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 고 김수미는 ‘전원일기에 일용이 엄마’로 잘 알려진 여배우로 41년간 써 내려온 일기와 탄원서에 30대 젊은 나이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2024년까지 일기에는 현대 한 여자의 억척스러운 일생과 고민, 살아온 인간의 험난한 삶의 내용이다. 지옥 같은 고달픈 여성의 고뇌를 보여주고 있다. 알코올 중독·외도·돈…그러면서 난 살고 싶다는 연기에 대한 신념과 갈망과 고뇌에서 경제적인 어려움,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에서 고통과 위기에 협박당하기도 하기도 하고 회사 운영을 맡겼던 자에게 횡령이라는 누명까지 쓰게 된다.
여배우라는 사회에 공인이라는 점 때문에 늘 조심하고 참고 견디고 바보같이 살아온다. 여성은 우리의 어머니시오, 부인이며 딸 들이다. 그녀의 살아온 한 여성의 삶의 철학에서 주는 교훈은 "숨 막힘의 고통은 어떤 약으로도 치유할 수 없다", "공황장애, 숨이 턱턱 막힌다" 등 한 여성으로 어려운 길을 걸어 10월 5일 오전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서울 성모병원에서 향년 75세에 세상을 떠난다. 이렇게 약한 여성으로 지옥 같은 삶을 마감한다.
지난해 11월 25일 보신각 앞에는 192켤레의 주인 잃은 신발이 전시되었는데 이 신발들은 ‘세계 여성폭력추방의 날’을 맞아, 작년 한 해 동안 친밀한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 피해자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한국여성의전화에 2009년 이후 언론에 보도된 것만 해도 최소 1,379명의 여성이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당한 참변이다. 이러한 여성폭력은 특정 집단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나이· 계층· 학력·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발생하며 여성을 대상으로 폭력과 억압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원인은 그간 한국사회의 축적된 성차별주의의 산물이다.
19세기 말 한국 온 여선교사들은 조선 여성들의 삶은 슬픔과 절망, 힘든 노동과 질병, 그리고 애정 결핍 때문에 상처투성이며 “낮은 계급의 여성들은 30대에 50대처럼 보이며, 이미 40대에는 거의 이가 빠져 있다”라며 당시 여성의 비참했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시기에, 기독교로 인해 여성의 위상에 큰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안방에 갇혀 지내던 양반댁 여성들은 교회로 삶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름조차 없던 하찮은 계집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자기 이름을 가지면서 인간으로 시작된다.
독일 출신 쉐핑 선교사의 1921년 선교보고서에 “이번 여행에서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 명뿐으로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큰 년’, ‘작은 년’ 등으로 불렀다.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 이처럼 기독교는 여성들에게 신앙의 기회를 제공한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이는 당시 사회에서 여성을 대하는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벙어리 삼 년, 장 님 삼 년, 귀머거리 삼 년”이라는 속담이 말해주듯, 한국 여성들에게 강요된 덕목 중 하나는 ‘말없이 따름’이었지요. 가부장적 사회일수록 여성의 말할 권리를 통제하였다. 그런데 교회와 미션 학교를 통해 여성들에게 말할 권리를 주며 그녀들의 목소리에 경청하면서 변화를 이끌었다. 이화학당에서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 등의 주제로 공개토론회를 개최하고 삼종지도, 여필종부, 칠거지악 등 봉건적 윤리 덕목에 여성 연사가 남성들 앞에서 자기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을 벌이는 것은 매우 혁명적인 일이다.
여성들이 당당히 말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당시 기독교는 여성 주체를 세우는 큰 역할을 했다. 물론, 오늘날의 감수성으로 당시 기독교가 한 실천들은 한계가 많았다. 글을 배우고, 자기 의견을 발언할 기회를 제공한 기독교의 역할은 결코 폄하될 수 없다. 문맹과 무지에서 벗어난 여성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을 열었고, 억압적인 상황을 깨닫고 사회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 여성들은 민족운동의 중요한 동력이었다. 삼일운동 당시, 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된 여성 중 기독교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이처럼 100여 년 전, 믿음의 여성들은 당시의 관습들을 하나씩 허물어 오늘을 만들어 온 것이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다는 사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에 안전하다고 해서 내일도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고 오늘날 우리의 삶의 불안한 이유는 정체성 인플레가 아니라 상호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산업사회 후기부터 현 정보사회까지의 인간의 초점은 다른 먼 지역 사람과의 소통이다. 이점은 모든 세대에게 강조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가정, 사회, 학교,나라 이르기까지 "나는 옳고 '너는 옳지 않다"는 잘못된 형태의 이해방식이 삶을 불안하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조 황희 정승 고사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느 날 황희 정승이 집에 돌아오니 집안의 두 여종이 다투고 있었다. 둘 중의 한 여종이 황희 정승 앞으로 나와 자기 생각이 옳다고 주장을 하니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황희정승은 "네 말이 옳다"라고 말이다. 이 말을 들은 자못 당당한 표정을 짓자 다른 여종이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옳고 아까 말한 여종이 틀렸다고 항변을 한다. 그러자 황희 정승은 정색하며 "그래 네 말도 옳다"고 하였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