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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문에는 성종 초기 수렴청정을 한 세조비 정희왕후의 상중에 전라감사 이극돈이 장흥 기생과 어울려 놀았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한편 <조의제문>은 중국의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폐하여 죽인 사건을 제문 형식으로 쓴 글인데, 이는 곧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비방한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었다.
이극돈은 이 문서를 가지고 평소 김종직을 증오하던 유자광에게로 달려갔다. 앞글에서 말했듯이 함양 학사루에 걸려 있던 유자광의 현판을 김종직이 떼어버린 일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대신 노사신, 윤필상 등과 의논한 후 왕(연산)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에서는 김종직이 세조를 비방했으므로, 그는 대역죄인이며, 이것을 사초에 담은 김일손 역시 같은 부류라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아도 청요직들의 거침없는 탄핵과 간쟁에 시달려오던 연산이었다. 연산은 즉각 김일손을 문초했다.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은 김종직 학파의 집단 음모라는 자백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연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했고, 김일손 등 5명을 능지처참했으며 31명을 귀양 보냈다.(<<표해록>>의 저자 최부도 해당) 이것이 이른바 무오사화라는 것이었다.
사화를 간신들의 음모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에는 보다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통찰이 요구된다. 당대의 청요직들은 도덕을 권력으로 실체화했고 이를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측면이 있었다. 이미 성종 후반기부터 청요직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언론 권력을 지나치게 행사해온 것이 사실이다.
처음에는 청요직을 통해 대신들을 견제했던 성종도 말년에는 대신들 편으로 기울었으며, 붕어 직전에는, “두 마리의 호랑이(대간, 대신)가 서로 싸우니 실로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요컨대 청요직들은 이미 연산군 이전부터 왕과 대신들의 우려와 공포를 키워왔던 것이다.
다만 성종은 철저히 유학적 교양으로 다져진 군주였기에 청요직들에게 군주의 특권인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성종은 어떻게 해서든 <<경국대전>>의 강령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사실 성종은 세종에 버금가는 호학 군주였다.
하지만 그의 적장자 연산은 아버지와 대조적이었다. 연산에게는 청요직들의 저항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헤아릴 역량이 없었다. 그는 젊은 청요직들의 저항을 단지 능상(凌上, 윗사람을 업신여김)으로 받아들이는 그릇밖에는 되지 않았다.
첫 번째 사화, 무오사화는 청요직 연대를 견제하고 그들에게 강력히 경고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부관참시된 김종직을 포함, 사형 숫자가 다른 사화에 비해 현저히 적은 6명이라는 점도 이를 방증한다. 이를 도식화하면, [무오사화 = 왕/대신 : 청요직]의 대립에서 청요직이 패한 사건이었다.
무오사화는 <<경국대전>>이 완성되고 불과 13년 만에 일어난 변칙이었다. 새로운 개혁과 진보는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정착화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며, 또한 그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를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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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타까운 조선 역사
교훈으로 받아 새로운 한국
만들어 가길 간절 기도합니다 !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잘 감상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