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장군 일대기!
안녕하세요? 나나입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서희장군의 일대기를 포스팅하려 합니다. 서희장군은 (고려태조25년) 942년에 출생하여 (목종1년) 998년에 사망하였으며 자는 염윤, 시호는 장위이며 고려 전기의 정치가이자 외교가였다.
서아성 (이천)으로 오는 서신일 (서희장군 조부)
이천서씨 시조인 서신일은 신라 금성 (경주)에서 아간 벼슬을 하다 서아성 (이천)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면서 이천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위풍당당하게 이천으로 오는 늠름한 서신일.
사냥꾼에 쫓겨 위기를 맞은 아기사슴
신인의 아들이 변신한 아기사슴이 포악한 사냥꾼으로부터 화살을 맞고 쫓기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자애롭고 지혜로운 서신일 (서희장군 조부)
자연과 더블어 살며 세상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제자들에게 가르치며 존경을 받으면서도 자식이 없어 늘 적적한 서신일이 (서희장군 조부) 어느 날 화살을 맞고 쫓기는 위기에 처한 아기사슴을 숨겨주고 사냥꾼을 따돌리는 자애롭고 지혜로움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은혜에 보답하고자 서신일(서희장군 조부)의 꿈에 나타난 신인
아기사슴을 구하고 난 후 서신일의 꿈에 경이롭고 신비로운 모습의 신인이 나타나 서신일 덕분에 위기를 묘면한 아기사슴이 자신의 아들이며 생명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자손 3대에 걸쳐 보국 안민의 재상이 될 자손을 낳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사슴의 보은으로 서희장군의 부친 서필잉태
신인의 은혜를 받아 서신일 부인이 잉태함으로서 새로운 명문 가문의 등장을 예고, 가문의 축복에 행복해 하는 80세 서신일 노부부의 모습.
서희장군의 부친 서필의 탄생과 이섭대천
아기사슴의 보은으로 태어난 서필은 (서희장군 부친) 고려전기의 문신으로 서신일의 조카 서목이 신라금성에서 서신일을 따라 서아성 (이천)에 정착하며 고장의 중추적 역활을 하던중,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와 일전을 치르기 위해 남하 하는데 복하천에서 큰 비를 만나 노심초사할때 서목은 일찍부터 봐왔던 물살이 느리고 얕은곳으로 안내하여 무사히 도하하게 도움을 줌으로서 이를 고맙게 여긴 왕건은 주역의 이섭대천 즉 "큰 내를 건너 이로웠다"고 교지를 내리게 되었으며 이것이 현재의 "이천"의 명칭이 되었다
태조왕건과 만나는 서필 (서희장군 부친)과 서목
서신일 (서희조부)과 조카 서목은 이섭대천을 계기로 서필과 함께 왕건을 만나게 되고 왕건은 서필을 도성(개경)으로 오도록 당부하게 되며 후일 서필은 태조 왕건과의 인연의 시작으로 도경 (개경)으로 올라가 강직한 충신으로 왕을 보좌하게 된다.
왕이 내린 금 그릇을 사양하는 서필
고려광종이 즉위후 더욱 신임을 얻어 내의령을 지내면서 과거제도, 신구 갈등조절 등을 통해 조정의 개혁을 단행하던 서필은 어느날 광종이 금 그릇을 내리자 왕보다 높은 술잔을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한다. 왕은 이를 계기로 서필을 더욱 신임 하였으며, 세상을 떠난뒤에도 최고의 벼슬인 '정민공' 이라는 시호를 받고 광종묘정에 배양된다.
10대 서희장군의 글공부와 무술연습
어린시절 부터 서희장군은 책을 가까이 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 하면서도 천마산 골짜기에서 무술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벽란도 상인과의 교류
고려초 벽란도는 국제 항구였다. 서희장군은 쌍기의 소개로 벽란도에서 국제적인 교류를 하는 송나라인, 여진족, 거란족 상인등과의 만남 속에서 국제정세에 눈뜨게 된다.
서희장군의 갑과 급제등용
서희장군은 어릴때부터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국제 정세등을 공부할 수 있는 책과 자료등을 아버지인 서필의 도움으로 접할 수 있었고, 쌍기로 부터 국제 정세를 배운덕분에 과거시험의 시제인, 인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해줄 수 있는 방안과 북방개척의 대안에 대하여 그동안 최선의 노력을 다한 실력으로 서슴없이 시제를 풀어냄으로써 18세의 나이에 갑과에 급제하여 인재로 등용되기에 이른다.
서희장군의 금의환향 서희장군은 과거에 급제하자 이천으로 인사차 돌아와 먼저 조부의 묘소에 들르고 고향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환대를 받는다.
북방에서의 근무
광종의 북방게척에 뜻을 받들어 북방지역의 관직을 받아 여진족들의 동태와 거란의 동정을 전해 듣는다.
송나라 사신파견
32살때 송나라 사신으로 간 서희장군은 고려를 무시하는 대신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송과 고려가 손을 잡아야 함을 역설한다. 서희장군의 지혜있는 설득과 당당함에 감복한 송나라 태조는 서희장군에게 검교병부상서의 벼슬을 내리는 파격을 보여준다.
할 말은 하는 소신있는 서희장군
정우현이 하급관리로 상소를 올리자 성종은 벌을 주고자 하였다. 이때 서희장군은 상소문은 옳은 글이고 신하가 상소하는 것은 도리어 상을 주어야 하는 일이라 말한다. 왕은 크게 깨달아 정우현에게 감찰어사로 직책을 올리고 서희장군에게 하사품을 주었다.
중용을 도리를 지킨 서희장군의 사환
서희장군의 사환은 아버지 서필의 신망이 큰 후광이 있었지만,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도리를 지키려는 서희장군의 품성 또한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 가운대서도 위로는 왕에게 직간 하는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고, 아래로는 말단 사환에게까지 자상함과 원칙을 지키는 곧은 품성으로 존경받는 것이 누구에게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서희장군의 담판
소손녕과의 담판이후 서희장군은 평장사를 거쳐 종1품 태보내사령에 임명 되었으나 996년(성종15년) 병을 얻어 개국사에서 오랫동안 치료와 요양을 했다. 이때 성종이 직접 문병을 와 어의 한벌과 말 세필을 사원에 나눠주고 개국사에는 1천석의 곡식을 내렸다고 한다. 개국사에서 요양하던 서희장군은 998년(목종1년) 향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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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고담당 019-290-5280 권팀장 원문보기 글쓴이: 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