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보는 법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면서 내게 생긴 변화 중 하나는 말수가 적어졌다는 점이다. 정말로 필요한 말이 아니면 가급적 안 하게 되고 휴대폰 통화는 웬만해서는 마스크를 벗어도 되는 사적인 공간에서만 한다.
그 대신 시선은 좀 더 풍요로워진 것 같다. 사람과 사물을 전보다 훨씬 유심히 바라본다. 특히 마주치는 사람의 눈은 부지불식간에 뚫어져라 보게 된다. 마스크를 쓴 얼굴에서 보이는 것은 눈밖에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본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눈은 인간의 감각 기관 중에서 가장 복잡한 기관이다. 옛부터 눈은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창구라 간주되었다. 그래서 ‘마음의 창’이라 불렸다. 현대의 신경과학자들은 “우리는 눈이 아니라 뇌로 본다”고 말한다. 그만큼 눈은 인지적인 기관이란 뜻이다. 동방 정교의 이콘은 예외 없이 성인의 눈은 커다랗게 그리고 입은 상대적으로 매우 작게 그린다. 눈에 부여된 영성적 차원을 짐작게 한다.
이렇게 복잡한 눈의 기능을 과학자이자 그리스도교 신학자인 테야르 드 샤르뎅 신부는 생명 활동의 핵심이라 규정한다. “본다는 것-생명 전체가 이미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물의 완성도나 생각하는 존재의 뛰어남은 무언가를 꿰뚫어보는 능력, 또는 본 것을 종합하는 능력에 달려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본 것을 어떻게 종합해서 삶 속에 반영해야 하는가. 고(故) 차동엽 신부가 생전에 즐겨 인용했던 성 요한 23세 교황의 정언에서 그 답을 찾아본다. “모든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식별하고, 작은 것을 시정하라.”(Omnia videre, multa dissimulare, pauca corrigere)
인간의 생물학적 시야는 대단히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보고”는 다 보라는 것도, 많이 보라는 것도 아닐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까지 잘 살펴보고 헤아림으로써 생각의 방향을 조정하라는 뜻일 것이다. 요컨대 사람과 사물을 깊이 통찰하고, 현상 너머에 숨겨진 삶의 본질로 시야를 확장하라는 뜻이리라.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교육은 근본적으로 잘 보는 법의 계발이었다. 플라톤은 모든 영혼에는 진리를 배워 익힐 능력과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이 있다고 전제했다. 그 눈이 원래 가지고 있는 시력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보아야 하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게 해주는 것이 교육이었다. “영혼 전체의 방향을 이 변화의 세계로부터 돌려서 마침내 영혼의 눈이 실상을 바라보고, 또 우리가 ‘선’이라 칭한 최고의 광명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교육이다.”
그렇다면 결국 제대로 본다는 것은 일상 속에서 선을 식별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을 실천하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바라봄은 하루아침에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기술의 숙련이 으레 그렇듯 제대로 보는 법을 익히려면 인내와 노고와 반복적인 학습이 필요하다. 모든 현상의 이면에는 언제나 ‘다른 것’이 있다.
청결한 사무실의 이면에는 그 사무실을 청소해 준 사람이 있다. 문 앞에 배달된 상자 이면에는 그것을 가져다준 택배 기사가 있다. 식탁 위의 과일 이면에는 지난여름 태풍으로 눈물을 흘린 농부가 있다. 일상 속에서 ‘이면의 다른 것’을 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독려해야 하는 학습의 출발점 아닐까. 의도와 지향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