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 있는 그리움/한영옥
―수련
누워서 생각하면 사람들 모두 순하게만 떠오른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보고 싶다고 소리지르게 된다
지르는 소리는 다시 나의 가슴으로 지면서
눈물 한 자락은 또 눈물 한 자락으로 이어져
나는 눈물에 잠겼다가 다시 떠오른다
어서 일어나야지, 사랑해야지
그러나 뻔히 나는 일어서지 못한다
나의 눈물이 흐르는 동안만 사랑스러운 사람들
일어나 흘러 보면, 흘러서 맞닿으면 언제나 망가졌던 만남
망가지는 것이 그저 까마득하여 누워서 키우는 그리움
이 눈물의 결 위에 나의 몸은 오늘도 홀로 떠서
홀로 문 열었다 다시 닫는다
<시 읽기> 누워 있는 그리움/한영옥
―수련
한영옥 시인은 자신의 삶과 시 속에 ‘환한 길’을 내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환한 길’이라니요? 그 길은 밝은 길이고, 열린 길이며, 따스한 길입니다. 그러나 이런 길은 내기도 어렵고, 찾기도 어려우며, 만나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더라도 미망과 미혹, 무명과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 고통과 난처함에서 벗어나고자 이런 길을 자신들의 삶과 몸속에 품어 안고 싶어합니다.
‘환한 길’에 대한 그의 갈망은 위 시에서처럼 ‘사랑’의 문제에 골몰하게 합니다. 사랑을 통하여 ‘환한 길’의 창조와 그것과의 만남이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직시해보면 인간이란 존재가 진정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인간의 본성은 자신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이기적 속성과 자기애라는 나르시시즘에 바탕을 두고 움직이지 않는가요?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정신분석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기대어 말하자면, 사랑은 받는 것이지,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받고자 하지, 사랑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 행복하지, 사랑할 때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고, 사랑이란 그것의 이기성과 나르시시즘적 속성 때문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갈망의 형태로만 존재할 뿐 진정으로 성취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사랑받고자 할 뿐 사랑할 수 없다는 이 모순 속에서 우리는 각자 사랑을 그리워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위 시는 한영옥의 시집 『안개편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위 시에서 한영옥 시인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관념성과 추상성에 대해 고백합니다. 사람들을 직접 만나지 않고 집 안에 수련처럼 누워서 생각하면 그들이 모두 순해 보이고, 그들에게 사랑한다고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마침내는 눈물까지 흐르는 감정의 지극한 상태에 도달하지만, 그것을 누워 있을 때의 감정일 뿐, 사랑의 현실적인 실천은 이루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영옥 시인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어서 일어나야지, 사랑해야지/그러나 뻔히 나는 일어서지 못한다/나의 눈물이 흐르는 동안만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사랑이란 영원히 ‘동사형’이 아니라 ‘명사형’이고, ‘머릿속의 일’일 뿐, 현실 속의 일은 되기 어렵다는 뜻이 이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교환이론에 의하면 사랑이란 ‘공정거래’가 이루어질 때의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인간이란 누구나 이기성과 자기애를 원동력으로 삼아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이런 이기성과 자기애가 서로 적절하게 충족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공정거래란 물질적인, 경제적인 거래만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형, 무형의 모든 것의 주고받음을 말합니다.
현실 속에서의 인간과의 만남이란 사랑의 성취보다 그것의 망가짐을 확인하는 일이라는 점을 한영옥 시인은 위 시에서 “일어나 흘러 보면, 흘러서 맞닿으면 언제나 망가졌던 만남”이라는 말로써 이야기합니다. 위 작품의 부제이기도 한 수련처럼, 우리는 누운 자리에서 겁도 없이 관념적인 사랑의 황홀경을 넘나듭니다. 그러나 날이 밝아 막상 세상으로 나아가면 그 황홀하던 사랑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공격과 방어, 갈등과 분노, 긴장과 경쟁, 불화와 좌절 속에서 우린 허둥댑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념은 다시 우리를 사랑으로 유혹합니다. 너는 사랑할 수 있다고…… 내일은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이런 관념의 유혹은 일면 유익합니다. 그 힘에 기대어 우리는 망가진 만남을 추스르고 내일 아침에 다시 출근버스에 올라탈 수 있기 때문이다.
위 시의 한영옥 시인은 이런 관념의 유혹이 지닌 본질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련처럼 누워서만 그리움을 키우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랑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정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직함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정직성은 분명 사려 깊은 모습이지만, 사랑의 현실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은 아픔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한영옥 시인은 관념 속에서 홀로 사랑의 문을 열었다 닫는 자신의 자폐성과 한계성을 위 시의 끝 부분에서 표현합니다. 수련처럼 누워서 사랑을 추상화로 꿈꾸고 그 추상화의 문이나 여닫는 자신의 실상을 그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 속에서 우리는 인간된 자로서 함께 공감하며 아픔을 느끼게 되고, 사랑은 물론 사랑을 통한 환한 길의 창조도 어렵다는 사실 앞에서 또한 인간된 자의 비애를 잔잔히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봅시다. ‘환한 길’에 대한 꿈과 ‘사랑’에 대한 소망은 인간이 세운 너무 높은 목포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높은 목표, 숭고한 목표는 때로 인간을 힘 있게 만드는 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높은 것일 때, 우리는 목표와 현실 사이의 거리 속에서 현기증을 느끼거나 우왕좌왕하며 생을 소진합니다. 그래서 저는 조심스럽게 제안해봅니다. 사랑의 홀로 누워 있는 관념이 공간에서나 일시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이라면, 아예 복거일이 말했듯이 사랑 대신 조금 너그러운 삶을 사는 데 목표를 두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득도한 자와 같은 ‘환한 길’이 삶과 몸 속에 창조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미등처럼 작은 빛의 길이라도 삶과 몸의 한쪽에 품어 안는 것에다 목표를 두고 수정을 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사랑의 진화가 가능하다면 미래의 시계는 지금보다 더 나아질지 모르지요. 그러나 아직도 넘을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우리는 한영옥 시인처럼 ‘환한 길’과 ‘사랑’을 꿈꾸며, 아프게, 밤새워, 고민하고, 시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꿈을 조금 낮추며 우리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