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사연
동해안을 따라 질주해 온 국군 제1군단은 미군으로부터 ‘로켓 군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38선에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국민과 軍, 모두가 환호했다. 그러나 丁一權(정일권) 참모총장은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1950년 10월1일~19일까지의 전투 상황. 10월1일 한국군이 동해안의 38도선을 넘어 양양까지 진격했으며,
10월19일 평양-함흥 축선까지 전선을 확장시켰다
왜 그랬을까? 정일권 총장은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직접 “병사 1명도 38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別命(별명)이 있을 때까지 38선 남쪽에서 대기하라”는 주의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엄명했다.
“北이 38선을 먼저 깨버린 이상, 그것을 법적으로 인정해야 할 까닭이 없다. 북진하라! 조국 통일의 둘도 없는 기회다. 맥아더에게 맡긴 작전지휘권은 언제라도 회수한다. 걱정할 것 없다!”
참모총장은 정치와 軍事(군사) 사이에 끼어 고뇌하게 마련이지만, 이때도 그런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럴 무렵, 동해안의 제3사단장 李鍾贊(이종찬) 준장으로부터 다음 내용의 전보가 육본으로 날아들었다.
“前衛(전위)의 제23연대(金淙舜 대령)는 10월1일 08시, 38선에 도달했지만, 38선 북방 600야드(약 550m)의 고지로부터 맹렬한 사격을 받고 있다. 부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600야드를 전진하거나 600야드 후방의 산그늘로 후퇴하는 방법 밖에 없다. 어찌 할까?”
정일권 총장은 이 순간 “이제, 살았다!”라고 생각했다. 38선을 돌파할 구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즉각, 워커 8군사령관에게 전화를 넣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丁 총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은 회상을 남겼다.
<워커 사령관은 “맥아더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1명의 병사도 38선을 넘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38선은 자기들(미국)이 만든 것 아닌가! 그것이 北에 의해 깨졌는데, 새삼 다시 존중하자는 것인가? 38선은 이제 없는 것이다. 바로 북진시켜라!”고 엄명했다. 그 사이에 낀 나는 호된 꾸지람을 들은 기분이었다. 나는 美 8군사령관 워커 장군에게 제23연대의 상황을 설명하고 다음과 같은 조치를 요망했다.
“여기서 600야드의 후퇴를 명한다면 아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반면에 의기소침해 있는 적을 소생시킬 것이다. 또 군인으로서 敵前(적전)에서 ‘후퇴하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猛火(맹화)에 노출되어 있는 국군 제23연대의 안전을 꾀하기 위해 600야드의 전진을 허락하고 싶다!”
워커 사령관은 일순 곤란해진 입장을 감추지 않았다. 이에 내가 다시 “장병들의 생명에 관한 문제다. 후퇴하면 전진하는 것보다 희생이 많다”고 역설하자, 그제야 그는 “이것은 정치적인 필요성으로부터 생긴 문제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순전히 전술적인 행동이라는 차원에서 認可(인가)한다”고 승인했다.
바로 600야드의 전진을 명했다. 제23연대는 10월1일 10시경에 적의 진지를 점령했다. 김종순 대령이 38선 돌파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를 李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대통령은 대단히 기뻐해 눈물까지 글썽였다.>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38선을 돌파했던 1950년 10월1일. 그 후 매년 10월1일이 ‘국군의 날’로 정해졌다.
北進― ‘계속 진격하라!’
‘38선 돌파’라는 역사적 실상을 좀 상세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거기에서 북진통일에 대한 우리 국민의 염원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50년 9월30일 17시, 국군 제22연대(金應祚 중령)가 江陵(강릉)을 탈환했다. 제8사단이 강릉에서 철수한 지 꼭 90일째 되는 날이었다. 강릉에서 제22연대를 超越(초월)한 국군 제23연대는 야간 행군을 계속, 10월1일 02시경 注文津(주문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첨병은 07시경 38선에 도달했고, 김종순 연대장은 08시경 38선上에 섰다. 그러나 38선의 북쪽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북한군은 보이지 않았다.
金 연대장은 갑자기 난처해졌다. “38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러나 병력은 넘어서는 안 되더라도, 수색은 연대의 自衛(자위)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동해안의 38선은 동쪽은 바다, 서쪽은 산이기 때문에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金 연대장은 수색중대를 북진시켰다. 그런데 지프가 38선을 넘으려 하자마자, 은폐된 적 토치카로부터 일제 사격을 받았다.
이때 金 연대장은, 병력은 넘어서는 안 되지만, 포탄은 넘어도 지장이 없다고 생각해, 57mm포의 사격을 개시했다. 그 상황을 丁來赫(정래혁) 당시 제3사단 참모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제23연대가 38선에 도착하자, 북방 500여m의 基士門里(기사문리) 언덕으로부터 맹렬한 사격을 받고 있다고 하는 보고가 들어왔다. 본래, 攻勢移轉(공세이전) 직후부터 38선을 넘을 것인가, 아닌가가 화제로 되어 있었던 것이지만. 상부로부터는 “일단 머물면서 북진을 준비하라. 越境(월경)은 別命(별명)에 따라야 한다”고 지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부대의 안전을 위해 기사문리 언덕의 적을 驅逐(구축)할 것인가, 아니면 후방의 산그늘로 물러날 것인가―양자택일의 문제가 박두했다.
그래서 그 일을 직접 육본에 품의한 다음에, 38선에 급히 올라가 보니 맹렬한 총· 포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38선에는 遮蔽物(차폐물)이 없었고, 북진은 중지되어 있었다. 손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적을 제압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500∼600m 물러나면 戰前(전전)의 38선 경계진지가 있었지만,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는 상황이고,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러서는 것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다.
“연대장은 어디에 있는가?”고 물으니 “전방에 있다”고 한다. 마침내 최전방까지 와서 보니 김종순 대령이 스스로 57mm 대전차포를 지휘해 북쪽을 향한 포격을 하고 있었다. 포탄이 지시한 목표에 명중할 때마다 “좋다! 하사로 임명한다!”, “잘했다! 중사로 특진시킨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射手(사수) 희망자가 늘어나 하루 수십 명의 하사관이 탄생하는 진귀한 현상이 일어났다. 지금처럼 승진에 정원이라든가 예산의 범위 등이 없었던 시절이라 士氣(사기)를 고무하는 데에는 현장 특진이 가장 빠른 지휘법이었던 것이다.
최전선을 둘러보고 江陵(강릉)의 사령부로 돌아오니 “부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전술적으로 필요한 한도에서 당면의 적을 驅逐(구축)해도 좋다”는 취지의 명령이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곧 “元山(원산)을 향해서 돌진하라”는 북진명령이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1951년 10월11일 원산 점령
그러나 제23연대에는 무엇인가의 사정으로 ‘공격명령’이 그때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그런 무렵에 金 연대장이 망원경으로 전방을 관찰했다. 왼편 산으로부터 강원도 襄陽邑(양양읍)에 걸쳐서 울창한 松林(송림)을 이루고 있었다. 金 연대장은 제3대대장 許亨淳(허형순) 소령을 불러 우선 “비밀을 지켜라”고 엄명한 뒤 “몇 명만 데리고 無線(무선)을 휴대해 양양읍 부근에 잠입하라! 마을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만약 越境(월경)이 발각되면 연대장이 모든 책임을 진다”고 명했다.
11시30분 무렵, 許 소령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그 내용은 “목표에 도착했다. 적이 마을 안의 쌀 창고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고 있다. 불을 꺼야 하나? 명령받은 대로 가만 있어야 하나? 지령을 바란다”는 것이었다. 金 연대장은 “거기에 있으라”고 지시하고, 바로 지프를 타고 강릉 사령부로 달려갔다. 그러던 도중에, 별판을 단 지프와 조우했다. 정일권 참모총장과 姜文奉(강문봉) 작전국장이 탑승한 지프였다.
丁 총장은 “부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필요한 전술행동으로서 600m 전방의 적을 격파해도 좋다”고 하는 명령이 이미 일선에 전해졌다고 생각했던 듯 “언제 38선을 넘었는가?”라고 물었다. 넘어 갔다면 대통령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종순 대령은 아직 그런 경위를 몰랐고, 38선 북쪽 600야드의 적을 공격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가 알고 있던 명령은 아직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독단으로 許 소령을 38선 이북에 잠행시켜 놓기는 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넘지 않았다”고 답하자, 丁 총장은 놀라서 “왜 넘지 않았는가?”라며 힐문하듯 반문했다. 丁 총장은 북진공격을 명했는데도 “아직 넘지 않았다”는 대답을 듣자 낙담한 듯했다.
그래서 金 대령이 “38선을 一步(일보)라도 넘으면 엄벌에 처한다는 명령이 있어서 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걱정이 되어 사령부에 문의하러 가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丁 총장은 “그럴 리 없지 않은가”라고 중얼거리며 지프를 38선을 향해 달리게 했다.
38선에서 丁 총장은 “아침 8시 여기에 도착했다면서 왜 지금까지 넘어가지 않았는가?”라고 金 대령을 힐문했다. 이에 金 대령은 丁 총장의 의도를 깨닫고, 이미 양양읍에 잠복시킨 許 소령을 무전으로 호출했다. 그리고 “지금 참모총장께서 와 계신다. 君의 현 위치를 틀림없이 보고하라”라고 명령하고, 수화기를 丁 총장에게 건넸다.
丁 총장은 許 소령의 보고를 받은 후 매우 흡족한 얼굴로 “계속하라!”고 격려하고는, 金 대령을 뒤돌아보며 “당신, 해야 할 조치는 다 해놓고, 뭘 그리 벌벌 떨고 있냐?”며 싱긋 웃었다고 한다.
38도선 돌파와 북진 / 출처: 육군군사연구소 刊 <1129일간의 전쟁, 6·25전쟁>
1950년 10월1일, 金白一(김백일) 소장의 국군 제1군단이 동해안에서 38선을 돌파했음은 앞에서 썼다. 이후 破竹之勢(파죽지세)로 북진, 10월10일에는 元山(원산)에, 10월17일에는 함흥-흥남에 돌입했다.
劉載興(유재흥) 소장의 국군 제2군단은 10월5일부터 春川(춘천)과 東豆川(동두천) 정면에서 38선을 넘었다. 예하 제6사단(김종오 준장)은 춘천 → 화천 → 金化(김화) → 平康(평강)을 따라, 예하 제7사단(신상철 준장)은 연천 → 철원 → 평강을 따라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인 10월10일 육본으로부터 “(제2군단의) 일부로 원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에 제2군단은 제6사단을 평강으로부터 원산으로 돌진시키고, 제7사단을 평강으로부터 谷山(곡산)에 진출시키고, 제8사단(이성가 준장)에 대해서는 伊川(이천)을 거쳐 중부전선을 북진토록 조치했다. 그러나 원산은 10월11일 제1군단에 의해 먼저 함락되었다.
제6사단이 평강을 출발했던 것은 10월12일, 원산에 들어갔던 것은 10월14일. 그리고 15일에는 西進(서진)해서 陽德(양덕)으로 향발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제6사단을 원산으로 돌진시킨 육본의 의도는 지금도 알 수 없다.
헛수고를 했다는 것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만, 육본으로서는 험한 산지로만 고생스럽게 북진해온 제2군단에게 중요 지역인 원산 공략의 一翼(일익)을 담당시키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산은 10월11일 완전히 점령되었던 만큼 그런 의미는 없게 되었다.
평양 1번 入城 경쟁
평양 점령은 적의 남침 이래 국군의 悲願(비원). 평양 1번 入城(입성)을 놓고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자존심을 건 일대 경쟁을 벌였다. 그것은 차량 50대를 보유한 ‘거북’과 차량 1000대를 보유한 ‘토끼’의 경주였다.
평양 공략 당시의 전투 요도 / 日 學硏社 刊 <조선전쟁(上)>
서부전선을 맡은 미 제1군단에서 평양 공략의 主攻(주공) 부대는 미 제1기병사단이었다. 미 제1기병사단은 10월9일 정오에 開城(개성) 정면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助攻(조공)을 맡았던 국군 제1사단은 이틀 뒤인 10월11일에야 연천군의 高浪浦(고랑포) 정면에서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主攻(주공)이란 결정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격역량을 집중하는 전술집단, 助攻(조공)은 주공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수행하는 부대를 말한다. 그런데 미 제1군단의 평양 向發(향발)이 일제히 이뤄지지 않았던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었다.
1950년 10월 초, 미 제1군단에 평양 공략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미 제1군단에 배속되어 있던 국군 제1사단장 白善燁(백선엽) 준장은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 제1군단의 다음 작전구상은 그를 실망시키는 것이었다.
<미 제1기병사단은 主攻(주공)으로서 京義本道(경의본도)인 서울 → 신의주 간 국도를 따라 진격하고, 미 제24사단은 助攻(조공)으로서 九化里(구화리) → 市辺里(시변리) → 遂安(수안)의 平壤道(평양도)를 따라 공격하고, 한국군 제1사단은 군단의 豫備(예비)로서 황해도의 海州(해주) 부근을 掃討(소토)한다.>
또한 유엔군의 全般(전반)계획에서도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과 중부전선의 국군 제2군단의 作戰地境(작전지경)은 江東郡(강동군)과 遂安郡(수안군)을 남북으로 잇는 선에서 갈라져 있었고, 평양의 포위는 元山에 상륙할 예정의 미 제7사단이 맡게 되어 있었다. 즉, 평양 공략에는 한국군 부대가 하나도 참가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점령 후의 북한을 대한민국의 통치 하에 두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국군 부대에 의한 평양 공략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군은 북한을 평정하면 일정기간 軍政(군정)을 시행할 방침이었다. 그 때문에 평양 공략에 한국군을 제외시키려 했던 것 같다.
미 제1군단 예하 국군 제1사단장인 백선엽 준장은 이 계획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미 제1군단장 밀번 少將(소장)에게 달려가 “평양 공략은 한국군에 있어 6.25 남침전쟁 이래 최대의 悲願(비원)”이라면서 미 제24사단과의 임무교대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밀번 군단장은 “貴官(귀관)의 사단에 차량이 몇 대 있는가?”라고 물었다.
“50대…”
“미국 사단은 1000 대를 보유하고 있어 언제든 기동화가 가능하다. 맥아더 원수는, 평양 공략은 물론 압록강까지의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아마도 소련과 중공에게 개입의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본다. 따라서 제1선의 사단은 기동력이 풍부한 사단이어야 한다. 차량 50대를 보유한 사단으로서는 곤란하다.”
白 사단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보병만으로 가장 먼저 돌진해 보이겠다. 차량화가 된 사단일지라도 적의 저항을 받으면 병사의 발로 싸울 수밖에 없잖으냐? 北으로 올라갈수록 산은 험해진다. 한국군 병사는 산에 익숙하다. 따라서 미군보다 속도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잠자지 않고 하루 24시간 계속 쳐 올라가면 적의 저항이 가장 강할 것으로 보이는 京義本道(경의본도)보다도 빨리 돌진할 것이다”
이때, 밀번 군단장은 매우 곤란한 표정이었다. 미 제24사단은 이미 명령을 받고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하던 밀번 군단장은 다짐하듯 물었다.
“진짜 할 마음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貴官(귀관)과 처치(미 제24사단장)를 교대시키겠지만…”
“평양은 바로 내가 5년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 곳 地理(지리)를 나만큼 아는 사람도 없다. 이번 평양 공격작전 계획이 공교롭게도 1894년 淸日(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짠 평양 공격계획과 거의 같은 구상이다. 나는 당시의 戰史(전사)를 잘 알고 있다. 淸日전쟁 때 일본군도 主力인 제5사단과 朔寧支隊(삭령지대), 元山支隊(원산지대) 등 3개 부대가 3面에서 평양을 포위 공격했다. 나의 제1사단이 삭령지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
밀번 군단장은 지도를 펼쳐 놓더니 白 사단장의 설명을 귀담아 들었다. 잠시 침묵이 지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선두 탱크에 탑승하고 돌진하는 사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