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피눈물 나는 교훈’ 배우다
 
1973년 시리아군의 기습공격으로 시작,16일간 벌어진 ‘10월 전쟁’
이스라엘, 승리 불구 막대한 피해 입고 전쟁 후 국론 분열과 미국에 의존하게 돼
지금도 곳곳에 녹슨 전차…당시 참상 ‘생생’ - 장병들 전승비 찾아 조국애 가슴에 새겨
 
골란고원 '눈물의 계곡' 인근 이스라엘군 전승비 옆에 있는 파괴된 시리아군 T-62전차. 필자 제공
골란고원 전망대 전시관 안에 있는 10월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 전차병들 모습이 담긴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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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0월 6일부터 10월 22일까지 골란고원을 중심으로 20세기의 마지막 대규모 전차전이 벌어졌다. 이스라엘과 아랍이 맞붙었던 '10월 전쟁'의 최대 지상전이었다. 현재 '눈물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그 전장에서는 지금도 녹슨 당시 전쟁 잔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현지 안내인 나아만(55·여)은 눈물의 계곡 전망대로 가던 중에 참전용사인 자신의 오빠 피니(64) 씨가 있는 키부츠에 들렀다. 필자에게 이곳에서 직접 전투를 경험한 참전자를 만나도록 배려해 준 것이다.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오빠는 수로용 배관과 모터를 생산하는 조그마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키부츠는 과거 시리아군 병영이란다.
인상 좋은 피니 씨는 지리산의 지하수 개발공사에 참여하면서 수차례 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는 그가 본 한국의 아름다운 강산과 남해 바다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긴 좁은 국토(경기도와 강원도를 합친 정도) 중 절반이 사막인 이스라엘에 비해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금수강산 한국이 무척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전쟁 당시 전차병으로서 이 골란고원에서 전투를 치르며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겼다. 현재 60대 중반 이상의 이스라엘인은 대부분 참전용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스라엘군 장교(맨 오른쪽)가 전승비 옆에서 이스라엘군 장병과 유엔군 소속 캐나다군 장교(왼쪽 둘째)에게 '10월 전쟁' 상황과 교훈을 들려주고 있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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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 피니의 전차전 이야기
1973년 10월 6일 오후, 이스라엘군 전차와 시리아군 전차 수백 대가 뒤엉킨 골란고원. 피아간 불과 수십m의 거리를 두고 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전방에 적 전차!" "사격준비 끝!" "쏴!" "좌 전방 적 전차 2대 동시 출현!" "쏴!" 명중된 시리아군 전차에서 화염이 치솟는다. 온몸에 불이 붙은 전차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와 바닥에 뒹군다.
특히 피니 씨가 탑승한 전차는 지뢰제거전차와 장벽극복용 교량전차를 우선적으로 타격했다. 당시 그와 동료들은 자신들이 물러서면 조국의 운명은 끝난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단다.
최초 시리아군은 15대1의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차로 이스라엘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10월 6일부터 수일간 사력을 다해 시리아군을 저지하면서 간신히 전선 붕괴를 막았다. 뒤이어 긴급 증원된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아랍연합군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근교까지 진격한다. 결국 10월 22일 저녁, 시리아는 유엔의 정전 제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골란고원 전투에서 시리아군은 1150대, 이라크는 200여 대, 요르단은 50여 대의 전차를 잃었다. 그러나 피니 씨는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처절한 전쟁 경험은 하고 싶지 않다며 애써 과거 기억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 시리아군 포로를 관리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스라엘군 전승비. 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은 이스라엘군 전차의 포신이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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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된 교통호와 벙커들
골란고원은 대체로 평탄한 초원지대지만 가끔씩은 야트막한 구릉도 있다. 군데군데 해자와 긴 제방(약 3m 높이), 도로장애물 등의 대전차방벽이 보인다. 우리가 탄 차는 갑자기 산등성이의 좁은 길로 기어오른다. 도착한 곳은 멀리 접경지역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고지 정상의 전망대. 이곳 역시 과거 이스라엘군 진지였다. 주변에는 폐기된 교통호와 벙커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고지 아래 멀리 보이는 곳이 바로 '눈물의 계곡(Valley of tears)'. 이 전쟁터가 피아 전차 수백 대가 뒤엉켜 수일간 주야로 피 튀기며 싸운 곳이란다. 오죽 사상자가 많았으면 눈물이 강물처럼 흘렀을까? 멀리 이스라엘 점령지에는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시리아 마을도 보인다. 철책 바로 건너편 눈앞의 부모 형제를 만나려면 요르단을 거처 시리아로 가야 한다. 한국 속초의 '아바이 마을' 같은 곳이 골란고원에도 4곳이나 있단다.
전승비 앞에서 현장교육 받아
전망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높게 휘날리는 이스라엘 국기와 전승비가 있었다. 그리고 시뻘겋게 녹슨 시리아군 T-62 전차포신이 마치 벌 받는 학생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마침 그곳에는 현장교육 중인 이스라엘군 장병들과 유엔군 소속의 캐나다군 대위가 있었다. 고릴라가 같은 큰 덩치의 이스라엘군 장교는 낯선 이방인에게 당장 경계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캐나다군 대위는 캐나다와 한국은 6·25전쟁에서 피를 같이 흘린 혈맹의 나라라며 반갑게 손을 내민다. 특히 오늘날 한류 열풍을 놀라워하며 자신이 가진 휴대폰도 한국산이라고 한다.
두 사람의 친근함을 보고서야 이스라엘 고릴라 장교(?)는 밝은 표정으로 '10월 전쟁'의 결과를 이야기했다. 이 전쟁으로 항상 승리만을 가졌던 이스라엘군의 신화는 깨졌단다. 전쟁 비용은 1년치 정부예산과 맞먹었으며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의 고통은 가늠할 수도 없었다. 국민들은 서로 불신하며 여러 파벌로 분열됐다. 특히 강력한 주변 적대국가들을 새삼 인식한 이스라엘은 전례 없이 군사·외교적으로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신종태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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