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중공군은 강했다
참담했던 중공군 앞 후퇴
60여 년의 세월을 지나 그 때를 회고하면서 나는 그저 담담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당시 중공군의 물밀 듯한 공세에 내가 이끄는 1사단의 ‘전멸(全滅)’까지를 생각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미 내가 적은 회고록에 그 내용은 자세히 적었다. 여기서 그 일을 다시 반복하는 일은 큰 의미가 없다.
단지 그 상황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하자면 이렇다. 나는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 사실을 알아 직속 상관인 미 1군단장 프랭크 밀번과 긴급하게 논의한 뒤 후퇴를 허락받았다. 이어 1사단을 지원하던 미 10 고사포단 윌리엄 헤닉 대령에게 모든 포탄을 적진에 퍼부어달라고 부탁했다.
참담했던 중공군 앞 후퇴
60여 년의 세월을 지나 그 때를 회고하면서 나는 그저 담담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당시 중공군의 물밀 듯한 공세에 내가 이끄는 1사단의 ‘전멸(全滅)’까지를 생각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미 내가 적은 회고록에 그 내용은 자세히 적었다. 여기서 그 일을 다시 반복하는 일은 큰 의미가 없다.
단지 그 상황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하자면 이렇다. 나는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 사실을 알아 직속 상관인 미 1군단장 프랭크 밀번과 긴급하게 논의한 뒤 후퇴를 허락받았다. 이어 1사단을 지원하던 미 10 고사포단 윌리엄 헤닉 대령에게 모든 포탄을 적진에 퍼부어달라고 부탁했다.
- 운산 북방의 중공군을 앞두고 긴급히 헤닉 미 10고사포단장(오른쪽)과 후퇴 작전을 논의한 백선엽 장군.
그러나 그들에게 밀려 내려오면서도 참담한 심정까지야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전장에서 물러선 일은 한번이 아니었다. 가장 참담했던 후퇴가 6·25 개전 초반 김일성 군대에 쫓겨 내려갈 때였다. 우리 1사단이 청주를 지나 백마령 터널을 지날 때였다. 굵은 장맛비가 내렸다. 나는 사단장이라서 사단에 겨우 한 대만 있던 지프에 앉은 채로 잠을 잤다. 그러나 진창에서 뒹굴며 잠을 자는 병사들을 보는 내 심정은 아프고 쓰라렸다.
- 미 10고사포단의 포격 장면. 중공군 전면에 1만3000발의 포탄을 쏴 연막을 형성해 국군 1사단의 후퇴를 돕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 전쟁사>를 뒤적이다 보면 그 때의 아픔이 되살아온다. 책에는 중국 지도부가 참전 초반에 상정한 전선 이야기가 나온다. 책의 저자들이 중국 자료를 입수해 밝힌 내용에 따르면 후방에서 전쟁을 총괄해 지휘한 마오쩌둥(毛澤東)은 참전 직후의 주(主) 전선을 평양 이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평양과 원산을 잇는 평원선(平元線)에서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과 국군이 전선을 형성할 것으로 봤고, 그에 따라 자국 군대를 평북의 덕천 이남으로 섣불리 내려 보내지 않을 작정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아군이 당연히 평양과 원산을 사수할 것으로 보면서 그 상황에 따라 평북과 함경도의 원산 이북에 중공군을 배치할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 대동강 다리에서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평양 탈환작전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
그래서 북진을 서둘렀던 당시의 아군 사정이 통한(痛恨)으로 남는다. 우리가 좀 더 침착할 수 있었다면, 청천강 너머 적유령 산맥 일대의 이상한 기운을 좀 더 면밀히 관찰했다면, 그래서 북진을 멈추고 평원선을 견고하게 지켰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길이 270㎞에 불과한 평원선에서 숨을 고르고 먼 시각으로 한반도의 전쟁을 저울질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 적어도 평양과 원산을 대한민국의 품 안에 안고 있지 않을까.
역사적 가정은 아무래도 부질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쉬움만큼은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 때의 상황을 거론할 때는 늘 맥아더를 떠올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군을 모두 지휘했던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방심과 자만, 미군 최고의 엘리트라는 의식으로 무장해 적정(敵情)을 간과했던 오만함을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사실, 나는 요즘도 나를 찾아오는 미군 고위 장성들한테서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맥아더 장군은 실제 어떤 지휘관이었느냐”는 것이다. 맥아더에 관한 평가가 미군 사이에서도 분분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몇 가지 중대한 실수가 있었지만, 그는 위대한 군인이었다”라고. 이는 내가 미군들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나는 실제 내가 만났던 미군의 장성들 가운데 맥아더를 가장 스케일이 큰 장군이었다고 생각한다.
- 인천상륙작전을 지켜보며 만족한 표정을 짓는 맥아더와 파안대소하는 참모들.
맥아더는 ‘국가’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스케일의 군인이었다. 리지웨이가 미국 행정부의 명령에 따라 그 틀 안에서 탁월한 전략과 전술을 선보인 장군이라면, 맥아더는 그 범위를 넘어서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미국의 안정과 번영을 위협하는 적만을 상정하지 않고, 더 넓은 차원의 싸움을 내다본 사람이었다. 그는 늘 공산주의와의 거대한 대결을 염두에 두었고, 실제 그에 따른 생각과 행동을 보여주었던 사람이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맺어진 1953년 이후에도 나는 미국을 방문할 때면 늘 우리와 함께 전선을 지켰던 미군 전우들을 찾아다니곤 했다. 같이 싸웠던 미 장성과 고문관, 직접 살을 부대끼며 전장을 누볐던 초급 미군 장교들도 만났다. 맥아더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휴전 직전인 1953년 5월, 그리고 한참 뒤인 1958년에도 미국에서 그를 만났다.
1958년 워싱턴 방문 길에 나는 그를 찾았다. 그는 아주 유명한 호텔의 스위트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가 6.25전쟁 때의 나를 기억하지는 못했으나, 두 세 차례의 만남으로 어느덧 나를 반겼다. 그는 이미 78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언뜻 키가 작아 보였다. 전쟁의 와중에서는 거대한 산맥처럼 느껴졌던 그의 어깨는 이미 기울었고, 키도 퍽 줄어든 느낌이었다.
- 1951년 3월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된 뒤 정일권 총참모장(왼쪽)과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이 반격작전을 숙의하고 있다.
이런저런 안부를 물은 뒤 환담을 나누던 그가 내 손을 잡고서는 베란다 쪽으로 이끌었다. 수행했던 우리 장교들을 제외한 채였다. 그리고서는 그가 내게 머뭇거리면서 이런 말을 했다. “백 장군, 그 때 내게 힘이 좀 있었더라면…전쟁이 많이 달라졌을거요….” 그가 직접적으로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나는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 뜻을 잘 헤아렸다고 생각한다.
그는 큰 인물이었고, 큰 군인이었다. 그러나 너무 커서 조략(粗略)함을 피하지 못했던 게 흠이었다. 세련되고 치밀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는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주역으로서의 자부심이 너무 컸다. 이런 그의 개인적인 요인에다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100개 사단이 넘는 병력을 급격히 해체하면서 생긴 미군의 전력 공백과 나태함이 겹쳤다. 이는 1950년 말 중공군 공세에 미군이 맥없이 물러선 원인들이다.
전선을 이끄는 장수는 멀리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세밀한 구석까지 미쳐야 한다. 기백과 담략(膽略)도 갖춰야 하지만, 제 스스로의 약점을 살피는 세심함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싸움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피할 수 있다. 맥아더에 관한 평가가 분분하지만, 내가 볼 때 1950년의 맥아더는 작음과 큼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장수의 ‘능소능대(能小能大)’라는 덕목에서 앞의 하나, ‘능소(작은 것에 능함)’를 갖추지 못했다.
중국은 그 와중에도 제 갈 길을 잘 찾았다. 맥아더가 이끄는 전선의 빈 구석을 봤고, 전선을 일단 평양과 원산 이북으로 설정하는 노련함도 보였다. 누가 약한지를 금세 간파했고, 자신의 주력을 약체인 국군의 전면에 집중할 줄 알았다. 앞서 소개한대로 그들은 미군이 압록강을 쉽게 넘어서지 못하도록 평북 일대에 진출한 뒤 전략적인 방어선을 설정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손자(孫子)의 ‘지피지기(知彼知己) 원칙’에도 매우 충실했다.
그러나 내가 “중공군은 강했다”고 하는 이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한반도 참전을 통해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메울 줄 알았고,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줄 알았다. 그들은 한국에서의 전쟁을 통해 스스로를 키울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점이 중국의 강점이다.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는 안목이 없다면 결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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