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66
3월16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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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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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LRtXV1qF5UU (전찬용 요한보스코 신님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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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교회는 누군가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켜주는 장소가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도 ‘서열’은 꽤 중요했던가 봅니다. 당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 하늘같은 존재였습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했습니다.
장남과 차남 사이의 격차 역시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어느 자리에 앉느냐 하는 문제는 그들에게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그런 가식적인 행동들이 참으로 한심스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더욱 실망하신 것은 그토록 오랜 기간 계속 반복해서 특별 교육까지 시킨 제자들마저도 아직 자리다툼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측근 제자들끼리, 그것도 길을 걸어가는 도중에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싸웠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한때 야망과 출세욕으로 가득했던 야고보와 요한 사도,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의 미성숙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에브라임에서 예리코로 내려가고 있는 중에 갑자기 그들의 어머니가 나타났습니다. 두 아들을 옆에 세워둔 채 그녀는 예수님께 절을 하면서 일종의 인사청탁을 하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20장 21절)
인사청탁을 하러 온 어머니가 설마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한 손에는 품질 좋은 토종꿀 한 병을, 다른 손에는 잘 키운 씨암탉 한 마리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오셨을 것입니다.
사실 그녀가 보인 행동은 꽤나 민망한 모습이었지만, 용서해줄 만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이 잘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로서, 예수님께 좋은 자리를 청탁하는 것은 야망이라기보다 강한 모성애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지닌 사람들은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건설하실 새로운 왕국에 대한 헛된 기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상적 통치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고, 그 나라가 서게 되면 물좋은 자리, 총리 자리와 당대표 자리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도가 보여준 모습 중에 꽤나 치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24시간 동고동락하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한가한 시간에 스승님께 면담을 신청하고 자신들의 속마음을 직접, 솔직히 표현하고 청했으면 차라리 나았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비겁하게도 어머니를 앞세워 간접적인 인사청탁을 시도한 것입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미성숙한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자괴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시 예수님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 사명의 핵심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오 복음 20장 26~28절)
우리 교회는 지상적인 영예와 세속적인 자리를 탐내고 추구하는 출세 제일주의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단체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키고자 애를 쓰다면,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존재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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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jFTduf_K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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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자녀를 경쟁시키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모든 복음은 예수님께서 왜 죽으셔야 했는지가 그 핵심주제입니다. 여기서는 ‘섬기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실 때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열두 사도 중 더 높은 위치에 앉으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는 어머니가 대신 청합니다. 자기 아들 둘을 마지막 때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하자 이에 나머지 열 제자가 화를 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이 아버지 앞에서 더 높아지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제를 섬기기 위함임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유튜브에 오빠와 여동생이 좀 위험한 곳을 건너가는데 여동생이 너무 작아 건너지 못하자 오빠가 인간 다리가 되어 주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보지도 않는데 이렇게 오빠가 동생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 오빠는 부모에게 사랑을 충분히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이미 충분한 사랑을 받은 오빠는 굳이 동생과 경쟁하여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부모는 형제끼리 서로 섬기기를 바랍니다. 물론 일부러 그러지는 않겠지만, 만약 부모가 형제를 차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녀들은 경쟁하게 됩니다. 가족 공동체라기보다는 회사처럼 경쟁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이 지옥이 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첫째 13살부터 막내 2살까지 7남매를 키우는 한 부부의 일상이 공개되었습니다. 아이 일곱을 키우는데도 부모는 정말 열심히 일해서 가정도 가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줄 여유가 없습니다. 아빠는 밤 아주 늦게 들어오거나 아예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엄마는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아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밤 10시에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들을 씻기고 재웁니다.
여기에서 외톨이가 되기 시작한 아이는 13살 사춘기가 된 아들입니다. 첫째는 이제 동생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고 오히려 동생들을 괴롭힙니다. 일곱 형제 중 유일하게 스스로 왕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보니 엄마가 너무 많은 아이를 키우니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군대식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과 둘째 딸을 데리고 장난감 가게에 가서 장난감을 골라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첫째와 둘째를 경쟁시킵니다. 먼저 동생들과 놀 수 있는 적당한 장난감을 골라오는 사람에게 자신이 원하는 장난감을 하나 더 사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 더 성숙한 첫째가 판매원에게 물어서 엄마가 원하는 장난감을 먼저 가져갑니다. 둘째는 경쟁이 되지 않은 이 상황에서 삐져서 말도 안 합니다.
오은영 박사는 이것을 지적합니다. 형제간에 ‘경쟁’이 있어서는 안 되고 경쟁은 자기 자신과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장이 매우 빠른 연령대에서 오빠에게 경쟁이 안 되고 오빠는 경쟁에 이기더라도 본전입니다. 지면 동생들 앞에서 말이 아닙니다. 동생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예 동생들과 함께 안 지내는 것이 자신에게 더 편안합니다. 전쟁에서는 승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피해자입니다. 자녀를 경쟁시키면 자녀들도 그렇게 됩니다.
경쟁하게 되면 자녀는 두 가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경쟁이 두려워 아예 회피하던가 아니면 끝까지 경쟁에서 이기려 기를 씁니다. 경쟁을 회피하는 것도 경쟁하는 것입니다. 달리기에서 멈추어 섰어도 여전히 운동장에 있는 것입니다. 경쟁하건, 경쟁을 포기하건 경쟁 안에서는 쉴 수 없습니다. 커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에 삽니다.
이무석 교수의 책에서 ‘작은 눈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던 한 자매님의 사연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첫째 딸로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다가 동생이 태어나자 부모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줄어듦을 느꼈습니다. 동생은 눈에 쌍꺼풀이 있고 자신에게는 없었기에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작은 눈 때문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돈도 많이 버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사랑은 동생이었습니다.
결혼해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경쟁을 독촉하는 이 자매를 어떤 남편이 참아줄 수 있을까요? 남편은 술집 여자와 바람이 났고 이것을 안 자매는 자기처럼 능력 있고 예쁜 여자를 두고 바람을 핀 남편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아내가 되어야 하기에 겉으로는 남편을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론 용서가 안 됩니다. 직장에서 퇴근한 남편에게 집을 나설 때부터 집에 돌아올 때까지를 한 시간 단위로 끊어서 무엇을 했는지를 보고하게 합니다. 그리고 속이는 것일 수 있으니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똑같이 반복해 보라고 합니다.
꿈에 남편과 바람피운 여자가 나타났는데 눈이 상당히 컸습니다. 그녀는 눈 작은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동생은 눈이 커서 아빠에게 사랑받고 자신은 눈에 쌍꺼풀이 없어서 사랑을 못 받는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도 이 이유로 눈이 큰 여자를 좋아했을 것이라는 무의식이 자신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에게 사랑을 받아 굳이 경쟁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살아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자녀를 경쟁시킨다면 참 부모라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이들을 이용하는 회사 상사나 군대 상관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곳이 지옥처럼 고통스러운 곳이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무석 교수의 『30년 만의 휴식』이란 책에서는 가명 ‘휴’라는 유능한 인재의 사례가 나옵니다. 휴는 어느 날 사장님에게 사직서를 내라는 말을 듣고 정신적 스트레스로 설사가 멈추지 않아 이무석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등을 놓쳐 본 적 없는 엘리트였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자신의 팀장이 회사를 차려 나갈 때 스카웃 되어 함께 회사를 일군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장님의 나가라는 말에 황당하기 그지없고 분노가 치미는 것입니다.
그가 왜 쉼 없이 달려왔을까요? 그것은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임신했을 때 유산시킬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할머니 집에 피신하면서까지 낳은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형만 사랑하고 휴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여행도 형하고만 갔습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모든 것에서 일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긴 것입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있었던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드러냈습니다. 자신과의 상담 약속을 어긴 것에 화가 난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이 교수도 배를 타고 휴가를 떠났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여행 중에 이 교수의 배가 뒤집히는 꿈까지 꾸게 됩니다. 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표출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났을 때 뾰로통하여 한마디 말도 안 했습니다. 그때 이 교수는 사실 그대로 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려져 응급실로 가게 되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다시 시작된 설사가 멈추었고, 가족들과 또 직장인들과도 온전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휴는 비로소 휴식을 찾았습니다.
어렸을 때 그런 상처가 있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냥 어쩔 수 없었다고 여기면 됩니다. 부모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냥 지금 경쟁을 멈추면 됩니다. 어떻게? 사랑을 많이 받으면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려주시기 위해 수난하고 돌아가시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더는 경쟁하는 사람이 아닌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우와한 비디오’에서 성장 가능성이 최대 1m밖에 안 되는 희소병을 지니고 태어난 대성이를 소개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데 키가 매우 작고 몸무게도 10kg을 넘지 못합니다. 손가락도 작고 팔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매우 크고 자유롭습니다. 동생과 놀다가 5살 동생에게 밀려도 “괜찮아요. 형이니까 양보해야지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부모에게 배웠을 것입니다. 대성이는 부모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서 동생과 싸워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장난감을 동생에게 양보하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립니다.
대성이가 부모에게 다가가기 위해 하는 행위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은 형제를 섬기는 죽음입니다. 이렇게 될 때 가정은 천국이 됩니다. 나라도 하나의 부모 역할을 합니다. 만약 자녀들에게 경쟁을 강요한다면 자녀들을 이용해 자신만 부강해지려는 모기와 같은 부모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학생 자살률이 세계 1위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가 신자들을 경쟁시키면 안 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자들을 이용하는 것이고, 그러면 그 밑에서 경쟁하는 봉사자들은 지옥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의 자녀들을 경쟁시키지 않습니다. 충분한 사랑을 주고 믿게 해서 그 자녀들이 서로를 섬기게 만듭니다. 지옥을 선물하려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죽이셔서 우리에게 주셨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해야합니다. 모든 노력은 다 인정받으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미 인정을 받았다면 에덴동산에서처럼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 곧 섬기는 일만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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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0,17-28 :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계속 들어 왔지만, 주님의 기적을 보고도,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것을 듣는 것 자체가 괴로운 말씀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분이 행하신 무수한 기적들을 보았는데, 이런 분이 고난을 당하신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제배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나아가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1절) 이 자리는 분명히 두 아들들이 원하는 것인데 그들은 어머니를 내세워 대신 청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시며,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인데, 이 순간에 아직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볼 때, 더욱 서운하셨을 것이다. 자리다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 복음에서는 잔과 세례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잔과 세례는 같은 것이 아니다. 잔은 수난을 의미하지만, 세례는 죽음 그 자체를 말한다. 예수님께 잔은 수난이었고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에는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고난은 당했어도 죽임을 당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이들이 고백자이다. 실로 주님의 잔을 마시기는 했어도,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받지 않았다.
“할 수 있습니다.”(22절) 그들은 시련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전쟁을 모르는 사람은 전쟁놀이가 재미있다. 그 잔의 의미를 모르니까 그렇게 대답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길 앞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하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잔이 어떤 것인 줄 알았다면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수난의 괴로움은 참으로 크다. 그러나 죽음은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10,39-40) 이 말씀은 거절하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나머지 제자들이 불쾌했다고 한다. 모든 사도들이 세속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 사이에 형제애가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모두가 희망을 가지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의 예를 드시면서 그들과 같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6절)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과 같이 하느님 안에 능력 있고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다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28절)고 하셨다. 그분을 본받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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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출세와 섬김>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 20,18-19)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주신 일인데(요한 10,11.18ㄱㄴ), 그 일은 곧 ‘사랑’입니다.(요한 15,13) 예수님의 사랑은 죽는 것으로(희생하는 것으로) 끝나는 사랑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이어집니다.(요한 10,17) (그래서 항상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은 ‘부활 예고 말씀’을 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우리가 받으려면,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여서,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주셨으니, 사랑으로 받아야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20,20-21)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입니다. 두 사도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요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두 사도가 직접 예수님께 요청한 것입니다.(마르 10,35)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와 왼쪽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요청은, 앞의 19장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ㄷ)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두 자리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요청을 한 것은, ‘예수님의 나라’를 세속의 나라들과 같은 나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도가 남들보다 더 권력욕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높은 두 자리를 달라는 요청은, 다른 열 사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또는 다른 열 사도를 자기들보다 더 낮은 자리에 앉혀 달라는 요청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요청은 ‘사랑’과도 거리가 멀고, 공동체 정신과도 거리가 먼 요청입니다. <다른 열 사도가 두 사도의 말을 듣고 불쾌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24절).>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22-23)
예수님의 답변은 거절도 아니고, 승낙도 아닙니다. 두 사도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시는 말씀이고,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 속에 포함될 수 있도록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라는 말씀은, 그들의 요청 자체를 부정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메시아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잘 모르고 있음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왕정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우선 먼저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메시아 왕국’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사랑으로’ 세우신 나라이고,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통치에 참여하려면, 사랑을 거스르는 이기적인 욕망은 모두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데,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랑”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또는 당신의 사랑에 참여하겠느냐? 라는 뜻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는 두 사도의 대답은, 아직도 잘 모르면서 하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나중에는 모든 것을 깨달았고, 믿었고, 순교했습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들이 지금은 잘 모르고 있지만, 나중에는 모든 것을 잘 알게 될 것이고,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5-28)
이 말씀은, “나의 나라는 세속의 나라들과는 다르다. 권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스리는 나라이고, 모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나라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과 “종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은,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낮춤’과 ‘섬김’만 생각하고 ‘사랑’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사랑 없는 낮춤과 섬김은 ‘비굴함’입니다. (겸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낮춤과 섬김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모두 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서로 낮추고 서로 섬기는 나라입니다. 모두가 함께, 동시에 서로 낮추고 섬기기 때문에, 실제로는 낮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나라이고, 그 나라에서는 모두가 다 높은 사람이 됩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기심이나 소유욕의 반대쪽에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는’ 헌신과 희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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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 속담에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무원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발 계획을 미리 알고 땅을 사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보를 넘겨주면서 이익을 챙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당에서도 가끔 그런 경우를 봅니다. 봉사하고, 기도하고, 나누는 일에는 소홀하면서 놀고, 먹고, 마시는 일에는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친교와 잔치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친교와 잔치 이전에 봉사와 기도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비슷한 의미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먼저 마신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선출된 공직자에게는 이런 저런 이유로 이권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리는 공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사로운 감정이 앞서서 자리를 마련하면 조직은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런 조직은 부정과 부패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신문에 나오는 비리와 부정은 대부분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려는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거든 내 아들들에게 예수님의 오른편 자리와 왼편 자리를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묻습니다. ‘너희도 그런 자리를 원하느냐?’ 제자들은 ‘예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다른 10제자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영광의 자리를 원하였습니다. 잿밥에 먼저 마음을 두는 것은, 김칫국 먼저 마시려는 태도는 제게도 있었습니다. 인사이동 명단을 보면서 부임지의 성당을 살펴보게 됩니다. 주로 외적인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본당의 크기를 보았습니다. 신자의 숫자를 보았습니다. 본당의 재정 상태를 보았습니다. 보좌 신부님이 있는지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역에 어려운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보는 것입니다. 봉성체를 원하는 분은 얼마나 되는지 보는 것입니다. 쉬는 교우들은 얼마나 되는지 보는 것입니다. 지난 5년간의 사목계획을 보는 것입니다. 주일학교와 청년들의 현황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뜻과 세상의 기준으로 가려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을 알려주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은 섬김의 길입니다. 그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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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예수님의 제자교육>
자녀 교육을 위해서는 온 몸이 부서져도 보람으로 여기고 뒷받침을 하는 것이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 부모들은 유별나지요. “기러기 아빠”니 “까마귀 엄마”니 하는 말이 생길 정도로 온 가정이 자녀의 교육에 열심이고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 최선의 뒷받침을 해주고자 노력합니다.
좋은 일이지요. 재산을 물려주기보다는 교육을 시켜서 스스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하고, 또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커나가도록 도와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많은 부모들의 이러한 교육에 대한 뒷받침이 가난했던 이 나라를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시키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편 우려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높은 교육의 열만큼 교육의 내실 또한 제대로 채워져 있는 지 염려스럽고 그 염려가 기우에 그치지 않고 실제 결과로 드러나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교육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르친다고 무조건 교육적인 것은 아닌 것이지요. 「깡패수업」이라는 영화가 있었다는데 깡패 되는 법을 교육받으면 깡패가 되는 것입니다.
또 소매치기들은 그들 세계에서 나름대로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운영한다고 합니다. 교육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바른 지향으로 올바른 방법을 통해 모두가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교육이 제대로 잘 가고 있는가 하는 부분에서 의문이 떠나지 않습니다. 세속적으로 자녀를 키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자녀들이 자기 자신만 알고 이웃 사람은 몰라볼 뿐 아니라 심지어 부모까지도 우습게 여기는 극단의 이기적인 사람으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렇게 헌신하며 자식을 키웠지만 나이든 부모들은 갈 곳이 없어 탁구공이 튀듯이 이 집 저 집 전전긍긍하며 초라한 노후를 보내고 있으며, 막상 부모가 이 세상을 떠나도 장례 예식 조차 참석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늘어가고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노후 대책을 자녀와 상의한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지요. 이 모두가 우리 교육의 방향과 목적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자라날 때 사회는 안정적으로 성장이 되고 부조리와 변칙이 판을 치는 혼란이 적을 터인데 지금 우리의 사회는 나만 잘 살고 보자는 극도의 이기심과 욕심으로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우리 신자들의 교육관이 어떻게 다를까요? 불행하게도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자녀의 신앙 교육의 의무마저도 소홀히 하여 가르치지도 않을 뿐더러 자녀가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면 부모가 오히려 우려하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성당마다 흔히 목격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세속적인 부모의 모습이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베대오의 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모습입니다. 제베대오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예수님께 청탁을 드립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
여러분은 자녀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제베대오의 어머니와 다른 모습인지, 아니면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인지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사람의 아들이신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임을 미리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생각만을 하고 있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 어머니는 노골적으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높은 지위를 청하고 이 모습을 본 다른 제자들은 저마다의 욕심으로 불쾌해 하며 화를 내고 있지요.
이렇게 서로 욕심을 부리며 다투는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무수한 조롱과 채찍질 그리고 십자가 죽음을 눈앞에 두신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생각만 하는 제자들 앞에서 참다운 스승의 모습을 보이십니다.
절망하고 화를 내며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고요한 모습으로 타이르실 뿐이었지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20,26-2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기보다는 조용히 가르치시고 알아듣기 쉽게 다시 설명하십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나라가 서면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자 서로 눈치 보며 다투는 이 철없는 제자들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살아가도록 결국 다 변화시키셨습니다.
교육은 이렇게 인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교육하면서 내 생각대로 내 의지대로 순간순간 눈에 보이게 무엇인가가 확연히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안될 때는 실망하고 안달을 하며 힘들어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향이 올바라야 합니다. 올바른 지향으로 인내롭게 한결같이 기도해야만 바른 교육의 열매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시며 가르치신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20,26-27)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녀를 양육해 보십시오. 어찌 노년이 불행하고 참담하겠습니까?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세속적으로 속물적인 교육관을 고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나의 노후가 편안해지려니 생각하고 끝없이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는 것은 열매 없는 빈 쭉정이 뿐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그런 세속적인 치맛바람이 아니라 영적인 치맛바람을 일으켰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나면 부모들은 그 보람의 결실을 노후에 풍요롭게 거두어들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당신의 모든 것, 피와 살까지도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써 섬김과 나눔의 극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다툼을 벌였던 철부지 제자들을 변화시킨 힘은 예수님의 끊임없는 기도와 실천, 그리고 한결같은 인내심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녀 교육은 역시 부모들의 신앙과 삶의 모범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말로는 누구나 할 수 있지요.
우리의 자녀들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녀로 성장하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본인이 행복하지요. 이기적인 사람은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아가게 마련합니다. 누가 가까이 하려고 하겠습니까?
참으로 자식을 사랑한다면 하느님을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평화와 영원한 세상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이 세상의 어떠한 어려움도 정화가 되고, 인생을 지혜롭게 살 수 있는 바탕을 갖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눔과 섬김이라는 바른 지향을 가르치시고 그것을 몸소 보여 주심으로써 제자들을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섬기는 사람이며, 자신의 것을 나눔으로써 예수님의 고통을 기꺼이 함께 하려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스승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들도 신자다운 바른 지향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들을 올바로 이끌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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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진정한 권위는 서로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날이 점점 구체화되어 가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미 갈릴래아 활동기(4,12-18,35) 중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고 즉시 첫 번째 수난예고(16,21-23)를 들려주셨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을 붙들고 이를 말리려다가 부끄러운 질책을 받았다. 갈릴래아 활동기가 마감될 즈음에 두 번째 수난예고(17,22-23)가 있었다. 그 때 제자들은 매우 슬퍼하였다고 마태오는 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상경길목에서 세 번째 수난예고(20,17-19)를 들려주신 것과 어머니를 동원한 제베대오 형제의 청탁과 이를 계기로 예수님의 진정한 사명이 밝혀지는 내용이다.
이번의 예고는 앞의 두 번보다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이다. 예수님의 동족인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선고를 받게되고, 이스라엘을 지배한 이방인 로마군인들에 의해 조롱과 침 뱉음, 매질과 채찍질을 받으며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흘만에 있을 부활 또한 어김없이 예고되어 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날이 점점 구체화되어 가고 있는 만큼 이에 따른 부활의 영광 속에 깃들여 있는 예수의 참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예고이다. 이제 연습은 끝이고 실전(實戰)만 남았다. 그러고 보면 오늘 복음의 분위기는 예수님의 실제적인 수난과 죽음 이전에 제자들이 맞이하는 최고조의 심각한 분위기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를 동반하여 분위기를 깨고 있다. 마치 신랑을 빼앗겨 통곡하는 혼인 잔칫집에 와서 축가를 부르는 듯 하다.
두 제자의 어머니가 예수께 와서 엎드려 절하면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21절) 하고 간청하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두 제자를 보고 화를 냈다고 하나 모두 같은 통속이다. 그들의 머릿속엔 예수님의 간절하고도 처절한 수난예고의 말씀은 온데 간데 없고, 앞서 예수께서 추종하는 자에 약속한 상급에 대한 말씀(19,29)만 꽉 들어차 있다.
재산이 많은 부자청년이 예수 추종을 거부하고 떠나자 베드로가 나서서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나를 따랐으니 새 세상이 와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 19,27-29)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고, 이에 제자들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때까지는 아직 멀었다. 그 전에 치러야 할 실전(實戰)이 남아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두 제자 어머니의 청을 거절한 것은 제자들 전체의 청을 거절한 것과도 같다. 사실은 예수께서는 이런 종류의 어떠한 청도 들어주실 수 없다.
그분은 이 세상에 스스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28절)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거절은 곧 초대이다. 이 초대는 사람의 아들과 함께 섬기자는 것이며, 세상을 위하여 함께 아파하고 목숨을 내어놓자는 초대이다. 그러나 이 초대는 진정한 권위에로의 초대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권위란 서로에게 봉사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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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예루살렘으로 가는 두 마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심장과 같은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 그 중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민족을 택하셔서 당신 뜻을 알려주신 모든 가르침이 살아 숨 쉬는 곳이고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도 가장 이스라엘다운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사는 곳.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치 하느님께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한마디는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기에 우선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과 그분이 당하셔야 할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것 이외에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이 당신의 자리를 찾아 가신다는 의미 또한 포함됩니다.
이스라엘이 받아들인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살아있는 그 계명을 보는 순간 이방인의 손을 빌어 없애버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기에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진실로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의 마음속에 이미 사랑의 수난이 각오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결국 사람들에게 죽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사랑의 힘을 보여 줄 것이라는 확신을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이런 마음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의 뒷부분은 예수님의 말씀 넘어 세상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전혀 분위기에 맞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스승은 죽으러 간다는데, 그 죽음 뒤에 오는 세상에서 잘 살게 해달라고 한 자리를 청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얄미운 것을 넘어 슬프기까지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그리고 그분께 가깝다고 불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청을 드리는 제자들과 그들의 어머니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죽음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와 함께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욕심 많은 제자들은 진심인지 모를 확신에 찬 대답으로 응합니다. “마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입니다.
결국 이런 제자들의 욕심은 자신과 함께 한 동료들과의 불화를 낳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 수난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접고 제자들에게 싸우지 말 것을 타이르십니다. 또한 당신에게 무모한 청을 드린 제자들과 더불어 정말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그 길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 엇갈린 마음의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도 늘 일어나는 흔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느님 앞에 나서면서 여전히 우리는 주님의 마음과 각오보다는 제자들과 그 어머니의 맘으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기 일쑤입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서 정작 우리가 청하는 것의 대부분은 다른 이들 위에 서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에 목숨을 바치시는데, 사람은 그 사랑으로 군림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기전에 그분께서 이미 십자가로 우리보다 더 밑으로 내려가셨는데도 자신이 그분 앞에 고개를 숙일 수 있다고들 생각하면서 정작 속으로는 엄청난 이기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현실이 오늘 복음과 어찌 이리도 닮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서 돌아가셨고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에 오늘 약속한 제자들은 목숨을 함께 바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후에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 역시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이 그런 각오를 가질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의 주님을 어떻게 대했던 가를 생각해본다면 그들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을지 모르겠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우리는 지금 예수님과 한 마음입니까? 아님 제자들과 한 마음입니까? 방향을 정하고 마음을 맞추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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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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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세 번째 예고 장면과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있기를 청합니다. 곧 높은 자리를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들의 열망을 나무라시지는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를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을 함께 불러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이는 높은 사람, 으뜸인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높은 사람’인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동시에, 높은 사람이 되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이란 남을 섬기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면 먼저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곧 왕이 되고 싶으면 ‘먼저’ 아내를 왕비로 대해야 하고, 왕비처럼 살고 싶으면 ‘먼저’ 남편을 왕으로 받들어야 하고, 성인이 되고 싶으면 ‘먼저’ 다른 사람을 성인으로 떠받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불신하고 신뢰하지 못하면 자신도 그렇게 신뢰받지 못하고 불신 받는 사람이 될 것이요, 남에게 자비로우면 자신도 그렇게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결국,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아버지를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며 배신하고 도망쳐 버릴 제자들을 섬기셨기에 섬김 받으십니다.
그러나 단지 작고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은 아닙니다. 혹은 희생과 헌신으로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신이 낮아지는 것을 넘어서, 상대방을 높이고 떠받들며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춘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는 ‘존경’이 없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섬김은 내가 낮은 자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를 높은 자 되게 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곧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기 위해서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이 닮아가고, 진리를 섬기면 진리가 되어 갈 것입니다. 돈을 섬기면 탐욕스런 사람이 되어가고, 세상을 섬기면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을 섬기는 학원”(<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45)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형제 섬기기’를 통하여 ‘주님 섬기기’를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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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주소서.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을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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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 곁에 나 있어>
마태오 20,17-28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다, 출세와 섬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포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그대 곁에 나 있어>
그대 곁에
나 있어
그대 기쁘기를
그대 곁에
나 있어
그대 힘나기를
그대 곁에
나 있어
그대 당당하기를
그대 곁에
나 있어
그대 높아지기를
그대 곁에
나 있어
그대 나아가기를
그대 곁에
나 있어
그대 살맛나기를
그대 곁에
나 있어
그대 그대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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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무엇을 원하느냐?>
많은 사람이 으뜸으로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접을 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도 진정한 존경과 사랑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속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떠나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 존경을 받을 사람입니다. 세상은 높아지라고 하지만 오히려 섬기는 사람, 세상은 첫째만을 기억하지만, 오히려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이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 정성과 노력이 없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을 지니게 되면 반드시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낌새를 알아챈 다른 열 제자가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에서도 바로 그러한 마음을 대변해 줍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물론 영광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광은 고통 없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딴청을 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20,22) 하고 물으시자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의미도 모르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잔은 모욕과 천대,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뜻했습니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낮아지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덥석 대답해 놓고는 딴전을 피우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마귀를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서는 어려운 일이나 우환이 닥치면 하느님보다는 ‘어디 용한 사람이 없나?’ 살피게 됩니다. 허례허식을 버리겠다고 맹세하고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행위를 합니다.
남이 나를 섬겨주기를 바라는 허영의 마음이 가득할 때도 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하고서는 미사참례를 소홀히 할 때도 있습니다. 모처럼 손님이 오면 함께 미사 참례하자고 권유하면 좋으련만 그를 배려한다는 빌미로 주일미사까지 궐합니다. 약속된 영생에 대한 희망을 말하면서도 눈앞에 것에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아직도 아무 수고와 땀도 없이 영광을 바라느냐? 고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기꺼이“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항구하기를 기원합니다. 군림해서 힘으로 내리누르는 삶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놓는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내어 바칠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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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 16장 21절부터 20장 34절까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사건,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는 먹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맞으실 비극적 사건을 세 차례에 걸쳐 직접 예고하십니다.(16,21; 17,22-23; 20,18-19 참조) 그 가운데 세 번째 예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에 이어서 ‘섬김’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아들들의 영광을 요청하자, 이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는 불쾌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세상의 통치자들이 지닌 권세의 남용을 지적하십니다.(20,25 참조) 이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통치자가 지켜야 할 지침을 제시하십니다.(20,26 참조) 이 지침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세상의 통치자들처럼 권력으로 백성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 곧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세상의 통치자들이 드러내는 무능을 보여 주시면서, 대조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윤리적 덕목을 실천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제자들이 ‘섬기는 사람’, 곧 ‘종’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서 설명됩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분이셨고, 많은 이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20,28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해 줍니다. 섬기는 종이 되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우리에게 큰 도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섬기셨고 우리의 종이 되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에서 희망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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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마태20,19-20)
<예수님의 눈물!>
우리는 지금 나와 우리 모두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전부를 바치신 '예수님의 눈물'을 기억하는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큰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고 묵상하면서, 그 사랑에 보다 더 깊이 동참하고자 하는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의 모습을 보면, 그것과는 별개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 모습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5-28)
예수님의 눈물!
예레미야 예언자의 눈물!
낙태아들과 죄 없는 아기들의 눈물!
수많은 순교자들의 눈물!
의인들인 참 그리스도인들의 눈물!
이 눈물과 죽음 저 너머에서 맞이하게 될 영원한 생명을 기억하면서, 제대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와 삶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일부 형제자매들이 신부님은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달라고 말하지만, 정치가 곧 삶이고, 삶이 곧 정치입니다.
"정치는 흔히 폄하되기는 하지만,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매우 숭고한 소명이고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입니다."('복음의 기쁨', 205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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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등학생 때 성당에 갔다가 후배 여학생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오빠는 기타 못 쳐요? 저는 기타 치는 남자가 너무 멋져 보여요.” 이 말을 들은 다른 여학생들도 “나도 그런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때였지만, 여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남학생이 되고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여름방학 내내 기타만 쳤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기타 코드도, 힘든 주법도 상관없었습니다. 여학생들이 기타 잘 치는 남자가 멋지다고 하니까…. 힘들지 않게 기타를 스스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모든 게 쉬워진다고 합니다. 그 대상이 좋아하는 것이면 뭐든 따라 좋아하게 되고, 그 덕에 능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편하고 쉬운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니 저 역시 원하는 것이 되고 그만큼 신앙생활도 쉬워질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든 것은 사랑의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눈이 아닌, 세상의 눈으로만 보면 큰 걸림돌로만 생각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열두 제자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이미 두 번에 걸쳐 말씀하셨고, 이번에 세 번째의 마지막 예고로 그만큼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말씀하신 것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을 하느님 나라에서 왼쪽과 오른쪽에 앉게 해달라고 하지요. 아직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의 성과를 욕심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영광은 고통과 시련을 받아내지 못하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서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깁니다. 이들 역시 그 영광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아직 세속에 잠겨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 주님 사랑에 집중하며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쉬워지며, 그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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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섬김의 여정>
-하느님 중심의 삶-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섬김의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오늘은 “섬김의 여정-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강론 제목을 택했습니다. 여정이란 말마디 요즘 부쩍 많이 강론 주제로 삼게 됩니다. 우리 평생 삶을 일일일생 하루에, 일년사계 사철에 대입해 보면 내 삶의 여정중 현위치가 드러날 것입니다.
과연 평생 삶을 하루로 압축했을 때, 오전 오후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과연 평생 삶을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사철중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제 경우 수차례 언급했습니다만 일몰을 6시로 계산한다면 하루중 오후 4시 정도, 사철중 초겨울이 좀 지나지 않았겠나 생각됩니다.
오래 살고 짧게 살고가 아니라 깨어 온전한 정신으로 사는 것이 문제이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성찰이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삶을 살게 합니다. 6년전 써놨던 “하루에 평생을 사네” 란 시를 얼마전 원장 수사가 강론시 인용했기에 전달 받아 인용합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살기를 소망하며 썼던 시입니다.
“날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잠깨는 새벽
일출日出
찬란할 때는
가슴뛰는 소년少年
한낮
햇빛 밝을 때는
활력넘치는 찬미讚美의 청년靑年
일몰日沒
고요할 때는
원숙圓熟한 노년老年
감사感謝로
하루를 끝내고
잠자리에 드는 밤
하루에
평생平生을 사네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나”-2016.2.8. 설날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예외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느님으로 끝납니다. 하느님이야말로 믿는 이들의 삶의 목표요 방향이자 삶의 중심이자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느님으로 끝나는 여정입니다. 오늘 다룰 여정은 섬김의 여정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당신 수도자들의 공동체를 일컬어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했습니다. 평생 섬김을 배워가는 여정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이웃을 잘 섬겨가는 섬김의 여정중의 삶인지 성찰하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와 복음의 예수님 처지가 흡사합니다. 고립무원의 참 외롭고 고독한 처지의 두 분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삶이었기에, 참으로 애오라지 하느님과 더불어 이웃을 충실히 섬겨온 삶이었기에 두 분은 위기의 순간을 잘 통과합니다.
다음 예레미야의 하느님께 하소연하는 기도가 그의 하느님과 이웃에 충실했던 섬김의 삶을 요약합니다.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보소서.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섬김의 여정에 주님과의 친밀한 대화의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배은망덕한 사람들에 좌절할 때 마다 주님과 깊은 신뢰의 기도를 통해 섬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다시 주님과 대화의 기도를 통해 섬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었던 예레미야 예언자였습니다.
사실 우리 수도자들이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가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을 주는지 깨닫습니다. 기도와 섬김의 삶은 함께 갑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지칠줄 모르는 섬김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처지 역시 참 외롭고 고독해 보입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주님 중심의 공동체라기 보다는 동상이몽의 철부지 제각기 공동체 같습니다. 제3차 주님의 수난 예고가 끝나자 마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두 아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스승님의 나라에서 두 아들을 스승님 좌우에 앉게 해 주십사 청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 본 열 제자는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하니 내심 그들의 속셈이 드러났습니다. 동상이몽의 불순한 공동체임이 폭로되는 장면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수난에 공감하며 동참하려는 마음이 전무하니 예수님 마음은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했을까요.
그러나 하느님과 이웃을 항구히 사랑과 겸손으로 섬겨왔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철부지 제자들의 현실에 실망하거나 좌절함이 없이 차분한 마음으로 제자들의 삶에서 무엇이 본질적이지 가르칩니다.
군림하고 통치하며 세도를 부리는 세상 통치자들의 태도와는 판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 제자들의 공동체를 섬김의 공동체로 정의합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새삼 어제 강조했던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영성’이 우리 믿는 이들의 본질적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심 섬김과 종의 영성입니다. 그 결정적 장면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장면일 것입니다.
애당초 타고난 섬김의 사람은 없습니다. 부단히 주님의 섬기는 삶을 깨달아 배워가면서 섬김의 삶도 날로 깊어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도 이런 일련의 가르침을 통해 섬김의 삶이 자기들에게 얼마나 본질적인지 크게 깨우쳤을 것입니다. 참 영성의 잣대는 섬김의 삶에 있습니다.
과연 주님을, 이웃 형제들을 겸손히 섬기는 삶에 항구한지요. 섬김의 여정을 통해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섬김의 여정은 그대로 예닮의 여정이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섬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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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SMRZUge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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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 28)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게 하는
사순의
십자가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을 때
주님의
자리마저
빼앗게 된다.
십자가를
부정하고서는
결코 삶을
되찾을 순 없다.
목숨을
바치러 오신
사랑이
삶의
출발점이며
목적지이다.
목숨은
십자가의
섬김으로
드러난다.
올바른
자리매김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죽음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커져버릴대로
커져버린
우리 자아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는 가장 큰
지혜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맑은 사랑의
길을 걸어가신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우리들을
가르치신다.
지배하고
독점하는
욕심이 아닌
섬기고
사랑하는
삶으로
돌아가는
십자가의
방향이다.
모든 삶이
가야만 하는
십자가의
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 배우게 된다.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사랑과 섬김이
목숨을
감추는
삶이 아닌
목숨을 바쳐
이루어내는
가장 값진
삶임을 믿는다.
십자가와
삶과의 간격은
낮아지고
섬기는
사랑에 있다.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삶의
진정한
해답이다.
그 길을
따르는
것이다.
++++++++++++++++++
(2)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루카 20, 27)
죽었던
그 자리에서
봄꽃이 피어납니다.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는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십자가가
모든 삶의
기초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정확한
표지판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섬기고 나누는
십자가의 생명입니다.
십자가는 옛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옛 것을
옛 방식을
내려놓아야
탈출구가 보입니다.
우리또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치유하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은
완성됩니다.
사순시기는
십자가에서
충만한 사랑의 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거룩한 지혜이며
가장 살아있는
참된 진리입니다.
십자가에서
비로소 믿게 되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께서 직접
걸으신 생명의 길입니다.
그 길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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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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