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중에는 선암사의 주지인 지허스님이 저술 혹은 구술하고 한겨레신문 여론매체부장인 최성민 기자가 기획한 "지허스님의 차"라는 책이 화제다. 이 책은 선암사의 칠전선원차와 선암사(다맥)를 주요소재로 한 책이어서 우리 차와 불교에 관심이 있는 많은 분들이 읽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어릴 때부터 선암사와는 여러 인연이 있어서 선암사와 관계된 일은 딴 독자보다는 많이 알고 있고, 또 우리 차의 애호가인지라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미 일지암 여연스님이 여러 문제를 제기하였다시피, 필자 또한 필자가 아는 사실들과는 그 내용이 너무 차이가 나므로 그 내용을 얼마 전 인터넷불교신문 자유게시판과 '한국전통자생차보존회'의 홈페이지에 올렸으나 지금까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대응할 가치가 없어서인지, 사실에 대한 외면인지 잘 모르겠으나 잘못된 내용을 어떠한 해명이나 반론 없이 그대로 방치함은 오류와 왜곡을 그대로 믿으라는 저자 측의 독자에 대한 강요이고, 횡포이며 무례가 아닌가!
또한 잘못된 기술(記述)도 문제겠지만 사실(事實, 史實)이 아닌 내용을 고의로 왜곡하여 기술함은 조작(造作)이나 날조(捏造)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에 필자는 사실과 다르게 기술된 부분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겠으므로 저자, 아니면 기획자 측에서라도 해명이나 반론을 꼭 해주기 바란다. 또 출판사도 출판과 판매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좋은 책, 양서출판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있을 것이므로 잘못된 내용과 왜곡된 부분은 바로 잡아야 하고, 조작이나 날조된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에게 사과하고 정정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미국의 세계적인 언론사인 뉴욕타임스의 날조된 기사와 기자에 대한 사과문 발표와 그에 따르는 조처는 우리사회에서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 1. 자생차밭 ; 순수한 자생차밭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순천 선암사 칠전선원과 벌교 징광사지 부근과 순천 금둔사, 보성 대원사 등이며 나머지는 호남과 경남 일대의 사찰등에 돌보는 이 없이 버려져 있다. ( 지허스님의 차 45쪽)
▶ 선암사 칠전선원 차밭 ; 선암사의 재래종 야생차밭은 해방이후 묵혀져 거의 황폐화 되었으나 1977년 이후 당시 주지스님 용곡스님과 신광수명인(申珖秀名人은 야생작설차부문, 박수근명인은 수제녹차부문으로 국내 2인뿐임)에 의해 복원되기 시작한다. 〔참고 ; 『승주군지』, 승주군 / 『차문화유적답사기』, 김대성 / 차밭복원기록(노임지급장부,사진 등) / 한국일보 1982. 10. 28.〕
▶ 벌교 징광사지 차밭 ; 징광사는 조선 영조46년(1770년) 화재로 전소된 후 폐사(廢寺)됨. 차밭은 공세(貢稅)등으로 따로 남아있을 수 없다. 재래종 차나무는 약간 산재(散在)했을 것이나, 상품화는 불가능함. 1980년 이후 한상훈(1998년작고)씨에 의해 선암사, 화엄사 등지에서 재래종 차 씨앗을 구해 파종, 차밭조성을 시작한다.〔참고 ; 『보성문화』, 보성군 1999. 8. /『차문화유적답사기』, 김대성〕
▶ 순천 금둔사 ; 금둔사는 1597년 정유재란시 화재로 전소된 후 폐사. 1996년 이후 지허스님이 1만 5천평의 야산에 차밭 조성. 〔참고 ; 한겨레신문 2002. 12. 9.〕
▶ 보성 대원사 ; 여연스님이 문제제기, 언급 생략함.
□ 2. 가마금 잎차 납품 ; 1980년부터 1992년까지 한국브리태니커사에 한해 3-5천통(1통에 100g) 납품, 고급차는 벌교 징광리 야생차밭에서, 일반차는 보성 회천의 야생 차밭에서 찻잎을 사다가 만들었다. ( 104쪽)
▶ 덖음차 5천통은 대단한 양이다. 차밭 면적이 최소 4만 평 이상은 되어야 생산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징광리 차밭은 1980년 이후부터 조성되므로 1987년까지는 생산이 전무했을 것이며 따라서 거의 모든 차를 회천 찻잎, 즉 『지허스님의 차』에 의하면 수전증과 시력장애 등이 올 수 있는 야부기다 찻잎, 혹은 그 완제품으로 대체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 ; 『보성문화』 / 『차문화유적답사기』, 김대성 〕
□ 3. 대각국사 의천 ; 대각국사는 선암사에서 오도한 뒤 천태선종의 개조가 되었다. 천태선종은 선교겸수 사상이다. (214쪽)
중국 요나라 천우황제가 중국에 온 대각국사를 만났는데 대각국사보다 나이가 적어 "형제국이 되자"고 했다. 나중에 스님이 선암사에서 심은 뇌원차를 보내고 수십 년간 수출…, 선암사 19암자와 본사건물 100여 동을 지었고 차밭을 크게 형성했다. (214, 247, 265, 270쪽)
▶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개창조인 천태종은 숙종6년(1101) 천태종 선시(選試)를 시행한 바 이때를 천태종 개창 시점으로 삼으며, 교관쌍수(敎觀雙修)의 교리를 가지고, 천태선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각국사는 요나라에 간 적이 없고, 당시 요나라 황제는 도종(道宗, 諱; 洪基 ;재위 1055-1100)으로 대각국사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대각국사는 선종11년(1094) 5월부터 다음 해 10월까지 18개월 동안 해인사를 시작으로 화엄사, 선암사, 무등산 규봉암을 순유(巡遊)하였으므로 선암사에 머문 시간은 몇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19암자, 불우(佛宇) 100여동 중창은 크게 과장된 것이며 차밭조성 또한 사실로 믿기 어렵고, 이후 6년 후인 1101년에 입적하였으므로 수십 년간 뇌원차 수출운운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선암사의 차나무는 17세 초 100주 가량 이식 재배한 것이 그 기원이라고 승주군지에 기록되어 있다. 〔참고 ; 『 한국불교사』, 김영태 /『고려사』, 국사편찬위원회 / 『선암사지』, 승주군 / 『대각국사문집』, 의천 / 『중국정사조선열국전』/『대각국사묘지명』 외 〕
□ 4. 선암사 칠전선원 다맥계보 ; 칠전선원 다맥제1세 침굉 현변(1616-1684)스님 이하(以下) 선수행(禪修行)과 차가 일여함을 보이기 위해 선암사 칠전선원과 다원을 획기적으로 정비, …익숙한 다각이 조실이나 선원장이 되고 완전한 전수자가 되어 다맥을 계승 ( 215, 262, 265이하 쪽 외)
▶ 선암사의 칠전선원은 정조21년 봄부터 정조22년(1798) 여름까지 해붕당스님이 화주(化主)가 되어 신건(新建)한다. 그러므로 그 이전 즉 제1세 침굉스님부터 제5세 환허 순민스님(1690-1742)까지는 칠전선원이 없었으므로 조실, 선원장, 다맥, 완전한 전수자가 존재할 수 없었다. 〔참고 ; 『선암사』, 승주군, 남도불교문화연구회〕
□ 5. 선곡 지우(1898- 1968) ; 다음 칠전선원 다맥15세가 함양에서 백용성스님을 모시고 살았던 선곡스님이다. 그분은 선암사 비로암에 와서 10년 수행, 득도 후 용성스님에게 가서 인가받아 손제자가 되었다. 그는 스승인 선파(禪坡)스님이 돌아가시자 선암사에 돌아와 선파스님의 선다법맥을 이었다. 다맥14세인 금봉스님(錦峯基林;1869-1916)이 열반하자 선곡스님은 다맥을 이어 15세가 되었다. (216, 268,277쪽)
▶ 『지허스님의 차』의 내용에 의하면 선곡스님은 17세(1913)에 선암사 비로암에 왔고, 29세(1925)에 선파(仙坡)스님의 법등을 이었다. 이후 백용성스님의 함양 화과원(華果院;1927-1936)에 3년 있다와서 선파스님의 선다법맥을 잇게되므로 이때는 34세(1930)이후가 된다. 그런데 '다맥14세인 금봉스님이 열반하자' 즉, 1916년에 열반하신 금봉스님이 14년 후에 어떻게 또 다시 열반하여 다맥을 물려주게 되는가! 칠전선원의 다맥은 시공(時空))을 초월할 수 있고, 혹은 염향사다맥(拈香嗣茶脈)으로 이을 수 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하겠다. 또 선곡스님이 선암사에 온 1913년 이후 선암사에 건립된 일곱큰스님(七大先祖師)의 비명(碑銘)들과 중수비, 기념비의 비문과 선암사의 제 기록, 그리고 용성스님과 관련된 기록 그 어디에도 선곡스님의 기록은 찾을 수 없으며, 영정(影幀)도 남겨지지 않았다. 또한 선곡스님의 직계가족들이 아직 생존해 있고, 선곡스님은 제자가 한 분인데 그 분이 아직 선파스님과 선곡스님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한다. 禪坡스님은 仙坡스님의 오기(誤記)로 자기 선조사의 법명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은 큰 불경(不敬)일 것이다. 그리고 지허스님의 법사는 딴 분으로 아직 생존해 계신다고 한다.〔참고 ;『선암사지』/ 『백용성스님의 禪農佛敎』, 김광식 〕
□ 6. 지허스님과 선암사 ; 지허스님(智墟 智雄;1941- )은 14살에 출가하여 60평생 동안 산중절간 안에서…, 선암사의 유구한 정통성과 선다맥을 완벽 유일하게 잇고 있다. (표지 ; 최성민이 지허를 말함. 외)
▶ 지허스님은 17세 되던 해인 1957년 3월 그의 부친(桃擎 丁守一)이 돌아가신 후 선암사에 왔으며, 2년 후인 1959년에 정광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선암사를 떠난다. 그리고 "부친이 창건하였으나 부친 사후 무방비 중에 폐허가 된 사찰, 즉 벌교읍 월곡리 용연사(龍淵寺)에 1962년(壬寅)에 학업을 마치고 주지로 부임하신 현 주지(1972년 현재) 정지웅(丁智雄 ;智溶)스님께서 중수불사를 단행하여 구태(舊態)를 일신(一新)케 하였다."라는 기록이 사진과 함께 있다. 그 이후 1974년 무렵에 선암사에 왔으며, 1983년에는 선암사를 떠나서 금둔사로 갔다. 1994년 3월부터 1997년 5월까지 선암사주지, 그리고 2000년 12월부터 주지를 다시 맡아 현재에 이른다. 그러므로 꽤 오랜 세월 약 15년 이상을 선암사에서 보냈다 할 수 있으나 1994년 주지 부임 이전까지는 차밭 복원에 관여하지 않았고, 차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본 사람도 없으며, 주민등록도 2002년에 처음으로 선암사로 옮겼다. 그리고 1957년 선암사에 처음 와서 1959년에 떠나는 그 짧은 2년 사이에 어떻게 선암사 강원(講院)에서 사집과(四集科)와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할 수 있으며, 다각을 거쳐 칠전선원의 조실이나 선원장이 된 후 완전한 전수자가 되어 1968년에 입적한 선곡스님의 선,다,법맥을 이을 수 있었는지 대단히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 ; 『스님의 맨발』, 한승원 /『차문화유적답사기』, 김대성 / 『전국사찰약사및불교인사록』, 불교출판사〕
지면 관계로 이만 약하고 다음 기회에 다시 언급하겠으나, 초의선사의 『다신전』내용을 오역, 왜곡하였고, 작설차와 죽로차에 대한 편향된 기술, 존재하지 않는 칠전선원의 다맥과 조작된 법맥 등『지허스님의 차』의 내용 중에는 수많은 오류가 있으며, 그 중에는 고의로 왜곡하였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는 내용도 많이 있다. 만일 어떤 목적에 의해 고의로 조작하였다면 도덕적인 책임문제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 기획자, 출판사 누구든지 또 어떤 형식이든 해명이나 반론해 줄 것을 일반 독자들을 대신해서 정중히 요청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