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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자전거 이야기 - 리컴번트 자전거 새로운 자전거의 수난과 영광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4. 27. 18:31
리컴번트 자전거
새로운 자전거의 수난과 영광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진 리컴번트는 미래의 자전거로 꼽힌다.
새로운 자전거의 등장
1930년대 초 누워서 타는 리컴번트 자전거(Recumbent Bicycle)가 처음 대회에 등장했을 때의 일이다. 리컴번트 자전거를 타고 출전한 프랑스 선수 프랑시 포르(Francis Faure)는 다른 선수들의 웃음거리가 됐다.
"이봐, 포르! 자넨 그 자전거를 타다가 그 위에 누워 잠이 들고 말걸세. 왜 다른 사람들처럼 앉아서 타는 자전거를 타지 않는 거야?"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포르가 속도를 내서 달리기 시작하자 다른 선수들은 포르의 우스꽝스런 자전거를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포르를 보고 웃을 수 없었다. 포르는 다른 선수들을 모두 물리쳤다. 포르가 탄 자전거는 벨로카(Velocar)라는 리컴번트 자전거였는데 이 자전거는 다른 자전거보다 훨씬 빨랐다. 그는 이 자전거를 타고 유럽의 모든 자전거 선수를 이겼는데 특히 5000m 경주에서는 무적이었다.
리컴번트가 다른 자전거보다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유선형의 형태 때문이다. 선수가 누워서 자전거를 타기 때문에 자전거는 유선형이 되고 바람의 저항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이 자전거는 어떤 선수가 타더라도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리컴번트 자전거의 등장은 1930년 유럽의 자전거 산업을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리컴번트 이야기는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컴번트 자전거는 이미 19세기 후반에도 등장했다. 리컴번트는 등을 기대거나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타는 자전거를 말한다. 리컴번트라는 말도 바로 이런 자세를 뜻한다. 리컴번트 자전거는 빠른 자전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자전거 경기에서 본격적으로 속도를 추구하게 된 것은 자전거의 공기 저항을 줄이는 법을 발견하면서부터다. 자전거 선수들은 다른 선수 뒤에서 달리면 공기저항을 크게 줄일 수 있고 훨씬 더 빨리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뒤부터 자전거 경기에서는 다른 선수가 앞에서 바람을 막아주거나 모터사이클이 앞에서 달리는 방식으로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1925년 샤를 모셰와 그의 부인, 아들 조르주가 모터가 달린 벨로카를 타고 있다.
1934년 파리에서 벨로카를 탄 프랑시 포르가 전통적인 자전거를 탄 선수들과 겨루고 있다.
또 자전거 앞에 비행기 조종석의 덮개와 같은 유선형의 바람막이를 장착하면 바람의 저항을 줄일 수 있고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 바람막이를 페어링(Fairing)이라고 부른다. 1910년대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페어링을 장착한 자전거가 등장했다. 그런데 1914년 독일 베를린에서 페어링을 장착한 자전거를 탄 선수가 대회 중에 충돌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페어링을 장착한 자전거의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었다. 이 사고 이후 국제사이클연맹은 선수들의 안전을 고려해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한 어떠한 장치도 자전거에 부착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 조치로 페어링을 장착한 자전거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었다.
1920년대에 다시 새로운 리컴번트 자전거가 등장했다. 프랑스의 소형 모터사이클 제작자인 샤를 모셰(Charles Mochet)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아내가 아들이 타기에는 자전거가 너무 위험하다는 얘기를 했다. 모셰는 아들을 위해 자전거처럼 페달을 돌려서 가는 안전한 네 바퀴 페달카를 만들었다. 페달카는 마치 자동차처럼 좌석에 편안하게 앉을 수도 있었다. 모셰의 아들 조르주는 이 자전거를 타고 다른 아이들을 쉽게 앞질렀고 그때마다 아주 좋아했다.
모셰는 이 페달카의 수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모터사이클 사업을 정리한 뒤 본격적으로 페달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자전거를 벨로카(Velocar)라고 불렀다. 벨로카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침체된 경제상황에 잘 맞는 것이었다. 자동차를 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벨로카를 샀고 모셰의 사업은 번창했다.
벨로카는 아주 빠르고 편했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그것은 벨로카가 코너를 돌 때 쉽게 넘어진다는 것이었다. 모셰는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는 방법으로 바퀴를 하나 줄였지만 결과는 더 악화됐다. 그는 연구 끝에 마치 벨로카를 둘로 자른 것처럼 바퀴가 두 개 달린 벨로카를 만들었다. 이것이 새로운 자전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32년 모셰는 벨로카에 대한 실험을 마치고 나서 이 자전거의 성능을 확신했다. 그는 벨로카가 운동 경기뿐 아니라 레저와 여행용으로도 아주 유용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자전거를 타고 대회에 출전할 선수를 찾고 있었다. 프로 사이클 선수인 앙리 르므완이 그의 벨로카를 타보고 이것이 어떤 자전거보다 빠르고 편하다는 것을 알고 놀라워했다.
그러나 그는 대회에 출전하지는 않았다. 이 이상한 자전거를 타고 대회에 출전하면 다른 선수들의 놀림감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에 모셰의 자전거에 매력을 느낀 선수는 바로 프랑시 포르였다. 그는 2류 선수였지만 이 자전거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대회에 출전하기로 했다.
벨로카는 트랙에서뿐 아니라 도로에서도 다른 자전거를 압도했다. 프랑시 포르가 대회에서 다른 선수들을 모두 물리친 데 이어 1933년에는 폴 모랑이라는 선수가 벨로카를 타고 파리-리모주 대회에서 우승했다. 포르와 모셰의 벨로카는 유럽에서 아주 유명해졌다.
마침내 모셰는 20년 동안이나 깨지지 않았던 오스카 에그의 한 시간 기록에 도전하기로 했다. '한 시간 기록'이란 한 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고 달린 거리를 측정하는 경기다. 모셰는 자신의 자전거로 세운 기록을 인정받기 위해 국제사이클연맹(UCI)에 편지를 보내 이 자전거가 UCI의 규정에 맞는지 문의했다. UCI는 경기 규정 31조를 참고하라고 답변했다. 이 규정은 자전거에 공기 역학적인 장치를 부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UCI는 이런 장치가 없으면 출전을 금지할 이유가 없다고 답변했다. 모셰는 UCI의 답변이 그의 자전거를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1933년 7월 7일 파리의 벨로드롬에서 프랑시 포르가 벨로카를 타고 오스카 에그의 한 시간 기록에 도전했다. 오스카 에그의 기록은 44.247km였다. 포르는 벨로카를 타고 한 시간에 45.055km를 달렸다. 에그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포르가 기록을 경신하는 순간 운동장은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기록 때문에 벨로카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다. 벨로카가 자전거인지 아닌지, 포르의 기록이 합법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신문과 잡지에서는 리컴번트에 대한 기사가 쏟아졌다.
한 달 뒤인 1933년 8월 29일 모리스 리샤르가 일반 자전거를 타고 오스카 에그의 한 시간 기록을 경신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다. 리샤르의 기록은 44.777km로 에그의 기록을 넘어섰지만 포르의 기록에는 미치지 못했다. 리샤르의 등장으로 누가 가장 빠른 선수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혼란에 빠졌다. 새로운 기준이 필요했다.
금지된 자전거
1934년 2월 3일 파리에서 열린 58회 UCI 회의에서 벨로카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때 한 아마추어 선수가 벨로카를 타고 회의장으로 들어와 시범을 보였다. 나이가 많은 영국의 대표는 벨로카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이것이 미래의 자전거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대표는 이 발명품은 자전거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왜 그런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대표의 주장에 대해 UCI 사무총장인 프랑스의 폴 루소는 벨로카가 규정에 맞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UCI 회의에서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루소는 포르의 기록을 잠정적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무엇이 자전거인지에 대해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 UCI 기술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프랑시 포르는 1933년 세계 한 시간 기록을 깨뜨렸다.
UCI 기술위원회에서는 새로운 자전거의 기준을 정했다. 그중에는 안장코와 수직인 선에서 페달이 달린 크랭크축과의 거리는 12cm 이내여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것은 페달이 안장 아랫부분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벨로카는 페달이 훨씬 앞쪽에 있기 때문에 이 한 가지 규정만 보더라도 새로운 자전거 기준에 부합되지 않았다. 기술위원회의 새로운 규정은 58대 46으로 채택됐고 벨로카는 자전거가 아니라는 판정을 받게 됐다. 1934년 4월 1일 이 규정이 시행됐고 리컴번트는 UCI가 인정하는 대회에는 참가할 수 없게 됐다. 이날은 리컴번트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날로 기록됐다.
국제사이클연맹에 따르면 벨로카는 바퀴와 핸들바를 갖추고 인간의 힘으로 달리는 기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UCI는 포르의 기록 대신 리샤르의 기록을 한 시간 기록으로 채택했다. 결국 벨로카의 영광은 아주 짧게 끝났다. 포르의 기록은 '인간의 힘으로 가는 기구'라는 새로운 분야의 기록으로 분류가 됐고 시간이 가면서 잊혔다.
UCI가 리컴번트를 금지한 것은 자전거 디자인은 안전해야 하고 자전거 경기는 제조업체의 경쟁이 아니라 선수들의 경쟁이 돼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리컴번트를 금지시킨 것이 안전이나 스포츠 정신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경제적인 요인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일반 자전거를 생산하는 업체와 프로 선수들은 돈이 있었고 그들이 강력한 로비를 통해 리컴번트를 금지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UCI의 결정에 낙담한 모셰는 탄원서를 보내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모셰는 그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자전거가 인정을 받지 못한 데 대한 상심이 컸고 그것이 죽음의 한 원인이 됐는지도 모른다.
리컴번트는 지금도 금지된 자전거로 남아 있다. 1885년 존 켐프 스탈리가 만든 세이프티형 일반 자전거가 오늘날까지도 자전거의 표준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1934년의 UCI 결정 이후로는 새로운 자전거 모델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주춤했다. UCI가 당시에 리컴번트를 인정했다면 오늘날 더 많은 사람들이 리컴번트 자전거를 타게 됐을 것이다.
UCI 결정에 대해 언론은 큰 관심을 나타냈고 포르와 리샤르는 유명해졌다. 유럽에서는 두 선수가 대결하는 경기가 열렸는데 포르는 벨로카를 타고 리샤르는 일반 자전거를 탔다. 관중들은 비극의 주인공인 포르와 금지된 자전거를 더 좋아했지만 UCI의 공인을 못 받은 자전거에 대한 관심은 점차 사라졌다.
이야기는 다시 1933년으로 돌아간다. 사이클 선수 마르셀 베르테는 자전거로 한 시간에 50km를 넘기 위해 유선형의 새로운 모델을 개발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자전거로 기록에 도전했는데 한 시간에 49.992km를 달렸다. 그는 결국 50km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그다음에 50km에 도전한 사람은 조르주 모셰와 프랑시 포르였다.
당시 샤를 모셰의 아들 조르주 모셰는 아버지가 죽은 뒤 페달카 사업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사업은 작지만 번창했다. 그는 벨로카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한 시간 기록에 도전한 것이었다. 1939년 3월 3일 포르는 한 시간에 50.537km를 달리며 최초로 50km를 돌파했다. 그 후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자전거 선수들도 참전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리컴번트에 대한 관심도 사라졌다.
리컴번트의 재발견
UCI의 결정 이후 리컴번트는 오랫동안 잊혀진 상태로 남아 있었다. 1960년대 말까지 리컴번트는 소수의 열광자들이 탈 뿐이었다. 리컴번트가 다시 부활하기까지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리컴번트 부활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미국 MIT 교수였던 데이비스 고든 윌슨(David Gordon Wilson)이다.
그는 자전거뿐 아니라 인간의 힘을 이용해 더 효과적으로 달릴 수 있는 수단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68년 윌슨 교수와 〈엔지니어링 매거진〉은 인간의 힘으로 가는 모든 수송 수단들이 참가할 수 있는 대회를 개최했다. 여러 나라에서 74명의 선수들이 이 대회에 참가했다. 리컴번트는 바로 인간의 힘으로 움직이는 대표적인 수송수단이다.
1970년대 자전거 붐과 에너지 위기를 계기로 인간의 힘을 이용한 수송수단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975년 국제인력수송수단협회(IHPVA)가 설립됐는데 이 단체의 목적은 인간의 힘을 이용한 수송 기구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리컴번트는 자전거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리컴번트 라이더들은 일반 자전거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 리컴번트 자전거가 대회에 출전하려고 하면 대회 관계자들은 리컴번트의 기어가 노출돼 위험하다거나 길이가 너무 길다는 등의 이유로 출전을 막는다.
미래의 자전거
1934년 UCI 회의에서 영국 대표는 리컴번트가 미래의 자전거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다. 과연 그의 말대로 리컴번트는 미래의 자전거가 될 수 있을까? 사실 오늘날 리컴번트는 다시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또 많은 자전거 전문가들이 리컴번트야말로 속도와 편안함을 대표하는 자전거로, 다가올 미래에 혁명적인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자전거라고 말한다. 리컴번트를 미래형 자전거로 꼽는 이유는 리컴번트가 다른 자전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리컴번트의 가장 큰 장점은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리컴번트는 인간의 힘을 이용한 수송 수단 중에서 가장 빠른 기록을 가지고 있다. 캐나다의 샘 휘팅햄은 2008년 9월 18일 자전거 전체가 유선형 덮개로 덮인 리컴번트 자전거 바르나 디아볼로를 타고 시속 132.47km를 기록했다. 1979년 IHPVA 선수권 대회에서 두 선수가 탄 리컴번트가 시속 55마일(약 88.5km)의 제한 속도를 위반하자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가 속도위반 딱지를 떼기도 했다.
리컴번트가 얼마나 빠른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탁 트인 곳이라면 리컴번트는 놀라운 속도를 낼 수 있다. 유선형의 형태로 공기저항이 적은 데다 허리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힘을 페달에 쏟을 수 있기 때문에 다리가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속도를 자랑하는 리컴번트는 인간의 힘으로 가는 교통수단 중 가장 빠른 기록을 갖고 있다.
속도경주용으로 제작된 리컴번트 자전거
UBS 슈퍼 마일리지 경주에 참가한 리컴번트
리컴번트의 또 다른 매력은 안전하고 편하다는 점이다. 리컴번트는 타는 자세가 낮고 지면에 가깝기 때문에 넘어져도 덜 위험하다. 무엇보다도 리컴번트는 편하게 앉아서 탈 수 있다. 그래서 리컴번트를 '바퀴 달린 안락의자'라고도 부른다. 등을 기대고 앉아서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듯 달릴 수 있다. 이런 자세로 자전거를 타면 긴장이 덜하고 장거리를 달리거나 여행을 하기에도 좋다. 좁은 안장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생식기의 문제도 리컴번트에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많은 라이더들이 일반 자전거를 탈 때 생기는 건강 문제 때문에 일반 자전거에서 리컴번트로 바꾼다.
리컴번트도 몇 가지 단점이 있다. 리컴번트는 언덕을 오르기가 힘들다. 또 주행 자세가 낮아 주변의 운전자들이 리컴번트를 잘 볼 수가 없다. 리컴번트는 길기 때문에 혼잡한 도시에서는 기동성이 떨어지는 단점도 있다. 반면 일반 자전거는 간편하고 기동성이 뛰어나 열악한 환경에서도 타기가 쉽다.
리컴번트 자전거가 주목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자동차의 가장 큰 장점인 덮개를 자전거에 장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일반 자전거에 덮개를 씌우면 자전거의 위쪽으로 무게가 쏠려 위험하다. 그래서 일반 자전거에는 덮개가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리컴번트는 낮은 무게 중심 덕분에 덮개를 씌우는 것이 가능하다. 이 덮개는 자전거의 속도를 빠르게 할 뿐 아니라 라이더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덮개는 비를 막고 추위와 바람을 막을 수 있다. 바로 이런 장점 때문에 리컴번트는 미래의 교통 혁명을 주도할 수 있는 자전거로 꼽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