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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사도행전 7:9~16
오늘 본문 말씀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분인 스데반 집사가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던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 앞에서 증거한 복음 설교 중 일부입니다. 이 내용 역시 지난 주일에 앞서 살펴본 바 아브라함의 삶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에 이어서 요셉의 삶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족장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이어서 야곱의 열한째 아들 요셉의 삶은 신앙의 모범이요 후에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오늘 요셉에 대하여 스데반 집사님이 매우 짧게 요약하여 증거하고 있는데, 그 앞 부분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사람을 택하시어 성령으로 일하신다는 것입ㅁ니다.
9절 전반절에서 이르기를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여러 조상’이란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금과옥조로 자랑하는 그들의 조상 야곱의 열두 아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블론, 요셉, 베냐민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열두 아들들 가운데 열 명의 아들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아넘기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처하며 그들의 조상을 대단하게 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랑인 혈통의 원류인 그 조상들은 사실은 형제를 배반하고 죽이려 들었고 단돈 은 이십 량에 이국 땅에 노예로 팔아넘기고 아버지를 속이고 들짐승에게 물려 죽었다고 보고하였던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막내 베냐민을 빼놓고는 그 나머지 열 명이 직간접으로 이 악한 죄악에 다 참여하였으니, 그들의 후손 역시 형제를 죽이려 했고 은 이십 량에 형제를 노예로 팔아넘기고 그 아버지 앞에서 뻔뻔하게 들짐승에게 찢겨 죽었다고 속인 뻔뻔한 죄인의 후손들인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지금 바로 동족의 깊은 죄성을 과거의 역사를 들어서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열 조상들이 그 동생 요셉을 그토록 죽이고자 하고 결국 노예로 도 받고 팔아 넘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육신의 본성에서 우러나온 성령에 대한 거역의 정신 때문입니다. 요셉이 두 번에 걸쳐 꿈을 꾸고 아버지 야곱과 형들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하였습니다.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말을 듣자 형들이 요셉을 말하기를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고 대답하며 요셉을 미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아버지 야곱과 형들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이르기를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에게 꾸짖는 말을 했지만, 어린 아들 요셉의 말을 마음에 간직하여두었습니다. 이는 요셉의 말이 심상치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들 요셉이 두 번에 걸친 꾼 꿈들은 옛날 야곱 자신이 형 에서에게 쫓겨서 도망치다가 벧엘에서 겪은 일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가 벧엘을 지나다 밤이 되어 지쳐 쓰러져 돌을 베개 삼아 잘 때였습니다. 갑작스럽게 꿈이 꾸어졌는데, 하늘에서 그가 누운 자리까지 사닥다리가 드리워지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셨던 영적인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지금 나이 어린 철부지이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그의 가문을 세워갈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야곱이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일에는 성령으로 분별하기 때문에, 성령의 사람 야곱은 요셉의 꿈이 범상치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꿈이 아닌가 생각하고 마음에 간직하고 지켜보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형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인 질투심을 가지고 동생이 꾼 꿈을 싫어하고 그 꿈을 믿고 설치는 듯한 동생이 미워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들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기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다 하자. 그러면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창세기 37:20)
이 말을 보면 요셉의 형들이 단지 요셉이 아버지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것에 대한 반감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크게 그들의 마음을 차지한 것은 요셉이 꾼 꿈이 함축적으로 가지고 있는 영적 가부장권에 대한 거부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문을 일으켜가는 일에 있어서 요셉을 쓰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대한 무의식적인 분노와 거역의 감정이 요셉을 향하여 그토록 무서운 살해 욕망과 분노로 표출된 것입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나머지 열 명이 그처럼 크건 적건 간에 똘똘 뭉쳐 동생 요셉을 잡아 죽이려는 한 패가 된 것은 그들이 선민이라고 자처하지만 그 심령 속에 이러한 불순종과 거역의 정신이 뿌리깊게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패역의 정신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백성들의 광야 교회 시대에도 끊임없이 표출되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한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서도 그토록 끊임없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는 때가 차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사렛 예수 우리 구주가 나타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를 보내셨다고 선포하였을 때에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마음만 가진 것이 아니라 그를 기어코 잡아 죽이려는 무서운 살의를 가지고 덤벼들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은 바로 그들이 조상적부터 가졌던 하나님의 주권적 뜻을 거부하는 그들의 패역한 정신과 맥락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만일 자기를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면 좋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저 그들의 병을 고쳐주는 자요 귀신을 쫓아주면서 좋은 교훈을 가르치는 자라고 말하면 그들이 죽일 마음까지는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약속된 그리스도요 자신을 죽은 자의 부활이요 자기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어마어마한 말씀을 하시니까 그들이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들을 다스린다는 사실, 자기들이 그 앞에 절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던 그들의 자랑이 된 옛 조상들의 거역의 기질이 요셉을 죽이려 들고 은 이십 량에 노예로 팔아버리는 끔찍한 악행을 저질렀던 것처럼, 스데반 집사님 시대에 그 산헤드린 공회의원들도 예수님을 그렇게 처참하게 죽인 것이라고 스데반 집사님은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령의 사람은 육신의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되어 있고 반드시 육신의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도 그런 일은 많이 있습니다. 저 19세기 영국에서도 존 웨슬리나 휘트필드와 같은 성령의 사람이 일어나 영적 부흥을 일으킬 때에 전통주의자들, 의식주의자들은 성령의 사람들을 내몰고 교회 안에 아예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저주하고 이단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충만함으로 인하여 육에 속한 자들에게 미움과 배척을 받을 수 있음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핍박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육신에 속한 자들로부터 몰이해와 따돌림과 적의에 찬 공격을 당할 수 있음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육신에 속한 자들이 선동하여 성령의 사람을 대적하고 분열을 조장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행할 때에 무분별하게 합세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다수가 합세한다고 거기에 따라가면 안됩니다. 광야 교회 시대에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라는 유려간 지도자들이 당시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여 백성의 지도자 250명과 많은 백성들까지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서 반역을 도모했던 것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비참하게 죽었고 염병으로 죽어나갔습니다. 다수라고 해서 그냥 따라가면 큰일 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의식적이고 종교적인 신앙 생활에 만족하지 말고 항상 성령 충만하고 말씀으로 무장하여 성령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잘 분별하여 성령으로 기뻐하며 진리로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말고 신앙 생활을 단지 오래 된 전통이나 습관으로 여기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일하심을 분별하여서 그러한 성령의 일하심을 주의깊게 살펴서 기도하며 동참하여 그 뜻을 이루어갈 수 있는 주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연단하시되,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점입니다.
9절 후반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편애의 대상이었습니다. 야곱이 그의 네 명의 아내 중에서 특별히 사랑하였던 아내가 라헬입니다. 그 라헬이 요셉을 낳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에 벧엘과 베들레헴 길에서 둘째 베냐민을 낳다가 산고로 죽었습니다. 아내 라헬을 잃은 야곱은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을 여러 아들 중에서 유난히 사랑해서 채색옷을 입히고 늘 가까이 두고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들들이 이것을 보고 속이 뒤틀려서 요셉이 자기들에게 말을 걸면 늘 퉁명스럽게 대답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 요셉이 아버지 곁을 떠나 자기들이 양을 치는 도단 땅에 왔을 때에 그를 잡아 죽이려고 했다가 애굽으로 가는 노예 상인에게 은 이십 량을 받고 팔아넘겼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요셉이 갑자기 형들에 의하여 노예로 팔리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으니, 그가 애굽에서 보디발 시위대장의 집에서 종으로 살아갈 때 얼마나 마음이 슬프고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는 왜 이런 일이 자기에게 생겼는지 몰라서 괴로워하면서 원인을 찾아보려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당장 꿈에라도 나타나셔서 해답을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아마도 자기가 처한 이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자기가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 두 번이나 꾸었던 그 영롱한 꿈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어보기도 여러 번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대답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창세기 39장 말씀에 보면, 그가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셨다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그 점을 꼭 집어서 스데반 집사님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요셉과 같이 그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고 세상에서 가장 소망 없는 비참한 처지에 떨어질지라도 그들과 여전히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잘 깨닫지 못하고 체감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린 것 같고 은혜 베풀기를 그친 것 같이 느낄 수 있으나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할 때만 아니라 우리가 실패의 밑바닥을 길 때에도 함께하시고, 은혜의 간증들이 쏟아질 때뿐 아니라 지루하고 길고 긴 영적인 사막을 홀로 지나가는 영적 침체의 시기를 지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여전히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우리와 함께하심을 보여주실 뿐 아니라 더 많이 더 자주 자기를 숨기시는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영적인 침체의 시간을 지나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지금 하나님 은혜의 이슬이 그친 지 오래 된 것 같고 하나님께서 그 은혜의 얼굴을 돌리신 것 같은 기간이 오래되어 낙심하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계속적으로 실패와 좌절의 자리로 굴러떨어지는 시련의 시기를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고 자기를 전혀 돕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요셉을 사망의 구렁텅이에 넣기도 하시고 이억 만리 말도 안 통하는 곳으로 노예로 팔리게도 하셨으나 요셉과 늘 가까이 말없이 함께하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도 함께하심을 확실하게 믿읍시다. 우리의 고난을 함께 겪으시고 우리의 수치와 슬픔과 연약함을 함께 겪으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며 우리를 붙잡아주고 함께하시는 주님을 굳게 믿고 고난 중에도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시며 직선적으로 일하시기보다는 곡선적으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하나님은 요셉에게 두 번의 꿈을 꾸게 하심으로써 그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크게 번성하게 하시는 일을 준비하게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요셉은 처음에 전혀 깨닫지 못하지만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에서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생활을 시작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가 노예 생활을 하면서 그 집안에서 섬김의 법을 배우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영적인 훈련을 배워갔습니다. 그러다가 가정 총무가 되어서 이제 인간적인 안정을 얻어 좀 여유가 있을 법하니까 그 집의 여주인의 유혹과 무고한 고발로 인하여 또 다시 더 깊고 절망적인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그 감옥에서 빠져나올 길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하면서 기도하며 섬김의 삶을 살았더니, 감옥에서 간수장으로부터 열쇠를 맡아서 감옥에서 간수장으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감옥을 빠져나갈 기회가 왔습니다. 그것은 애굽 왕 바로의 최측근이었던 술 맡은 관원장과 빵 굽는 관원장이 왕의 진노를 당하여 그곳에 갇혔다가 같은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고민하던 중에 요셉의 꿈 해몽을 받았을 때입니다. 요셉이 꿈을 해몽대로 복직하게 된 술 맡은 관원장에게 요셉은 자기를 감옥에서 건져내 달라는 부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꿈 해몽의 은혜를 감옥에서 나갔을 때에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요셉은 잠시 품었던 희망도 사라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감옥 생활을 하는 중에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소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 후에 만 이 년이 지난 후에 애굽의 바로 왕이 어느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두 번의 기묘한 꿈을 연거푸 꾸었습니다. 그가 나일 강변에 서 있는데 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가에 올라와 갈밭에서 꼴을 뜯어먹는데 그 뒤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가에서 올라와 그 살진 일곱 소를 잡아 먹는 것이었습니다. 바로가 잠을 깨었다가 다시 잠을 들었는데 곧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또 가늘고 말라버린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가늘고 마른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묘한 꿈을 꾸었다가 깨어난 왕은 너무 선명한 꿈인지라 애굽의 유명한 점술가들과 지혜자들을 불러 모아 꿈을 말했지만 해몽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 술 맡은 관원장이 불현 듯 감옥에서 자기의 꿈을 제대로 해몽하여준 요셉이 기억나서 왕에게 요셉에 대하여 아룀으로써 드디어 요셉이 왕 앞에 서서 하나님의 지혜로써 그 꿈을 해몽해주면서, 앞으로 일곱 해 풍년과 일곱 해 흉년이 곧 닥칠 것이라는 예고함과 동시에 미리 그 일을 잘 대비하여 일곱 해 흉년을 잘 넘기라고 조언하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이 일로 크게 감동을 받은 바로 왕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혜로운 자 요셉을 국무총리에 임명하여 그 모든 일을 잘 감당하도록 요셉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지 10여 년이 지난 후입니다. 때가 되어 일곱 흉년이 시작된 지 이삼년이 흘렀을 때입니다. 가나안 땅에 있던 요셉의 형제들이 아버지 야곱의 명을 받아 양식을 얻으러 왔다가 요셉 앞에 무릎을 꿇고 양식을 간청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요셉이 어린 시절 꾸었던 꿈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꿈을 꾸었던 17살 때로부터 약 25년이 흐른 때의 일입니다. 야곱이 그 형들이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양식을 청할 때 그 꿈을 기억했다고 창세기 42:9 말씀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 꿈을 붙들고 지금까지 그 숱한 고난, 지독한 시련의 세월을 인내하며 소망 가운데 기다려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셨던 그 꿈이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는 그 소망을 붙들고 인고의 세월을 보내었더니 25년의 세월이 걸리니 마침내 때가 차매 그 일이 이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이처럼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로 곧장 세우시고 형들을 세우고 집안을 일으키는 기둥으로 곧장 쓰시지 않으시고, 온갖 굴곡진 삶을 살게 하시다가 때가 차니까 그를 들어 그 계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이 더디 흐르고 생각지 못한 수많은 일들이 우리 삶에 일어나곤 합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신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과 계획을 이루어가고야 마신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오늘 주보 4면에 보면, 재미있는 인터넷 칼럼을 권준희 자매님이 골라서 실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이 변수에 맞추어 춤을 추라”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행하시는 일은 우리가 짐작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생각지 못한 일을 겪을 때는 당황하기도 하고 놀라고 어쩔 줄 몰라서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감당할 수 있는 것만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책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대책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각지 못한 일에 휘말려서 정신없이 문제 해결을 위하여 매달리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복과 은혜를 받을 믿음과 인격의 그릇을 빚어가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그 손길에 맞춰서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훈련해야 하겠습니다. 춤을 출 때 능숙한 상대방에게 전적으로 리드를 맡겨야 춤이 자연스럽게 잘 추어진다고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의 무도회에서 예상치 못한 리듬과 코스를 만나곤 하지만 우리를 하나님께서 완전히 ‘리드(lead)’하도록 주도권을 맡겨야 하겠습니다. 그러할진대, 하나님께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같고 예상을 전혀 할 수 없는 다양한 고난을 겪을지 모르나 결국은 아름답게 준비되어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가 합당한 복과 은혜를 받게 되는 하나님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너무 조급하지 마십시다. 힘들다고 불평하거나 낙심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선한 손길에 우리를 맡기고 요셉처럼 천천히 가게 하시면 천천히 가고 밑바닥으로 기게 하시면 또 그렇게 순종합시다. 때가 되면 요셉을 깊은 감옥에서 끌어올려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시고 또 때가 되어 형들이 절하게 하시는 그 놀라운 꿈을 이루어주신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놀랍고 복된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이 성취되는 그 날이 반드시 오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