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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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을 아시나요?
1974년 4월 25일, 음악과 꽃으로 장식된 혁명이 일어났다.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으로 알려진 이 혁명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독재자의 권위주의 통치를 무너뜨린
무혈에 가까운 군사 쿠데타였다.
그 결과로 민주주의가 승리했고 포르투갈의 긴 역사에서
가장 놀랍고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국경일이 선포되었다.
그렇다면, 이 놀라운 사건의 배경은 무엇이며, 어떻게 계획되었을까?
이 갤러리에서 포르투갈의 민주주의를 재구성한 군사 쿠데타를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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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 살라자르 (1889–1970)
1933년부터 포르투갈은 독재자로서
에스타도 노보(신주) 정권을 이끌었던
안토니우 살라자르의 권위주의 통치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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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보수적이고 독재적인 이념에 영감을 받아, 에스타도 노보는
포르투갈의 아프리카와 아시아로의 식민지 확장을 감독했다.
1961년 살라자르는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떠오르는 민족주의 운동에 맞서
포르투갈 군대를 배치하며 값비싼 장기 식민지 전쟁을 시작했다.
이 사진은 1961년 5월 5일 앙골라로 향하는
베라 크루즈에 탑승한 포르투갈 군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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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의 대립
앙골라와 모잠비크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포르투갈 해외 식민지였다.
두 곳 모두 에스타도 노보 정권 기간 동안 국가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사진에서 모잠비크 테트 지역에서 순찰 중인 포르투갈 군인들이
게릴라들이 매설한 지뢰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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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원치 않는 전쟁
1970년대 초까지, 전쟁은 늘어나는 기간과
재정적인 비용 때문에 인기가 없었다.
포르투갈 군인들에 의해 최대 300명의 민간인이 살해된
1972년 12월 위리야무 학살과 같은 유혈 사태로
사실상 정권에 반대하는 여론은 높아졌고,
대륙의 달갑지 않은 침략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반란군(사진)의 결의를 강화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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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로 카에타노 (1906-1980)
1968년 몰락을 겪은 후 권력을 포기한 살라자르는 1970년에 사망했다.
그의 후임자인 마르셀로 카에타노가 1968년부터 1974년까지 총리를 지냈고,
그는 카네이션 혁명으로 알려진 기간 동안 전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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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
혁명과 함께 포르투갈의 식민지 열망의 종말과
포르투갈의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왔다.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내전에 압도당한 수천 명의 포르투갈 시민들이
결국 아프리카 대륙에서 도망쳤다. 1975년 사진은 앙골라의 국립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기 위해 필사적인 루안다의 거주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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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이션 혁명은 무엇인가?
이 혁명은 혐오스럽고 신용을 잃은 에스타도 노보 정권을 무너뜨린
좌파 군 장교들이 일으킨 무혈 쿠데타였다.
이 무리는 이전에 불만을 품은 식민지 군대로 구성된 군사 운동(MFA)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오텔로 사라이바 드 카발료 (1936–2021)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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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1974년 4월 25일 아침, 라디오 레나센차는
영향력 있는 정치 포크 음악가이자가수인 제카 아폰소의 노래인
'그란돌라, 빌라 모레나(Grândola, Vila Morena)'를 틀었다.
이것은 MFA를 동원하여 전국의 전략적인 권력의 요지를
장악할 시간이라는 비밀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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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날
두 번째 라디오 방송은 수십만 명의 포르투갈인들에게
그들의 오랜 역사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곧, 탱크들이 리스본의 자갈이 깔린 거리를 가로질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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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지지
리스본에서 MFA는 전략적 목표 장소였던 국영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국, 공항 및 포르투갈 은행등을 장악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수도의 거리에 모여 환호하고, 손을 흔들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군부 저항세력을 지지했다.
비슷한 장면들이 포르투갈의 두 번째 도시인 포르투에서도 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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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카네이션 혁명이라 이름 붙여졌을까?
이 혁명의 이름은 셀레스테 마틴스 카이로라는 이름의
식당 종업원 덕분에 지어졌다.
식당의 1주년을 기념하려고 계획되었던 축하 행사는
수도 전역에서 전개되는 혁명때문에 취소되었다.
빨간색과 흰색 카네이션이 단골 고객들을 위한 선물로 준비되어 있었고,
카이로는 꽃들을 낭비하는 대신에 꽃들을 가지고 집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거리에서 군인들을 만났을 때 그녀는 카네이션을
군인들에게 건네주었고 군인들은 그 꽃들을 소총의 총구에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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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상징
붉은 카네이션이 돋아난 총구의 이미지는
빠르게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이 아이디어는 빠르게 퍼졌고, 꽃을 파는 사람들은
반란군 병사들을 위해 많은 카네이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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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그리고 응보!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은 총알이 거의 발사되지 않고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꽃은 평화로운 권력의 전환을 상징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다치지 않고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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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DE를 둘러싸다
살라자르의 장기 독재는 부분적으로
PIDE(Policia International de Defesa do Estado)라는
조직에 의해 시행되었다.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를 모델로 한 이 그림자 경찰력은
정권의 반대자들을 박해했고, 고문하고 투옥하고 살해했다.
PIDE 요원들은 MFA에 의해 빠르게 확인되었고 즉시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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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
혁명군을 기다리며 그들의 운명을 감지한
몇몇 PIDE 요원들은 경찰 본부로 피신했다.
분노한 군중들에 둘러싸인 그들은 군중들에게 발포했고,
4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망자들이 혁명의 유일한 사망자였다.
결국, 그 요원들은 체포되었고 나중에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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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 속도를 내다
날이 갈수록, 모든 사람들이 독재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깃발을 흔들고 상징적인
카네이션 꽃다발을 들고 리스본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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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군도 혁명군에 조인하다
도시의 중심부인 프라사 데 디. 페드로 4세 광장과 호시오는
많은 사람들이 MFA 트럭들과 혁명에 조인한 정부 군들을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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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정권이 무너지다
혼란 속에서 총리인 마르셀로 카에타노와 몇몇 정부 장관들은
도심에 있는 카르모 막사로 피신했다.
MFA가 그들의 무기를 발사한 몇 안 되는 경우로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건물에 총격을 가했다.
패배를 인정한 카에타노는 항복하고 협상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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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 데 스피놀라 장군 (1910-1996)
수상은 안토니우 데 스피놀라 장군에게 권력을 양도했다.
식민지 전쟁의 베테랑인 스피놀라는 아프리카에서
정부의 행동에 대해 점점 더 목소리를 높여왔다.
직업 군인인 스피놀라는 MFA의 공식 대표로 선택되었다.
그는 포르투갈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74년 5월 15일부터 같은 해 9월 30일까지 잠시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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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에서 벗어나다
포르투갈의 독재 정권이 물러나면서,
이제 성취한 민주주의가 실감나기 시작했다.
40년간의 억압 끝에, 이 나라는 마침내 독재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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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사건
이 혁명은 국내와 국제적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집행이 이뤄졌는데,
1975년 포르투갈 주재 미국 대사 프랭크 칼루치가 다룬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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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구세군
에스타도 노보 정권이 전복된 후, 포르투갈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지정된
군 장교들로 구성된 국립 구세군(Junta de Salvaço National)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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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힘
그 혁명의 성공은 군대를 지지한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 포스터는 국민(포보)과 MFA의 단결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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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씨를 뿌리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3일 후, 리스본 주민들은
추방된 사회주의 지도자 마리우 소아레스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도시의 기차역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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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 소아레스 (1924년 ~ 2017년)
마리우 소아레스는 1968년 정치 운동가로서 PIDE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나중에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혁명의 결과로,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1976년부터 1978년까지 그리고 1983년부터 1985년까지
포르투갈의 총리를 지냈고, 이어서 1986년부터 1996년까지
포르투갈의 17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포르투갈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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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과정
카네이션 혁명은 1976년 포르투갈 최초의 입헌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했다.
1976년 7월 23일, 안토니우 라말호 에네스 장군이 공화국 대통령으로,
마리우 소아레스가 총리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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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행진
혁명 7일 후인 1974년 5월 1일, 리스본의 많은 부분이
에스타도 노보 정권의 몰락 이후 처음으로 수도에서 열린
공식 시위인 메이 데이를 기념하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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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유산
유럽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권위주의 정권을 종식시키고
포르투갈 전역에 민주주의를 도입한 것 외에도, 카네이션 혁명은
4월 25일을 기념하여 수많은 거리의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전 폰테 살라자르(살라자르 다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다리는 오늘날 Ponte 25 de Abril (4월 25일 다리)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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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주베 저항과 자유 박물관
2015년, 알주베 저항과 자유 박물관이 리스본에 문을 열었다.
1928년부터 1965년까지 운영되었던 이전 감옥 안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정치범들은 감금되었고, 고문을 당했다.
카네이션 혁명을 위한 특별 전시회는 박물관의 하이라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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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날
카네이션 혁명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혁명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출처: (The New York Times) (Britannica) (Portugal.com) (Africanews)
참조: Revolutions and rebellions that shaped world 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