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8번째 편지 - 나이가 들면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요즘 햇살에 봄기운이 묻어납니다. 절기상 이번 겨울은 3월 15일까지라고 하니, 이제 2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유난히 추웠던 이번 겨울은 여러분께 어떻게 느껴지셨나요? 길고 지루한 계절이었을까요, 아니면 눈 깜짝할 새 지나간 시간이었을까요.
나이가 들수록 한 해가 화살처럼 스친다고들 말합니다. 어린 시절 끝없이 길던 하루가 왜 성인이 되면 이토록 짧게 느껴질까요? 똑같은 24시간이 누구에게는 풍성하고, 누구에게는 허무하게 다가오는 이유에는 과학적 이유가 숨어있습니다.
Stanford University의 신경과학자 David Eagleman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흐르는 시간을 실시간으로 측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저장된 기억의 양’을 바탕으로 나중에 시간을 거꾸로 계산한다고 합니다.
매일 같은 길로 출퇴근하고, 익숙한 식당에서 늘 보던 사람을 만나는 반복된 일상 속에서 뇌는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이미 아는 정보”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기록을 최소화합니다. 한 달이 지나도 남은 기억의 밀도가 낮다면 뇌는 그 시간을 순식간에 지나간 것으로 인식합니다.
반대로 낯선 여행지에 가거나 새로운 배움을 시작할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뇌는 생존을 위해 시각, 청각, 촉각의 감각 정보를 촘촘히 수집하고 저장합니다. 정보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며칠의 시간도 길고 밀도 높게 느껴집니다. 결국 시간의 체감은 ‘물리적 길이’가 아니라 ‘기억의 밀도’에 의해 좌우됩니다.
컴퓨터 공학의 ‘활용(Exploitation)’과 ‘탐색(Exploration)’이라는 개념을 인생에 대입해 보면 더 명확해집니다. 브라이언 크리스천은 저서 <알고리즘, 인생을 계산하다>에서 이 두 전략의 조화를 강조합니다.
'활용'은 불확실성을 배제하고 이미 검증된 지식을 활용해 ‘가장 확실한 보상’을 얻는 안정적인 전략입니다. 단골 식당에 가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탐색'은 당장의 보상이 떨어지더라도 더 나은 가능성을 찾기 위해 ‘모르는 영역’으로 과감히 진입하는 도전적 전략입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식당의 문을 여는 용기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일수록 실패가 두려워 ‘탐색’을 멈추고 익숙한 ‘활용’에만 안주한다는 점입니다. 활용 전략은 효율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뇌의 녹화 스위치는 서서히 꺼집니다. 결국 삶의 외연은 넓어지지 않고 시간의 속도만 빨라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뇌는 이미 아는 내용이라고 판단해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절대적으로 시간의 속도가 빨라져서가 아니라 활용 전략만 계속 유지하다 보니 새롭게 느끼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도파민(Dopamine)입니다. 도파민은 흔히 쾌락의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기억의 저장 버튼’에 가깝습니다. 뇌가 스스로 예상한 ‘예측치’와 현실에서 벌어진 ‘결과치’ 사이에 격차가 발생할 때, 즉 RPE(Reward Prediction Error, 보상 예측 오류)가 일어날 때 분비되기 때문입니다.
Zero(0) RPE, 즉 예상한 대로 결과가 나오면 도파민의 변화가 없습니다. 뇌는 "새로 배울 게 없네"라고 판단하고 기억의 셔터를 누르지 않습니다. 매일 다니는 출근길이 기억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반면, 격차(오류) 값이 큰 RPE는 그것이 뜻밖의 횡재든, 예상치 못한 참패든 뇌는 "이것은 생존에 중요한 정보"라고 판단하여 셔터를 강하게 누릅니다.
이 기억 버튼이 눌리는 횟수가 많을수록 시간은 더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리학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24시간이지만, 우리 뇌가 인식하는 주관적 시간은 철저히 RPE의 빈도에 비례합니다.
앞으로 남은 삶을 주관적으로 더 길고 묵직하게 느끼고 싶다면 답은 분명합니다. 익숙함에만 머무르지 말고, 새로운 길을 걷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배움을 시작하십시오. 뇌가 “이것은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순간을 늘려야 합니다.
"인간의 뇌는 현재 흐르는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가 아니라, 과거에 저장된 데이터의 양, 곧 기억의 밀도를 바탕으로 시간을 사후 역산한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더라도 시간의 밀도만큼은 스스로 높일 수 있습니다.
이번 봄에는 기억의 밀도가 한층 높아지기를 바래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6.3.3 조근호 드림
첫댓글 익숙함에만 머무르지 말고, 새로운 길을 걷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배움을 시작하십시오. 뇌가 “이것은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순간을 늘려야 합니다.
좋은글에 머물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