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신혼시절
1960년대는 북한 무장공비의 난립 등 남북 관계가 최악의 긴장 상태였다. 정부의 통제로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최전방 비무장지대에서는 어느 한 편이 상대의 군사 진지를 기습하여 경계병을 잔인스럽게 살상하면 다른 한 편이 보복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에 한국군은 북한군의 진지 기습을 억지하고자 시계청소(視界淸掃)와 철조망 설치 작업을 전 휴전선에 걸쳐 광범위하게 시행하고 있었다.
박 대위가 통솔하는 160여 명의 중대 인력도 시계청소를 위한 벌목 작업에 동원되었다. 그들이 배치된 곳은 갈대와 아름드리나무가 총총히 들어차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고, 북한군 진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한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는 남북군사분계선상의 한 지점이었다.
천막생활을 시작한 부대원들은 매일 아침 6시에 기상 하여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해질 무렵까지 줄곧 나무 베기만 하였다. ‘사각사각’, ‘왱왱’거리며 톱질을 해대다 보면 누군가 “넘어가요!”라고 고함친다. 그러면 일순간의 정적이 흐르고 아름드리나무가 ‘쿵’하고 쓰러지면서 토끼, 노루, 고라니 같은 산짐승들이 후다닥후다닥 황급히 도망쳐 달아난다. 꿩들도 놀라 ‘꿩꿩’ 소리 내며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다. 매일같이 이런 과정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단조로운 일상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박이나 휴가를 얻는 것이었다. 부대원 누구에게나 외박과 휴가는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박 대위도 외박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부대원들의 사기를 생각하여 자신의 외박을 먼저 내세울 수는 없었다. 영외 거주자 대부분이 외박을 다녀온 후에야 그는 자신의 외박을 상위부대에 신청했다. 지휘자로서 고생하는 대원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박 대위의 마음은 한껏 들떠 있었다. 3개월여 만에 처음으로 집에 ‘퇴근’하는 것이다. 자신을 보고 수줍은 미소를 지을 아내와 그리고 “아빠!” 하며 뛰어나와 안길 두 살배기 딸 영아의 모습을 상상하며 서둘러 산에서 내려갔다. 운 좋게 산마루턱에서 보급품 운반용 군용트럭을 만나 귀가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최대한 아끼고 아껴 야 할 소중한 1박 2일이 아니던가!
박 대위의 아내와 딸은 강원도 화천군 최북단 민가에서 전방으로 20여 리쯤 더 들어간 곳에 허름하게 지어진 군인관사에 살고 있었다. 그곳에는 14가구의 위관(尉官)급 군인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루에 한 차례씩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뒷동산에 올라 솔잎을 긁거나 나뭇가지를 잘라와 취사와 난방을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육체적인 불편함보다도, 산속에서 천막생활을 하는 남편과 떨어져 몇 개월씩 과부 아닌 과부로 혼자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외로움이 젊은 여인들로서는 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조용하던 이곳 관사가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저 멀리 비탈길 넘어 군용트럭에서 어떤 군인이 내려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을 보고 “외박이다!”라고 소리친 것이다. 관사 내의 군인 가족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목을 길게 빼고 한 발 한 발 관사 쪽으로 다가오는 그 군인을 주시했다. 이내 그 군인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드러났지만,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이 덥수룩한 수염으로 반쯤이나 가려져 아직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누굴까? 그가 자기의 남편이기를 바라는 여심과 아빠이기를 바라는 동심이 애틋하다.
이윽고 박 대위의 모습이 드러나자 영아가 “아빠, 아빠!” 하며 종종걸음으로 달려 나가고, 자기의 남편임을 확인한 영아 엄마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히 짓는다. 그러는 영아 엄마를 동료 군인가족들이 놀리며 축하해주었다.
“영아 엄마, 축하해요! 영아 엄마 오늘 좋겠다.”
관사 식구들이 도로 쪽을 향하여 길게 줄지어 섰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부하들이 마중 나와 늘어서 있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박 대위가 관사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함성을 지르면서 손뼉을 쳤다. 몇 명의 어린이들이 “필승!”이라는 구호와 함께 거수경례를 했다. 박 대위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오른팔을 반쯤 치켜들어 그들의 환영에 답했다.
영아가 박 대위의 품에 안겨 목덜미를 꼭 껴안은 채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영아는 “맴매”라고 응얼거리고는 손가락으로 엄마를 가리키면서 이맛살을 찌푸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엄마가 힘들고 짜증스러울 때마다 남편을 원망하며 영아의 엉덩이를 몇 차례 토닥거린 것을 아빠에게 고자질하고 있는 것이다. 지켜보고 있던 관사 식구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영아 엄마는 음식을 준비하느라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 집에서 참기름, 밀가루, 달걀, 채소 등을 조금씩 가지고 와 영아 엄마를 도왔다. 오래간만에 튀김 냄새가 관사 촌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삭막하고 찌들었던 최전방 산골의 조그마한 군인가족 관사 촌에 모처럼 활기가 넘쳐났다.
다음은 누구 차례일까?
젊은 아낙네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밤새도록 손가락셈으로 점(占)액 질을 했다.
207년 가을 牛步/朴鳳煥
(박봉환 문집 한국문학방송간 “태풍 불던 날 나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