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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편 高句麗 전성시대/ 제 1장 기원 1세기초 고구려의 국력발전과 그 원인
大朱留王 이후의 고구려
기원 1세기 이후로 기원 3,4세기까지의 한강 이남 곧 남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은 아직 초창하여 새로 일어선 때요, 압록강 이남 곧 중부조선의 여러 나라들은 다 쇠미해지고, 압록강 이북 곧 북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도 거의 기울어져서, 가라나 신라나 백제나 남낙랑이나 동부여 두 나라들이 다 기록할 만한 일일 별로 없고, 오직 고구려와 북부여가 가장 강대한 나라로 여러 나라 중에 크게 떨쳤다. 그러나 대주류왕 이후 연대가 삭감된에 따라 사실도 모두 빠져서 그 사적(史蹟)을 논할 수가 없게 되었고, 이제 지나사에 의거하여 고구려가 지나와 선비에 대해 정치적으로 관련된 한두 사항을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
고구려 대 支那의 관계
고구려가 동부여와 남낙랑과의 관계로 인하여 늘 한(漢)과 다투더니, 기원 1세기경에 한의 외족(外族)에 왕망(王莽)이라는 괴걸(怪傑)이 나와서, ① 고대 사회주의적인 정전법(井田法)을 실행하고, ② 한문화(漢文化)로 세계를 통일하여 일조의 공산주의적 국가의 건설을 시도하여, 지나 본국뿐 아니라 조선의 여러 나라까지도 얼마간의 관계가 발생하였다. 말하자면 지금의 중화민국(中華民國) 이전에 지나는 수천 년 동안 왕조의 변역과 군웅의 쟁탈이 무상하였지마는, 기실을의 세력이 갑의 세력을 대신할 때에, 민중에게는 한때, ‘요역(徭役)을 면제하고 부세(賦稅)를 감해준다(省徭役 薄賦稅)’하는 6장의 혜정(惠政)으로 고식적(姑息的)인 편안을 주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옛 규정을 회복하여 폭(暴)으로써 폭을 대신하는 극이 되풀이될 뿐이었으니, 이를 무의식한 내란이라고는 일컬을지언정, 혁명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는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왕망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토지를 평균하게 나누어 빈부의 계급을 없애자는 생각을 대답하게 실행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동양 고대의 유일한 혁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제 정전설(井田說) 발생의 경과의 왕망의 약사(略史)를 말하기로 한다.
정전설은 지나의 춘추시대(春秋時代) 말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원전 5세기경)에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생한 것인데, 당시 여러 나라들이 서로 맞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나라마다 귀족이 전권(專權)을 하여, 사치가 극에 이르고, 전쟁이 끊일 날 없어서, 부세가 날로 높아가고,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땅을 아울러 가져서 인민의 생활이 말할 수없이 곤란하였으므로, 유약(有若)ㆍ맹가(孟軻 : 孟子) 등 일부 학자들이 이를 구제하려고 토지평균설(土地平均說) - 정전설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지나의 하(夏)ㆍ상(商)ㆍ주(周) 3대가 다 정전제(井田制)를 행하였는데, 정(井)자 모양의 9백 묘(畝)의 땅을 여덟 집에 나누어주어 한 집이 1백 묘씩을 경작하고, 그 나머지 1백 묘는 공전(公田)이라 하여 여덟 집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공용(公用)에 바치게 하고 또 각자 경작한 1백 묘에서 소출의 10분에 1을 공세(公稅)로 바치게 하여 이를 십일세(什一稅)라 일컬었다.”고 하고, “선대의 성왕(聖王)은 다시 나지 않고 중국이 분열하여 전국시대가 되매, 제후와 왕들이 그 백성에게서 세를 많이 받기 위하여 정전을 파괴하는 동시에, 정전에 관한 문적(文籍)까지 없애버렸다.”고 하였다.
어느 민족이고 그 원시 공산제가 있었음을 오늘날의 사회학자들이 다 같이 공인하는 바이니, 지나도 그 태고에 균전제도(均田制度)가 있었을 것은 물론이거나와, 그들(有若ㆍ孟軻 등)이 주장한 정전제는 당시 조선의 균전제를 눈으로 보고 혹은 전해듣고서 이를 모방하려 한 것이고, 그들이 자인한 바와 같이 자기네의 옛 문적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선의 균전은 팔가동전(八家同田)이 아니고 사가동전(四家同田)이니, 지금 평양이나 경주에 끼쳐 있는 기자형(器字形)의 고전(故田)이 이를 충분히 증명하는데, 그 세제는 10분의 1을 취하는 ‘십일세(什一稅)가 아니고, 20분의 1을 취하는 입일세(廿一稅)였다.’
맹자가, ‘맥(貊 : 貊 곧 濊貊)은 20에서1을 취한다(貊 二十取一).’고 한 말이 이를 명백히 지적한 것이다.
저들이 사가동전제를 파가동전제로 고치고 20분의 1의 세재를 10분의 1의 세제로 고쳐서 조선과 달리하고는, 자존적 근성이 깊이 박힌 그들이 이를 조선에서 가져왔다 함을 꺼려 숨기고 중국 선대 제왕의 유제(遺制)라고 속이는 동시에 조선을 이맥(夷貊)이라 일컫고, 조선의 정전은 이맥의 제도라고 배척하여 춘추의 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이나 맹자와 마찬가지로, “십일(什一)보다 적게 받는 자는 대맥(大貊)ㆍ소맥(小貊)이다(少乎什一者 大貊小貊也).”라고 하고, “맥(貊)은 오곡이 잘 되지 않고 오직 기장만 나는데……백관(百官)ㆍ유사(有司)를 먹여 살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20에 1만 받아도 족하다(貊五穀不生 唯黍生之……無百官有司之養 故二十取一而足).”고 하였다. 후한서 부여ㆍ옥저 등의 전(傳)에,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기름지고 아름다워……오곡이 잘 된다(土地平敞……肥美……宜五穀).”고 하였고, 위략의 부여ㆍ고구려 등의 전에는, “그 벼슬에는 상가(相加)ㆍ대로(對盧)ㆍ패자(沛者) 등이 있다(其官 有相加對盧沛者).”라고 하였으니, 맹씨(孟氏)ㆍ공양(公羊)ㆍ곡량(穀梁) 등의 말이 근거도 없고 이론에도 맞지 않는 조선 배척론임을 볼 것이다.
조엽(趙曄)의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하우(夏禹)의 정전(井田)이 조선(본문의 州愼)의 것을 모방해서 행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정한 자백이다.저들이 정전설을 아무리 소리 높여 외쳤더라도 본래 민중을 휘동하여 부귀의 계급을 타파하려 한 운동이 아니고 오직 임금이나 부귀의 계급을 설복하여 그 이미 얻은 부귀를 버리고 그 가지고 있는 것을 민중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자는 것이므로 민간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임금이나 귀족들은 바야흐로 권리의 쟁탈에 급급하여 정전설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진시황이 여러 나라를 토멸하여 지나를 통일하고 지나의 모든 재부(財富)를 독점하여, 아방궁(阿房宮)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다가 2세에 망하고, 8년의 큰 난리를 지나 한(漢)나라가 일어나매, 옛날부터 여러 나라에 있어 온 귀족과 토호(土豪)들이 많이 멸망하여 부귀 계급이 훨씬 줄고, 인구도 난리통에 많이 줄어들어 농토 부족이 근심이 없었으므로, 문제되어오던 사회 문제가 얼마 동안 잠잠하였으나, 2백 년의 태평세월을 지나면서 인구는 크게 번식하고 거농(巨農)과 대상(大商)이 발생하여, 부자는 여러 고을의 땅을 가진이가 있는 반면에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사회 문제가 학자나 정치가의 사이에 다시 치열하게 논란되게 되었다.
그래서 혹은 한전의(限田議 : 토지 소유를 제한하자는 의논)를 내어 인민의 땅을 얼마 이내로 제한하자고 하고, 혹은 주례(周禮)란 글을 지어, 이것을 지나 고대에 정전제를 실행한 주공(周公)이란 성인이 지은 글이라고 거짓 핑계하여 당시의 제도를 반대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한의 제실(帝室)은 쇠약해지고, 외척(外戚) 왕씨(王氏)가 대대로 대사마(大司馬)ㆍ대장군(大將軍)의 직책을 가져 정권과 병권을 마음대로 하다가, 왕망이 대사마ㆍ대장군이 되어서는 한의 평제(平帝)와 유자영(孺子嬰) 두 황제를 독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신(新)이라 하였는데, 왕망은 실로 앞에서 말한 ① 정전제의 실행 ② 한문화(漢文化)의 세계 통일이라는 두 가지 큰 사상을 가진자였다. 그래서 주례(周禮)를 모방하여 온 지나의 정전 구획(區劃)에 착수하고 또 사신을 이웃 나라에 보내서 많은 재물을 임금에게 뇌물하여, 인명과 지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고치고 한문을 배우라고 꾀었다.이보다 앞서 흉노가 남ㆍ북 둘로 나뉘어져서 북흉노는 지금의 몽고 북부에 웅거하여 한과 대항하였으나 남흉노는 몽고 남부에 웅거하여 한에 신복(臣僕)하였는데, 이때에 왕망의 사신이 남흉노의 선우(單于) 낭아지사(囊牙知斯)를 달래어 ‘두 글자 이상의 이름은 중국 문법에 어긋나니, 낭아지사란 이름을 고쳐 ‘지(知)’라 하고, 흉노란 ‘흉(匈)’자가 순하지 못하니 ‘항노(降奴)’라 고치고, 선우란 ‘선(單)’자가 뜻이 없으니 복우중국(服于中國)이란 뜻으로 ‘복우(服于)’라 고치라.’고 하였다.
낭아지사가 처음엔 듣지 않다가 왕망의 재물을 탐내어 한이 준 흉노선우(匈奴單于) 낭아지사의 인문(印文)을 버리고 왕망이 새로 주는 항노복우지‘(降奴服于知)’란 인문을 받았다. 그러나 왕망이 다시 생각하기를 남흉노가 관할하는 부중(部衆)이 너무 많으니 혹 후일에 근심이되지 않을까 하여, 그 부중을 12부로 나누어 열두 복우(服于)를 세우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낭아지사가 크게 노하여 드디어 왕망에게 대항하여 싸우기에 이르렀다.
왕망이 여러 장수를 보내어 흉노를 치는데, 요동에 조서를 보내고, 고구려현(高句麗縣)이 군사를 징발하였다. 고구려현이란 무엇인가?
한나라 무제가 고구려국을 현으로 만들려다가 패하여 소수(小水), 지금의 태자하(太子河) 부근에 한 현을 두고 조선 여러 나라의 망명자ㆍ포로 등을 끌어모아 고구려 현이라 일컬어서, 현도군에 소속시키고, 통솔하는 장관 한 사람을 두어 고구려후(高句麗侯)라 일컬은 것이었다. 그 고을[縣] 사람들이 먼 길에 출정함을 꺼리므로 강제로 징발을 행하니, 고을 사람들이 새외로 나와서 싸움터로 가지 않고 모두 도둑이 되어 약탈을 하였다. 왕망의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다가 패하여 죽으니, 왕망이 대장군 엄우(嚴尤)를 보내 그 고을의 후(侯) 추(騶)를 꾀어다가 목배어 장안(長安)으로 보내고 싸움에 크게 이겼음을 보고하니, 고구려현을하구려현(下句麗縣)이라 고치고 조서를 내려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여 이긴 기세를 타 조선의 여러 나라와 흉노의 여러 부족을 쳐서 한화적(漢化的) 시설을 재촉하였다. 이에 조선 여러 나라, 북부여ㆍ고구려 등의 나라가 왕망에 대항하여 공수(攻守) 동맹을 맺고, 왕망의 변경을 자주 침노하여 왕망이 이에 대 조선ㆍ대 흉노의 전쟁을 위해 세금을 늘리고 사람을 징발하여 전 지나가 소란해졌다.
그래서 부유한 백성들만 왕망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도 떼를 지어 일어나 왕망을 토벌하므로, 왕망이 마침내 패망하고 한나라 광무제(光武帝)가 한나라를 중흥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왕망의 침입을 유류왕(儒留王) 31년의 일로 기록하고, 후ㆍ추를 고구려의 장수 연비(延丕)로 하였으나, 이는 삼국사기의 작자가 ① 고구려 고기(古記)에 연대가 줄어든 공안(公案)이 있음을 보고 고기의 연대를 한서의 연대와 맞추고, ② 한서의 고구려가 고구려국과 관계없는 한나라 현도군의 고구려현인 줄을 모르고, 이를 고구려국으로 잘못 알아서 한서의 본문에 그대로 초록하는 동시에, 다만 유류왕이 왕망의 장수의 손에 죽어 그 머리가 한 나라 서울 장안에까지 갔다고 함은, 저들 사대노(事大奴)의 눈에도 너무 엄청난 거짓말인 듯하므로, ‘고구려후추(高句麗侯騶)’ 5자를 ‘아장연비(我將延丕)’의 4자로 고친 것이다(김부식이 흐리터분한 잘못은 많으나 턱없는 거짓은 못하는 사람이니, 연비는 혹 고기의 작자가 위조한 인물일듯도 하다. 그러나 유류왕은 분명히 왕망보다 백여 년 전 인물이고, 한서에 말한 고구려는 분명히 고구려국이 아니니, 설혹 참말로 연비라는 사람이 있었다 할지라도 유류왕 시대 고구려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왕망은 지나의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의식있는 혁명을 행하려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웃 나라를 너무 무시하여 남의 언어ㆍ문자ㆍ종교ㆍ정치ㆍ풍속ㆍ생활 등 모든 역사적 배경을 묻지 않고, 한문화(漢文化)로 지배하려 하다가 그 반감을 불러일으켜서 얼마간의 민족적 전쟁을 일으키게 해서, 결과가 내부 개혁의 진행까지 저지하여, 그 패망의 첫째 원인을 만들었다. ‘신수두’교가 비록 태고의 미신이지마는, 전해내려온 연대가 오래고 유행한 지역이 넓어서, 한나라의 유고는 이를 대적할 무기가 못 되고, 이두문이 비록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만든 것이지마는, 조선의 인명ㆍ지명 등 명사(고대에는 모두 우리 말로 지은 명사)뿐 아니라, 노래나 시나 기록이나 무엇이거나 다 이때 조선인에게는 한자보다 편리하였으므로, 한자로 이두자를 대신 할 가망이 없으니, 왕망의 한 문화적 동방 침략이 어찌 망상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흉노의 본 이름은 ‘훈’인데, 구태여 ‘훈’을 ‘흉노’로 쓰는 이는 한인(漢人)이고, 고구려의 본 이름은‘가우리’요, 고구려(高句麗)는 그 이두자인데, 구태여 고구려를 구려(句麗) 혹은 고구려(高句麗)로 쓰는 이도 한인이었다. 한인의 짓도 괘씸하거늘 하물며 게다가 본명과 얼토당토않은 글자를 가져다가 ‘항노(降奴)’라 ‘하고려(下高麗)’라 함이랴? 왕망의 패망함이 또한 당연한 것이었다.
鮮卑 대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와 한이 충돌하는 사이에 서서, 고구려를 도우면 고구려가 이기고, 한을 도우면 한이 이겨, 두 나라의 승패를 좌우하는 자가 있으니, 곧 선비라 일컫는 종족이 그것이었다. 선비가 조선의 서북쪽, 지금의 몽고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가, 흉노 모돈에게 패하여 그 본거지를 잃고 내외 흥안령(內外興安嶺) 부근으로 옮겨갔음은 이미 제2편 제3장에서 말하였거니와, 그 뒤에 선비가 둘로 나뉘어 하나는 그대로 선비라 일컫고, 하나는 ‘오환(烏桓)’의 고기를 먹고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목축과 사냥으로 생활하는 종족으로서 각기 읍락(邑落)을 나누어 사는데, 부족 전체를 통솔하는 대인(大人)이 있고, 읍락마다 부대인(富大人)이 있어 그 부족들은 다 그 대인이나 부대인의 명자(名子)로 성을 삼으며,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젊은 사람을 존중하고, 늙은 사람을 천대하며, 문자가 없으므로 일이 있으면 나무에다 새긴 것으로 신표(信標)를 삼아서 무리를 모으고, 모든 분쟁은 대인에게 판결을 받아서 지는 자는 소나 양으로 배상을 하였다.
조선이 모돈에게 패한 뒤에 선비와 오환이 다 조선에 복종하지 않고, 도리어 조선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므로 고구려 초에 유류왕이 이를 걱정하여 부분노(扶芬奴)의 계략을 쫓아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왕이 친히 거느리고 선비국의 전면을 치고, 다른 한 부대는 부분노가 거느리고 가만히 사잇길로 하여 선비국의 후면으로 들어가서, 왕이 먼저 교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달아나니, 선비가 그 소혈(巢穴)을 비워두고 다투어 추격하므로, 부분노가 이에 소혈을 습격 점령하고, 왕의 군사와 함께 앞뒤에서 쳐서, 드디어 선비를 항복받아 속국을 삼았다. 오환은 한의 무제(武帝)가 위우거(衛右渠)를 토며한 뒤에 이를 불러 우북평(右北平)ㆍ어양(漁陽)ㆍ상곡(上谷)ㆍ안문(雁門)ㆍ대군(代郡) - 지나의 서북부 지금의 직예성(直匠省)ㆍ산서성(山西省) 일대에 옮겨 살게 하여 흉노의 정찰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 뒤 소제(昭帝) 때에 오환이 날로 불어나므로, 당시 한의 집권자 곽광(霍光)이 훗날의 걱정거리가 될까 하여, 오환의 선조 가운데 모돈에게 패하여 죽은 참혹한 역사로써, 오환을 선동하여 모돈의 무덤을 파헤쳐 조상의 원수를 갚게 하니, 흉노의 호연제선우(壺衍鞮單于)가 크게 노하여 날랜 기병 2만 명으로 오환을 치매 오환은 한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한이 3만 군사를 내어 구원한다 일컫고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흉노가 물러나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오환을 습격해서 수없이 학살하여 오환이 아주 쇠약해져서 다시 한에 대항하지 못하게 되었다. 왕망의 때에 이르러서는 오환으로 하여금 흉노를 치라 하고 그 처자들을 여러 고을에 볼모로 삼고 오환을 휘몰아서 흉노를 전멸시키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니, 오환이 분하게 여겨 배반하고 달아나는 자가 많았다.
왕망이 이에 그 볼모로 한 처자를 죄다 죽이니, 그 참혹함이 또한 심하였다.왕망이 망하고 지나가 크게어지러워지니, 고구려의 모본왕(慕本王)이 이를 기회로 하여, 요동을 회복하여 양평성(襄平城)의 이름을 고쳐 고구려의 옛 이름대로 오열홀(烏列忽)이라 일컫고 선비와 오환과 협력하여 자주 지나를 치니, 한의 광무제가 한을 중흥한 뒤에 요동군(遼東郡)을 지금의 난주(灤州)에 옮겨 설치하고, 고구려를 막기 위하여 장군 채동(蔡彤)으로 요동 태수를 삼았다. 그러나 채동이 자주 전쟁에 지고, 금백(金帛)으로 선비의 추장(酋長) 편하(偏何)를 달래어서 오환의 추장 흠지분(歆志濆)을 살해하게 하니, 모본왕이 다시 선비와 오환을 타일러서 공동작전을 취하였다. 한은 계책이 궁하여 해마다 2억 7천만 전(錢)을 고구려ㆍ선비ㆍ오환 세 나라에 바치기로 약조하여 휴전이 되었다.
모본왕이 한을 이기니 몹시 거만해져서, 몸이 아플 때에는 사람으로 누울 자리를 삼고, 누울 때는 사람으로 베개를 삼아서 꼼짝만 하면 그 사람을 목베어 죽여, 그렇게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시신(侍臣) 두로(杜魯)가 왕의 베개가 되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일찍이 친구에게 울면서 그 사정을 하소연하니, 그 친구가 말하기를, “우리를 살게 하므로 우리가 임금을 위하는 것인데, 우리를 죽이는 임금이야 도리어 우리의 원수가 아닌가? 원수는 죽이는 것이 옳소.”하였다.
이에 두로가 칼을 품었다가 왕을 죽였다. 모본왕이 죽은 뒤에 신하들이 모본왕의 태자는 못났다고 하여 페하고 종실에서 맞아다가 세우니 이가 태조왕(太祖王)이다.
고구려 본기가 대주류왕 이후는 확실히 연대가 줄어들었으므로 모본왕 본기부터서야 비로소 근거할 만한 재료가 될 것이지마는, 모보노앙을 대주류왕의 아들이라고 함은 그 연대가 줄어든 자취를 숨기려는 거짓 기록이다. 모본왕은 대개 대주류왕의 3세나 혹은 4세가 됨이 옳고, 모본왕 때에 요동을 회복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태조왕 3년(기원 55년)에 요서와 10성을 쌓았으니, 요동은 그 전에 한 번 회복되었던 것이 명백하며, 후한서 동이열전(東夷列傳)에, “고구려와 선비가 우북평(右北平)ㆍ어양(漁陽)ㆍ상곡(上谷)ㆍ태원(太原) 등지를 침략하다가 채동(蔡彤)에 은혜와 믿음으로 불러 다 다시 항복하였다.”고 하였으나, 세출전(歲出錢) 2억 7천만 전이 채동전(蔡彤傳)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세공(歲貢)이요, 은신(恩信)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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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1세기초 고구려의 국력발전과
그 원인에 대한 조선상고사를 공부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