노래)에 의해 탄생했는데, 방탕한 지배 엘리트들이 파티용 음악으로 즐기며 유행되었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의 쾌락 묘사는 전쟁 중에 겪은 악몽을 잊고, 전후에 죄책감이나 허영심으로 자신의 전쟁 이야기를 지어내 사람들에게 꽤나 잘 어울린다. 영화와 미니스커트, 칵테일과 컨버터블 자동차, 무허가 술집과 줄담배 등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는 모든 쾌락, 아니 그 이상을 제공했다. 유행성 독감처럼 전염력이 강했다.
- 베를린, 시카고, 에로구로(에로틱+그로테스트)의 도쿄 긴자, 상하이는 풍요의 소비를 보여준다.
인플레이션은 전비 조달을 위해 각국이 돈을 너무 많이 찍어내서였다.
- 1921~1929년까지 미국 경제는 연평균 6%씩 성했다. 경제는 주로 돈 있는 엘리트층을 위해 굴러갔다.
- 1928년, 상위 1%의 납세자가 미국 총소득 가운데 거의 20%를 벌어들였고, 미국 부의 40%가 상위 1%에 집중되었다.
- 1921년 8월부터 1929년 8월까지 다우지수는 4.4배 상승했고, 밀 현물가는 1917~1920년에 전전 평균의 세 배이상 치솟았다.
- 1차 세계대전 때, 유럽의 생산력이 파괴적인 일에 쓰이면서 아시아와 미국의 생산업체들이 맹렬한 기세로 사업을 확장했다.
디플레이션, 1920~1921년 경치 침체로 주요 생산품과 제품 가격은 크게 하락했다.
밀 가격은 1925년 2월, 1부셸당 182센트(1920년 5월에 294%였다.) 1929년 5월까지 계속 하락하여 102%가 되었다. 이러한 디플레이션은 대공황의 전주곡이였다.
디플레이션은 농민들에겐 가난을, 공업과 금융업자에겐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싼 가격에 자산 매입 또는 권리와 권한 확보)
대공황은 전무후무한 경제적인 파국의 신호탄은 미국 자산 가격의 폭락이었다.
1929년 10월 28일, 일명 ‘블랙먼데이’에 다우지수는 거의 13% 떨어졌는데 이는 역사상 1일 최대 하락폭에 속한다. 실제로 시장은 9월 3일부터 내려가 11월 13일까지 거의 50%나 폭락했다.
대공황의 증상
1929년~1933년까지 미국의 명목 GDP는 거의 절반이 감소했고, 1930년이 되면서 농업, 제조업, 금융업으로 확대되었다.
1929~1932년까지 세계 7대 경제 대국 생산량의 총합은 거의 20% 감소했다.
*미국이 통화 긴축정책(현재의 상황)으로 단기자본을 다시 뉴욕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미국보다 다른 국가들이 영향을 빨리 받았다. 각국 중앙은행들도 신용 대출을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브라질, 캐나다. 독일, 폴란드가 하강 국면을 보였다. 특히 일찍이 건설 호황을 누렸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경제적 파국은 가혹할 정도로 심했다.
실업, 사람들을 가장 충격에 빠뜨린 것은 공장 노동자의 실업이었다.
《타임스》는 경기 침체가 바닥을 친 지 10년 뒤 사설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실업은 전쟁 다음으로 우리 세대에서 가장 파급 효과가 크고, 가장 서서히 진행되고, 가장 피해를 안기는 폐해다. 이는 현대 서양 문명의 독특한 사회적 질병이다.”
미국 실업률은 대공황 직전에 3.2%였다가 1933년 25%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30년대 후반까지고 이상이 유지했다.
1932년 독일도 노조원들의 50% 이상이 실업 상태였다.
트리거, 위기가 심화되고 연장된 것은 미국 은행권의 붕괴, 지급 불능상태가 그 원인이다.
1929~1933년까지, 미국 내 2만 5000개 은행들 가운데 대략 1만 곳이 문을 닫았다. 프랑스/스위스/오스트리아/독일도.
그림6-1(299)을 보면 대공황의 부분적으로 금융 경색의 결과였다는 시각을 확인시켜준다.
당시 후버 미국 대통령은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수출 촉진, 단체교섭, 농업협동조합, 재계 ‘협의회’에 대한 지원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리 효과적이지 않았다.
대공황은 원료의 과잉생산과 과잉 투기 때문에 발생한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1920년과 1921년 발생한 일들과 그 특징(디플레이션)이 유사했다. 제시된 해결방법은 불행히도 되레 사태를 악화시켰다.
후버는 미국의 “근본 자산은 줄지 않았다(다만 금융자산 가격이 하락했을 뿐!).” 따라서 연방준비은행은 금으로 환산한 달러의 가치를 유지하면서 낮은 금리로 신용을 계속 공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 했으며, 예산 균형을 유지하면서 공공사업을 확대하고, 노동자, 자본가, 소비자는 필요한 생산비 절감에 동참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 또한 기존의 관세를 더욱 높여 보호무역을 강화하자고 주장했다(식품, 직물, 기타 생필품 생산업체들 보호)
연방준비은행은, 통화 정책을 완화하지 않음으로써 1930년과 1931년의 은행 연쇄 도산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1931년 10월에는 대출금리를 인상했다. 한편 균형 잡힌 예산 운용을 위해 경기 조정용 재정 부양책은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1930년 6월에 법제화된 보호주의적 법안인 스무트홀리법은 재정 신뢰도에 타격을 주었다.
독일 경제도 금리 인상과 세금 인상, 비용 절감과 보호주의라는 똑같이 치명적인 정책을 받아들였다.
전통적인 정책 대응 실패, 구조적인 불균형이 원인.
- 상품과 제품 가격 인하 압력은 정책보다 국제적인 수요 공급의 문제였다.
- 전쟁은 미국의 주요 무역파트너에게 경화(硬굳을 경, 化될 화: 주조 화폐 또는 금과 쉽게 교환할 수 있는 통화-옮긴 이) 부채를 떠안겼다.
- 독일의 경우 전쟁 배상금이 여기에 해당한다. 독일의 실질임금이 1924~1931년까지 75% 상승
***** 패전국들은 대미 수출이나 상대국에 대한 수출로 부채의 이자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화폐가치 하락(환율?)?)
당시 노조 힘이 커지자 협상이 아닌 공장폐쇄로 이어졌다. 이로 인한 실업률 증가했다.
1933년 3월 4일, 후버 후임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취임 연설에서 대공황의 근본 원인으로 ‘근거 없는 공포’를 지목하면서 농산물 가격을 올리고 정부 지출을 줄이자고 주장했다. 이는 호시절에도 잡기 힘든 두 마리 토끼였다.
그의 계획은 은행에 대한 엄격한 감독과 공익사업 기획, 구제 사업에 대한 중앙집권화를 통제를 요구함으로써 단순히 연방정부의 힘을 증가시킬 뿐이었다. 그 결과 관료들의 일자리가 만들어졌을 뿐 실업 타개에 별로 도움 되지 않았다.
중요한 점은 정책변화가 각국 정부에 강요되었다는 점이다.
1931년 당시 40개국 이상이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1937년에 이르면 사실상 모든 국가가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국제 통화 체계를 떠받치던 영국과 미국은 변동화율제를 채택했다. 이제 두 국가의 중앙은행은 금보유고의 변화나 자본 흐름이 환율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지 않으면서 국내 금리를 낮추는 데 주력할 수 있었다.
- 공공 지출이 증가하고 세입이 줄어글면서 정부 적자가 증가했다. 경기를 부양할 수 있을 정도로 적자 재정을 운용할 수 있는
나라는 영국과 미국뿐, 이 현상은 게인스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 대표하는 획기적인 경제 이론에 앞서 발생했다.
경기 횝복을 이끈 통화의 평가절하이 두 가지면
명목 금리를 떨어뜨렸고, 실질금리와 실질임금도 떨어뜨릴 수 있었다.
보호주의의 열풍은 영국마저 자유무역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세계화는 끝났다. 상품의 흐름은 수입관세에 의해 제동이 걸렸고, 자본의 흐름은 외환 관리 등에 의해 제한받았다. 또한 노동력의 흐름은 이민 규제에 의해 억제되었다.(=>1901년대의 영국 제국의 호황, 1909년대의 민족주의 이념의 갈등 고조)
** 케인스는 자급자족을 목표로 하는 다소 폐쇄된 경제에서만 경기가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기 책의 독일어판 서문에서 별생각 없이 이렇게 지적했다. “하나의 통일체로서 생산 이론은 자유 경쟁과 자유방임하에서 생산되는 특정 생산물의 분배와 생산 이론보다 전체주의적 국가에 훨씬 더 쉽게 조화된다.” (302) 케인스의 단어 선택은 의미심장했다. 그 단어의 기원은 이탈리아의 파시즘에서 찾을 수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전체주의적 정권은 이미 대공황이 발생하기 10여년 전에도 존재했다.**
** 전체주의국가는 대공황 전에 이미 출현-> 공산주의 실험-> 강압적 공업화-> 집단화 정책
** 집단화 정책의 굴락(Gulag; 노동수용소 관리본부의 줄인 말)) 시스템
소수민족과 숙청의 대상을 인민의 적(계급의 적)을 만들어 집단농장 또는 강제수용소로 보내 노동력으로 활
용했고 추방과 숙청으로 이민족 ‘절멸’을 시도했다. 여기에 기근과 역병이 더해져 대재앙이 됐다.
전체주의국가 소비에트 체제는 시장의 변덕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서도 뉴욕의 마천루나 대량 생산되는 헨리 포드의 자동차같이 대단한 작업을 해낼 수 있는 체제로 보였기 때문이다. 모든 면을 통제할 수 있었다.
덕목은 평등이고 사회의 목표는 빠른 산업화가 아니라 유산계급의 ‘타파’였다.
전체주의국가의 엘리트는 빠르게 관료가 출현했다. 그들은 경제생활의 모든 면을 통제하고 독립적인 조사를 받지도, 민중에 대한 책임을 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쉽게 당의 특권을 정당화하고 그 특권을 누리는 데 드는 비용을 얼마든지 치를 수 있었다.
공산주의 실험은 실현 가능한 국가사회주의의 꿈을 상징했고, 자본주의 체제와 다른 새로운 미래였으며 서양 세계의 일부 인사들에게도 곧 실현될 듯한 미래로 보였다. ‘일국사회주의론’은 1924년 레닌이 사망 후, 볼세비키당 지도부의 분열에 스탈린이 제시한 핵결책이었다.
- 레프 트로츠키(소련의 정치가, 사상가, 붉은 군대의 창립자)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농업 경제를 산업화 방법은 세계 혁명이 유일하다고 생각,다.
- 스탈린은 자신을 비판한 레닌의 유언장을 감추고 그의 후계자를 참칭하며 소련 내에서 빠른 산업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
계획과 내전을 승리로 이끈 강철같은 의지력만 있으면 될 일, 즉 자칭 ‘강철의 사나이’가 이끄는 경제 혁명을 주창했다.
표면적인 목표는 여전히 대치하고 있는 제국주의 열강에 경제적, 군사적으로 필적할 만한 강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인력과 자원을 도시로 엄청나게 이동하도록 만듦으로써 혁명의 기반인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단숨에 확대하려고 했다. 1928~1939년 사이 도시 노동력은 세 배로 늘었다. =>강압적 공업화; 맹신적으로 성과내기에 돌입
대략 400만 명이 시민이 혁명 전에 ‘계급의 적’이었다는 이유로 시민의 권리를 빼앗겼다. ‘임금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은 직장과 학교, 병원, 식량 배급 체계에서 불이익을 당했으며 자기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스탈린이 보기에 혁명 전 사회에서 살아남은 자본가, 귀족, 상인, 관료, 사제, 부농은 출신 계급에 대한 동정, 전통, 관습, 의견, 세계관 등으로 인해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추방해야 했다. ‘이방인 계급’화는 대중의 관심을 ‘인민의 적(정확히 누가?, 어떠한 사람들이?, ‘착취’는 정확히 무슨 뜻인가?)’이라는 새로운 부류로 돌리기 위함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축과 돼지를 몰수당하느니 죽여서 먹어버렸다. 그래서 1935년에 소비에트의 총 가축 수는 1929년의 절반으로 감소했다. 그리하여 길고 괴로운 굶주림이 찾아왔다. 동물 배설물로 만든 비료가 없어지자, 1932년 곡물 생산은 1930년에 비해 20% 감소했다. 굶주린 사람들은 고양이, 개, 들쥐, 새, 나무껍질, 심지어 말 두엄과 인육을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근에 이어 역병으로 발진디푸스로 1100만 정도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모스크바 주재 서양 세계의 특파원들은 대표적으로 《뉴욕 타임스》의 월터 듀란티는 특권층에 접근할 수 없게 될까 두려워 스탈린 정부의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은폐를 묵인했다
대략 40만 가구, 200만 명 정도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추방됐으며 집단화에 반발한 사람들은 총살당하거나 장제노동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차르 시대의 여권제도를 부활시켜 도시로 도망치는 것도 막았다.
스탈린은 뒤처진 국가를 현대화를 위한 필요한 조치였다며 집단농장화로 인한 희생을 정당화했다. 숱한 인명이 희생된 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당 비서인 멘달 M. 하타에비치는 “집단농장화 정책은 표면적으로 소비에트 농업을 개선하려는 시도”였다고 밝히지만 진짜 목적은 계급의 적, 부농 계급을 근절하는 것이었다.
1차 5개년 계획에 따른 강압적 공업화는 도시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 과밀해진 인구밀도, 영하 40도와 영상 40도에 노출된 환경, 열악한 작업환경에 따른 부상과 사망, 주방 화장실이 없는 공동
주택 생존을 위한 희망은 계층 이동의 기회를 잡는 것 뿐이었다. 아파트를 얻을 수 있다면 상급자나 이웃을 매도하려 했다.
이는 경제적 광기의 소산이었다. 집단화는 소비에트 농업을 완전히 무너뜨렸고 자원 배분 조차 엉망이었다.
소비에트가 발표한 공식 수치, 1929~1937년 GDP는 연평균 9.4%에서 16.7%로 증가했고, 1인당 소비액은 3.2%에서 12.5%까지 증가했다. 실제 GDP 성장률은 연 3%에서 4.9%였고 1인당 소비액은 1.9%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공식 수치의 5분의 1 내지 6분의 1에 해당한다.
정책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20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면, 그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1930년대 소련의 웅장한 건설 사업들은 죄수 수천 명에 의해 건설되었다. 계획 경제의 뒤에는 강제노동수용소로 이루어진 굴락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가 숨어있었다.
거대한 감옥, 굴락 시스템
소련 곳곳에 수용소가 최고조에 달한 때에는 총467개 있었는데, 스탈린 치하에서 성인 남녀와 아동 1800만 명이 굴락을 거쳐 갔다. 유형에 처해진 사람이 600~700만 명임을 고려해 보면, 스탈린 치하에서 징역을 경험한 인구는 15%에 달했다. 각 굴락 시스템은 수용소 수백 개로 구성되었다.
- 채탄을 위한 수용소, 도로 건설을 위한 수용소, 항공기 제작을 위한 수용소, 심지어는 핵물리학 수용소까지 설립되었다. 또 다 른 식민화다. 누가 노예인지 분명한 경계가 없다. 아침에 명령을 내리던 사람이 저녁에 수갑을 차고 있을 수 있었다.
- 새 노예는 꾸준히 유입됐다. 공개재판에서 스파이 협의와 파괴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 ‘반소비에트 선동’/‘반혁명 활동’/‘반혁
명 테러 활동’/‘트로츠키식 테러활동’ 등의 이유로, 스탈린 정권의 극악무도한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발트해와 백해를
잇는 225킬로미터의 벨로모르 운하다. 1931년 9월~1933년 8월까지, 12만 8000~18만 명의 죄수 동원, 곡괭이와 외바퀴수레,
자귀 재를 깎는 도구)만으로 수로를 팠다.
- 또한 모스크바볼가 운하 개통식 직후에는 도급업자와 관리자 200여 명은 운하 건설이 지연되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숙청을 도입한 사람은 레닌이었는데, 숙청을 도구로 스탈린은 더욱 무자비하고 살벌하게 공포정치를 했다.
- 숙청 대상은 고문과 심문을 당하다가 결국 ‘범죄’를 실토하고 다른 동료들을 매도한 뒤 총살당했다.
숙청/말살의 대상, 계급의 적
그 계급은 그 경계선이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다. 소련은 다민족 러시아 제국이다. 그런데 스탈린은 특정 미족을 믿을 수 없는 집단(계급)으로 간주하고 민족추방프로그램을 가동하며 ‘말살’ 정책을 실행했다.
말살되어야 할 ‘계급의 적’
세습 농부의 아들/외국인과 접촉한 사람들/1933년 이후 소련으로 도망쳐 온 사람/1920년대에 해외에서 혁명을 선동한 고참 볼셰비키 당원/소련 국경지대에 거주했던 민족들의 추방(고려인, 발카르인, 체첸인, 그림 반도의 타타르인, 독일인, 그리스인, 잉구슈인, 메스케티인, 칼미크인, 카라차이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등)
- 체포/이주/박해/박탈/추방(쫓겨남)
1937년 10월 29일, NKVD의 수장 니콜라이 예조프(Nixolai Yezhov)는 인민위원회 의장 뱌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kav Molotov)에게 서한을 보내, 극동 지역의 모든 고려인 17만 1781명이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었다고 알렸다. 이는 소련의 동부전선을 안정시키는 방법으로, 1920년대 중반에 처음 세운 계획을 완료했음을 의미했다. 이 정책의 이론적 근거는 계급과 인종 문제를 교묘하게 섞어 놓은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사회 기반인 토지 소유의 철폐, 집단화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32~1933년 기근(카자흐스탄 북구 카프카스, 볼가강 지역도)에 우크라이나인의 희생이 유독 많았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에서보다 집단화가 더 강도 높고 빠르게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생산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곡물 할당량이 고의로 높게 배정하는 등)
쿠바 지역의 코사크인 시베리아로 추방/1935~1936년 핀란드인 3만여 명 시베리아/1936년 1월 독일인 수천 명 서부 국경지대로/1937년 1000여 가구의 쿠르드인이 남부 국경지대로/1년 뒤, 이란인 2000명 추방.
1939년 1월, 폴란드인을 목표로 소탕 작전, 정치국에 의해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간부, 폴란드인, 라트비아인, 독일인, 에슨토니아인, 핀란드인, 그리스인, 이란인, 하르빈인, 중국인, 루마니아인들과 소비에트 국민의 간첩 적발 그리고 파괴 활동 분쇄를 위한 작전으로 확대
(326) 그림6-2. 1926~1954년, 스탈린의 ‘인종 청소’에 의한 희생자 수
소비에트 정권이 전체주의 정권보다 덜 관료적이라고 말하지만 러시아 문서보관 증거를 보면 굴락의 수감자들을 민족에 따라 세세히 분류하는 등의 원장 기록이 있다. 이는 수용소의 죄수들을 죽이기보다는 그들의 노동력을 짜내는 데 과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1935~1938년까지, 비러시아계 민족에 대한 박해로 대락 80만 명이 체포되엇 추방되거나 처형되었다. 공포정치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인 1936년 10월부터 1938년 11까지, 박해받는 민족 출신은 체포되었던 모든 정치범의 5분의 1 정도였지만, 처형자 수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실제로 민족 집단에 대한 조치로 체포된 사람의 75%가량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차르 치하에서 최하층민(차르의 박해 대상)이었던, 유대인들은 두드러지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들은 혁명기 볼셰비키당에서 엄청난 역할을 해냈다. 많은 유대인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새로운 정치 문화(박해를 벗어날 희망에 공산주의 지지)로 받아들였다. 1920년대는 소비에트는 유대인들에게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차츰 신뢰할 수 없는 민족으로 간주해 집중 픽박한다.
사회통합이 진전되었음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지표는 다른 민족 간의 결혼이 급격히 늘었다는 점이다.
러시아에서는 1925년에 18.8%였던 이민족 간의 결혼이 2년 뒤엔 27.2%로 증가했다.
그렇다고 소비에트 전역에서 인종 혼합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중앙아시아에서는 러시아인과 회교도가 결혼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인종 장벽도 천천히 무너지는 것으로 보인다. 점차 유대인 집단은 전통적인 이디시어를 버리고 러시아어를 선택하는 조짐도 보였다.
이렇게 다민족 제국이 자연스레 만들어져 가던 때에 스탈린은 진정한 민족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이며 심지어는 대러시아의 야비한 악동이라고 경고한 레닌의 말대로, 1939년 전쟁이 발발하기 전(실제로는 1933년)에 이 악마 같은 그루지야인은 본색을 드러냈다.
1980년대까지도 위르겐 하버마스(Jϋrgen Habermas)는 제3제국과 스탈린의 소련을 비교하는 것이 정당치 않다고 했지만, 물론 두 정권은 전혀 똑같지 않았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와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 간에, 양적인 차이는 있어도 질적인 차이는 없다. 하지만 솔포베츠키에 도착한 10대 소년 유리 치르코프(Yuri Chirkov)를 반길 ‘노동을 통한 자유’라는 슬로건이 이후 아우슈비츠에 온 죄수들을 환영한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Arbeit Macht Frei)’라는 전설적인 구호와 똑같은 거짓말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