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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이 아까워 몇 점 더... 작은 사진으로 소개
입장권을 사면서 다른 성당이나 비슷하겠지 하고 들어갔는데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우선 들어가는 입구의 조그만 마당에 첨탑 꼭대기의 여인이 바람개비를 잡고 있는 모형을 만들어 놓았는데 어마어마하게 크다. 그리고 입장하고 보니 미사를 드리는 공간이 아니고 박물관인데... 전시된 미술품, 조각들이 엄청나게 크고 화려해서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내부에는 그림은 물론, 조각품, 목조 조각 등 훌륭한 예술 작품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플라테레스크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모두 수천점이나 될 것 같은 소장품들은 모두 황금색이라 흡사 황금궁전에 들어온 느낌이다.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청동으로 제작한, 네 사람이 들고 있는 콜럼버스의 관이다.
이 콜럼버스의 관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다.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는 금과 향료가 무진장인 인도(India)를 찾아 대 항해를 시작한다.
그러나 금과 향신료를 얻지 못하고 아메리카대륙(신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오자 이사벨은 크게 실망하고 콜럼버스에게 냉랭하게 대했던 모양이다. 크게 실망한 콜럼버스는 자신이 죽으면 절대로 스페인 땅에 묻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결국 자신이 발견한 쿠바에 묻혔다고 한다. 그러나 스페인은 훗날 그들의 잘못을 깨닫고 콜럼버스의 시신을 스페인으로 모셔오는데 그의 유언을 거스를 수 없어 땅에 묻지 못하고 대 세비야 성당에 모시면서 지금처럼 공중에 떠있게 설계했다고 한다.
<대성당에서의 에피소드>
세비야 대성당에서 관광객이 너무 많아 임교장과 헤어지고 말았다. 성당 안을 두어 바퀴 돌며 목을 길게 빼고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너무 피곤하여 뒷문으로 나와서 그늘에 앉아 담배를 한 대피며... 10여 분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다. ‘출구가 여러 곳일 테니...’ 우선 바깥으로 나와서 처음 들어갔던 입구 앞에 앉아 한 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행여나, 바로 옆에 있는 알카사르성 앞의 기다랗게 늘어선 줄을 뒤에서부터 앞까지 훑어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데로 가면 도저히 찾을 길이 없고... 그냥 무작정 또 성당입구에 앉아 기다리는데 오지 않는다. 조급한 마음에 다시 알카사르성 입장객들... 중간쯤에 임교장이 서 있다. ‘아니, 여기 서 있으면 어떡합니까? 들어갔던 입구로 와야지?’ ‘바깥으로 나와 사방을 찾아 다녀도 없어서 먼저 성으로 들어 가셨나 해서...’ ‘임교장! 이럴 땐 항상 입구입니다, 입구!!’ 암튼... 십 년 감수했다. ㅎ
<황금탑/Torre del Oro>
과달키르 강변의 황금탑 꼭대기에서 본 과달키르 탑 속의 전쟁박물관
이 황금탑은 13세기 초 이슬람인들이 도시 앞을 흐르는 과달키비르 강(江)을 통과하는 배를 검문하기 위해 세웠다고 하는데 강 건너편에는 은의 탑이 있어서 두 탑을 쇠사슬로 연결하여 세비야에 들어오는 모든 배를 막았다고 한다. 황금탑 이라는 이름은 처음 탑을 세울 때 금 타일로 탑의 바깥을 덮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16~17세기에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을 이곳 지하창고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또, 이곳은 콜럼버스(Columbus)의 신대륙 항해의 시작점이며, 마젤란(Magellan)이 세계 일주를 위한 항해를 떠났다고 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지금 은의 탑은 없지만 조금 떨어져 건설한 다리를 건너가면 고만한 탑이 하나 있는데 올라가면 주변이 한 눈에 보이고 두 탑 내부는 모두 박물관이다.
<알카사르(Alcázar)> 성채
알 카사르 입구 알 카사르 성채 소녀들의 정원
스페인은 도시마다 알카사르(Alcázar)라는 성채가 있는데 처음에는 로마장군 케이사르(Caesar)의 이름을 딴 로마시대의 성인가 했는데 나중에 조사해 봤더니 알카사르는 ‘성(城)’이라는 의미의 보통명사...
아침 일찍 갔는데도 매표구 앞에 표를 사는 줄이 너무 길게 늘어서 있어서 먼저 황금탑을 보고 난 후 들어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황금탑을 보고난 후 왔더니 또 줄이 길게... 다시 대성당을 보고 난 후...
알카사르 성채는 우선 성벽이 너무 멋진데 안으로 들어가면 종루까지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있다. 종루에 오르면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곧바로 성 안에 있는 꽃과 나무들이 잘 가꾸어진 정원이 보인다.
이 궁전은 12세기 후반 이슬람 인들이 세운 성채라고 하는데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의 것은 14세기 페드로 1세가 건설한 ‘페드로 궁전’이라고 한다. 스페인 특유의 이슬람 양식인 무데하르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 알려졌고,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비슷한 채색 타일 장식과 격자 천장, 파티오 등이 유명하다는데 글쎄... 나에게는 그다지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보다 후원에 있는 정원이 마음에 들었는데 이 정원의 이름이 ‘소녀의 정원’이라는데 좀 서글픈 사연이 있다. 이슬람 무어족들이 이 지역을 점령했을 때 스페인 소녀 100명을 바치라고 했다던가....
크지는 않지만 기하학적으로 꾸민 정원은 모양부터 너무나 아름답고 또 잘 가꾸어서 가지가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고 내 허리보다 낮은 난쟁이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또, 예전에는 수영장이나 목욕탕으로 사용했었던 듯 작은 풀장도 있는데 오래된 돌계단이 매력적이다.
<누에바 광장(Plaza Nueva)과 세비야 시청사(Seville Town Hall)>
세비야 시청사 시청 뒷골목 페르난도 3세 동상
세비야 시청사(市廳舍)는 누에바 광장(Plaza Nueva)에 있는데 플래터레스크(Plateresque) 건축의 거장인 스페인 건축가 리아뇨(Diego de Riaño)가 15세기 말에 건축을 시작해 16세기에 완성한 유서 깊은 시청사로, 에스파냐에서 대표적인 플래터레스크 양식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플래터레스크(Plateresque)는 원래 은세공을 뜻하는 단어로 16세기에 스페인에서 유행한 고딕, 르네상스, 이슬람의 여러 요소를 건물의 외관이나 내부 장식에 사용하는 건축기법이다.
현재 누에바 광장 쪽의 정면은 건축가 리오스(Demetrio de los Ríos)와 마론(Balbino Marrón)이 19세기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새롭게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이 시청사는 세비야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자 랜드마크(Landmark)라고 하는데.... 글쎄 나는 골목길의 자그마하고 아기자기한 성당들이 훨씬 더 예뻤다.
시내 가운데쯤에 누에바 광장(Plaza Nueva)이 있는데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시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된다. 광장 한쪽에는 12세기 초 카스티야 왕국의 왕이었던 페르난도 3세(Pernando III) 기마상이 우뚝 솟아있다. 페르난도 3세는 스페인 서북부에 있던 조그마한 레온왕국(Kingdom of León)을 카스티야왕국과 완전히 통합시킨 위대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스페인은 12세기에 아라곤(Aragon)왕국, 나바라(Navarra)왕국, 카스티야(Castilla)왕국 그리고 남부 안달루시아지방의 무슬림 왕국인 그라나다(Granada)의 네 나라이지만 우리나라 부족국가 시대처럼 그 이전에는 훨씬 더 많은 작은 나라들이 있었다.
<플라멩코(Flamenco) 공연 관람>
정통 플라멩코 공연 관람
저녁을 먹은 후 숙소에 돌아와 주인에게 플라멩코 공연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약도를 그려주며 이곳에 가면 정통 플라멩코 공연을 볼 수 있다며 꼭 보라고 한다. 공연은 조그만 무대 앞에 3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관람석이 있는 조촐한 공연장인데 이미 발 들여 놓을 틈조차 없이 관객들이 들이차 있다. 그러나 용케도 가운데쯤에 빈 좌석이 있어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 되고난 후 완전히 플라멩코의 춤과 음악에 빠져들고 말았다. 공연하는 예술인(!!)은 딱 4명으로 처음에는 무대와 출연자 인원을 보고 조금 실망도 했었는데... 완전히 최정상급 기능보유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막히게 연주하는 기타리스트(Guitarist)와 노래Cante)하는 가수가 각 1명, 무용수는 남, 여 각 1명으로 모두 네 명뿐인데도 완전히 청중을 압도한다.
화려한 의상도 아니고, 과도한 몸짓도 아닌, 절제된 동작과 춤, 노래, 기타반주가 완벽한 앙상블을 이루어 공연하는 내내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 가슴을 쥐어뜯는, 피를 토하는 듯 비장한 어조의 노래, 온몸이 부서질 듯 강렬하면서도 절제된 동작의 몸짓, 현란한 발 구르기와 손가락 튕기기(캐스터네츠), 그리고 박력이 넘치는 발 구르기와 리드미컬한 박수, 거기에 신들린 듯 얹어지는 현란한 기타선율과의 완벽한 조화는 청중의 숨을 멈추게 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한다. 약 1시간 30분 정도의 공연이 끝나자 관중들은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멈출 줄 모른다. 공연 중에는 일체 사진촬영이 금지이고 공연이 끝난 후 잠시 사진촬영이 허락된다. 몇 번 길거리에서 녹음에 맞추어 플라멩코를 추는 소녀들을 보았는데 전연 차원이 다르다. 그네들은 푼돈을 벌기 위해 어설픈 흉내만 내고 있었다는....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 바로 옆의 자그마한 방은 플라멩코 박물관으로 꾸며 놓았는데 주로 포스터와 무대 의상들이다. 숙소 주인 말대로 정통 플라멩코를 감상할 수 있어서 매우 만족... 나의 오랜 숙원을 풀었다.
집시음악으로 알려진 플라멩코와 집시의 기원(起源)에 대하여 알아본다.
조상 대대로 방랑생활을 하는 민족인 집시 족은 코카서스(Caucasus) 인종에 속하는 소수 유랑민족으로, 기원에 대해서는 인도(印度) 북서부라는 것이 가장 유력하나 확실한 정설은 없다고 한다.
집시(Gipsy) 혹은 보헤미안(Bohemian)으로 알려진 이들의 첫 이미지는 ‘영원한 방랑자’, ‘자유로운 영혼들’, ‘아름답고 격정적인 집시음악’, ‘강렬한 터치의 기타(Guitar)음악’, ‘강열한 리듬의 플라멩코(Flamenco) 춤’ 등 긍정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점쟁이, 도둑질, 매춘(賣春), 불결한 위생,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들, 굶주림, 어디를 가든 환영받지 못하는 민족....’ 우리나라 유럽 관광객들이 출국 전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집시들의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말이라고 한다.
14세기부터 발전한 플라멩코는 집시, 안달루시아인, 아랍인, 유대계 스페인인의 민요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19세기에 들어와 집시들이 직업적으로 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게 되면서 플라멩코가 집시음악과 춤의 대명사가 되었다.
보통 기타(Guitar) 음악과 칸테(Cante/노래)에 즉흥 춤을 수반하는 플라멩코는 심오하고 장중하며 비장감을 동반하여 죽음과 번뇌, 종교 등이 주요 테마이다. 중간조의 플라멩코는 덜 심오하나 음악에 동양적 색조가 가미되는 경우가 많고, 경쾌한 플라멩코는 사랑, 시골의 전원생활, 일상의 즐거움 등을 소재로 한다.
독무로, 혹은 군무로 공연되는 이 플라멩코에서 남성들은 발끝과 뒤꿈치로 마룻바닥을 굴러 소리를 내는 등 복잡하게 펼쳐지고 여성들은 발놀림보다는 손과 온 몸으로 표현하며, 비장한 얼굴 표정도 큰 몫을 한다. 공연에는 복잡한 리듬의 손뼉치기, 손가락 튕기기(Finger flick) 및 추임새가 수반되기도 하며, 종종 현란한 리듬의 캐스터네츠를 동반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는 집시를 보헤미안이라고 부르는데 보헤미아(Bohemia)지방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보헤미아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오스트리아, 독일 바이에른과 국경을 접하던 왕국이었는데 1968년 체코 사회주의 공화국에 포함되었고 1993년부터 체코의 영토가 되었다.
북유럽과 북부독일에서는 타타르(Tatar)인 또는 사라센(Saracen)인, 남부독일에서는 치고이너(Zigeuner),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히따노(Gitano)......... 이들을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다.
<스페인 광장(Plaza de España)>
박람회장 본관 앞 분수대 왼쪽 첨탑은 성당 회랑 앞 스페인 역사그림
처음 큰 기대는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할 겸 덜렁덜렁 갔는데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마치 왕궁처럼 반달형으로 지어진 건물은 수없이 많은 아치가 있고 그 뒤는 끝없는 회랑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한쪽에는 뾰족한 첨탑이 당당히 솟아있는 성당이 있고 건물 앞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작은 강을 만들어 관광객들은 노 젓는 보트를 타고 한가하게 물놀이를 즐긴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1929년에 열린 에스파냐ㆍ아메리카 박람회장인데 건축가 곤살레스(Aníbal González)가 지었다고 한다. 또 광장 쪽 건물의 아치 밑 벽면에는 스페인 각 지역의 역사적 사건들이 타일 모자이크로 묘사되어 있다. 건물 앞의 광장 한가운데는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대는 분수도 인상적이지만 굉장히 넓은 광장은 그냥 텅 비어있고 나무그늘 하나 없어서 더운 여름철이면 땀깨나 흘려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정문을 나서면 상당히 넓은 수목의 공원지대로 많은 사람들이 그늘 밑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 한가롭다.
세비야에서 타리파로 오는 주변 들판은 온통 올리브 밭과 오렌지 밭, 그리고 목장의 연속이며 투우의 나라답게 나무인지, 알루미늄인지... 거대한 황소 조형물을 만들어 언덕 높은 곳에 세워놓은 것이 곳곳에 보인다. 또 높은 언덕이나 벌판에는 풍력발전기의 거대한 바람개비들이 엄청나게 많이 세워져 있다.
<5> 지브롤터의 항구도시 타리파(Tarifa)
스페인의 최남단이자 유럽대륙의 최남단인 타리파항은 지브롤터 해협을 지키는 요새로 옛날부터 바람이 거세게 부는 곳으로 유명하다. 타리파항에서 배로 20분 남짓이면 아프리카의 최북단 탠지어항에 닿는다. 무슬림인 무어인(Moors)들의 유럽진출 발판이 되었던 타리파는 당시 무척 중요한 항구였을 것이다.
타리파 항에는 오래된 제법 큰 고성(古城)이 있는데 성벽 위로 올라가면 주변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 위에서 바라본 타리파항 견고해 보이는 성벽 1000년을 지켜온 구스만 성
구스만성(Castillo de Guzmán/Castle of Tarifa)이라 부르는 이 성은 서기 960년 당시 코르도바를 점령하고 있던 무슬림의 칼리프 라흐만 3세(Abd-ar-Rahman III)가 처음 건설했다는데 1292년 카스티야의 왕 이었던 산초 4세(Sancho IV)가 점령했고, 다시 구스만(Alonso Pérez de Guzmán)이 이어받아 증축한 후 구스만 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구스만에 의하여 무슬림이 차지하고 있던 지브롤터 해역은 750년의 이슬람 지배에서 벗어나 스페인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공로로 구스만(니에블라 백작)은 스페인 통일의 여왕 이사벨 1세로부터 지브롤터 문장(紋章)을 수여받았다고 한다. 구스만성 입구에 가면 분수 가운데 네모난 좌대(座臺) 위에는 사자를 쓰다듬고 있는, 왕관을 쓴 산초 4세의 좌상이 있다.
지브롤터 해협의 거센 바람은 유명한데 돌풍이 불 때면 똑바로 걷기가 힘들 정도이다. 배표를 들고 배를 타러 부두를 걸어갈 때도 바람에 휘둘려 바다에 떨어질 것 같아서 사람들은 머리를 숙이고 종종걸음...
타리파에서 모로코 탠지어까지는 배로 20분 정도면 가는데 배 삯은 1인당 4만 원이나 된다.
성 안의 작은 공간 산초 4세의 좌상 성 입구 구스만 동상
성 위에 오르면 해안을 따라 기다랗게 지어진 견고한 요새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곳곳에 대포를 설치하여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성 위에서 보면 도시의 곳곳이 한 눈에 훤히 내려다보인다. 성위의 좁은 통로를 따라가면 구석구석을 볼 수 있고 성 안의 방들은 곳곳에 박물관으로 꾸며져 당시의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6> 알헤시라스(Algeciras)
13박 14일의 모로코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1박을 한 알헤시라스는 타리파항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해안도시이다. 알헤시라스는 로마시대부터 작은 어촌마을로 있었는데 8세기 초, 스페인을 침공한 무어인들이 점령하고 이름을 알헤시라스라고 했다는데 아랍어로 ‘초록빛의 섬’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 이후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과 무어인들의 뺏고 빼앗기는 줄다리기를 하며 폐허가 되었는데 18세기 초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힌 지브롤터 출신 스페인 이민자들이 알헤시라스를 재건했다고 한다.
알헨시라스는 그다지 볼거리가 없고 우리는 단지 절벽도시 론다를 가기 위해서 하룻밤 묵어가는 지점이다.
알헤시라스에서 아침 일찍 열차를 타고 고원의 절벽도시 론다(Ronda)를 향해 출발했다.
<7> 고원(高原)의 절벽도시 론다(Ronda)
절벽 위 전망대 허큘리스 동상 투우장 앞의 투우사
말라가(Malaga)주의 북서쪽 내륙 고원에 있는 도시 론다(Ronda)는 평균고도 700m가 넘고 말라가시에서 113km 떨어져 있다. 우리는 열차를 타고 갔는데 2시간 정도 소요되고 차비는 1인당 12유로이다.
열차는 깊고 푸른 계곡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듯 달리는데 터널도 연속으로 나타나서 마치 등산열차를 타고 고산을 오르는 기분이다. 이따금 작은 시골 역에서 정차하면 등산객들이 무리지어 내리는데 건너편 계곡의 좁고 아슬아슬한 절벽 오솔길로 줄을 지어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론다는 기원전 6세기 켈트인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기원전 3세기, 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가 건설한 요새화된 마을이고, 기원전 1세기 들어 로마 황제로부터 시(市)의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론다는 스페인의 투우 발상지로 유명한데 지금도 투우장이 잘 보존되고 있어 관광객들이 관람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투우장이 스페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투우장인 셈이다. 투우장 앞의 광장에는 황소와 투우사 조각상, 그리고 양쪽에 사자를 데리고 있는 허큘리스 동상도 있다.
공원입구에는 헤밍웨이 부조도 있는데 헤밍웨이는 대표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이곳에서 집필했다고 한다. 투우장 바로 근처 절벽위에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왼편으로 눈길을 돌리면 지척에 누에보 다리가 보인다. 또 절벽 아래로 드넓게 펼쳐진 벌판에는 올리브 농장도 보이고 푸른 채소밭도 보인다. 그 너머로는 겹겹이 둘러싼 고산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누에보(Nuevo) 다리 누에보 다리 밑 폭포 절벽위의 전망대
도시 변두리는 깎아지른 절벽인데 이 절벽도시로 들어오는 누에보 다리(Puente Nuevo)는 1759년에 착공하여 1893년에 준공되었다니 34년이나 걸려서 완공한, 200년이나 오래된 다리인 셈이다. 다리를 건너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누에보 다리와 멋진 절벽위의 도시풍경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 우리는 밑바닥까지는 너무 멀어서 못가고 중간쯤 내려갔다가 되돌아오는데도 힘이 들어 헉헉거렸다.
누에보 다리 난간에 기대서서 내려다보는 아득한 산과 들판, 아찔한 절벽은 영원히 잊지 못할 장면이다.
<8> 역사의 항구도시 말라가(Malaga)
피카소 갤러리 미술관 안마당 교황 바오로 6세 말라가 대성당
스페인의 대표적인 화가 피카소의 출생지인 항구도시 말라가는 기원전 13세기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했다고 하는 고대도시인데 현재는 인구 60만 정도로 스페인에서도 제법 큰 도시에 속한다.
말라가는 피카소 미술관, 대성당, 고대 로마 원형극장, 알카사바 요새 등이 유명한데 기후가 온화하고 인근의 말라게따(Malagueta) 해변이 여름철 휴양지로 이름이 나서 많은 피서객들이 찾는 휴양도시라고 한다.
피카소 미술관은 그의 가족이 살던 집터라는데 피카소는 이곳에서 10살까지 살았다고 한다.
2003년 10월, 피카소가 죽은 후 그의 어릴 적 꿈이었다는.... 생가를 고쳐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는데 그의 유족인 며느리 크리스티네(Christine Ruiz-Picasso)가 133점, 손자 베르나르드(Bernard Ruiz-Picasso)가 22점을 기증하여 총 155점의 피카소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주로 1901~1972년 사이의 작품이고 말년에 그린 소품들과 미완성품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고 한다.
말라가 대성당(Catedral de Málaga)은 1528년에 짓기 시작하여 1782년에야 완공된 성당이라니 완성되기까지 실로 250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된 성당이다. 건축 양식은 르네상스형식인데 안달루시아지역에 남아있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1528년에 디에고 데 실로에가 처음 설계할 당시에는 남쪽과 북쪽에 두개의 탑을 세우기로 계획했으나 자금부족으로 북쪽의 탑만 세우고 중단하고 말았다. 그래서 양쪽에 균형을 잡고 있어야 할 탑이 하나밖에 없어 ‘외팔이 여인(La Manquita)’란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탑은 안달루시아 지역 성당들 탑 중에서 두 번째로 높은 탑이라고 한다. 말라가 대성당은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양식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고, 성가대석과 조각상, 부속 건물들도 아름답기로 소문이 났다.
말라가의 또 하나의 자랑꺼리는 알카사바 성채(Alcazaba de Málaga)와 히브랄파로(Gibralfaro) 성, 그리고 로마반원형 극장유적(Teatro Romano)이다. 언덕위에 견고하게 축조된 알카사바 성채는 너무도 웅장하고 멋질뿐더러 그 성벽아래 축조된 로마시대의 극장유적 또한 눈길을 사로잡는다.
알카사바 성채는 11세기 중반 이슬람에 의해서 지어졌다는데 이미 2세기에 지어진 로마시대의 반원형 극장유적을 허물지 않고 성채를 지어올린 것이 신통하다. 알카사바 성채에서 언덕 위를 한참 오르면 히브랄파로 성까지 볼 수 있는데 외관도 무척 인상적이고 아름답지만 성 안의 정원이 특히 아름답다.
이 요새는 스페인이 통일되기 전인 1487년, 이사벨 1세(Isabel I)와 남편인 페르난도 2세(Fernando II)의 군대를 맞아 말라가 시민들이 결사 항전을 벌였던 장소로 유명하단다.
로마극장(뒤는 알카사바 성채) 로마극장과 성채 히브랄파로 성
말라가 시민들은 3개월 동안이나 포위되어 배고픔에 지친 나머지 결국 항복했고 요새는 기독교도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후 이사벨 1세는 한동안 이 요새에서 살았는데 육중한 돌로 쌓은 튼튼한 방벽이 요새까지 오르는 지그재그 형태의 가파른 산길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다.
히브랄파로성은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기원전에 세웠던 요새가 무너진 자리에 14세기 초엽 새롭게 세운 대규모 요새로, 높이 131m의 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 그라나다(Granada) 왕국을 통치하던 이슬람 군주 유수프 1세(Yusuf I)가 건설했는데 히브랄파로라는 이름은 ‘빛나는 바위’라는 뜻의 고대 페니키아어 히벨파로(jbel-faro)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상 부근에 전망대가 있는데 말라가 항구를 포함한 시내 전경과 드넓은 지중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관광객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장소이다.
무어인들의 성(城)이었던 알카사바는 훗날 대대적인 보수를 하고 다시 쌓아 박물관과 정원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히브랄파로 성채는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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