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티노 감독은 항상 새로운 영화 문법을 개척하며 전진한다. [저수지의 개들](1992년)로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데뷔작을 선보인 이후 타란티노 감독은 언제나 새로운 형식을 가지고 등장했다. 그의 영화가 동어반복의 비슷한 스타일에 머물러 있는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래서 언제나 그의 영화는 갓 볶아낸 커피처럼 신선하다. 다음 작품이 어떤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을까 가장 궁금하게 만드는 감독이 타란티노다. 타란티노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 하는게 아니라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가라는 스타일의 문제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스타일리스트 감독이다.
만약 당신이 초반 30분의 지루함을 견딜 수가 있다면, 그의 신작 [데쓰 프루프]는 분명히 놀라운 쾌감을 전해줄 것이다. [데쓰 프루프]를 지배하는 것은 속도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살인마 스턴트맨(커트 러셀 분)이나 그가 운전하는 차가 무섭게 공격하는 7명의 여성들이 아니라, 속도 그 자체다. 타란티노는 망설이거나 멈칫거리지 않는다. 시속 200km로 질주하는 속도, 방아쇠를 당기면 장전된 총에서 순식간에 튀어나가는 총알의 탄력성이야말로 [데쓰 프루프]가 목표하는 것이다. 타란티노식 사유의 속도가 현실적 속도를 동반한 작품이 [데쓰 프루프]이다. 주제적으로는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억압받은 여성들을 위해 바치는 타란티노식 헌사이다. 극단적인 여성 예찬론에 가깝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 쾌감은 절정에 이른다.
언제나 그렇듯이 타란티노 영화는 말이 많다. 그는 등장인물들이 쉴새없이 입을 열 수 있도록 엄청난 분량의 대사를 준비한다. 심지어 혼자 있을 때도 중얼거린다. 불과 다섯 편의 장편영화로 이미 영화사의 거장 반열에 올라선 타란티노 감독이기 때문에, 수많은 대사들이 심오한 의미를 갖고 있다거나 영화적 복선을 던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면, 당신은 타란티노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타란티노의 대사는 그 자체로 즐겨야 한다. 썰렁개그에 가까운 그의 유머가 골 때리게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수많은 대사들이 캐릭터 구축에 효과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물론이다. 특히 먹물적 책상물림에서 만들어진 대사가 아니라 현장에서 채집된 생생한 대사는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 넣고 캐릭터 구축의 사실성에 기여한다.
[데쓰 프루프]는 크게 두 개의 이야기로 나눠져 있다. 1부는 텍사스주 오스틴시, 2부는 테네시주 레바논시가 무대다. 영화의 마지막 장소를 타란티노는 자신의 고향 근처에서 찍었다.(그는 테네시주 녹스빌 태생이다) 1부와 2부를 이어주는 것은 오른쪽 뺨에 커다란 흉터 자국이 있는 스턴트맨(커트 러셀 분)과 그의 차 데쓰 프루프다. 1부의 도입부는 여유만만이다. 지방 소도시의 라디오 DJ로 꽤 유명한 정글 줄리아(시드니 타미야 포이티에 분)는 친구인 알린, 세나와 함께 멋진 밤을 보내기 위해 동네의 바들을 전전하며 춤을 추고 즐겁게 논다. 그녀들을 지켜보는 사람은 스턴트맨. 그는 바에서 만난 금발의 미녀 팸(로즈 맥고완 분)이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게끔 교묘하게 유도한다.
스턴트 맨의 차는 어떤 사고에서도 안전하게 운전자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 개조된 데쓰 프루프. 하지만 절대 죽지 않는다는 데스 프루프는 오직 운전자만을 보호한다. 조수석에 탄 팸은 정신없이 좌충우돌 달리다가 급정거하는 차 안에서 짐짝처럼 여기저기 부딪친 뒤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피맛을 본 변태 살인마 스턴트맨은 그가 원래 목표로 했던 정글 줄리아 일행이 탄 차를 뒤쫒는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자동차 추격씬에 이를 때까지 느릿하게 전개되던 [데쓰 프루프]는 갑자기 놀라운 속도로 급발진한다. 온 몸의 피는 모세혈관까지 탱탱하게 긴장되고 아드레날린은 펑펑 분출되기 시작한다.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2부는 테네시주 레바논시를 배경으로 한다. 1부와 비슷한 모습이 전개되는데, 다른 것은 자동차 추격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스피드하게 전개된다는 것이다. 2부에서 가장 놀라운 볼거리는 [캣 우먼]에서 샤론 스톤의 대역을 했고 [킬빌]에서 우마 써먼의 스턴트 대역을 하면서 타란티노 감독과 만난 뉴질랜드 출신 스턴트 우먼 조이 벨이 직접 연기하는 스턴트 묘기다. 마치 성룡의 액션 연기처럼 CG를 전혀 쓰지 않고 진짜 조이 벨이 온몸으로 연기한 후반부의 놀라운 연기는 입을 쩍 벌어지게 하고 눈동자를 막대사탕처럼 휘둥그래 확장시켜 놓는다. 1부와 2부는 짝을 이루고 있는데, 1부 클라이막스의 잔혹한 쾌감은 2부 마지막의 잔혹한 쾌감과 대구를 이룬다. 그것은 성적인 대결이다. 궁극적으로 타란티노는 우리 시대 모든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 하지만 당신이 마초적 남성이라고 해도 [데쓰 프루프]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도 모르는 쾌감에 사로잡힐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서정주의 시 자화상을 빌어 얘기하자면, 타란티노 감독을 키운 것은 8할이 비디오 가게다. 고교를 중퇴한 그는 비디오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동서고금의 수많은 영화들을 섭렵했다. 그가 즐겨본 영화들은 베르히만이나 고다르의 영화가 아니라, 홍콩 액션 영화나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 그리고 싸구려 B급 호러 영화나 추리물 등이었다. 그래서 타란티노의 영화는 무조건 재미있다. 그는 왜 대중들이 영화라는 형식에 열광하는지, 어떻게 만들어야 그들을 극장에 오게 할 수 있는지,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면서 본능적으로 배웠다.
한때 [내 꿈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연기에 집착했던 타란티노 감독은 데뷔작부터 자신의 영화에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그가 각본을 쓰고 친구인 로드리게스 감독이 만든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는 주인공으로 연기도 한다. [데쓰 프루프]에서는 1부에 등장하는 바의 바텐더 워렌(퀜틴 타란티노 분) 역으로 나온다.
타란티노는 항상 의외의 인물을 캐스팅해서 너무나 훌륭하게 변신시키는, 배우들의 가장 뛰어난 조련사다. [토요일 밤의 열기][그리스] 등으로 디스코붐을 주도했던 섹시가이 존 트라볼타는 디스코붐이 수그러들면서 한쪽 구석에서 깨갱 엎드려 있어야 했다. 그를 영화판으로 다시 불러낸 사람이 퀜틴 타란티노다. 올백으로 빗어넘긴 머리, 양말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가 디스코가 아니라 깨금발로 트위스트를 추는 존 트라볼타를 어찌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펄프 픽션]을 통해 존 트라볼타는 제 2의 연기 인생을 시작했다. [재키 브라운]에서도 70년대 블랙플레이네이션 영화의 히로인이었던 흑인 여배우 팜 그리어를 캐스팅 해서 타이틀 롤을 맡긴다. 한창 때의 쭉쭉빵빵도 아니고 중년이 된 흑인 여배우 팜 그리어는 타란티노에 의해 멋진 필모그래피를 추가하게 되었다.
[데쓰 프루프]에서 타란티노의 부름을 새롭게 받은 사람은, 스턴트 우먼 조이 벨만이 아니다. 스턴트 맨 역의 커트 러셀은 그래도 왕년의 꽃미남이었다. 그에게 까칠한 턱수염과 구레나룻을 기르게 하고 한쪽 뺨에는 흉한 칼자국까지 그어서 멋진 캐릭터로 만들어냈다. 또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명배우 시드니 포이티에의 딸인 시드니 타미야 포이티에를 캐스팅해서 섹시한 여자 DJ의 육감적 모습을 보여준다. [데쓰 프루프]에는 유명 여배우인 세릴 래드의 딸 조던 래드도 1부에 등장하는 4명의 여성 중 하나인 세나 역으로 나온다. 그들은 모두 치열한 공개 오디션을 뚫고 캐스팅 된 배우들이다.
[데쓰 프루프]의 또 하나의 주인공들은 바로 영화에 등장하는 클래식한 차들이다. 머슬 카 Muscle Car라고 불리우는, 6,70년대 유행했던 배기량이 큰 육중한 차들이 등장하는데 우선 광란의 질주로 모든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스턴트맨의 차는 블랙블루 칼라의 세비 노바다. 그 차가 추격하는 1부의 정글 줄리아 팀들이 탄 차는 상대적으로 아담한 혼다 시빅이다. 2부에서 스턴트맨은 닷지 차저를 몬다. 그 차가 추격하는 조이의 차는 닷지 챌린저다. 그래서 [데쓰 프루프]의 마지막은 닷지끼리의전쟁이다.
[데쓰 프루프]에서 타란티노 감독이 들고 나온 새로운 스타일은, B급 장르 무비의 의도적인 혼성이다. 지금까지 타란티노 감독은 기승전결식의 선형적 서사구조를 파괴하고 비선형적 내러티브를 제시해서 영화의 서사구조를 새롭게 개척해 나갔다. 하지만 [데쓰 프루프]는 비선형적 서사는 아니다. 1부와 2부 사이에는 1년여의 시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세밀하게 관찰해 보면, 연소자 관람불가라는 자막이 뜨는 오프닝부터 삼류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듯한 툭, 툭, 끊어지는 의도적인 편집의 교란, 칼라에서 느닷없이 흑백으로 전환하는 시걱적 교란도 있고, 대화 도중에도 갑자기 소리가 커졌다 작아지는 청각적 교란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의도적인 장치다. 우리는 지금 팝콘을 먹으며 즐겁게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지, 심각한 작가주의 예술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데쓰 프루프]의 내러티브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1부의 마지막과 2부의 마지막이 대구를 이루는 특징적 형식이다. 그 대구 형식을 이용하여,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타란티노는 주제를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