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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프로 사주 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혜도짱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은 서양에서 들어온 태양력으로서 원래 우리 것이 아니었다. 원래 우리는 달력(월력인데 이두식으로 발음한 것임)이라 하여 월력을 썼는데 이는 정확히 말하면 태음태양력인데 24절기가 바로 태양력으로서 계절에 맞추어 19년에 7번씩 윤달을 썼으며 7요일은 원래 일(日) 월(月)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였다
우리의 달력의 기원을 적어 보기로 한다.
(1) 한단고기 단군세기-제 2대 부루 단군 임자 12년(서기전 2229)에 신지 귀기가 칠회력을 만들었고....,제 5대 구을 단군 을축 4년(서기 전 2096)에 처음으로 갑자를 쓰고 역서를 만들었다(원래는 육계로 계해를 시초로 하였던 것임)...,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
신시시대(배달나라 시대 즉 서기 전 3897-서기 전 2333)에 칠회제 신력이 있었다, 첫날은 천신에게 제사지내고 2회의 날에는 월신에게 제사지내고, 3회의 날에는 수신에게 제사지내고, 4회의 날에는 화신에게 제사지내고, 5회의 날에는 목신에게 제사지내고, 6회의 날에는 금신에게 제사지내고, 7회의 날에는 토신에게 제사지냈다....
옛날에는 계해를 썼나니 단군 구을이 처음으로 갑자를 써서 10월을 상달이라 하고 한해의 시작이라 했다, 육계는 신시씨에 의하여 신지에게 명하여 제정한 것으로 계를 처음 시작으로 한다...,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상편에,....자부선생(배달나라 제 14대 자오지한웅 즉 치우천왕 때 선인. 서기전 2700경)께서 칠회제 신력을 만드시고..., 책력을 만드사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일 년으로 하니 이것이 바로 삼신일체의 윗 어른이 남긴 법이다...,
마한 불여래 때 부루 단군 12년 임자년에 ..명을 내려 칠회력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마한 아화 때인 제 11대 도해단군 때...경당을 설치하여 칠회제신의 의식을 정하고 삼륜구서의 훈을 강론하게 하니..라고 적고 있다.
이상에서 종합하면, 우리는 배달나라 때부터 칠회력을 써 왔는 바, 이는 7요일을 기준으로 한 달력이다. 일월의 음양과, 수 화 목 금 토의 오행을 사용하여 7요일의 달력을 만들어 그에 해당하는 신에게 제사 지냈던 것이다.
(2) 부도지-요(요임금. 서기전 2383-서기전 2284)는 천수를 몰랐다...역제를 천수의 근본을 살피지 못하고 거북이나 명협의 미물에서 근본을 취하였으니...요의 역제는 거북과 명협의 역이요, 인간의 역이 아니다...,
천도가 돌아 종시가 있고 종시가 또 돌아 4단씩 겹쳐 나가 다시 종시가 있다, 1종시의 사이를 소력이라 하고 종시의 종시를 중력이라 하고 네 번 겹친 종시를 대력이라 한다, 소력의 1회를 사라하니 사에는 13기가 있고 1기에는 28일이 있으며 다시 4요로 나뉜다, 1요에는 7일이 있고 요가 끝나는 것을 복이라 한다, 그러므로 1사에 52요복이 있으니 즉 364일이다,
이는 1,4,7의 성수요 매 사의 시작에 대사의 단이 있으니 단과 1은 같기 때문에 합하여 365일이 되고 3사의 반에 대삭의 판이 있으니 판은 사의 2분절이다, 이는 2,5,8의 법수요, 달이 긴 것이 1일과 같기 때문에 제 4의 사는 366일이 된다, 10사의 반에 대회의 구가 있으니 구는 시의 근원이다, 300구가 1묘가 되니 묘는 구가 눈에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9633묘를 지내서 각, 분, 시가 1일이 되니, 이는 3,6,9의 체수다, 이와같이 끝나고 또 시작하여 차차 중력과 대력에 미쳐서 이수가 곧 이루어지는 것이다, ...유호씨가 이와같이 하우에게 단단히 타일러서 제법을 폐지하고 부도로 돌아 올 것을 권하였으나 완강하게 듣지 아니하고...라고 적고 있다.
이상에서, 단군조선시대 초에 이미 1년 365일 또는 366일 52주, 1월 28일 4주, 1주 7요일의 달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3) 한편 음력은 달의 공전을 주기로 계산하여 1달을 정하면 평균 29.5일이 되는데 큰달이 30일이요, 작은 달이 29일인데, 12달이면 354일이 되므로 1년 365일 또는 366일을 기준으로 하여 3년을 지나면 33일이 남으므로 윤달을 1달을 계절에 맞추어 넣으면 1년 13월이 되고, 이렇게 하여 19년마다 7회의 윤달을 정하게 된다. 그러면 1년은 정확히 365.24219907일이므로 19년째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4) 태음력을 썼던 곳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족으로 우리와 연관이 많은데, 점토판에 남아 있는 역사자료에 12진법, 60진법, 태음력, 씨름, 점복 등이 기록되어 있다. 수메르언어를 연구한 어느 학자는 수메르어가 고대한국어와 유사하다고까지 하였다.
수메르의 역사를 밝히면 또한 단군조선이전의 역사도 밝혀지는 것이 된다. 한단고기에 수밀이국이 12한국의 하나라고 적고 있고 단군조선시대 서기전 1660년과 서기전 997년에 수밀이국 사신이 특산물을 바쳤다.
서기전 1652년에 우루인(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우루국이 있었음. 이 나라를 가르키는 것인지?) 20가가 투항하여 왔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 수밀이국과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국이 같은 것인지 연구해 볼 만하다.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아담과 이브의 시대를 서기전 4004년에 시작되었다라고 계산하였는데, 이때는 한국의 말기로 한웅이 배달나라를 개천한 서기 전 3897년과 매우 근사한 시대이다.
한편 부도지에서는 한인이전에 마고, 황궁, 유인씨의 시대를 기록하고 황궁시대에 파미르고원에서 동서남북으로 각 방향으로 3파씩 모두12파가 나뉘어 이동하였고, 황궁, 유인시대에 순치를 하였으며, 임검시대에 유호씨가 월식, 성생주로 전교하러 떠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여기서 월식주는 파미르의 서쪽이므로 바로 메소포타미아지역으로 수메르족의 근거지인데, 수메르의 문화는 바로 고대 한국의 문화였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양력 현재 우리가 쓰는 것은 일제 시대에 들어온 것이고요.
음력은 고조선 무렵 중국과 같이 사용..
동양의 음력, 즉 중국 기원은 일단은 은나라까지 기원이 올라갑니다.
우리의 달력은 누가 만들었을까?
현재 우리가 쓰고있는 태양력의 기원은 이집트까지 거슬러 갈수 있지만 태양력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이다. 고대 서양에서는 한 해가 시작하는 날을 춘분 날로 정했다. 때문에 춘분이 들어있는 달을 1월로 정했다. 반면 중국의 경우는 동지 날을 기준으로 해동지가 들어있는 달을 한 해의 시작으로 했다.
고대 로마 시대 초기의 로물루스 시대에는 춘분을 일년의 시작으로 하고 일년을 10개월로 했다. 또한 일년의 길이는 3백 4일로 하는 기이한 달력을 사용했다. 그 뒤를 이어 로마 황제가 된 누마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710년 경에 2개월을 추가해 1년을 12개월로 하고, 길이를 355일로 하는 누마(Numa)력으로 개력했다. 그러나 이 달력은 여전히 1태양년의 실제길이와 11일 정도 차이가 나 사용하는데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그 뒤 율리우스 시저의 집권 시대인 기원전 46년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인 소시게네스의 조언으로 1년을 365일로 하는 새 달력을 만들었다. 이 달력에서는 오늘날과 같이 한 달의 길이를 31일과 30일을 번갈아 넣었다. 달의 크기는 원칙적으로 홀수인 달을 31일로 하고, 짝수인 달은 30일로 정했다.
그런데 평년을 365일로 하기 위해 2월에서 하루를 떼어 내 29일로 했다. 윤년인 경우는 2월을 30일로 했다. 춘분날은 누마 왕 때와 마찬가지로 3월 23일로 정했다. 태양력의 1년 길이는 365.25일로 매 4년마다 윤년을 두었다. 이것을 율리우스력이라 한다.
율리우스가 개력을 할 때 계절과 달력의 날짜가 이미 3개월이나 차이가 나 있었다. 그래서 율리우스는 23일 짜리 윤달과 67일 짜라 윤달을 끼워넣어 계절을 맞추었다. 때문에 기원전 46년은 실제로 445일이나 되는 긴 해였다. 율리우스는 개력 이후부터 달력을 계절에 맞추기 위해 기존의 1월을 3월로 하고 그 앞에 새로 두 달을 넣었다. 이에 따라 모든 달이 두 달씩 미뤄져 당시에 5월을 의미하는 퀸틸리스(Quintilis)가 7월이 됐다.
율리우스는 생일이 7월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7월달의 본래 명칭인 퀸틸리스를 자신의 생일 달의 의미를 지닌 율리(July)로 개칭했다. 따라서 7월(July)의 영어 명칭은 율리우스의 생일 달이라는 의미인 셈이다.
역사에서 잊혀진 네로의 달
율리우스가 브루투스에게 시해된 후 로마 황제로 등극한 이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이다. 그도 율리우스를 본받아 달력에 이름을 남기려고 했다. 그는 트라키아와 아크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해 8월달의 본래 명칭을 바꾸었다. 그의 생일은 8월이었는데, 아우구스투수가 8월의 명칭을 바꾼 것은 자신의 생일달을 기념하려는 의미도 있었다.
그는 이 달의 본래 명칭인 섹스틸리스(Sextilis, 제6번째 달이라는 의미)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고 바꾸었다. 더욱이 황제인 자신의 달이 다른 달보다 작으면 황제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면서 2월에서 하루를 떼어와 31일의 큰 달로 변경했다. 그러자 1월에서 7월까지는 홀수인 달이 큰 달이 되고, 7월과 8월이 연속해서 큰 달이 됐다. 그리고 8월부터 12월까지는 짝수 달이 큰 달이 됐다.
이 때문에 2월달이 다른 달에 비해 유난히 작아져 버렸다. 양력은 태양의 운행에 따라 1년의 길이를 정했지만, 달의 길이는 임의대로 정해졌던 것이다.
그 후, 악명이 높던 네로 황제는 이들을 본 따 4월을 자신의 달인 네로네우스(Neroneus)로 고쳤지만, 네로 황제의 사후에 다시 본래의 명칭으로 되돌아왔다.
1년에 11분, 1천년에 10일 차이
1년의 길이는 실제의 1년 길이인 365.2422일에 비해 0.0078일이 길다. 이는 약 11분 14초에 해당한다. 따라서 1백 28년이 지날 때 마다 태양년의 길이가 하루씩 더 길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춘분날이 1백 28년마다 하루씩 앞당겨지게 돼 로마 교황 그레고리 13세 때는 큰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1582년에 춘분날은 3월 11일로 본래의 위치에서 이미 10일이나 크게 앞당겨져 있었고 이는 종교적으로 큰 문제였다.
당시 유럽의 모든 국가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고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행사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날은 부활절이었다. 부활절은 춘분날 후 첫번째 오는 보름을 지나 첫번째 일요일 날로 정해졌다. 만일 첫번째 오는 보름날과 일요일날이 겹쳐지면 다음 주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킨다. 때문에 달력의 오차로 춘분날이 앞당겨지면 부활절도 앞당겨지게 됐던 것이다.
그레고리 13세는 이를 본래 지키던 부활절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 개력을 단행했다. 새로운 달력에서는 우선 태양년의 길이가 실제와 거의 같도록 윤년의 횟수를 조정했다. 서기 연도가 4로 나누어지는 해를 윤년으로 정하고, 동시에 100으로 나누어지는 해는 평년으로, 다시 400으로 나누어지는 해는 윤년으로 정했다. 예를 들어 서기 1900년을 평년이고, 서기 2000년은 윤년이 되는 셈이다. 이런 원리로 400년간 윤년을 1백회 두던 규칙을 97회 두는 것으로 고쳤다. 이렇게 하면 1태양년의 길이가 365.2425일이 돼 실제의 길이인 365.2422일과 거의 유사한 값이 된다.
부활절을 맞추려고 10일 빼먹어
다시 춘분날의 위치를 부활절 제정 당시의 날짜인 3월 21일로 되돌려 놓기 위해 1582년10월 4일 (목요일)의 다음날을 1582년 10월 15일 (금요일)로 변경했다. 따라서 1583년부터는 춘분날이 3월 21일로 밀려나게 됐다. 하지만 1582년 10월 5일부터 14일까지의 날짜는 존재하지 않는 날이 됐다.
이 때 날짜는 건너뛰었지만 요일은 그대로 이어졌다. 이를 그레고리력이라 하는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양력이 이 것이다.달력의 역사 ◀◀◀
년, 월, 일은 다음 세 가지의 천체운동의 주기에서 만들어집니다.
년(年)- 태양년-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바퀴 완전히 도는데 걸리는 시간
월(月)은 보름달과 다음 보름달 사이의 시간
일(日)은 해가 남중했다가 다음 남중할 때까지의 시간
천체 관측이 정교해짐에 따라 사람들은 일년이 우수리 없이 딱 떨어지는 날 수와 달 수로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대 문명의 초기에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계곡에 있던 농부들은 일년이 열두 달로 되어 있고, 한 달은 보름달과 다음 보름달 사이의 평균시간인 28.8일로 된 달력을 고안하였다. 이 날 수를 더하면 일년이 354일이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년보다 11일이 짧다.
이 고대의 농부들은 그들이 씨 뿌리는 날짜가 점점 계절과 어긋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달력을 계절과 일치시키기 위해서 여분의 날과 달을 달력에 더했는데, 처음에는 불규칙하게 더했으나 나중에는 19년 주기로 하였다.
태양년이 365일에 가깝고 매 4년마다 하루를 더해야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낸 사람은 이집트인이었다. 그러나 그 이집트 천문학자들은 4년마다 하루를 더하는 것에 대해 자기네 왕을 설득시키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계절과 달력은 천천히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 후 200여년이 지난 후, 기원전 46년에 가서야 쥴리어스 시저 (Julius Caesar)는 윤년이 도입된 365일제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 달력도 그렇게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매 4년마다 하루를 더한 것은 오히려 달력이 매년 약 12분 앞서가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쥴리어스 시저가 그의 달력을 만든 후 천 수백년이 지난 후, 이 작은 오차는 누적되어 약 6일의 차이가 발생하였다. 그 결과, 부활절 같이 종교적으로 중요한 날이 계절보다 점점 일찍 찾아왔다.
1582년에 가서는 이 차이가 꽤 커졌다. 그래서 교황 그레고리 13세 (Gregory XIII)는 달력과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바꾸었다. 즉,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는 해 중에서 400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해는 윤년이 되지 않게 하였다.
예를 들면, 2000년은 400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윤년이지만 1900년은 나누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윤년이 아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오차가 3300년 동안에 약 하루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때 까지 사용하던 달력을 계절과 일치시키기 위해서 1582년은 1년의 길이를 10일이 줄어든 355일로 하였다. 즉, 1582년 10월 4일 다음날이 10월 15일이 되도록 하였다.
그레고리 달력을 채택함으로써 달력과 계절은 꽤 잘 맞았다. 그러나 여전히 일년을 이루는 날짜 수가 태양주위를 도는 지구의 회전주기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세 가지 천체 주기를 바탕으로 한 달력을 사용하는 한, 매달 또는 매년에 속한 날짜 수가 달라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太陰曆(태음력)
첫 번째, 태음력(太陰曆)은 달의 운행만을 기준으로 삼아 달이 평균 29.53059일을
주기(週期)로 차고 지는 것을 1달로 정해서 만든 달력입니다. 순태음력(純太陰曆)으로도
불리는데, 현재 일상에서 사용되는 우리의 음력(陰曆)과는 다른 역법입니다. 윤달을
사용하지 않음으로 계절과 달력이 점차 달라지는 결점이 있지만 현재에도
이슬람문화권에서는 사용되고 있습니다.
太陽曆(태양력)
두 번재, 태양력(太陽曆)은 현재의 양력(陽曆)으로 태양의 공전주기인 365.2422일을
12달로 나누어 만든 것입니다. 로마시대를 기원으로 보는데,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발전했습니다.
율리우스력은 로마의 대황제 율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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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칠정산이라는 달력이 있습니다.
"칠정산"은 아라비아의 달력과 중국의 달력을 참조해서 만들었는데,
우리나라가 사용한 달력중에서 최초로 한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죠.
칠정산은 태음력을 채택하고 있는데,
현대에 사용하고 있는 달력과 비슷합니다.
기본적으로 태양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1년을 규정하고,
24절기가 들어가있죠...
그리고 음력을 약간 가미해서 달의 차고 기울어짐을 표현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달력인데,
아시는 분이 거의 없더군요...
아래는 뉴스에서 검색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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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2년(세종 24년) 조선의 학자들에 의해 편찬된 칠정산(七政算)은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인 역법서다.
우리나라는 세종시대 이전까지 중국에서 오늘날의 달력에 해당되는 역서를 받아다 사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역서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고, 그대로 사용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중국의 역서를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사용하면 절기와 일출ㆍ몰 시각에서 약간의 오차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위도와 경도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더욱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역법자체도 완전한 것이 못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오차는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조선 조정은 계속해서 역서의 바탕이 되는 역법을 중국으로부터 배워와 우리나라의 경위도에 맞춰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역법 자체가 난해했거니와 중국에서는 역법을 연구하고 역서를 제작 반포하는 일을 천자(天子)만의 고유한 임무로 생각해 우리나라 학자들에게 함부로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 이후 많은 학자들이 중국으로 가서 당시의 역법을 배워오려는 줄기찬 시도가 잇따랐다.
칠정산은 바로 이러한 각고의 노력을 통해 얻어진 결실이다.
칠정산은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돼 있는데, 여기에 서술된 계산법의 바탕이 되는 각종 천문상수는 한양을 기준으로 해서 정해진 것이다.
이 중 칠정산 내편은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과 명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칠정산 외편은 원나라에서 아랍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편찬된 회회력(回回曆)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역법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세종과 당시의 조선 학자들이 칠정산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혼천의(渾天儀)와 간의(簡儀)와 같은 정밀한 천문관측 기구들을 직접 제작했으며, 이 기구로 한양의 경위도와 동 하지점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 새로운 역법의 바탕이 되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세종과 조선의 여러 학자들은 20여 년 간에 걸쳐 광범위한 문헌을 수집 연구하고 지속적으로 천문 기구들을 제작 개량해 나갔다.
그 결과 칠정산은 비록 중국의 역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당시까지 발달한 여러 역법체계들을 모두 소화 정리한 후 만들어진 우수한 역법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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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혹 전에 다른님이 가져오셨다면...부끄.ㅎ
좋은 글 올려주신 이간님께 감사드립니다. 이글을 농예각에서 취담정으로 옮기겠습니다.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글 올려주신 이간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