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쓴 약]
황 전
다실(茶室) 청소를 하다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니,
작은 호수 속에 파란하늘과 높고 낮은 산들과 푸른 소나무들이 함께 어우러져 늦여름의 오후 한때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때 승용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오십대로 보이는 단정한 옷차림을 한 거사님이 차에서 내리자
나는 거사님을 다실로 안내하고 스승님을 찾았습니다.
스승님께서 다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사님은 스승님께서 좌정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절부터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은 날이 덥습니다. 절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앉으십시오.”
스승님은 좌정을 하며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이 이름 없는 암자를 찾았습니까?”
“제가 동료 교수들과 같이 며칠 전에는 춘천에서 00 큰스님을 친견했고, 어제는 부산에서 00 큰스님을 친견했습니다. 오늘은 아는 사람이 꼭 스님을 한 번 찾아가 뵈라고 해서 왔습니다.”----
거사님은 스스로 대견한 듯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잘못 오셨습니다. 나는 정말 이름 없는 스님입니다. 누구신지는 몰라도 잘못 말한 것 같습니다.”
스승님은 차를 권하면서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지금까지 큰스님이라며 찾아오는이가 한 사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스승님 스스로도 공부가 모자라서 숨어 지내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스승님은 말을 이었습니다.
---“교수님이라고 하셨는데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역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역학을 전공하셨으면 불교공부도 많이 하였겠습니다.”
---“불교공부라기 보다는 불교경전과 불교에 관한 책들을 천여 권을 보았습니다.”
스승님께서는 감탄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그렇다면 불교에 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없겠습니다.”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것 보다는, 이제까지는 논리로는 져 본 적이 없습니다.”
교수님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 동안 자신이 이룩했던 여러 가지 연구 성과를 자랑했습니다.
스승님은 교수님의 말이 다 끝나자,
---“교수님, 외람되지만 내가 한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불교 서적을 천여 권이나 읽으셨으면, 조사어록도 다 읽어 보았겠습니다?”
---“예, 다 읽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조사어록에 나와 있는 일학년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회양선사님이 길을 가다가
젊은 스님이 바위에 앉아 좌선을 하는 것을 보고 묻기를,
---“젊은이는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가?” ---하니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하고 젊은 스님이 대꾸하자
---“앉아만 있다고 부처가 되는가?” ---했는데 젊은 스님이 대꾸가 없자,
기왓장을 갈기 시작하자 젊은 스님이 묻기를
---“스님, 그 기왓장을 갈아서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그리고는 ---“여보게, 소가 가지 않을 때에 채찍으로 소를 때려야 가는가? 마차를 때려야 가는가? 했습니다.
교수님께서도 이 이야기를 아시지요?”
---“예 압니다.”
---“교수님, 무엇을 때려야 가겠습니까?”
---“마차를 때려야 갑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고개를 살래 흔들며
---“교수님은 어째서 마차를 때려야 간다고 생각하십니까?”
---“.......”
---“교수님은 아무리 많은 불교서적을 보았다고 할지라도 일학년 문제를 알지 못했으니 불교공부는 일학년 수준입니다.”
나는 스승님의 파격적인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님은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스승님은 교수님께 차를 권하면서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여름날에 시원한 수박을 먹으면서 그저 시원하고 달콤한 맛에 빠질 뿐,
수박이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 오게 된 이유를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박은 인간이 재배를 했지만, 인간을 위해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수박씨를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그 뜨거운 태양을 단맛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수박의 단맛만을 취하고 수박씨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버리듯이,
불교공부의 핵심을 놓치고 자신이 그저 이해하는 것에 만족하고 맙니다.
달콤한 수박을 먹으면서 한번쯤은 수박씨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는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공부는 바로 이런 통찰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교수님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려는 듯 차를 아주 천천히 마셨습니다.
교수님은 아무런 말도 없이 약간 풀이 죽은 모습으로 공부 잘하는 학생처럼 스승님의 법문에 빠져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자 스승님은 법문을 계속했습니다.
---“교수님께서 날도 더운데 먼 길을 찾아와서 절까지 하였으니 일학년 문제를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수박씨 맛을 봐야 수박씨를 버리지 않게 되거든요.
교수님, 소가 가지 않을 때는 무엇 때문에 가지 않겠습니까? 가다가 힘들어서 지쳐버리니까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를 쉬었다 가게 해야지, 지친 소에게 채찍질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회양선사는 마조스님에게 공부는 순리대로 해야지,
그렇게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한 것입니다. 마조스님은 그 뜻을 단박에 알아차렸고요. 이런 문제를 풀어 주어서는 안 되지만, 교수님께서 그동안 해온
불교공부의 많은 지식들을 밑거름으로 해서, 지금부터라도 자신만의 한 송이 꽃을 피우려는 노력을 하시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교수님은 합장을 했습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스님, 제가 한 가지 더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금강경에 ‘머무른 바 없이 마음을 쓰라’고 했는데, 무엇을 ‘머무름 없음’이라하며 무엇을 ‘마음 씀’이라 합니까?”
---“‘머무른 바 없이 마음을 쓴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머무른 바가 없는데 어떻게 마음을 씁니까? 그리고 누군가는 머무른 바 없이 마음을 낸다고들 하는데
머무른 바가 없는데
어떻게 마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스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을 모든 번역서는 그렇게 해석을 해 놓았는데 스님께서는 왜 아니라고 하십니까?”
---“교수님 번역서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응무소주이생기심을 어떻게 참구를 했으며 그 참구를 통해 무엇을 경험했는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머무른 바 없이 마음을 쓴다도, 낸다 도 아니면 무엇입니까?”
“‘머무른 바 없이 마음이 난(生)다’ ---입니다.”
---“스님, ‘머무른 바가 없는데 어떻게 마음이 난다’ 고 할 수 있습니까?”
---“교수님도 참, ‘쓰는 것’도 인위적이요 ‘낸다’는 것도 인위적이지만 ‘난다’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저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납득이 가도록 풀어줄 수는 없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요. 그러나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남는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한 알의 씨앗이 죽은 것입니다. 그 한 알의 씨가 죽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열매가 맺었습니까? 바로 이도리가 ‘머무른 바 없이 마음이 난다’는 도리입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하자면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어, 제 모습을 잃으니 머무른 바가 없고 봄이 되어 싹이 절로 나오니 난다는 말이 맞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이해가 됩니다. 지금까지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을 한 알의 씨앗으로 해석한 것을 들어보기는 처음입니다. 제가 스님을 찾아온 보람이 있습니다.”
교수님은 혼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교수님, 그러나 제가 한 이 말은 오십 점짜리입니다. 백점짜리를 알아야 진리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스님, 그러면 무엇이 백점짜리 입니까?”
---“혜능대사님께서 ‘응무소주이생기심’을 듣는 순간 깨달으셨는데 바로 이 깨달은 도리를 알아야 백점짜리입니다.”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혜능대사님께서 깨달으신 그 도리를 알고 계십니까?”
---“법을 알지 못하면서 어찌 말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스님, 그러면 백점짜리로 바로 일러주시지 않고 어째서 오십 점짜리로만 일러주십니까?”
“교수님이 더운 날씨에 여기까지 찾아오셔서 대접을 한 것입니다. 법이란 상대의 근기에 따라 쓰는 것이지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스님, 제가 알기로는 법이란 그 근기가 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인데. 스님께서는 혜능대사님께서 응무소주이생기심을 듣고 단박에 깨달으신 그 도리를 알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스님께서도 깨달으셨습니까?”
스승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저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아니, 깨달음이 무엇인지도 모르시면서, 혜능대사님께서 깨달은 도리를 말씀하십니까?”
교수님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습니다.
---“깨달음을 모르니까 깨달은 도리를 압니다. 만약에 제가 깨달음을 안다면 그 도리마저 잊었을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하하하, 깊이 한 번 참구해 보십시오.”
교수님은 스승님께서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냉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스승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에 오실 때에는 법을 가지고 오십시오.”
---“스승님, 그래도 교수님인데 공부가 일학년 수준이라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하하하, 저 교수님이 나를 찾아온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왔으니까 나는 그저 마음에 쓴 약한 첩 지어준 것뿐이다.”
---“예! 마음에 쓴 약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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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응무소주 이생기심 마하반야바라밀_()_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