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원의 이방인들
샴발라(Shambala)라는 단어는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단어이다. 같은 뜻이지만 오히려 샹그리라가 친근하게 느껴질 것이다. 샴발라는 상그리라의 티베트어 원어이다. 이 세상 어디인가에 존재하지만 우리하고는 시간의 차원이 다른 유토피아를 의미한다. 시간이 정지된 낙원에서 생로병사에서 고통 받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바람 부는 티끌세상에서 유한적인 삶에 매달려 살아야만 하는 중생들에게는 글자 그대로 꿈같은 이상향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불노장생을 꿈꾸며 이곳을 찾아 해매는 호사가들의 부질없는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지만 그 결과는 신비스런 전설만 더할 뿐이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청학동, 중국의 무릉도원, 그리고 히말라야의 샹그리라 등등이 전설로만 존재하는 곳들이다. 이 이상향의 개념은 동양권 보다는 서구 쪽에서 생소한 것이었는데 샹그리라를 처음으로 그들에게 알린 소설이 있었다.
바로 1933년 출판되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제임스 힐튼의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이다. 우리나라에도 흑백영화로 오래전에 TV에서 상영된 바 있어서 필자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을 히말라야 신드롬에 걸리게 한 이 작품은 히말라야 인근의 전설을 소설화한 것으로 실제 카일라스 아래의 숨겨진 계곡을 무대로 설정하여 시간이 정지된 이상향인 불루문(Blue moon) 계곡을 신비스럽게 묘사하여 구미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히말라야 미스터리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소설의 내용처럼 ‘낙원에의 초청장’을 가지고 들어가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을 선택된 행운아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왜냐면 그들은 그 곳에서 다시 나오지 않았기에, 이쪽 세상에서는 그냥 실종이란 딱지를 부처 종결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실종자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하여간 히말라야 인근의 마을에는 이런 실종자를 찾는 전단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구게왕국 유지에 새로 조성된 마을의 유일한 여관 벽에도 실종자를 찾는 전단이 붙어 있었다. 젊은 일본인이었는데 이를 보는 나그네의 가슴은 착잡해 지기 마련이다.
샴발라 왕국은 해석에 따라서 3곳으로 인식된다. 그 첫째는 히말라야 어딘가에 있다는 숨겨진 공간적인 곳이고 두 번째로는 초능력적 영혼들만이 사는 다차원의 우주 공간에 있다는 실체적이지 않은 곳으로 주로 신지학(神智學)같은 오컬트(Occult)적 관점에서 보는 다소 허황되게 보이는 신비의 왕국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인간 육체 속의 의식과 신경회로의 중심체인‘짜끄라(Cakra)’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왕국이다.
말하자면‘시간의 수례바퀴의 가르침’이란 수행법을 통하여 샴발라라는 영원한 풍요와 행복의 골짜기로 들어가 깨달음을 얻어 니르바나(Nirvana)라는 경지에 들어간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니까 ‘깔라짜끄라(KalaCakra,時輪)'라는 단어가 바로 샴발라의‘키워드’인 셈이다.
적당한 기온과 물기와 토양이 어울러져야만 풀과 나무와 꽃이 피듯이 샴발라왕국의 대문이 약속된 시간과 장소 그리고 준비된 이들에게만 열린다는 사실은 우리가 끊임없이 진리를 구하기 위해 의식의 진화를 이룩해나가야 함이 우리 인간의 이번 생의 숙제라고 시사해주는 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서양인들에게 유토피아로 꼽힌 샹그리라가 다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 1997년 9월이다. 중국 윈난(雲南)성 정부가 대규모 기자회견을 열어 “본 성내의 띠칭주(迪慶州) 중덴현(中甸縣)이 바로 샹그리라"라고 주장한데서 촉발되었다. 원래 윈난성은 각계의 전문가 50여명이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소설 속에 나오는 자연·문화적 환경이 중덴과 일치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중국은 그곳을 1992년까지는 개방하지 않았다. 티베트의 미개방정책과 맞물려 있는 변경에 위치한 소수민족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그 주된 이유였다. 그러다가 2001년 12월 중국정부는 그곳을 아예‘샹그리라현(香格里拉縣)’으로 이름을 바꾸어 개방하고 2003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시켰다. 그러니까 어느 날 갑자기 지도상에 현존하는 샹그리라로 둔갑을 한 것이다. 그 이유야 뻔하다. 소설의 유명세를 빌어 국제적인 관광지로 개발하여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한 목적이다. 물론 그곳이 샹그리라라는 소설의 무대라는 학자들의 논리는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작 소설의 저자인 제임스 힐턴은 그 근처에도 와 보지 않은 채 소설을 썼기에 그 누구도 단정은 내릴 수 없다. 하여간 중국인들의‘비단장사 왕서방 기질’탓으로 샹그리라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셈이다. 원래 샹그리라로 손꼽힌 곳은 비단 중덴만이 아니었다. 인도, 네팔, 부탄, 쓰촨(四川)성 등 히말라야 인근의 그럴듯한 마을들이 저마다 샹그리라를 내세웠지만, 그중 윈난성이 적극적으로 샹그리라 마케팅에 선수를 친 것이다.
언어학자들은 샹그리라의 뜻을 3가지로 풀이한다. 첫째로 해석으로‘샹’은 마음을, ‘그’는 소유격을,‘리’는 태양을,‘라’는 달을 뜻하여 전체적으로는“마음속의 해와 달”이라는 의미가 된다고 한다. 두 번째로는 ‘샹그’는 ‘흰 달빛’을, ‘리라’는 ‘태양’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이는 현 행정구역상의 중뎬의 옛 이름인‘일월성(日月城)’을 가리킨다는 한다. 또한 세 번째는 우리의 제일 주제인 샴발라의 사투리라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어느 것이 정답인지 확정된 바 없다.
오늘도 아침부터 길가의 노천카페에서는 카세트를 아침부터 시끄럽게 틀어대고 있었다. 요즈음 유행하는 귀에 익은 곡이어서 가사는 잘 전달되지 않았지만 무슨 곡이냐고 물었더니 아예 테이프를 통째로 건네준다. 무심코 훑어보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바로 <샴발라는 멀지 않네(香巴拉竝不遙遠)>라는 노래였기 때문이었다.
한 아름다운 곳이 있다네.
사람들은 그 곳을 찾아가려 한다네.
그 곳은 사계절 항상 푸르고 꽃은 피어 있고 새는 노래하는 곳이라네.
그 곳은 고통, 근심, 걱정 없는 곳이라네.
그곳의 이름은 샴발라라 한다네.
신선들만이 사는 곳이라네.
아 ! 그러나 샴발라는 그리 먼 곳은 아니라네.
그 곳은 바로 우리들의 고향이라네.
길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샴발라를 들어가며 강 건너의 다와쫑 계곡을 바라다보는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말을 잃었다고나 할까?
다와쫑 어딘가에 샴발라가 있다는 것이 거의 현실성 있게 다가왔다. 도무지 환상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묘한 뜻을 풍기는 가사를 음미하다보니 마치 무슨 마취약에 취한 듯하였다. 50여 년 전에 이 다와쫑을 지나간 서양 승려인 고빈다도 이곳을 샴발라의 실제 모델이라고 적고 있다.
사방이 고원으로 둘러싸인 깊이 1천m도 넘는 서부티베트의 협곡에는 그 지방의 원주민들만이 겨우 접근할 수 있는 숨어있는 골짜기가 많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꽃이 만발하고 숲으로 둘러싸인 비옥한 땅과 맑은 강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아름답게 지어진 승원과 승려들이 수행할 수 있는 동굴이 수 없이 많다. 과거에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으며 살았다. 사시사철 따듯한 햇볕을 받으며 고원의 찬바람과 외부세계의 야망과 투쟁에서 보호받았던 그곳은 정말 잊혀진 낙원인지도 모른다.
이런 전설에 매료된 히말라야 마니아들의 기록은 옛날로 소급할 수 있다. 초청을 받았건, 받지 못했건 그들은 어떤 비전(Vision)을 찾아 히말라야를 넘어서 목숨을 담보로 한 모험을 감행하였다. 중세 유럽에는 아시아의 오지 카타이, 즉 중국에 기독교 왕국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13세기 유럽의 문턱까지 휩쓴 칭기즈 칸의 공포에 떨던 유럽인들은 미지의 기독교 국왕인 프레스트 존(Prest John)이 아시아의 오지에 강력한 기독교 제국을 통치한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이 전설적인 제왕이 나타나서 몽골군을 물리치고 그들을 도울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탐색대를 여러 차례 아시아의 오지로 파견하였다.
13세기 중엽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몽골군을 회유하기 위해서 사신을 몽골 조정에 보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인 플란더스 출신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기욤 드 뤼부룩(1220-1293)은 몽골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이 존재한다고 기록하였다.
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공인된 사실이다. 5세기 당시 네스토리우스가 주창한 기독교의 일파는 중근동과 중국내륙까지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예수의 신성과 인간성의 공존설을 주장해 481년 교황청으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았다. 현재 시안의 비림(碑林)에 보존된 당대진경교비(唐大晋景敎碑)에 그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드 뤼부룩은 또한 카라코람 지방의 불교사원을 기독교의 예배 장소라고 다음과 같이 보고서를 띄우면서,“시대가 흐르고 지리적 고립에 따라 기독교가 삭발하고 노란 옷을 입는 풍습으로 바뀐 것이다.”라고 결론 내렸으나 그것은 큰 오해의 첫 번째 단추였다.
이렇게 초기 기독교가 동방으로 선교의 눈을 돌려 수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였을 때 그들의 목적은 모두 프레스트 존의 왕국을 찾는 것이었다. 1145년 카발라의 주교가 교황 오런 3세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중앙아시아 오지에 기독교 장로가 국왕노릇을 하는 기독교왕국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일단의 선교사들이 설산을 넘어 어딘가에서 교왕청과 연락을 끊은 채 정착하여 이상적인 천국을 건설하였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십자군전쟁이 한창일 때여서 이 사실은 풍문으로 사방으로 전해져 수많은 이들이 그 잊힌 왕국을 찾고자 헤매었지만 결과는 전설만 더한 꼴이 되었다.
다음으로, 구게에서 2년간이나 머물며 천주교의 교당을 성립하고 구게왕비를 비롯한 적지 않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등 구게에서의 기독교 선교에 성공했던 앙드라데 신부의 이야기는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기에 다음 장으로 일단 미루어 두고 우선 앙드라데의 뒤를 이은 이방인들의 티베트 입국에 대한 후일담을 이야기해보자.
앙드라데에 뒤를 이어, 1715년 8월 14일, 두 달 동안 라다크의 레(Lhe)에 머문 뒤 설역고원으로 들어온 2명의 가톨릭 예수회 신부가 있었다. 한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의 이뽈리토 데씨데리(1684-1733)이고 또 한사람은 인도 델리에서 20년 넘게 선교활동을 해온 임마누엘 프레시어(1679-?)였다. 그들이 파견된 목적은 앙드라데의 보고가 얼마만큼 믿을 만한지를 확인하고 이 ‘악마의 가톨릭’에 대한 예수회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구게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 전설의 왕국은 폐허가 된 상태였기에 데씨데리는 여행을 계속하여 다음해 라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는 1721년까지 6년 동안 라싸에 머물면서 티베트어를 익히고 티베트불교의 사상과 문화를 연구하여 종합 보고서를 로마 교황청에 띄워서 그동안 금지되어 있던 티베트에 대한 가톨릭 선교권을 다시 예수회에 돌려 줄 것을 청하였다.
데씨데리에 의해 그동안 황당하고 기괴한 이미지로 채색되었던 티베트불교의 진정한 모습이 서양에 소개되었고 서양의 불교연구는 더욱 전문화되기 시작하였다. 놀라운 일은 데씨데리 자신이 겔룩파의 주요 경전인, 쫑가빠의「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을 독파하고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기독교의 우위를 주장해서 기독교를 선교하기 위한 「교의문답서」를 티베트어로 썼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타 선교사들의 편견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유럽인으로서 선교를 위해 티베트에 들어왔던 17~19세기 가톨릭 선교사들은 티베트 사원의 지옥도나 머리와 팔과 다리가 여러 개 달린 괴물같이 보이는 무서운 호법신(護法神)들의 탕카 그림에 경악해서 티베트불교를 중국불교보다 더 사악하게 마치 악마의 집단처럼 묘사하는 사태는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 영국 탐험가들도 티베트불교를 라마교(Lamaism)라는 비칭으로 부르며 신도들의 복종만을 요구하는 정신적 테러리즘이라고 혹평했으며, 1904년 영국군의 티베트 침략에 종군하고 나중에「라싸의 베일 벗기기」란 베스트셀러를 저술한 에드문드 챈들러(Edmund Chandler)도 티베트 승려들을 미신을 수단으로 혹세무민하여 민중에 악정을 베푸는 사악한 무리로 보았다.
자기 것만을 유일한 진리라고 인식하고 있는 이런 제2, 제3의 선교사들은 현대, 지금 이 시각에도 티베트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몇 푼의 떡밥과 함께 이른바 복음(福音)을 주입시키며 순진한 티베트 민중들의 가치관을 흔들어 대고 있을 것이다. 티베트 민초들에게 천수백 년 동안 체질화된 종교적 확신이 무너질 때의 그 혼란스러움은 어찌하라하고 말이다. 설사 그들의 믿음이 아무 가치도 없어 보이는 미신으로 보일지라도, 단지 오지에서의 악조건 하에서의 선교성과라는 소속교단의 선전효과를 충족시키기 위해 티베트인들에게 개종(改宗)을 강요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문제이다.
각설하고, 그런데 1920~60년대에 들어서는 그 악마의 사교집단이 지구의 미래를 구할 참된 동양의 지혜와 종교로 탈바꿈하게 되는 대반전이 이루어진다. 세계공황과 1,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서구의 근대성과 인류의 미래에 회의를 느낀 서구인들에게는 뭔가 색다른 존재가 절실하게 필요하였는데, 그럴 때 신지파(神智派·theosophy)라는 일단의 신비주의자들이 출현하여 그 대안으로 세계의 영적 중심센터로서 티베트를 부각시켰던 것이었다.
그 신드롬은 그 후 중국의 티베트 점령에 이어진 달라이 라마의 망명으로 이어져 여전히 서구사회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중이다. 그 결과 비록 국토는 잃었지만, 티베트불교는 세계적으로 뻗어나가는 소득을 얻게 되었고 그들의 지도자인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 성하는 노벨평화상을 받으며 일약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앙드라데 신부에 의한 최초의 천주교당 설립
샴발라의 소문은 그렇게 오랜 시간 퍼져나갔지만 티베트고원은 여전히 서구인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전설일 뿐이었다. 그렇게 수백 년이 흐르다가 1624년 6월 마침내 포르투갈의 예수회 신부인 앙드라데 신부(Padre A. Andrade, 1580-1634)가 구게왕국에 도착하였다.
당시 인도의 무굴제국에 선교를 위해 파견되었던 포르투갈 출신의 이 신부는 동료 수사인 마누엘 마르쿠스와 함께 인도의 선교본거지인 고아(Goa)를 출발하여 갠지스의 지류 스투레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행 끝에 히말라야 골짜기의 마라고개(5,700m)를 너머 티베트 땅에 다다랐다. 이들의 목표는 중세 기독교도들의 왕국을 히말라야 오지에서 발견하여 기독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자는 원대한 꿈이었다.
당시의 구게왕은 티따시 사빠데였는데, 눈 깊고 코 큰 이들 서양인들을 처음 본 왕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그대들의 사원(교회)은 중생들에게 무슨 것을 가르치는가?”
이에 앙드라데가 말했다.
“존경하는 국왕이시여, 우리들은 천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이에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의를 보여 일단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다해 음식과 숙소를 마련해주고는 이내 주판알을 튕기기 시작하였다.
무릇 고대로부터 정치와 종교는‘악어와 악어새 관계’라는 비유로 부를 수 있던 관계였다. 왕권의 권위와 통치에 이롭다고 생각되면 적극 장려하였고, 해롭다고 생각되면 배척하던 미묘한 관계였다. 며칠 동안 생각을 거듭하던 사빠데왕도 역시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2년 전에 왕위에 올랐지만, 층층시하의 왕족들과 고위 승려들의 견제로 제대로 왕 노릇을 할 수가 없었기에 생각 끝에 당시 구게왕국 6백년간 이어 내려온 불교의 지나친 전횡에서 그의 왕으로서의 권위를 되찾고자 그 견제세력으로 이 새로운 종교를 이용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일단 왕은 반대하는 신하들과 승려들에게 “진리는 진리를 해칠 수 없는 것이다. 낯선 사람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그것이 참된 진리라면 붓다와 보살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타이르면서 교회를 지어주고 신부의 활동도 도와주라고 명령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대접에도 불고하고 당시 앙드라데의 일기와 고아의 교구본사에 보내는 보고서는 부정적이었다. 당시 구게의 승려들이 엄청난 금과 보석을 갖고 있으면서도 청빈한 수도생활을 하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몇 십 년 동안 공부하고 날마다 고행을 거듭하고 있는 사실과 염력(念力)으로 먼 곳의 물건을 순간 이동시키거나 공중에 몸을 띄우고, 전생을 기억하고 미지의 세계와 이야기를 나누는 등의 초능력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는 자기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사람 뼈로 만든 피리, 사람 머리뼈로 만든 염주 그리고 그들이 입고 있는 법복이 고대 그림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12사도와 같은 차림이며 승단의 위계제도와 가톨릭에서도 쓰는 성수와 법구 같은 것들을 그들도 쓰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교황청으로 보내기도 했다.
여기는 세상의 끝이다. 이 불모의 오지에서 번영하고 있는 이곳의 종교는 악마들이 교회를 흉내 내어 만들어낸 ‘악마들의 가톨릭’인 것이 틀림없다. 예수회원은 결코 이곳에 발을 딛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앙드라데의 보고서는 1626년 리스본에서 간행되어 카타이, 즉 중국과 티베트에 관한 잘못된 정보를 유럽에 전하게 된다. 하여간 2달을 머물던 앙드라데는 인력과 자금의 보충을 위해 인도 고아로 돌아왔는데, 그 때 그는 사빠데왕이 고아의 주교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친서를 가져왔다고 한다.
앙드라데가 나의 땅에 와서 백성들에게 성교를 펼침을 짐도 심히 기뻐하는 바이오. 그러니 그대 라마수령(즉 고아의 주교)에게 나의 백성들에게 선교할 권한을 주겠으니, 하루 속히 앙드라데를 이곳으로 보내 나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시오.
다음해 1625년 8월 앙드라데는 또 한명의 수사와 선교에 필요한 성물을 가지고 구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열성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며 한편으로 티베트의 말과 글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카슈미르 출신 신자의 통역 없이도 원주민의 언어로 선교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4월12일 부활절에 설역 최초의 천주교회당의 주춧돌을 놓고는 왕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공사를 진행하여 8월에는 마침내 커다란 십자가를 세운 뒤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자리에는 고아에서 파견된 또 다른 수사 3명이 배석하고 국왕이하 일부왕족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는데, 특히 왕비와 한명의 왕족이 세례를 받기도하여 그들 6인의 선교단들의“아멘”소리는 거의 설역고원을 덮고도 남을 기세였다. 그 결과로 병사들이 전쟁터로 떠날 때에 신부의 가호가 행해졌고 왕이 라다크왕을 영접하려고 야외에서 야영을 할 때는 앙드라데는 왕과 함께 한 천막에서 잠자는 특전을 받기도 했다. 앙드라데는 그 후 고아로 돌아가 그 공로로 주교직에 올랐다.
이런 선교활동으로 1627년에는 12명이 세례를 받았고, 3년 뒤에는 한명의 왕비의 사촌누이와 왕자를 비롯해 100여명이 세례를 받는 성과를 얻었고 3년 뒤 왕국이 멸망할 당시에는 4백여 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불교를 미신이라 여기는 앙드라데 신부와 그 후임자들의 과격한 선교활동의 여파로 결국은 구게왕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후일 앙드라데는 고아에서, 그가 구게에 힘들게 세운 천주교회당이 파괴되고 또한 그의 후임자들이 전쟁포로가 되어 라다크왕국으로 끌려갔다는 보고를 받고는 장탄식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는 왕국이 멸망하였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확인 차 다시 선교사를 보내었다고 하지만, 그 보고서 역시 이미 구게왕국은 인적이 전무한 폐허가 되었다는 확답만 되돌아 왔다고 한다.
앙드라데의 구게 선교설을 증명할 만한 물건이 구게왕국 유지의 한 동굴에서 발견되었다고 한 때 중국 신문들이 술렁거렸다. 다름이 아니라 해골가면 북(骸骨鼓)을 겹겹이 감쌌던 헝겊과 종이에서 포르투갈어로 쓰인 중세 기독교 성경책이 대량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직접 그 기사와 사진을 본바 있었다. 워낙 건조한 곳이라 가능한 일이라 여겨진다. 또한 금세기 초에 싸파랑을 방문한 외국탐사대원들에 의해 크기가 3m나 되는 나무 십자가도 목격되기도 하였다.
구게왕국의 멸망과 그 후의 미스터리
그 동안 옛 구게왕국유지는 수백 년간 인적이 끊긴 폐허로 남아 있었기에 유적들이 발굴된 금세기 초기에는 7백년간 지탱하며 찬란한 불교문화를 자랑하던 작지 않았던 왕국이 지금부터 350년 전 홀연히 사라진 원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른바 티베트의 10대 미스터리’의 하나였다.
비록 왕국은 망했다지만, 그 후손들의 흔적은 어딘가에 남아 있어야 하지만, 지금 짜다나 싸파랑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구게왕국의 후손들이 아니고 금세기에 딴 곳에서 이주시킨 부족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번성하였던 그들의 후손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지만, 왕국의 멸망에 대해서는 몇몇 가설이 제기되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첫째는 왕국의 내부분열로 인한 자연적 쇠락이나 기후변화에 의한 주민들의 집단이주 등으로 인한 폐허설이고 두 번째로는 ‘외적침입설’인데, 근래 진행된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후자로 굳어져 가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말하자면 외적이 쳐들어와 일시에 초토화시켰다는 말이다. 그 근거로는 유적지 동굴에서 발견된 많은 고대전쟁 유물들을 들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투구와 갑옷, 방패, 화살, 돌수류탄(石彈) 등으로 고원의 건조한 기후 때문에 수백 년 동안 손상되지 않고 잘 보존될 수 있었다. 또 다른 증거로는 산 아래에서 발견된 미라동굴(乾尸洞)에서 출토된 수많은 목 없는 시체들이었는데, 역시 건조한 기후 때문에 거의 미라 상태로 발견되었다. 검시결과로는 동굴의 가장 끝에는 라마승, 그 옆으로 아이들이, 그 다음은 부녀자와 남자들 순으로 모두 목이 없는 채로 누워 있었다고 한다.
현제까지 제시되고 있는 가설에 의하면, 구게왕국의 최후의 날은 다음과 같이 그려지고 있다. 앞장에서 이야기 한바 대로, 구게왕국의 마지막 왕인 사빠데의 지나친 기독교 편향에서 파국은 다가오고 있었다. 왕국의 기독교화에 대해 왕의 동생과 원로대신들 그리고 승려들은 여러 번 왕에게 직언을 하며 우려와 경고를 하였으나 왕은 태도를 바꾸지 않고 오히려 몇몇 신부들의 부추김을 받아드려 1626년에는 라마승으로 출가한 120명의 소속 사원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심지어는 그들에게 환속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을 정도가 되었다.
마침내 1630년이 되자 망국의 검은 구름이 구게의 하늘을 짙게 가렸다. 사빠데왕은 애초에는 승려집단의 전횡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기독교를 이용하려던 것이었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지나침은 도리어 망국으로 치닫게 만든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마침 사빠데왕이 병석에 누울 때를 기다려 왕의 동생과 숙부를 주축으로 하는 일부 반역세력들은 카슈미르의 라다크왕국으로 밀사를 파견하여 적군을 불러들인 사건을 벌였다.
그렇지 않아도 오래전 혼인문제의 앙금 때문에 구게왕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던 라다크의 레(Leh)왕국으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 해묵은 사건은 18년 전으로 소급해 올라간다. 당시 왕자를 낳지 못하던 구게왕의 왕비에게서 왕자가 태어나긴 하였지만, 원인모를 정신병에 걸려 제구실을 못하자 나라에서는 온 세상의 명의를 초빙하여 왕자의 병을 치료하려고 하였으나 별무소득이자 한편 라다크왕국에 청혼을 하여 왕의 여동생을 새 왕비로 맞이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몇 번의 혼인사절이 오고간 뒤, 드디어 공주가 라다크를 출발하여 구게왕국의 수도 싸파랑에 거의 도착할 때가 되었을 때, 돌연 구게왕이 변덕을 부려 결혼을 취소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였다. 이에 새색시는 구게왕국에 들어와 보지도 못하고 본국으로 쫓겨 가는 치욕을 당하였다. 당연히 라다크왕국의 분노는 하늘에 이르렀지만, 특히 공주의 오빠인 젊은 셍게남걀왕은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당시 라다크의 국력은 구게를 침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가슴속 깊숙하게 원한으로 남게 되었던 일이 있었다.
기회를 놓칠세라, 이에 한풀이와 정복전쟁을 겸한 셍게남걀왕이 이끄는 라다크의 정예병들이 구게 내부의 반역자들의 호응을 받으며 물밀듯이 파죽지세로 밀려들어와 마침내 싸파랑 궁전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이 궁전은 앞장에서 이야기한바 있는 것처럼 일당백의 난공불락의 천연의 요새였기에 쉽사리 함락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아직도 사빠데왕에게는 충성스런 왕의 직속 친위대가 완강하게 저항하였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구게왕국‘최후의 날’은 두 가지로 이야기되고 있다. 첫째는 당시 구게국왕 이하 친위대 및 전 주민들은 난공불락의 산성에서 농성하면서 한 달 간을 버텼는데 화살이 떨어지자 주먹만한 돌로, 칼이 무뎌지면 맨몸으로, 최후의 한사람까지 싸웠다. 그러나 물과 식량마저 떨어지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목을 적군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 때 라다크 병사들은 전 구게의 백성들의 목만을 잘라 가져가고 그 시체는 한 동굴에 던져 넣었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3백년 만에 발견된 미라동굴이라고 한다.
둘째는 당시 공방전이 길어지고 겨울이 다가오자 라다크군이 철수를 검토하자, 구게왕의 동생이 고육책을 써서 거짓항복을 하고는 국왕인 친형에게 꿇어 엎드린 채로 울면서 형제의 의리를 거론하며 휴전제의를 하자 전쟁에 시달린 왕이 마음이 약해져 동의를 하고 동생을 믿고 강화조약을 맺으러 산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나 그것이 함정일 줄이야.
기다리고 있던 라다크의 병사들과 구게의 반역자들이 왕의 친위대를 살해하고 왕을 사로잡고는 산성의 잔여병력들의 항복을 강요하였다. 그러자 일부는 항복이나 자결을 하였지만, 일부충신들은 후일을 기약하고는 야간을 틈타 비밀동굴을 통해 산에서 내려와 먼 곳으로 도망을 해버렸다고 한다.
이어진 라다크병사들의 살육과 노략질에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구게왕국은 하루아침에 피비린내 가득한 폐허로 변해버렸다. 당시 구게왕과 왕비와 왕족들 그리고 기독교 선교사들은 모두 라다크로 끌려가 굴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는데, 후에 선교사들은 인도와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석방시켰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첫댓글 귀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_()()()_
너무 귀중한 자료입니다. 역시...
늘 공부를 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