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협인석탑 (寶篋印石塔)
보협인탑이란 『보협인다라니경』을 그 안에 안치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한국에서는 유일한 석조 보협인탑이다.
중국 오월(吳越國)의 마지막 왕인 충의왕 전홍숙은 인도의 아소카왕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8만 4천기의 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다는 고사를 본따
금, 동, 철 등의 재료로 소탑 8만 4천기를 만들고
그 속에 일일이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5개의 돌만 남아있어
완형은 아니지만 한국에 하나밖에 없는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탑의 형식은 한국 석탑의 일반형식과 전혀 달라서
기단과 탑신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고 완전한 형태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뚜껑을 덮은 듯한 네모난 상자모양의 돌 2개를 포개어 놓은 후,
그 위로 귀를 세운 머리장식을 얹어 놓은 모습이다.
불상이 새겨진 육면체 위체 4각형의 받침돌을 놓고
다시 그 위에 육면체가 놓이는데 4면에 부처님의 전생설화가 새겨 있다.
이 탑몸돌 윗면 중앙에는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둥근 사리구멍이 남아있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대평리 탑골의 절터(구룡사로 전해진다)에 있던 것을
1967년에 동국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세웠다.
기단석 각면에 2구씩의 나한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탑신괴임석에는 당초문(덩굴무늬)과 양연문이 조각되어 있고,
탑신 각면에 석가본생도 조각과 사리공이 있다.
뚜껑돌에는 덩굴무늬와 48개 연꽃무늬를 새겼고,
상륜부에는 말의 귀 모양을 한 연꽃무늬 판을 네 귀퉁이에 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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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양식과 형태는 중국 오대(五代) 오월국충의왕(忠懿王)전홍숙이
조성한 8만 4천 탑의 모습을 모범으로 하고 있다.
10세기 중반경 전홍숙은 많은 살상이 이루어졌던 전쟁 후 병이 발병하자,
탑을 조성하여 서사한 보협인다라니경을 탑안에 두고 공양하겠다고 서원하였다.
이후 치유되자 인도 아육왕의 사례에 따라 탑을 만들고
그 안에 서사한 보협인다라니경을 납치(納置)하여 그 탑을 대량으로 유포하였다.
당시 전홍숙 가문에서는 지금은 행방이 전해지지 않는 무현(鄮縣)의 아육왕탑을
가져와 항주 나한사(羅漢寺)에서 공양하였는데, 기록에 전하는 이 탑의 양식이
전홍숙이 배포한 탑의 양식과 동일하여 이를 차용하여 탑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전홍숙은 당시 천태 서적을 구하기 위하여
고려와 일본에 사자를 보냈으며 이 때 자신이 조성한 아육왕탑을 닮은 보협인탑을
다른 선물들과 함께 전했다고 한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에 다수의 전홍숙 발원의 명문이 있는 보협인탑들이 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남한 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전홍숙 조성의 보협인탑의 예가 확인된다.
우리나라는 후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오월국을 비롯한 남중국과 왕래가 잦았는데,
전홍숙탑이 조성되는 시기인 고려 광종대에 천태학을 중심으로
오월(吳越)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전홍숙은 천태 서적을 구하기 위해 고려에 50종의 보물을 보냈고
고려 승려 체관(諦觀)이 오월에 입국했으며
고려 원공국사(圓空國師)지종(智宗) 등의 30여 명의 승려와
적연국사(寂然國師)영준(英俊) 등의 유학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전홍숙 조성의 보협인탑이
10세기 후반경에 전래되었고 이어 이 탑의 영향을 받은 석탑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한편 보협인탑에 납치된 보협인다라니경은 1007년 전후에 고려에서 개판되었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동국대학교에 가면 볼 수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