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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개화와 외압에서 시작된 한국근대사는 전통적 지배층이 보수 반동적 관념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외압에 휘말려 나라와 민족을 파멸로 몰고가는 성격이 농후했던데 비하여, 영세농민을 주축으로 하는 피지배 민중은 도리어 능동적으로 민족사의 새로운 진로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강하였다. 그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가 개항 전부터 성장한 동학농민의 전통사회에 대한 도전과 보국안민輔國安民·척왜척양斥倭斥洋의 사상에 입각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려는 동학농민군의 항일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개항 이전부터 영세농민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서북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 이주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영세농민들은 황무지를 개척하여 그곳을 한인의 ‘신천지’로 삼아 생활토대를 마련하고 나아가 조국독립운동기지의 토대를 만들었다. 서북간도와 연해주 등지의 이주 개척지는 역사적으로 보면 상고 이래 고구려와 발해로 내려오면서 민족의 활동무대로서 고대문화
를 형성하였던 민족의 옛땅故地이었다. 그곳은 또한 지리적으로 일의대수一衣帶水만 건너면 국내에 진입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특히 독립운동사에서 큰 줄기를 이루는 서북간도를 중심한 남북만주의 한민족해방투쟁사는 이 일대에 형성된 대규모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오늘날 중국 안의 한민족인 ‘조선족朝鮮族’의 원형이 바로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이주한 한인들이다. 간도와 한민족 역사의 상관성은 바로 이와 같은 점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근대사에서 지칭하는 간도는 백두산의 동북방, 두만강 대안의 북간도와 백두산의 서남방,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국외 한인사회가 형성되었던 북간도는 연길延吉·화룡和龍·왕청汪淸의 3현縣과 흔히 훈춘琿春현 등 4개 현이 중심이 되었으나, 넓게는 액목額穆·돈화敦化·동녕東寧·영안寧安등 4개 현도 아울러 지칭하기도 하였다.
북간도에는 주맥인 노야령老爺嶺산맥과 흑산령黑山嶺산맥에서 뻗어나간 지맥들로 형성된 무수한 구릉과 분지가 있고, 부루하통하[希爾哈通河]·해란강·가야하[嘎呀河]·두만강 등 4대 하천을 젖줄로 하여 골짜기마다 한인의 개간 농경지가 펼쳐졌다. 북간도의 하천 중에서도 부루하통하와 해란강이 큰 편이다. 해란강은 백두산에서 동북으로 뻗은 장백산맥이 흑산령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한 청산리靑山里에서 발원한 후 동쪽으로 흘러가 두도구頭道溝와 용정촌을 지난다. 부루하통하는 서 노야령산맥의 가운데 위치한 합이파령哈爾巴嶺에서 발원해 명월구明月溝와 토문자土門子, 그리고 동불사銅佛寺를 거쳐 북간도 제일의 도시인 연길의 마반산磨盤山에서 해란강과 합류한 뒤 도문圖們에서 다시 두만강과 합류하게 된다.
한편 북간도와 대칭을 이루는 서간도는 백두산 서남쪽, 압록강 너머의 혼강渾江, 파저강 또는 동가강일대를 중심으로 송화강 중상류지역까지 아울러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서간도에는 집안輯安·통화通化·유하柳河·
회인懷仁·관전寬甸·임강臨江·장백長白·무송撫松·안도安圖·흥경興京, 현 新賓·해룡海龍 등의 여러 현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고조선의 역사가 깃들여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발흥지로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이 깊은 지역이다. 그 중에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는 환도산성·오녀산성을 비롯하여 광개토대왕비·장수왕릉 등 고구려의 위업을 상징하는 유적·유물들이 널려 있다. 서간도는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산간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백두산 서쪽으로 장백산맥이 가로놓여 있으며, 요동반도에는 반도의 주맥인 천산산맥千山山脈이 이어지는 등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기는 하나, 압록강과 그 지류인 독로강禿魯江·자성강慈城江·혼강 유역에는 충적지대가 곳곳에 형성되어 있으며,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제외하고는 표고 1,000m 내외의 기복이 완만한 노년기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국경지대를 넘으면 산지와 구릉에 둘러싸인 표고 200m 미만의 평원이 펼쳐진다. 이 지역의 기후는 만주 중에서는 온난한 편으로 강수량도 풍부하여 사람이 살기에 비교적 적합한 조건을 구비하였다. 註1)
이와 같은 서북간도 도처에 평야와 분지, 그리고 구릉지를 따라 한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개간농경지에는 다양한 농작물이 재배되고 있었다. 조·옥수수·고량·기장·콩 등의 밭농사도 크게 성행했지만, 이주 한인사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농업은 역시 하천유역의 저지대와 습지에서 일으킨 벼농사였다. 이주 한인이 시작한 벼농사는 후일 만주 농업경제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주곡으로 등장하였을 정도였으며, 그 전토의 대부분은 한인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개간되었다.
역사적으로 한민족은 고대로부터 간도를 비롯한 만주지방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단군조선 이래로 고구려와 발해에 이르는 10세기 초
까지 서북간도를 비롯한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는 한민족의 활동영역에 들어있던 민족의 옛땅으로, 민족문화 발전의 중요한 터전이 되었던 영역領域이다. 그 뒤 고려조에 들어와 1107년에는 예종이 도원수 윤관尹瓘을 파견하여 이 지역에 웅거하고 있던 여진족을 정벌하고 북방 척경拓境을 단행하였다. 이때 윤관은 두만강 이북 700여 리를 개척하고 9성을 쌓았다. 9성 가운데 하나인 공검령성公嶮嶺城은 선춘령先春嶺 동남, 백두산 동북의 소하蘇河 강변에 위치하였고, 선춘령에다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 새긴 척경비를 세운 것으로 고지도와 그밖의 여러 고문헌에 전해진다. 또한 여말 이성계李成桂가 용흥전 동북지역에서 활동할 때 두만강 건너 알동斡東을 중심으로 그 지역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 복속시켰다는 사실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이 전하고 있다. 게다가 조선조 성종 때에는 남이南怡장군이 일시 두만강을 너머 영고탑寧古塔, 寧安까지 복속시킨
고사가 전해진다. 그 이래로 명조明朝 말엽까지 국경문제로 중국과 분쟁을 일으킨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명이 망한 뒤 중원을 차지한 여진족 청淸은 1658년 간도를 봉금지대封禁地帶로 선포하여 중국인과 한인의 이주를 엄금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봉금지대는 조선의 변경 주민들이 인삼 등을 채취하고 수렵과 벌목에 종사하던 생활무대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생계를 영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도강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봉금지대 설정 이후 발생하게 된 월경죄인越境罪人 처벌문제가 조선과 청과의 외교문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註2)
청의 강희제는 1712년 오라총관烏喇[吉林]總管 목극등穆克登으로 하여금 백두산 일대를 탐사하고 양국간의 국경선에 대하여 조선과 약정하게 하였다. 강희제는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토문강土門江 동남은 조선 땅, 서북은 청국령이라고 국경을 자의적으로 획정하고는 목극등에게 토문강과 압록강 사이의 영역을 사정토록 한 것이다. 이때 목극등은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으로 10여 리 떨어진 압록강과 토문강의 발원지점에 “서쪽으로는 압록강이고 동쪽으로는 토문강이다. 그러므로 강이 나뉘는 고개 위에다 돌을 새겨 기록한다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라고 새긴 정계비를 세웠던 것이다. 이른바 ‘백두산정계비’가 그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러시아의 거센 남침 위협에 대항해 봉금정책을 폐지한 청나라는 1880년대에 들어와 적극적인 간도 개간정책을 실시하였다. 한편 이 무렵 관북 변경의 주민들은 목극등이 백두산정계비에 기록한 토문강은 분수령 정계비가 있는 곳에서 발원하여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고, 두만강은 정계비에서 건곡乾谷과 구릉을 넘은 원거리에 있는 지점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곧 비문대로
라면 현재의 북간도 일대가 청국령이 아니라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한청 양국간에 간도 일대의 국경 감계勘界문제가 야기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간도 감계문제를 해결코자 1885년 조선측의 감계사인 안변부사 이중하李重夏와 중국측 훈춘부통琿春副統 덕옥德玉 등 양국의 대표간에는 회령會寧에서 감계회의를 개최하며 정계비를 현지 답사하였다. 이어 1887년에도 수차의 회담을 가졌다. 하지만 양측의 주장이 확연히 달라 합의점을 도출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양국간의 감계문제는 미결과제로 남아 있던 중에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註3)
그 동안 한국정부에서는 간도지방에 거주하는 수많은 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1902년 이범윤李範允을 간도시찰사로 파견한 뒤 이듬해에는 다시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에 임명하여 간도 거주 한인의 호구와 인구를 조사하여 지방행정제도와 조세제도를 갖추도록 조처하였다. 간도관리사로 부임한 이범윤은 이주 한인을 압박하는 청의 관리와 군인을 구축하고자 무장단체인 충의대忠義隊라고도 부르는 사포대私砲隊를 조직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러일전쟁에서 승세를 굳히고 을사5조약을 강제한 일제는 1907년 8월 용정龍井에 한국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세우고 간도 전문가인 재등계치랑齋藤季治郞를 소장에 임명함으로써 간도 침략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일제는 우선 대륙침략정책의 일환으로 간도지역이 한국의 영토임을 주장하고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배경하에서 청일간에 1909년 9월 4일 이른바 ‘간도협약’이 체결됨으로써 한민족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청간의 야합野合에 의해 간도 영유권이 일방적으로 중국에 넘어가고 말았다. 일제는
간도협약에서 대륙침략에 필수조건이 되는 신민둔新民屯과 법고문法庫門 사이를 비롯한 수개의 만주 철도 부설권과 무순撫順·연대煙臺 등지의 채탄권採炭權 획득을 위한 교환조건으로 간도지방 영유권을 완전히 청에게 양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이주 한인에 의하여 개척되어 대규모의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있던 두만강 이북 약 18만 2,000여 리의 땅을 소위 일제 보호국시기에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때 상실한 간도는 서쪽으로는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여 서북으로 노야령산맥을 거쳐 태평령太平嶺·석두령石頭嶺·황구령黃口嶺에 연결되는 훈춘지방을 포함하는 광활한 지역이다. 일제에게 국권을 침탈당한 한국은 토문강土門江과 도문강圖們江이 두만강豆滿江을 지칭하는 같은 강이라는 청의 억지 주장이 문헌자료와 객관적인 방법에 의하여 확실하게 입증되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주 한인이 피와 땀으로 개간한 옥토가 일제의 대륙팽창정책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註4)
19세기 중엽에 들어와 한인들이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서북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본격적으로 이주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왕조 말에 조성된 기아와 빈곤 등 열악한 경제상황을 타개하는 데 있었다. 그 이전에도 변경지대의 한인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간도 땅에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타작한 곡식을 가지고 돌아오는 ‘계절출가이민季節出稼移民’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조선후기 정치기강의 해이와 탐관오리의 발호, 그리고 빈발하는 민란 등도 도강 이주를 촉발시킨 중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영·정조 이후 노론이 득세하면서 순조·헌종·철종 3조에 걸쳐 세도정치가 자행되고 있었다. 외척 권신들이 왕명의 출납에서부터 인사행정에 이르기까지 전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파행적인 인사행정이 자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왕실의 권위는 실추되고 국가기강은 날로 해이해져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상징되는 탐관오리들의 대민수탈이 누적되면서 민중의 생활고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삼남三南을 비롯한 전국 각처에서 민란이 빈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민란으로 사회불안이 가중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 민중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북상하는 사례가 빈번해졌던 것이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서북간도는 한국과 연접해 있어서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변경지대에서 압록강과 두만강만 건너면 바로 서북간도로 들어갈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주 여정이 용이하고 또한 국내와 비슷한 산천지형이 낯설지 않아 서북지방의 빈민이 쉽게 간도로 이주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한인의 간도 이주를 급격히 촉발시킨 계기는 서북지방을 휩쓸었던 이른바 기사己巳년인 1869년 대재해大災害부터였다. 1869~1871년간에 함경도와 평안도지방을 비롯한 서북지역에 사상 유례가 없는 대흉년이 들었다. 이 기간에 겨우 초근목피로 연명하였던 서북지방의 주민들은 영양부족으로 얼굴이 누렇게 되었고 몸은 퉁퉁 부었거나 풀독에 죽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제대로 구휼책도 강구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빈민들은 정치적·사회적 처지와 입장을 고려할 여지도 없이 다만 연명을 위한 방책으로 국금國禁을 무릅쓰고 도강 이주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註5)
이 무렵 회령부사會寧府使로 부임한 홍남주洪南周는 기아에 허덕이는 주
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두만강 대안 간도 개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향호鄕豪인 이인회李寅會로 하여금 주민들을 권유하여 월강원서越江願書를 제출토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인수개간引水開墾을 월강 명목으로 설정토록 하고 두만강 대안을 ‘사잇섬’, 곧 간도間島로 명기하도록 지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간도라는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도 유력하다. 이인회는 부사 홍남주의 부탁에 따라 월간사업越墾事業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는 주민 다수를 동원하여 인수개간원서를 부사에게 제출하였고, 부사는 즉시 이를 수락하는 허가를 내리게 됨으로써 개간을 위한 도강 이주가 합법적으로 공인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註6)
그 동안 국법으로 도강을 금지하던 간도지역에 대한 개간 허가 소식이 알려지자 원근 군읍도 호응하였다. 빈민들의 도강 이주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주민의 수가 격증하게 됨에 따라 황무지도 매우 활발하게 개척되어 갔다. 그리하여 불과 수삭만에 100여 정보의 황무지가 개간되었을 정도로 급격하게 농경지가 늘어났다. 이를 일러 1880년의 경진개척庚辰開拓이라 지칭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한인의 간도 이주를 행정적으로 강력하게 뒷받침해준 인물이 1883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에 임명된 어윤중魚允中이었다. 그는 회령 등지의 변경지대를 순회하면서 간도 개간문제를 직시하고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 ‘월강죄인을 죽여서는 안된다越江罪人不可殺’고 하며 종래의 변방정책을 수정해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는 간도의 개간지에 대하여 토지 소유권을 정부 차원에서 인정해주는 문서인 ‘지권地券’을 교부하여 한인의 간도 이주를 실질적으로 승인해 주었다.
한편 1880년대에 들어와서는 청 정부측에서도 밖으로 러시아의 거
센 남하정책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간도개척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따라서 한인 이주를 적극적으로 초치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1883년 조선과 길림성 당국간에 체결된 「조길통상장정朝吉通商章程」에 근거하여 청 정부에서는 1885년 화룡욕和龍峪, 현 용정시 智新鄕에다 통상국通商局을 설립하고 광제욕光霽峪, 현 용정시 光開鄕 光昭村과 서보강西步江, 현 훈춘시 三家子鄕 古城村에 통상분소通商分所를 설립하였다. 통상국을 설립한 목적은 경제적인 수익보다도 이주 한인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데 있었다. 그 당시 간도에는 성현省縣의 지방 관리가 없었기 때문에 통상국이 이 곳에 거주하는 주민까지 행정적으로 통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어 세 곳의 통상국분소을 월간국越墾局蓋杞으로 고치고 두만강 이북으로 길이 700리, 너비 50리 되는 광범위한 지역을 한인 이주민을 위한 특별개간구로 획정하였다. 이 결과 한인 이주민의 수는 더욱 급증하게 되었다. 註7)
북간도 이주 초기 단계에서는 한인들이 두만강변의 무산·종성·회령 등지에서 도강한 뒤 강 기슭의 산골짜기를 따라 해란강 이남 일대, 곧 두만강변에서 멀지 않은 분지와 산기슭에 촌락을 형성하였다. 그 중 대표적으로 한인촌락이 형성된 사례가 명동촌明洞村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이주민의 수가 급증하면서 한인들은 더욱 멀리 북상하여 해란강을 건너 부루하통하와 가야하 이북과 이서 지방으로 깊숙히 이주 정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북간도 도처에 한인마을이 자리잡게 되었다. 註8)
1890년대에 들어와 이주 한인의 간도 개척은 내강內江 혹은 마도강馬刀江 영안嶺內이라고도 부르는 오지에까지 미쳐 황전荒田을 개척하는 추세가 급증하였다. 따라서 간도 전역에 걸쳐 한인촌락이 형성되었고, 간대 일대에는 의관문물이 마치 국내와 흡사한 양상을 띨 만큼 크게 변모하
였다. 註9)
한인들이 북간도에 이주 정착하게 되자 각지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북간도 한인들이 처음으로 수전농水田農을 실시한 것은 1900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두만강 대안의 용정시 개산둔진開山屯鎭 천평 일대와 용정 부근 해란강변의 서전대야瑞甸大野일대가 최초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다. 註10)
1860년대 이후부터 일제의 대한침략이 심화되는 1905년 을사5조약 이전까지는 한인들이 대체로 이와 같은 이유와 배경하에서 서북간도 이주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이주민 가운데서는 북간도의 경우에는 함경북도, 서간도의 경우에는 평안북도 출신이 특히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894년에 실시한 재만 한인동포의 출신지 조사에서도 조사대상 인원 65,000명 가운데 함북 출신이 32,000명, 평북 출신이 14,400명이었고, 1904년에는 78,000명 가운데 함북 출신이 32,000명, 평북 출신이 23,500명이었다. 통계숫자로 보더라도 간도에 이주한 한인 가운데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의 함북과 평북 출신이 70% 이상에 달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註11)
근년 중국 내의 ‘조선족’은 1987년을 기준으로 총 170만 명에 달하고 있다. 그 가운데 요녕성 거주 조선족이 19만 8천여 명, 흑룡강성 거주 조선족이 43만 1천여 명인 데 비하여 길림성에는 110만 4천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註12)
1905년 을사5조약 전후부터 한인의 간도 이주는 경제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과 경제수탈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망명자, 곧 항일독립운동자의 이주가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즉 일제의 식민지화정책이 가시화되는 1905년 을사5조약 이후부터 1910년 국치 전후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 활동하던 항일운동자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망명하여 새로운 활동방향과 근거지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동기에서 망명 이주한 한인들은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국내에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도 비중 있는 지위를 가지고 있던 인물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국내에서 항일전을 수행하던 항일의병의 북상 망명은 항일무장투쟁의 국외확대인 동시에 무장투쟁의 새로운 국면 전환이었다. 의병의 북상 망명은 일제의 무력탄압이 가중되던 1908년 하반기 이후 더욱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병은 일제군경의 탄압을 피하고 새로운 항전 근거지를 구축하기 위해 북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서북간도로 건너가 장기지속적인 투쟁방략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북상 망명한 항일의병은 이미 1910년 전후부터 서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8년간에 활동한 관북지역 의병의 경우는 그와 같은 북상 망명의 추세를 뚜렷이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로 파악된다. 함북 경성鏡城의병의 핵심인물들인 이남기李南基·최경희崔瓊凞를 비롯해 김정규金鼎奎·지장회池章會 등이 1908~1909년 무렵 북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집단 망명하
게 되었다. 또 함남의 북청·삼수·갑산 일대에서 영웅적인 항일전을 수행하던 홍범도洪範圖·차도선車道善 등이 서북간도와 연해주 일대로 넘어와 각지를 전전하며 항일활동을 지속하며 재기항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훈춘 일대에서는 조상갑趙尙甲이 거느리는 다수의 의병이 항일전을 벌여 나갔다. 또한 박만흥朴萬興·김창규金昌奎·노우선盧禹善 등은 백초구百草溝에서 항일단체인 포수영砲手營을 조직하고 러시아제 연발총 240여 정으로 무장한 채 북간도 의병의 핵심인 조상갑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연해주 의병의 일원으로 이범윤의 휘하에 있던 방병기方炳起를 비롯하여 황모黃某 이름미상·장선달張先達 등이 각지에 분산되어 있었고 수십 명 규모의 의병부대가 국내의 일제 침략기관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註13)
이와 같이 간도로 망명한 항일의병은 1919년 3·1운동 이후 무장항일전에 의한 ‘독립전쟁론’ 구현 분위기가 급속하게 확산되자 각처에서 새로운 형태의 독립군단을 편성하게 되었다.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과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 등이 그와 같은 범주에 들어가는 대표적인 독립군단인 것이다.
한편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던 민족운동자들도 을사5조약 이후 대거 망명 이주하게 되었다.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 구상은 이들의 망명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북간도의 경우, 국망을 예견한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여준呂準 등이 일제의 한국통감부가 들어선 1906년부터 용정촌을 독립운동기지로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한 뒤 1906년 8월경 용정촌에 정착하여 민족주의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열었다. 다음으로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착수된 곳이 북만주의 밀산부密山府다. 밀산부
의 독립운동기지는 헤이그 사행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이상설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의 한민회장 김학만金學萬을 비롯하여 정순만·이승희李承熙 등이 중심이 되어 1909년 여름부터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중러 접경지대에 위치한 흥개호興凱湖 북쪽의 중국령 밀산부 봉밀산蜂密山 일대에 한인들을 집단 이주시켜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고 한인 자제의 교육을 위한 한민학교韓民學校를 건립하면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해 나갔다.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이상설 등의 선발대가 북간도로 망명한 이후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용정촌은 물론 북간도 각처로 민족운동자들의 망명 이주가 계속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빈민들의 이주도 더욱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조선총독부의 한 통계에 의하면 1910년 9월부터 1911년 12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북간도로 이주한 한인수는 17,753
명으로 집계되었다.
이 무렵 대종교 계열의 민족지사들도 대거 북간도로 망명하여 무장항일전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곧 대종교의 창시자인 나철羅喆을 비롯하여 그 중요 임원인 서일徐一·계화桂和·박찬익朴贊翊·백순白純·현천묵玄天默 등도 북간도 연길·화룡·왕청 일대로 망명하여 도처에 한인학교를 세우고 민족주의교육에 진력하였다. 대종교 인물들은 화룡현 삼도구 청파호靑波湖에 대종교 북도본사北道本司와 하동河洞에 남도본사南道本司를 세워 선교하면서 왕청 덕원리德源里를 비롯해 풍락동風樂洞·청파호 등지에도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주의교육에 심혈을 쏟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북간도에서는 1860년대 이래 영세 궁민들의 이주로 형성된 대규모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을사5조약 이후 다양한 계열의 민족운동자들의 망명 추세가 증가하고 있었다. 민족운동자들의 망명은 결국 이 지역의 대규모 한인사회를 규합, 항일민족운동 전력의 극대화를 구상한 결과였다. 곧 이 시기 망명 지사들은 일제와 독립전쟁을 결행하여 조국광복과 민족해방을 달성하는 것을 최고의 이념으로 삼고 있었다. 이를 위해 민족운동자들은 항일민족운동의 기반이 되는 교육·종교·실업 등 각 방면에 걸쳐 심혈을 경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더욱 조직적이고도 효과적인 항일민족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자치단체의 설립을 필요로 하였고, 그 결과 1913년 1월 북간도지역의 한인자치와 민족운동을 도모하기 위한 결사인 간민회墾民會의 결성을 보게 된 것이다.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자들이 다양한 형태의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은 한인자제들의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이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해 내는 민족주의교육이었다. 그러므로 1910년대가 되면 북간도 각처에 형성된 한인마을 어느 곳에나 규모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한인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한 통계에 의하면, 북간도의 연길·화룡·왕청·훈춘·안도 등 5개 현에서만 1916년까지 존치된 여러 형태의 한인학교는 총 158개교에 달하였으며 재적 학생수도 모두 3,879명에 이르렀다. 註14) 북간도 민족주의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과 일제하 북간도 민족주의교육기관의 본산인 명동학교明東學校를 비롯해 와룡동臥龍洞의 창동학교昌東學校, 소영자小營子의 광성학교光成學校, 두만강변 자동子洞의 정동학교正東學校, 나자구羅子溝의 대전학교大甸學校, 훈춘 대황구大荒溝의 북일학교北一學校 등이 북간도지역 민족주의 교육기관 가운데 두드러진 예이다.
북간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간도에 한인이 대규모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부터이다. 청이 봉금령을 선포한 후에도 서북지방 변경주민들은 월경죄를 무릅쓰고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이주를 단행한 사례가 있었다. 그 중에서 1831년경 임강현臨江縣의 모아산冒兒山 북방으로 한인 두 가구가 이주한 것이 그 시초였던 것으로 보인다.
1845년 이후 봉금령이 느슨해지자 평안도 변경 주민들은 압록강 대안 임강현 일대의 황무지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1849년에는 충청도 출신 수명이 후창군의 대안 삼도동三道洞으로 이주하였고, 이듬해에도 7도동에 십수명의 이주가 있었다. 또 1852년에는 함경도 단천 주민 10여 명이 노령하老嶺下로 이주한 것이 그 사례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추세에서 1869년의 기사년 대재해는 북간도의 경우와 마
찬가지로 서간도 이주의 큰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기사년 이후 3년 동안에 평안도 출신의 한인 이주민이 6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이 서간도로 이주한 것이다. 註15) 이로써 서간도에도 대규모의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872년에 기록된 『강북일기江北日記』에 의하여도 1869년에 한인들이 대거 이 지방으로 이주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주민의 대부분이 본적지를 무산·후창·초산·강계·영변·선천 등지로 밝혀 평안도 출신임을 알려준다. 이에 강계군수는 정부의 명도 받지 않고 한인의 월경을 인정하고 서간도 일대를 28개 면으로 분할하여 평안도의 행정구역으로 연장하여 그 중 7개 면을 강계군에, 8개 면을 초산군에, 9개 면을 자성군에, 나머지 4개 면을 후창군에 배속하기까지 하였다.
그 뒤 청은 1875년 서간도의 봉천성현재 요녕성에 대한 봉금령을 정식으로 폐지한 뒤 적극적인 이주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인의 서간도 이주는 합법적이고도 대규모로 단행될 수 있었다. 1897년에 통화·환인·관전·신빈 등지로 이주한 한인이 이미 8,722호에 3만 7천 명이나 되었다. 註16)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이주 한인을 보호할 목적으로 1897년 서상무徐相懋를 서변계관리사西邊界管理使로 임명하여 서간도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평북관찰사 이도재李道宰는 1900년에 변경지방을 순시하고 이주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시 서간도지역을 적절히 배분하여 후창·자성·강계·초산·벽동 등 각 군의 관내에 배속시키는 한편 이주민에게 호세로 30전을 상납케 하였다. 이도재는 또 압록강 연안의 각 군에 충의사忠義社를 조직하여 비도匪徒의 작폐를 막게 하였다. 충의사는 이택규李澤奎가 사장으로 있으면서 서간도지역에서 이주민의 안
전을 유지하는 임무를 맡고 지방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註17)
그 뒤 1902년에도 정부에서는 서간도지역에 의정부 참찬 이용태李容泰를 보내 향약을 실시하였으며, 1903년 5월에는 양기달楊技達 등을 파견해 서간도 일대를 시찰케 하였다. 이때 한인 이주민의 수는 장백·임강·집안·통화·환인·관전·단동 등지에 속하는 32개 면에서 총 9,754호, 45,593명에 달하였다.
서간도 한인 이주는 북간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905년 이후 더욱 급증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망명이 동기가 된 민족운동자들의 이주 경향도 뚜렷하였다. 의병전쟁이 탄압을 받게 되면서 의병계열의 인물들이 북상 망명하게 되고, 신민회 계열의 민족운동자들이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당면 목표로 서간도로 집단 이주하였던 것이다. 註18) 이때 압록강 하류지역에서 서간도로 이주한 경로는 안동安東, 현 단동에서 육로로 관전·환인·통화·유하현을 거친 뒤 점차 길림吉林 또는 장춘長春 등 내륙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상룡李相龍의 『석주유고石洲遺稿』에 의하면 1913년에 서간도를 포함한 봉천성 관내에만 28만 6천여 명의 이주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한편 초기에 이주한 한인들은 대개의 경우 청의 심한 압제를 받으며 삶의 터전을 개척해 나갔다. 청은 서간도 각지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지방관을 파견하여 제반 행정기구를 증설함으로써 이주 한인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 나갔다. 한편 청 정부는 이주 한인의 황무지 개척을 장려하는 토지대 납부를 통하여 그 소유권을 인정해 줌으로써 한인의 이주 정착을 수용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한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며 변발호복辨髮胡服을 강요하고 청
국 입적을 종용하였다. 이에 대다수의 한인은 치욕을 참으며 머리를 땋아 올리고 중국 옷을 입는 ‘변장운동變裝運動’을 벌여 청의 압제를 피했지만, 그 심적 고통은 극심하였다. 註19) 게다가 한인들에게는 각종 세금이 과중하게 부과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총 30여 종에 이르는 잡세 가운데는 민족차별의 성격을 띤 것이 적지 않았다. 한인들이 논농사를 하고 소를 사육한다고 하여 ‘수리세’와 ‘소사양세’를 부과하였으며, 또 관청에 드나드는 ‘문턱세’, 남에게 고용된 이들에게 부과되는 ‘고용세’, 그리고 ‘인두세’, ‘굴뚝세’, ‘소금세’, ‘입적료’ 등을 바치는 경우도 생겼다. 게다가 중국 지주들의 착취도 극심해 소작료가 3~4할, 혹은 5할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혹한 착취하에서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겨웠으며 살림은 비참하였다. 註20)
서간도지역의 한인사회는 처음 파저강波猪江이라고 부르던 혼강琿江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수전농을 위한 경작지 확보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이주 한인들에 의한 벼농사는 1840년대부터 혼강 유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861년에는 안동의 삼두랑두에서도 벼를 심었으며, 1875년에 통화현 하전자 한인들은 소택지와 늪지를 개간하여 벼를 시험적으로 재배해 상당한 수확을 거두었다. 그리고 1880년에는 안동의 당산성과 봉성현 소만구지역의 한인들이 유하지역으로 이주하여 벼농사에 성공하였다. 이와 같이 통화의 상전자·하전자·소만구, 유하의 삼원포, 신빈의 왕청문, 안동의 당산성·삼도랑구, 봉성의 사리채 등지는 한인들이 비교적 일찍 수전을 경작한 지역으
로 알려져 있다. 그 뒤 1900년 무렵 유하현에 거주하던 일부 한인은 해룡·동풍·서풍·개원 등지로 다시 이주하여 수전을 개간하였다. 1908년경 이들은 다시 영길현으로 이주하여 수전을 개간하였으며, 이후에도 송화강과 휘발하를 따라 점차 휘남·반석·교하 등지로까지 지역을 넓혀 갔다. 註21) 이와 같이 1910년까지 서간도에서도 수전의 대부분은 이주 한인들이 개간한 것이다. 밭농사를 위주로 하던 서간도에 한인들이 들어가 수전농을 개간함으로써 이 지역의 경제력 증진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신의주 대안의 안동현과 봉성현, 그리고 관전현은 양국의 교통로에 해당되어 일찍부터 한인의 내왕이 잦았던 지역으로 한인 이주가 초기부터 집중된 지역이다. 1904년의 이주 한인수를 보면 안동安東·봉성鳳城현이 420호에 1,420명, 관전현이 770호에 3,720명으로 조사되었다. 1905년 이후에는 이주민이 더욱 증가하여 안동현의 시가지에 모여 사는 경우도 있었다. 1911년 압록강 철교가 준공되어 안봉선安奉線이 개축되자 한인들의 서간도 이주는 더욱 증가하였다. 1921년 현재 안동·관전지역의 한인구는 1911년에 비해 4.5배나 증가하였다. 註22)
통화현의 경우 한인 이주는 1894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혼강의 우안 동강촌에도 한인에 의해 수전이 개간되었고, 혼강의 좌안 동강 지류 이밀하二密河 연안지방과 흥경가도興京街道 지방에도 한인 이주민이 자리잡고 있었다. 1912년 현재 통화현의 한인수는 2,055호에 10,275명에 달하였다.
환인현의 한인 이주는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것으로 나타나지만, 토지가 척박하고 비적이 횡행한 까닭에 이주민의 수가 여타 지역에 비해
많지 않았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한인이 거주하기 시작한 일면성一面城·횡도천橫道川·상루하上漏河 등지가 대표적인 한인 거주지였다. 1907년 현재 한인의 수는 514호에 2,005명 정도였다. 註23)
1910년대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유명한 유하현 일대에도 이미 1880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한인 이주민이 정착하고 있었다. 삼원포三源浦와 대두자大肚子·마록구馬鹿溝 등지가 그 중심지였으며, 1905년경에는 유하현 시내에도 들어와 거주하였다. 유하현 일대는 벼농사에 특히 유리한 지역으로 알려져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한 많은 한인이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왔다. 이들은 대사탄大沙灘과 삼통하三通河의 원류지방인 남산藍山과 상류지방인 고산자孤山子·대우구大牛溝 등지에 거주하여 수전을 일구었다. 1912년 현재 한인구는 1,062호에 5,356명으로 집계되었다.
신빈현의 경우에도 1900년경 신빈보新賓堡 부근의 각지에서 한인들은 수전을 일구며 정착하였다. 그후 안봉선의 개통 후에는 경상도 출신의 한인들이 무순을 거쳐 왕청문旺淸門·두도구頭道溝 등지에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註24)
서간도는 항일의병 등의 민족운동자들에 의해 북간도에 앞서 독립운동기지로 구상된 지역이다. 서간도지역 가운데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된 관전현과 유하현 일대에 민족운동자들이 최초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북상한 항일의병들에 의해서였다.
서간도 독립운동의 발상지인 삼원포 일대를 가장 먼저 답사한 것은 백범 김구이다. 그는 1895년 동지 김형진金亨振과 함께 삼원포를 두 차례
나 답사하였다. 註25) 그 뒤 을미의병 실패 후 1896년 유인석柳麟錫의 제천의병 계열의 인물들 다수가 양서지역을 경유해 통화현 오도구五道溝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이 지역이 한민족의 부흥기지로 구상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유인석을 따라 서간도로 이주한 동지들이 70~80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집단적 망명이 이루어졌다. 유인석은 서간도가 독립운동기지의 적지適地인 점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이 땅을 보건대 … 근래에 큰 가뭄으로 인해 한인으로 이주해 오는 자가 만여 명 이상이고 나머지 땅에도 수만 호를 수용할 수 있다. 토지는 매우 비옥하여 한 사람이 경작하면 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1년을 경작하면 3~4년을 먹을 수 있다. 콩과 조가 수화水火와 같고 인심은 매우 후하다. 그 중에 가끔 의기 있는 자가 있어 더불어 일을 도모할 만하다. 註26)
또한 평북 의병장 조병준趙秉準·전덕원全德元을 비롯하여 황해도 평산의진의 이진룡李鎭龍과 조맹선趙孟善·우병렬禹炳烈·백삼규白三圭, 그리고 강원도의 박장호朴長浩 등도 서간도로 망명한 대표적인 의병세력으로, 후일 서간도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인물들로 부상하게 된다. 특히 3·1운동 이후 서간도지역의 대표적인 독립군단 가운데 하나로 편성된 대한독립단은 이들 세력을 근간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한편 의병 계열의 망명 가운데는 이미 순국한 왕산 허위許蔿의 일가족이 1912년에 서간도로 망명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 왕산의 형 성산 허겸許Ⅱ이 왕산의 처와 자식 등 유족들을 거느리고 통화현으로 망명을 단행했던 것이다.
항일의병 다음으로 서간도지역으로 망명한 민족운동자 가운데 중요한 인사들이 신민회 계통의 애국계몽운동자들이다. 이들의 서간도 망명은 곧 신민회가 추진한 독립군기지 건설사업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신민회의 원대한 계획에 따라 이회영李會榮과 이시영李始榮의 6형제를 비롯해 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김창환金昌煥·주진수朱鎭洙·김대락金大洛 등의 선발 망명대는 1911년 초까지 환인현 횡도천과 유하현 삼원포 일대에 도착해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주는 망명자금을 마련한 뒤 대가족을 거느리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압록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이회영 일가의 경우에 11남매 50여 명의 대가족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일시에 처분하고 1910년 말을 기해 압록강을 건넜으며, 안동 천전川前의 김대락의 경우에는 66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전토를 방매한 뒤 50여 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심지어는 만삭의 임부였던 손부와 손녀까지 대동하고 압록강을 건넜던 것이다. 명문가 출신의 김대락은 ‘분통가’를 지어 일제의 압제를 피해 망명길에 오른 비장한 심정을 여실히 토로하고 있다. 註27)
1910년 국치 전후 지사들의 망명은 강렬한 항일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뚜렷한 신념을 실천하는 행동이었다. 이와 같은 선발 망명대를 뒤이어 일제의 삼엄한 감시속에서도 국내 각지로부터 민족지사들의 망명이 계속되고 있었다. 경북의 경우 그 사례는 두드러진다. 안동의 이상룡과 울진의 주진수가 망명한 뒤, 이들의 영향으로 영양·봉화·안동 등지로부터 1911년간에 87명이 이주를 떠났고, 1912년 9개월 동안에만 경북 각지에서 1,092명이 서간도 이주를 결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註28)
이상에서 보았듯이 1910년 국망 전후 서간도지역으로 이주한 한인은 황해도·평안도의 변경 주민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토대 위에서 항일의병과 신민회 간부 등의 민족운동자들이 정치적인 동기에서 집단적으로 망명 이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서간도로 망명한 이들 지사들은 북간도의 경우와 같이 항일독립운동의 구체적 실천방안을 모색하는 동시에 이주 한인사회의 경제력 향상문제 등의 해결에 고심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한인사회를 하나의 단체로 규합, 세력을 극대화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 결과 1911~2년 간에 한인 자치단체인 경학사耕學社와 이를 계승 발전시킨 부민단扶民團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신흥학교를 설립한 것을 비롯해 삼광학교三光學校·동화학교東華學校·배달학교倍達學校 등 수많은 민족주의 교육기관을 각지에 세워 한인 자제들의 교육사업에 진력해 갔다.
북만주는 현재 중국의 동삼성 중 흑룡강성 일대를 지칭한다. 북만주는 북쪽으로 흑룡강, 동쪽으로는 우수리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 시베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내몽고 자치구와 연결되고, 서남쪽은 장춘·길림 등지와 접하며, 동남쪽으로는 돈화·연길로 북간도와 연접해 있다. 흑룡강성의 중심은 하얼빈이며 이곳을 거점으로 동지철도 연선지역과 송화강 유역이 전개된다.
서북간도의 연장으로서의 성격을 띤 북만주는 한인사회의 형성 시기
가 서북간도보다 뒤질 뿐만 아니라 인구 또한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한인사회가 여러 곳에 점점이 산재된 형태로 형성되었다. 註29) 북만주 중에서도 이주 한인사회와 가장 관련이 깊은 지역은 동지철도 동부선 일대와 송화강 유역의 여러 곳들이다. 특히 송화강 하류 일대의 요하·밀산·호림·의란·방정 등지는 한인들이 개척하기 전에는 인구가 희박하고 농경보다는 수렵이 주가 되었던 곳들이다.
북만주 최초의 한인촌으로 알려진 곳은 기사년1869 대재해 무렵부터 이주가 시작된 동녕현 삼차구三岔口, 곧 고안촌高安村이다. 이곳으로 한인들이 집중되면서 1913년부터는 ‘고려인이 편안하게 거주한다’는 뜻을 지닌 고안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훈춘이나 노령에서 대수분하大綏芬河나 대두천하大 川河를 거치는 경로는 동녕을 경유하여 영안寧安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영고탑이라고도 불리우는 영안은 북만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도시이며, 그 주위에 동경성·신안진·황기둔 등 이주 한인촌이 여러 곳에 형성되었다. 註30)
북만주지역에는 중국정부의 행정 통제력이 비교적 약하였고, 만주국 성립 이전까지는 일본 영사관의 경찰력도 별로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던 지역이었다. 1910년대에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된 한인사회가 192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북만주는 광대하여 이주 한인사회도 널리 분산되어 있었다. 또한 북만주 이주민들은 이미 연해주와 서북간도 등지에서의 이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들은 최초 이주지에서 사회적·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그 타개책으로 재차 이주를 결행한 경우가 많아 경제적으로는 보다 열악한 경우가 많았다.
1920년대 북만주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단체인 신민부와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 그리고 한국독립당 등은 대체로 중동선中東線 철도 연변의 이주 한인사회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또 한인사회가 형성된 곳에는 한인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민족주의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대종교·기독교 등의 종교운동과 청년회·부녀회 등 사회단체 활동도 비교적 활발하였다.
북만주 가운데 1910~1920년대에 한인사회가 형성된 중요지역으로는 1천여 명의 한인사회가 형성된 하얼빈을 중심으로 그 외곽 취원창聚源昶 일대, 중동선 연변의 아성阿城·오상五常·서란舒蘭·주하珠河 일대, 그리고 고안촌을 중심으로 한 동녕지방 등지를 들 수 있다. 1924년 현재 북만주 한인구는 대략 3만 명 정도로 집계되고, 북만주 전역에 걸쳐 비교적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길림·액목·영안·목릉·동녕현 등지에 2~5천 명의 한인 이주민이 비교적 밀집해 거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