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까마귀
이복수
지난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그저 추운 정도가 아니라 혹독한 추위였다. 3한4온은 옛이야기이고 7일간을 계속 영하 15도를 오르내렸다. 더욱이 이곳은 한적한 시골이고 소양강 상류지역 ‘마적산’ 산 아랫동네이다 보니 시내보다 2도가량 더 낮았다. 단독주택으로 이사 오자마자 맞닥뜨린 첫 번째 겨울나기가 이렇게 매서울 줄 진즉에 알았더라면 이사하지 말 걸 그런 후회도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얗게 성애가 낀 커다란 유리창 밖 풍경이 을씨년스러웠다. 겨울 뜨락에 메마른 잔디밭, 세 그루 소나무만 덩그러니 서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맹추위에 아내는 매일 아침 시내에 있는 초등학생 외손주를 보러 나가면서 볼멘소리를 해댄다.
“에그, 이 추위에 딸 가진 에미가 죄인이지...무슨.”
나는 그런 아내의 푸념을 짐짓 못들은 채 돌아서서 남측으로 난 창밖만 뚫어져라 응시한다. 아내마저 떠나고 난 시골집 마당엔 적막이 흐르고, 홀로 남겨진 방안엔 고독이 하얀 서릿발처럼 내려앉는다. 그렇게 1층 거실 유리창 안과 밖에 절간 같은 고요가 흐르던 어느 날, 뜻밖에 반가운 녀석들이 찾아왔다.
그것은 ‘새’였다. 몸 전체가 새까많고 몸집이 큰 겨울까마귀였다. 간헐적으로 참새들이 앞마당 펜스에 몰려와 ‘재잘재잘’ 놀다 간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큰 새가 나타나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기에 나는 적잖이 놀라고 당황하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 겨울, 시골집 뜨락에 난데없는 까마귀들의 출몰이라니...’ 나는 속으로 의아해 하며 방안에 서서 녀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처음엔 한 마리가 날아와 앞마당 소나무 큰 가지에 앉자 연이어 서너 마리가 합류했다. 그러더니 뜨락 잔디밭에 내리꼿 듯 하강하여 ‘토닥토닥’ 통통 걷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 아주 가까이에서 그 큰 등치의 새가 사뿐사뿐 토닥토닥 걷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녀석들과 나의 지근거리는 불과 50미터 남짓..., 그래서 더욱 자세히 그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까마귀들이 그 육중한 몸매를 이기지 못해 마치 닭이 걷듯이 토닥토닥 걸을 때마다 고개가 상하上下로 같이 꾸벅꾸벅 흔들거리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앙증맞아 보여 ‘피식’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한참동안 잔디밭을 노닐다가 닭장 옆 울타리 위에 앉더니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난 녀석들을 만나다니!’ 나는 은근히 내일도 그들이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의 바람이 통했는지 이튿날 아침, 녀석들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리하여 지난 겨우내내 까마귀와 나는 서로의 외로움을 나누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어느새 다정한 친구가 된 것이다. 나이 들어 서로 왕래가 뜸한 인간친구들에 비해, 비록 서로 말은 안 통해도 매일같이 찾아와 잠시 머물다가 가는 ‘새‘친구들이 더없이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었다.
누가 까마귀를 불길한 새라고 했는가.
세상사람들은 ‘F.베이컨’이 말한 대로 오류와 편견이란 ‘동굴의 우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까마귀란 새는 우리가 보기와 달리 지능이 매우 높고, 효성이 지극하며 부부애가 진득한 길조임에도 이를 아는 이는 흔치 않다. 오히려 ‘까마귀 있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란 고시조의 영향 탓인지, 아니면 그 검고 흉하게 생긴 외양 때문인지 까마귀는 그저 미운 오리새끼 마냥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왔고, 몹쓸 존재로 낙인이 찍혀 사람들의 관념 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까마귀의 효성이 지극함을 일컫는 말로 반포보은反哺報恩이 있다. 이는 까마귀가 늙고 병든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어 봉양하는 것을 가르키는 말이다. 부모 모시기를 헌신짝 차버리듯 하는 요즘 세태에 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모습인가. 부모님 살아신 제 나는 진정 까마귀만도 못한 자식이 아니었는지 반문해 보면 숙연해질 뿐이다. 또한, 까마귀는 다른 새들에 비해 지능이 높고 영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2004년 12월 ‘사이언스’지에는 까마귀의 지능이 침팬지만큼 높다는 연구결과가 실린 적이 있다. 고려시대 문신이자 대학자인 ‘이규보’의 ‘유아무와 인생지한 唯我無我 人生之恨’이란 고사는 한마디로 까마귀의 잔꾀를 나타내주는 말이다.
<삼국유사>에는 까마귀를 ‘신령스러운 새‘로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까마귀가 태양의 정기로서 묘사되고 있어 우리나라의 태양신화라 할 수 있다. 중국의 태양신화 속에서도 까마귀는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로 형상화되어 있고, 고분벽화의 소재로 삼족오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렇듯 까마귀는 우주만물의 중심인, 태양의 정기를 받은 신성하고 신령이 있는 영특한 ‘새’로 우리 인간에게 길조임이 분명하다. 한때 대하드라마를 시청하면서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의 깃발을 보는 순간 가슴이 섬뜩하며 강렬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아아! 바로 저것이었구나,’ 나는 대고구려의 진취적인 대륙성 기질이 삼족오-저 태양의 정기를 뿜은 까마귀의 신령함에 용해되어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였다. 난해한 시를 썼던 천재시인 ‘이상’의 ‘오감도’-그가 왜 조감도를 오감도라 했는지 그 심오한 의미를 까마귀를 통해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다시 가을이 오자 어디선가 까마귀 친구들이 찾아왔다. ‘까악 깍, 까악 깍!’ 그들이 반가운 목소리를 내며 잊지 않고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까마귀 친구들을 보자 몹시 들뜬 나머지 나도 모르게 소릴 질렀다.
“박여사! 까마귀들이 왔어요. 까마귀 친구들이...”
기뻐서 상기된 나를 보던 아내가 한마디 거드는데 살갑지가 않다.
“당신은 좋겠네. 태양의 아이들이 와서...흐흐.”
아내의 약간 빈정거리는 말투에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에 네가 찾아주니 나는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비록 매일 아침 나의 뜨락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게 고작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단다. 바로 지척에서 잔디 위를 통통 토닥토닥 걸어가는 네 모습이 참 우습기도 하고, 그런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나의 소소한 재미와 즐거움이 또 얼마나 큰지 넌 모를거야.
이 가을날, 아침못 뜨락에서 까마귀가 내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얼까. 저 신령한 새가 앞마당 소나무에 앉아 나를 건네다 보며 분명 무언가 전하고픈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미련한 이 중생은 듣지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다.
‘봄은 기다리는 자에게 오지 않고 먼저 다가가는 자에게 온다’는 김경훈 시인의 ‘까마귀가 전하는 말’처럼, 오늘도 저 까마귀는 이 아침 조연당 뜨락에서 부릅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복수 수필가
속초 출신으로 전 강원수필문학회장, 도혁신분권과장, 강원발전연구원 사무처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구인문학회장, 현대계간문학 자문위원, 춘천남부노인복지관 문예창작반 지도강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2년 제 20회 강원수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