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행복했다 생각해본다. “소망이 충복되어 만족을 느끼는 상태”가 행복이라면, 내 인생은 행복 쪽에 가깝지 싶다.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렵게 산 때문인지 돈을 좋아했지만, 부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내 꿈은 학문하는 사람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바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든 소망 다 접고, 인생을 걸고 하나만을 고집하였다.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네댓 살 한문을 배울 적부터 공부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다른 선택은 없었다. 그래서 한길을 걸으면서 학문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그리하여 내 깜냥으로는, 그것만으로도 행복으로 치부하고 싶은 쪼잔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행복 쪽을 얼쩡거려본 적은 별로 없었다. 나는 행복을 잘 몰랐고, 그것이 절실한 것도 아니었다. 공부와 일을 열심히 한 것이 고작이었다. 가르치는 일에 종사한 동안에도 행복이라는 단어를 눈여겨본 것 같지 않고, 담론으로 삼았던 일도 거의 없었다. 안타까운 일일지는 모르지만, 행복을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온 것만은 분명하지 싶다.
행복을 자주 보고 듣고 화제로 삼기 시작한 것은, 수필 공부 이후의 일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수필을 읽으면서 지나치게 행복에 매달리는 글을 만나게 되면, 행복이 달아났을 때의 상실감이 떠올라 한동안 상념에 잠길 때가 있었다. 인생은 맘대로는 안 되는 것이고, 삶이라는 것 자체도 희비며 고락이 교차 · 반복되면서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가 소망을 다 이루어 행복한 삶만을 살았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모른 채 반쪽짜리 삶만을 살아야 했던 불행도 경험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있을 때, 마침 교수불자회로부터 부탄 여행에 동참해달라는 권유를 받게 되었다. 지난 7월이었다. 부탄은 마지막 샹그릴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 하여 냉큼 호응하였다. 내가 부탄을 가보겠다 맘먹은 것은 20년도 넘는다. 당시에는 17세기의 걸작 <탁상사원>을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부탄은 교통편 등 여행조건이 지나치게 복잡해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수교 30주년 기념으로 직항로가 열렸다 하여 모든 일정 취소하고 따라나섰던 것이다.
부탄 파로공원에 내린 후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가는 곳마다 그린벨트로 연결된 울창한 산림이었다. 자연의 보고, 천혜의 원시림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70만의 작은 ‘은둔의 왕국’이 숲 속에 싸여 있었다. 인간 한계의 초탈을 상징한 탁상사원은 3000km가 넘는 산허리의 절벽 바위틈에 매달려 있고, 지구의 극점 히말라야산맥의 봉우리들은 안갯속에 아스라이 어른거렸다. 앞창을 툭 치면 잡힐 것 같았다.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상큼했다. 온갖 세파와 공해에 찌든 내 가슴팍 위로 숲 냄새가 묻어난 한줄기 산들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두 마리 토끼는 잡을 수 없다고 했던가. 그러나 부탄은 애초부터 한 마리 토끼만을 겨냥한 경우 같았다. 그들은 전 후 대부분의 후진국의 발전모델인 외국자본의 도입을 통한 개발계획을 거부하였다. 그 결과 두 얼굴로 나타난 것 같았다. 자연을 지켜낸 대신 미개하고 가난한 한 마리 토끼만이 굶주리고 있었다. 부탄의 시가지나 삶의 질은 40%의 문맹률에서 엿볼 수 있듯이, 50년대 말의 한국의 사회상을 닮아 있었다. 호텔 방 샤워기에서는 황토 빛 천연수가 쏟아지고, 식당 밥을 넘기는 데는 도 닦는 정신이 필요했다. 아내가 준비해준 절편과 육포가 없었다면, 부탄의 한 마리 토끼 신세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식탁 위에서는 파리가 날고, 수도 팀푸의 시가지와 박물관 경내에서는 살생 금지의 부산물인 개똥 말똥이 널브러져 있었다. 밖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행복이 불쌍하다는 불경한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두 얼굴의 부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란다. 그것도 재단(NEF)이 현지 실시한 결과, 국민의 97%가 행복하다고 대답하여 세계 1위의 행복국가로 발표하였다고 한다. 이 미개하고 가난에 찌든 부탄 국민들이 현실에 만족하고, 스스로 행복해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 머리 속에서는, 부자 나라 한국 젊은이들의 ‘헬조선’과 ‘이생망’의 자조가 행복지수 118위의 바닥권이라는 사실과 관련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우리 국민들은, 격차와 소외를 빚어낸 국부의 성장만으로는 행복의 양이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것인가.
가이드는 한국말이 유창했다. 그는 부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보였다. 부탄은 “정신이 풍요로운 나라”, “국민이 행복한 나라”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고 있었다. 부탄은 GDP보다는 그들이 개발한 국민총행복(GNH) 개념을 신앙하기 때문에 개발보다는 자연 보존을 중시하고, 교육과 의료 등도 무료이고, 차별 없이 서로 믿고 배려하기 때문에 현실에 만족한다고 한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하다는 것이다.
부탄 사람들은 때 묻지 않고 순박해 보였다. 그들에게서 돈 욕심은 느낄 수 없었다. 상점에서도 상품을 팔려는 몸짓은 볼 수 없었다. 긴 염주만 돌리면서 기도에만 열심이었다. 기도도 자기 기복은 하지 않고, 중생과 나라 잘되기만 빈다고 한다. 정신적 풍요를 가져온 수분(守分)과 자비, 지족(知足)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UN기구 등의 객관적 기준에 의한 행복지수가 바닥권인 부탄 국민들이 행복하다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궁핍과 불편이 널려있고, 비위행적인 환경 속에서 따분한 일상뿐인 이 나라 국민들이 행복하다는 것이 참으로 궁금하였다. 그것이 1주 여의 내 화두였다. 짐작하기로는 아마도 불교국가 특유의 정신 수련으로 자비와 지족이 몸에 배어있고,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왕추크 국왕의 행복우선정책이 결합하여 이룩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선지 부탄을 떠나면서 파로공항을 이륙하고 있는 비행기 유리창으로 내려다본 신호등의 빨간 불빛은, 돈이 곧 행복이라는 착각에 경고 사인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다시 나를 되돌아본다. 나는 해가 바뀌면 80이 된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쯤에 와 있지 싶다. 이제 새삼스럽게 겨울의 문턱에서 성자 흉내를 내면서 고행 길에 나서거나, 희생을 감수하면서 불행을 자초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행복에 갇혀 아무런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 나태나 안일에 빠지기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행복 쪽을 기웃거리기보다는 불행을 이겨낼 수 있는 수련에 힘써볼 생각이다. 행 · 불행 같은 것이 나를 흔들지 못하도록 조용히 와두나 챙기면서 마음공부에 정진해 볼 참이다. 그리 보면, 이제는 행복과 불행의 경계쯤에 자리 잡는 것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김선형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