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풀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일제히 몸을 뉘었다. 억새풀의 껄끄러운 꽃을 훑고 몰려온 바람이 수임의 파르스름한 민둥머리 위로 스쳐지나간다. 수임의 키보다 큰 억새풀들은 하얗게 하늘을 쓰다듬는다. 산에는 벌써 나무들이 빈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수임은 등에 맨 바랑 끈을 쥐고 부지런히 도정의 뒤를 따른다. 마른 풀이 쌓인 길은 좀 전의 논둑보다는 부드러웠지만 마을에서부터 계속 걸어온 수임은 발이 아프다. 잠깐 좀 쉬어 가면 좋으련만 도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빠른 보폭으로 성큼성큼 앞서갔다. 수임은 큰스님만큼이나 도정을 대하기가 어려웠다. 올해 열여덟인 깡마른 체구의 도정은 응법사미다. 두 달 전 수임이 송암사에 처음 왔을 때 무서운 할아버지인 큰스님도 부드럽게 맞이하여 주셨는데 도정은 꼿꼿한 눈길로 수임을 흘끗 한번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도정 때문에 더욱 절을 낯설어하는 수임의 등을 다독인 것은 현주스님이었다. 스님은 설탕 뿌린 누룽지를 쥐어주며 주변의 산길을 데리고 다녔다. 고아원에 적응을 못하던 수임을 데리고 온 것도 현주스님이었다. 스님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 같았다.
투둑 투둑. 가벼운 발걸음 소리 같은 것이 공양간 밖으로 들려오더니 이내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궁이에 부채질을 하던 도정이 황급히 마당 한 구석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으러 나간다. 수임은 도정이 팽개쳐놓은 부채를 들고 아궁이를 가만가만 부친다.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가 매캐한 냄새와 함께 후끈한 열기가 올라오자 숨이 턱 막혀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잠시 후 도정이 젖은 옷을 털며 공양간에 들어섰을 때 수임은 부채를 떨군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넌 저리 가서 감자나 까라." 도정의 냉랭한 말투에 수임은 어깨를 움칠하며 깬다. 수임은 입가를 문지르고는 감자를 불려놓은 바가지에 손을 담갔다. 비에 젖은 바람이 뒷덜미에 닿자 오스스하다. 감자를 단단히 쥐고 숟가락으로 힘주어 긁었다. 도정 들으라는 듯이 깐 감자를 소리나게 양푼 속에 떨군다. 몇 개를 더 까고 나자 손아귀 힘이 빠진 수임은 공양간 문에 기대고 앉아 마당 한 쪽의 버드나무를 바라본다. 긴 가지를 더욱 길게 늘어뜨린 수양버들에서는 노랗게 물든 이파리들이 빗줄기를 따라 맥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고아원에서처럼 이것저것 트집을 잡으며 툭하면 때리는 큰형들은 없어서 좋지만 이곳은 너무 심심하다. 수임은 빗속으로 팔을 뻗는다. 보얀 살갗 위로 빗방울이 장난스러운 피라미처럼 튀어 오른다. 도정이 수임의 앞에 마른 걸레를 던졌다. 수임이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도정은 선방 쪽을 턱짓으로 가리킨다. 수임은 입술을 삐죽거린다. 어차피 빗물에 또 젖을 툇마루를 왜 닦으라고 하는 건지, 아무래도 도정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수임은 툇마루 안쪽으로 쭈그리고 앉아 마당 한 쪽의 샘터를 본다. 커다란 절구 모양의 물받이가 넘치고 있었다.
수임은 큰스님이 어려워 가까이 가지 않지만 어쩌다 지나칠 때면 오래된 나무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도정은 큰스님에게서 곧잘 가르침을 받곤 한다. 큰스님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한결같은 도정을 보면 존경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수임은 법당으로 들어와 절을 올린다. 큰스님은 수임에게 매일 삼십 번씩 부처님께 절을 올리라고 하셨다. 법당 바닥의 차가운 냉기에 코끝이 시렸다. 막 일어나려고 하는 차에 누군가 바지를 잡아끈다. 수임은 기겁을 하다가 바닥에 코를 찧었다. "인석아, 엉덩이가 하늘을 뚫겠다. 절을 올릴 때는 등이랑 엉덩이를 평평하게 해야지." 돌아보니 현주스님이 웃고 있다. 수임은 바지를 고쳐 입으며 히힛 웃는다. 솜털이 보얀 볼에 움푹한 볼우물이 졌다. 현주스님 시주 나가시는 길을 마중하고 난 수임은 빈 물통을 들고 산을 오른다. 떨어진 솔방울을 줍는 것이다. 땔감이라면 장작이 뒷마당에 높이 쌓여있기는 했지만 수임은 산에서 긁어온 솔방울을 태우는 냄새가 유난히 좋았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며 마른 나뭇가지가 부서진다. 나뭇잎들을 모두 떨군 숲에서는 맑은 바람냄새가 난다. 현주스님은 산에 뱀이 있다고 겁을 주었지만 이맘때면 뱀들도 겨울잠 잘 준비에 들어갈 것이다. 그때, 쌓여있는 낙엽을 발끝으로 툭툭 차며 걷던 수임이 걸음을 멈췄다. 까만 두 눈이 더욱 커진다. 수임은 살그머니 물통을 내려놓고 조심조심 발을 뗀다. 나무둥치 밑으로 무언가가 움직인다. 수임은 나뭇가지로 가만가만히 둥치 주위를 헤쳤다. 옅은 회색 빛의 주먹만한 털 뭉치가 뾰족하게 귀를 치켜세운다. 수임의 입이 함박만큼 벌어졌다.
도정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놓아줘라." 수임은 두 손안에서 꿈틀거리는 토끼를 품안에 안으며 도정을 외면했다. 조그마한 몸에서 따뜻하게 두근거리는 박동이 전해져온다. "놓아주래도." 도정의 언성이 높아졌다. 수임은 토끼를 더 꼭 끌어안고 공약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 하더니 눈앞이 아찔하다. 도정에게 뒷덜미를 잡아 끌린 수임은 마당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동그라진다. 눈앞이 희부옇게 번지며 울음이 밀려온다. 고아원의 형들에게 차돌 같은 주먹으로 쥐어 박힐 때도 눈 하나 감짝하지 않던 수임이었다. 나동그라진 채로 눈가가 붉어지도록 도정을 노려본다. "말 들어라. 어미토끼가 찾는다." 도정은 수임의 시선을 자르고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수임은 목이 메어오는 것을 삼키고 반드르르한 도정의 뒤통수를 쏘아보며 질세라 대꾸한다. "어미가 버렸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냥 두면 굶어 죽어요." 도정은 묵묵히 마당 구석에 세워놓은 빗자루를 들고 뒷간으로 향한다. 얼룩 한 점 없이 깨끗할 때에도 도정은 매일같이 뒷간을 청소한다. 뒷간에서 들려오는 비질소리에 수임은 그제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장과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한 서랍장 하나가 놓여있는 방바닥은 미지근하다. 수임은 방석을 끌어내려 토끼를 올려놓고는 눈 높이를 맞추어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토끼는 겁을 먹은 듯 몸을 움츠린 채, 좀처럼 편해 보이지가 않았다. 토끼를 다시 품에 안아들고 방안을 둘러보던 수임의 눈이 반짝인다.
넓은 호수가 있다. 하늘빛이 맑게 고인 호수 위로 수임은 조심스레 얼굴을 내민다. 멀리서 들려오는 산새소리가 마치 나뭇잎 위로 햇살 부서지는 소리 같다. 사방은 온통 푸르다. 수임의 얼굴이 티 없이 떠오른다. 잠잠한 호수 위로는 옷깃을 떨구는 바람조차 없다. 들꽃을 품은 호숫가의 흙은 촉촉하고 부드럽다. 수임은 물에 비친 제 얼굴이 꼭 다른 아이 같다. 아이를 향해 가만히 손을 뻗어본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것 같던 아이는 어쩐 일인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질 않는다.
부스스 눈을 뜬 수임은 이불장 안의 어둠에 겁을 집어먹고 재빨리 문을 열어제쳤다. 요란스럽게 군것이 무안스럽도록 사방은 고요하다. 눈을 비비며 이불 위에서 내려온다.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서야 무언가 허전한 것이 느껴졌다. "스님! 스님.." 맨발로 법당까지 달려나간 수임은 그만 몸이 딱 굳어버린다. 수임을 본 큰스님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힌다. 큰스님 뒤쪽으로는 도정이 꺼진 촛불을 켜고 있다. 큰스님의 눈길을 받은 수임의 고개가 수그러든다. "이런 막 되먹은 놈 같으니. 여기가 네 집 마룻바닥이더냐!" 큰스님은 다행히도 더 나무라진 않으신다. 큰스님의 먹빛 장삼 자락이 스치자 수임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발름거린다. 큰스님의 모습이 사라지자 수임은 도정에게 다가갔다. "스님, 내 토끼 못 봤어요? 안고 잤는데..." "보내줬다." 수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작은 손에 핏기가 가시며 주먹이 쥐어졌다. 발바닥을 타고 올라온 빳빳한 냉기가 복사뼈를 아프게 찌른다. "스님이 뭔데 맘대로 놔줘요!" 수임의 목소리가 법당 천장을 울린다. 수임은 뛰쳐나와 다시 산을 올랐다. 낮에 본 나무둥치 아래는 비어있고 저녁의 어스름이 지기 시작한 산기슭에는 스산한 바람만이 불어올 뿐이었다.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누군가의 비웃음소리처럼 들려온다. 수임은 바닥에 주저앉는다. 눈을 부릅떠보지만 턱이 제멋대로 울먹거린다. 눈물방울이 튼 볼 위로 흐르자 바늘처럼 따갑다. 수임의 손은 마른 나무뿌리를 질끈 움켜쥐고 있었다.
수임은 공양을 올리거나 빨래를 할 때 도정과 마주해도 입을 다문 채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겨울에 접어든 산사에는 눈이 자주 내렸다. 수임은 매일같이 싸리비를 들고 마당을 쓸었다. 작은 석탑을 덮은 눈이 햇살에 반짝인다. 숨을 크게 들이쉬면 가늘게 날아다니던 눈가루가 콧속으로 날아 들어왔다. 저녁이 되면 석등의 불빛이 은은하게 퍼지는 가운데 수임은 툇마루에 앉아 법당에서 들려오는 큰스님의 목탁소리를 듣곤 했다. 샘터 얼음판에서 놀던 수임이 발이 시려서 방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쌓아놓은 방석 밑으로 발을 묻고 있는데 서랍장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수임은 팔을 뻗어 서랍을 밀어 닫으려다가 멈칫하고는 살그머니 문 밖을 살핀다. 현주스님과 도정은 책을 사러 시내에 가고 없었다. 수임은 조심스럽게 도정의 서랍을 열었다. 온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도정은 대체 속에 무엇을 담고 사는 걸까. 수임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작은 죄책감과 함께 간지럽게 피어오르는 장난스러운 호기심에 두 볼은 홍조를 띈다. 서랍 속에는 몇 권의 책들과 차분히 접힌 속옷, 필기도구와 노트 몇 권이 가지런히 들어있었다. 수임은 무언가 기대하던 것이 맥없이 시들어 버린 기분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중얼거리며 노트들을 뒤적이던 수임이 순간 숨을 멈추었다. 두꺼운 노트 사이에 소박해 보이는 중년부인을 가운데 앉히고 교복을 입은 도정과 수임또래의 여자아이가 좌우로 서 있는 사진이 끼어 있다.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에 얼굴이 하얀 여자아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맑은 얼굴의 웃음이 파란 하늘 아래 피어난 제비꽃처럼 예쁘다. 수임은 자신도 모르게 사진 속 여자아이의 표정을 따라 웃음을 지어내다가 이내 노트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일기장이었다. 쓰는 것을 한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일기는 어제 것까지 꼬박이 쓰여져 있었다. 수임은 노트들을 다 꺼내어 하나씩 펼쳐보았다. 제일 밑바닥의 흰 노트는 절에 들어오기 전의 일기장인 것 같았다. "수임이 거기 있느냐." 큰스님의 목소리에 수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노트들을 재빨리 집어넣고 서랍을 닫았다.
아침 공양을 올린 후 수임은 법당을 쓴다. 현주스님은 아직 푸르스름하게 어둠이 깔려있는 마당의 저 쪽에서 염주를 돌리며 걷고 계셨다. 열어놓은 문으로 산바람이 밀려들어와 가뜩이나 냉기 어린 바닥이 더욱 차가웠다. 수임은 빗자루를 놓고 앉아 빨갛게 튼 손끝을 입김으로 녹인다. 부처님 앞 향로에 꽂힌 향 연기가 실처럼 가늘게 풀리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니 졸음이 밀려왔다. 절에 온 지 몇 달이 지났어도 적응이 안 되는 것은 역시 기상시간이다. 더군다나 겨울이 되자 이부자리에 누웠을 때나 새벽에 눈을 떴을 때나 똑같이 사방이 컴컴해서 어느 때는 정말 내가 잠을 잔 건 맞나 싶기도 하였다. "지금 뭐 하는 거냐?" 달콤하게 눈꺼풀을 내리 감으려던 차에 도정이 손에 들린 빗자루를 낚아채듯 빼앗아갔다. 도정은 바닥을 쓸며 핀잔을 던진다. "그런 정신으로 법당엘 들어오다니... 가서 찬물로 얼굴 씻고 와라." 수임은 멋쩍은 듯 까끌까끌한 머리를 긁적이고는 도정에게서 빗자루를 받아들려 다가갔다. "씻고 오래도!" 도정은 매몰차게 수임의 손을 밀어낸다. 수임은 머릿속이 화끈거렸다. 수임은 눈썹을 씰룩이며 내뱉는다. "잠깐 졸 수도 있지요. 스님은 잠도 안 자세요?" 도정은 날카로운 눈매로 흘끗 수임을 쳐다본다. 수임은 움찔했지만 도정을 마주본다. "네 정신상태를 말한 거야. 아무리 어리다 행도..." 도정의 말허리를 자르며 수임은 보란 듯 코방귀를 뀐다. "맨 날 나한테만 그러는데, 스님도 만만치 않잖아요. 가족사진 숨겨놓은 거 내가 다 봤어요. 절에서는 그런 거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거 몰라요?" 법당 밖의 현주스님도 들으라고 수임은 일부러 큰소리로 따지고는 숨을 쌕쌕거린다. 도정이 비질하던 손을 멈추었다. 말을 하고도 그의 얼굴을 마주보기가 뭣하여 바닥만 쏘아보고 있던 수임이 눈을 들었을 때 도정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당황한 수임이 도움을 청하듯 마당의 현주스님 쪽을 본다. 스님은 여전히 먼 산에 시선을 두고 염주를 돌리고 계셨다.
수임은 숨을 죽이고 숨어서 어두운 공양간을 들여다본다. 아궁이의 불 그림자가 도정의 몸 위에 얼룩지고 있었다. 도정은 마지막 남은 노트도 아궁이 속으로 던져 넣는다. 수임은 아랫입술을 문다. 저렇게까지 심하게 굴 일도 아니라고 입을 씰룩이면서도 불편한 마음은 구겨진 이불자락처럼 좀처럼 펴지지가 않았다. 수임은 슬그머니 공양간 안으로 발을 디딘다. 아궁이 속의 땔감 타 들어가는 소리가 탁탁 튀어 오른다. "잘못했어요..." 수임은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도정은 말없이 일어나더니 수임을 지나쳐 공양간을 나간다. 힘없이 방으로 향하던 수임은 뒷간을 쓰는 도정의 뒷모습을 보았다. 해는 붉은 자락을 너울이며 천천히 산 너머로 잠기고 있었다. 해가 모습을 완전히 감추고 나자 보랏빛 하늘도 남아있던 빛을 조용히 접는다. 밤 공기가 찬데 현주스님은 툇마루에 나와 앉아 계셨다. 흙 위에 덮인 살얼음을 자분자분 밟고있던 수임이 현주스님 곁으로 와 걸터앉는다. "스님, 무슨 생각하세요?"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듯 하던 현주스님의 얼굴에 금새 웃음이 번졌다. "소리를 듣는 중이야." "무슨 소리요?" 수임은 귀를 기울여본다. "너도 들어볼래?" 현주스님이 수임의 말랑말랑한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물었다. 수임은 스님의 곁에 더욱 바짝 당겨 앉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눈을 감아봐라." 눈을 감고 한참을 있는데도 스님은 더 어찌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수임은 문득, 언젠가 고아원 앞에 수임을 데려다놓은 엄마가 그랬듯 스님도 나을 이대로 두고 사라져 버린 게 아닌가 싶어 번쩍 눈을 뜬다. 스님은 눈을 감고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었다. 수임은 다시 눈을 감는다. "머리 속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소리를 듣는 거야." 스님의 말에 수임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무 것도 안 들리는데요?" "녀석,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만이 전부는 아닌 게야. 진정한 소리는 마음으로부터 나고 듣는 거란다. 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무엇인가 기울여봐라."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와 이따금씩 산 저 족에서 새소리가 들여올 뿐 사방은 여전히 고요하다. 수임은 스님의 팔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뜬다. 스님의 따뜻한 손이 수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도정스님은 날 싫어하나 봐요." 수임이 조그맣게 말했다. 현주스님이 빙그레 웃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마음을 이어주는 길이 있단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만들어져 있는 길이란 없지 않니. 풀이 우거지고 자갈이 깔려 있는 거친 땅이라 해도 네가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그것은 길이 되는 거야. 중요한 건 그 길을 가고 싶어하는 네 마음이란다." 수임은 고개를 숙인 채 발등을 내려다본다. 어느 틈에 가느다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도정은 묵묵히 자기일 만 했고 수임은 그를 마주하는 것이 어렵고 불편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임은 절 안의 모든 것이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밥상 위의 늘 비슷한 나물 반찬에 점점 입맛을 잃어갔고 소리도 없이 지칠 줄 모르고 내려대는 흰눈도 답답했다. 차라리 고아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고아원 아이들과 좁은 방안에서 옴닥 거리며 붙어 자던 것이 떠올랐다. 수임은 문득, 마음만 먹으면 돌아가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임은 가방에 옷가지를 챙겨 넣어 두었다. 며칠째 이런저런 계획들을 떠올리다가도 현주스님을 마주하면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큰스님이 선방에 드시고 법당에서는 현주스님이 도정을 옆에 앉혀놓고 불경을 외고 계셨다. 얼마동안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던 수임은 방으로 들어갔다. 처음 올 때 입고 온 옷을 꺼내 입었다. 가방을 안고 마당을 가로질러 절 밖으로 나온 수임은 정신 없이 산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딱따르르... 현주스님의 목탁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집고 마을 쪽으로 내려가던 수임은 차라리 지름길로 산을 넘어가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옆 산으로 걸음을 옮긴다. 발끝이 다 붙어버린 듯 얼얼했다. 뒤를 돌아보니 아스라이 보이던 절은 아예 모습을 감추었다. 노를 젓듯 밀어내며 산길을 나아간다. 보얗게 피어오르는 입김이 그대로 눈가루가 되어 날아가는 것 같다. 얼마쯤 그렇게 걸었을까. 수임은 시린 손을 양 겨드랑이에 끼며 멈추었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던 수임의 표정이 굳는다. 아까 거쳐온 길이 저 앞쪽에 다시 나 있었다. 수임이 눈을 헤친 흔적까지 그대로다. 다른 쪽으로 방향을 옮겨 한참 나아가다 보면 또 아까 그 자리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수임은 눈앞이 까마득해진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속이 울렁거렸다. 이를 물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던 수임은 다리가 휘청거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우중충하던 하늘이 눈바람을 뱉어내기 시작한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진다. 불상 앞의 촛대 위로 흘러내리던 긴 촛농이 아른거린다. 수임은 눈을 감았다. 도정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는 아궁이에 불을 때고, 눈 쌓인 마당을 쓸고, 뒷간을 청소한다. 수임과 마찬가지로 도정의 그림자도 언제나 혼자다. 수임은 절에 온 지 얼마 안됐을 때의 밥상을 떠올렸다. 큰스님과 현주스님은 발우에 공양을 드려도 도정은 수임과 함께 소반을 놓고 먹었었다. 수임이 고사리를 맛있게 집어먹자 도정은 고사리 접시 근처에는 젓가락도 대지 않았었다. 수임은 도정이 고사리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금새 고사리 그릇이 비었지만 너무 배불리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의하던 큰스님의 말이 떠올라 더 달라고 하기도 눈치가 보였다. 다음날 아침상에는 고사리가 그릇 한가득 담겨져 있었다. 수임은 별 신경 쓰지 않고 좋아라 고사리를 먹었다. 그제야 도정도 고사리를 가져다 먹기 시작했다. 도정은 늘 수임의 식사속도가 너무 빠른 것을 나무라곤 했었다. 고아원에 있을 적 친구들은 다들 밥을 빨리 먹었었는데, 수임은 그런 것 가지고 트집을 잡는 도정이 너무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도정은 밥알하나 남김없이 깨끗이 밥그릇을 비운 후 물로 한번 더 헹구어 마셨다. 수임도 흘끔거리며 도정을 따라했었다. 도정은 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곤 했다. 그는 스님들의 세숫물을 받아놓고 마른 수건을 꺼내두었다. 수임도 그가 공양간 앞에 받아놓은 따스한 물에 세수를 했다. 수임은 더운물을 다 같이 나누어 쓰는 줄 알았다. 겨울이 되어서야, 김이 솟는 대야는 수임의 것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온몸의 힘이 풀리는 것 같다. 수임은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나뭇가지에 돋아난 눈꽃이 보인다. 얼어있던 모든 것이 녹아드는 기분과 함께 수임은 나른하게 졸음이 몰려왔다. 엄마의 품에 안긴 듯 사방이 포근해져온다.
햇살을 받은 몸에서는 엷은 풀내음이 난다. 티 없는 호수는 잠든 듯 고여있다. 물 위에 비친 아이의 모습을 들여다보던 수임은 더 이상 손을 뻗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짚어본 수임은 눈을 감고 아이의 모습을 다시 그려본다. 마음 속으로 아이의 얼굴이 하나하나 윤곽을 나타낸다. 아이가 빙그레 웃었다. 수임도 마주 웃는다. 수임은 손끝으로 촉촉한 흙을 만지작거린다. 수임은 저 잔잔한 호수가 마냥 고여있기만 할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호숫가 물망초의 작은 뿌리를 통해, 주변 상수리나무들의 푸른 이파리를 향해 호수는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흙에서는 호수의 맑은 숨소리가 느껴졌다. 아이가 수임에게 손을 내민다. 수임은 가만히, 그 작은 손을 마주잡는다.
따뜻한 누에고치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깨지 않고 오랫동안 이대로 있고 싶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몸 깊은 곳에서부터 갈증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입안이 말라붙고 혓바닥이 마른 낙엽처럼 껄끄러워졌다. 이내 수임은 속이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무겁게 눈을 뜬다. 누군가 불빛을 가리고 있다. 그 모습이 어둡게 뭉쳤다가 천천히 드러난다. "정신이 좀 드냐?" 도정이었다. 수임은 입술을 달싹여 물을 찾는다. 도정이 잠시 후 물 사발을 가지고 왔다. 뒤이어 현주스님도 들어온다. 비스듬히 일어나 물을 들이킨 수임은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묻는다. 머리가 두 배로 부은 듯 어지럽고 사납게 지끈거렸다. 현주스님의 큼직한 손이 수임의 이마를 짚는다.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와 문 여닫는 소리가 들려온다. 수임은 잠시 앓는 소리를 내다가 이내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도정은 새벽같이 마당을 쓸고는 샘터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문밖을 내다보던 수임은 밖으로 나온다. 수임을 보지 못한 도정은 공양간으로 들어간다. 수임은 뒤를 따른다. 도정이 쌀을 담은 솥에 물을 붓는다. 수임은 한 쪽에 놓인 고구마를 들고 흙을 털어 냈다. 도정이 손으로 솥 안의 물을 가늠하며 입을 연다. "들어가. 가기 전까진 편하게 지내라." 수임은 보랏빛을 띄는 고구마 껍질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잠시 멀뚱히 서 있었다. 도정은 벽에 걸린 소반을 내린다. "안 갈래요. 여기 있을 거예요." 도정은 말없이 소반을 닦는다. "머리 이러고 가면 애들이 놀려요." 수임은 한 발짝 가까이 가서 도정의 눈치를 살피며 말한다. 도정은 날이 풀릴 때쯤이면 머리도 자랄 거라고 짧게 대꾸했다. 수임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젓는다. "그럼 또 밀 거예요. 나도 스님 될라구요" 도정이 잠시 손을 멈추고 수임을 쳐다보았다. 수임은 퀭해진 눈을 들어 도정을 마주보다가 선반에서 수저를 챙겨 내민다. 아궁이 속에 솔가지들이 타들어 가는 공양간 안의 공기는 훈훈하게 데워지고 있었다.
큰스님이 수임을 부른 것은 그 날 오후였다. 현주스님과 도정도 선방에 모여 있었다. 현주스님에게 눈이 녹으면 시내에 가서 옷을 한 벌 해주고 고아원까지 데려다 주라고 하신다. 수임은 입술을 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도정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큰스님 앞에서는 긴장한 탓에 여기 있겠다는 말이 쉽사리 나오질 않는다. 다리가 저려왔다. "이 놈, 그래도 징징거리지 않고 오래 버텼다. 허허... 그럼, 가서 쉬거라." 큰스님이 웃으며 말했다. 수임은 머뭇거리며 그대로 앉아있다. "스님, 저 여기 있고 싶습니다." 수임은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나서 또박또박 발음하여 말했다. 방안에 짧게 정적이 흐른다. 수임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인 채 노란 장판의 방바닥만 내려다본다. 잠시 후 큰스님이 두어 번 기침을 하며 입을 여셨다. "그건 안 된다. 이놈, 여기가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네 놀이터인 줄 아느냐! 돌아가서 친구들하고 재미있게 지내거라." 큰스님의 말투는 부드럽지만 단호하다. 수임은 무릎을 붙인 채로 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입도 떨어지지 않는다. 현주스님이 무어라 도움을 주길 바랬으나 스님은 말이 없었다. 한참만에 수임은 다시 입술을 달싹인다. "여기 있을래요." 큰스님은 미간을 찌푸린다. "그 놈 참 한번 말하면 알아들어야지. 안 된다고 했다." 수임은 입술을 물고 코를 훌쩍인다. 자기도 모르게 고였던 눈물방울이 무릎위로 떨어졌다. 큰스님이 또 꾸중할지 몰라 재빨리 눈을 깜빡여 눈물을 삼킨다. 그때, 도정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큰스님, 거두어주시지요." 말이 끝나자마자 큰스님이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수임은 눈을 크게 뜨며 도정 쪽을 보았다. 그는 여는 때와 같은 무표정이었다. 잠시 후 큰스님이 말을 꺼냈다. "허어 어쩐다. 우리 절은 중을 넷이나 먹여 살릴 재량이 없는데.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느냐. 이제까지 공짜로 배불리 밥 먹고 따순 잠을 잔 도정이 네가 나가도록 해라." "스님 어떻게 제게 그런 말씀을..." 어이 없어하는 도정의 말을 자르며 큰스님은 크게 호통을 쳤다. "연을 쉽게 끊지 못하는 자 부처가 될 수 없고 연을 쉽게 끊는 자 또한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벗어나지도 못하면서 피하지만 말고 돌아가거라. 가서 너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야차인지 관음인지 다시 한번 보거라. 마음이 걷지 못하고 몸만 걸어서는 이도 저도 네 길이 아니다. 험한 세상 속에서 중생들이 살아가고자 몸부림치는 자체가 수행인 것이니라. 이놈아 부처가 되고싶음 가서 부모도 섬기고 장가도 가서 애도 낳고 오욕칠정을 다 겪어보거라. 그래야 똥인지 된장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문제를 알아야 답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니라."
마당에 있던 작은 새들이 포르르 날아간다. 부드럽고 가벼운 바람이 버드나무 가지의 연녹색 새싹들을 어루만진다. 흰 구름이 뜬 파란 하늘 아래로 석탑의 모습이 단아하다. 덜 녹은 마당 주변의 눈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수임은 샘터에서 넘치는 물로 빨아낸 걸레를 야무지게 쥐어짠다. 법당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가 반지르르한 툇마루 위로 떨어진다. 수임은 나뭇결을 따라 툇마루를 훔치다가 이마에 송송히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아낸다. 잠시 걸레질을 멈추고 반쯤 열려있는 공양간을 내다보았다. 도정이 떠난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도정은 마을입구에 멈춰서 수임을 돌려보내며 말했다. "토끼는 네가 아무리 정성을 다해 돌봐도 어미를 못 잊고 그리워했을 것이다. 네 말대로 어미한테 버림받았다해도 말이다."
"스님 말씀대로 마음의 길을 만드는 건 어렵긴 해도 좋은 거 같아요." 도정이 떠난 지 얼마 안되어 수임이 현주스님에게 말했다. 현주스님은 책에서 눈을 떼고 수임을 바라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길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지켜 가는 것도 중요하지." 수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시무룩하게 입을 열었다. "도정스님이랑 힘들게 친해졌는데... 길을 지킬 수가 없으니까 또 없어져 버리겠네요." 수임은 손끝으로 방바닥에 동그라미 세모 네모를 그린다. 현주스님은 가만히 책장을 넘기며 미소가 번진 입가로 대답했다. "그 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기억하고 있으면 되지 않느냐."
걸레질을 마친 수임은 뒷마당으로 가 장작을 꺼냈다. 장작에서는 쌉싸름한 냄새가 난다. 공양간으로 향하던 수임이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어 서고 눈을 크게 뜬다. 저쪽에서 무언가 가물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수임은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 땅이 하늘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 수임은 조심조심 다가간다. 그러나 가까이 가자 그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수임은 고개를 들어 석탑 너머로 흘러가는 흰 구름을 본다. 하늘 아래 첩첩이 산들이 푸릇푸릇하다. 수양버들 아래로 또 무언가 조그맣게 피어오른다. 수임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바라본다. 봄빛 아지랑이였다.
첫댓글 나무님! 정말 고생하셨겠네요. 이 많은 걸 다... 덕분에 편히 읽고 갑니다.
잘 읽고 갑니다, 더운 날씨에 올리신다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 관세음 보살 -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나무님 더운데 글 올리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나무님 손목 아프시겠다.... 덕분에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관세음보살..()
ㅠㅠ 전아리양과 통화하면서요, 작품파일 보내주기로 했는데요, 고3이라 컴에 들어갈 시간도 없나봐요..기다리다 급한 맘에 성질대로 직접 입력..ㅎㅎ 오자 보이면 말씀해 주세욤..^^*
나무님,수고 ^^ 감자까는 모습 누룽지에 설탕 뿌려 먹는 모습 보이는듯 합니다 다음에 또 읽어 봐야겟어요
이렇게 긴글을..........역~~시 나무님! ^^* .. 만나게 되면 손목 맛사지라도.....관세음보살...()()()
전아리양의 문학에의 길이 멋지게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고생하신 나무님도 보람이 있으시겠지요?
아, 반야님도 다녀가셨네요..자인성님....그립습니다. 자주 좀 오세요..^^* 바람꽃님, 이작품 어때요? 고등학생의 작품치곤 의젓하지요? 전아리양이 멋진 작가되면 무일 불교문학상도 더불어 빛나겠지요.기대해 봅시당..내일은 우리카페 한마을님의 우수상 수상작 싣습니다.
여고생의 작품이라니 ..대단합니다. 정말 우일문학상을 빛내주는?..(^*^)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채팅하면서 나무님의 솜씨는 알아보았지만 고생많으셨고요.. 이런 솜씨로 화엄경도 치셨나요? ㅎㅎㅎ
나무님 올리시느라고 고생하셨는데 저는 편하게 읽고만갑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 ()
오욕칠정을 다 겪어야 덩인지 된장인지 안다네요~ 참으로 부처의길은험하고도 먼가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