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해으름 서울 강남 뱅뱅 사거리 어느 일식 집 카운터 앞, 두 사내가 "어 어" 하며 놀란 듯 서로를 바라 보았다. 지금은 그만 둔 某회사의 입사 동기인 줄은 알겠으나 순간적으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둘 다 이름은 부르지 못하고 그냥 손을 맞잡고 반갑게 인사만 나누었다. 무려 25년 넘게 서로 소식을 모르고 지냈으니 그도 그럴 수밖에. 동기들과 연락이 두절됐던 그 친구는 얼마 전 모호텔 로비에서 정말 우연히 어떤 동기를 만나서 그날 모임에 나오게 됐단다. 역시 한 번 맺어진 인연은 그 끊이 오랫 동안 끊어져 있었더라도 반드시 다시 이어지고 그렇게 되면 더 단단하고 끈끈해지는 게 세상 이치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왜냐하면 내게는 이미 우연한 일을 계기로 42년간의 공백을 깨고 초등학교 동기들과 소중한 인연의 끈이 이어진 경험이 있고, 젊은 시절 한 때 서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던 친구가 내 미니홈피를 찾아 와 '혹시?'하고 남겨 놓은 단 한마디가 다시 인연이 돼 28년의 공백을 메꾸고도 남는 관계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무려 23년 전에 만들어 놓고도 내 팽개쳐 두어 못내 마음에 걸리는 인연이 하나 있다. 마음 속으로는 늘 한 번 찾아 가야지 찾아 가야지 생각하면서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만 게으름이 드러날까 봐 어디 가서 알고 지낸다는 이야기를 차마 입에 올릴 수도 없었다. 조금만 더 게으름을 피우다간 소중한 인연이 영영 끊길 것 같아 어제 큰 맘 먹고 찾아 나섰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華城) 나들이에 나선 것이다. 마침 어제는 모처럼 아무 약속도 일정도 없는데다 식구들도 다른 일로 밖에 나가 있고 날씨까지 포근해 그 인연을 찾기엔 더할 나위없이 좋은 기회였다. 물론 산책삼아 나선 길이라 하나하나 뜯어보지 않고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제대로 보려면 사전에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공부하고 현장에서 그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휴일이라 그런지 나들이 나온 가족과 국내외 관광객으로 제법 붐볐다. 중국 관광객이 대부분이었지만 의외로 일본 관광객도 많았다. 그들과 가볍게 말을 섞는 재미도 쏠쏠했다. 서장대(화성장대) 부근에서 만난 싱가폴 아가씨에게 부탁해 사진을 찍기도 했다. 비록 주마간선격으로 둘러 보았지만 이제야 수원시민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성과 관련된 시설물이나 성곽 주위의 소나무 숲도 볼만하고 성에서 바라보는 석양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적어도 계절별로 한 번 씩은 찾아가야 제대로 볼것 같다.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이 그냥 흙길이었으면 좋겠는데 군데군데 포장이 돼 있어 아쉽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만 흙길이 더 정취가 있지 않을까. 사실 그런 느낌은 고향 마을 찾을 때도 마찬가지다. 포근하고 여유로운 맛이 사라져서다. 마당이나 고샅길은 시멘트로 덮혀 있고 듬성듬성 개구멍이 나 있어 바람은 물론 가끔은 몸집 작은 아이들까지 드나들던 울타리 대신 딱딱한 시멘트 담이 둘러쳐 있고, 사립문 대신 육중한 철문이 자리하고 있어 분위기가 무거워 마음까지 무거워진다.
각설하고, 앞으론 자주 들러 인연을 돈독히 해야겠다. 굳이 멀고 먼 제주도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을 찾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두 세 시간동안 훌륭한 트레킹코스를 즐길 수 있다. 게다가 수원시민은 관람료도 받지 않으니 언제든 두 세 시간 여유만 있으면 언제든 다가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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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orundae 원문보기 글쓴이: 이승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