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放浪 및 乞食
二十樹下<스무나무 아래>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食 .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
스무나무 아래 서른(서러운) 나그네가 마흔(망할) 집안에서 쉰밥을 먹네.
인간 세상에 어찌 일흔(이런) 일이 있으랴.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서른(선) 밥을 먹으리라.
▶二十樹 : 스무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나무 이름
▶三十客 : 三十은 '서른'이니 '서러운'의 뜻. 서러운 나그네.
▶四十家 : 四十은 '마흔'이니 '망할'의 뜻. 망할 놈의 집.
▶五十食 : 五十은 '쉰'이니 '쉰(상한)'의 뜻. 쉰 밥.
▶七十事 : 七十은 '일흔'이니 '이런'의 뜻. 이런 일.
▶三十食 : 三十은 '서른'이니 '선(未熟)'의 뜻. 설익은 밥.
▶함경도 지방의 어느 부잣집에서 냉대를 받고 나그네의 설움을 한문 수자 새김을 이용하여 표현한 시이다.
無題<죽 한 그릇>
四脚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排徊 .
主人莫道無顔色 吾愛靑山倒水來 .
네 다리 소반 위에 멀건 죽 한 그릇. 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가 그 속에서 함께 떠도네.
주인이여, 면목이 없다고 말하지 마오. 물에 거꾸로 비치는 청산을 내 좋아한다오.
▶산골의 가난한 농부 집에 하룻밤을 묵었다. 가진 것 없는 주인의 저녁 끼니는 멀건 죽. 죽 밖에 대접할 것이 없어 미안해하는 주인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주지만 글 모르는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風俗薄<야박한 풍속>
斜陽鼓立兩柴扉 三被主人手却揮 .
杜宇亦知風俗薄 隔林啼送不如歸 .
석양에 사립문 두드리며 멋쩍게 서 있는데, 집 주인이 세 번씩이나 손 내저어 물리치네.
저 두견새도 야박한 풍속을 알았는지, 돌아가는 게 낫다고 숲속에서 울며 배웅하네.
▶不如歸: 두견새의 딴 이름.
難貧<가난이 죄>
地上有仙仙見富 人間無罪罪有貧 .
莫道貧富別有種 貧者還富富還貧 .
지상에 신선이 있으니 부자가 신선일세. 인간에겐 죄가 없으니 가난이 죄일세.
가난뱅이와 부자가 따로 있다고 말하지 말게나. 가난뱅이도 부자되고 부자도 가난해진다오.
姜座首逐客詩<강좌수가 나그네를 쫓다>
祠堂洞裡問祠堂 輔國大匡姓氏姜 .
先祖遺風依北佛 子孫愚流學西羌 .
主窺簷下低冠角 客立門前嘆夕陽 .
座首別監分外事 騎兵步卒可當當 .
사당동 가서 사당을 물으니, 보국대광 강씨 집안이라네.
선조의 유풍은 북쪽 부처에게 귀의했건만, 자손들은 어리석어 서쪽 오랑캐를 배우네.
주인은 처마 아래서 갓을 숙이며 엿보고, 나그네는 문 앞에 서서 지는 해를 보며 탄식하네.
좌수 별감이 네게는 분에 넘치는 일이니, 기병 보졸 따위가 마땅하리라.
▶김삿갓을 내쫓은 주인은 나그네가 갔나 안 갔나 확인하려고 갓을 숙이고 엿보는데, 김삿갓은 문 앞에 서서 인심 고약한 주인을 풍자하고 있다.
▶輔國大匡:정일품에 해당하는 벼슬아치.
▶北佛: 불교. 불교가 북방에서 전래 되었기 때문인 듯 함.
▶座首別監: 지방 수령의 자문기관인 유향소에 소속된 자에게 주던 칭호.
見乞人尸詩(걸인의 시체를 보고)
不知汝姓不識名 何處靑山子故鄕 .
蠅侵腐肉喧朝日 烏喚孤魂弔夕陽 .
一尺短筇身後物 數升殘米乞時糧 .
寄語前村諸子輩 携來一簣掩風霜 .
네 성씨, 네 이름 나 모르니, 어느 곳 청산이 네 고향인고?
파리떼는 썩은 살에 붙어 아침 햇살에 시끄럽고, 까마귀 외로운 혼을 불러 저녁 빛에 조문하네.
한 자 남짓 지팡이는 몸에 딸린 유물이고, 두어 됫박 남은 쌀은 빌어먹던 양식이구나.
앞 마을의 여러분께 청하노니 흙 한 삼태기 가져와 바람 서리 막아주소.
▶김삿갓이 어느 곳을 지나다가 걸인의 시체가 길가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는 것을 보고, 문전걸식하기로는 자신과 같은 처지이므로 떠도는 나그네의 서러운 심정과 야박한 세상의 인심을 읊은 시이다.
開城人逐客詩<개성 사람이 나그네를 내쫓다>
邑號開城何閉門 山名松嶽豈無薪 .
黃昏逐客非人事 禮義東方子獨秦 .
고을 이름이 개성인데 왜 문을 닫나. 산 이름이 송악인데 어찌 땔나무가 없으랴.
황혼에 나그네 쫓는 일이 사람 도리 아니니,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네 혼자 되놈일세.
逢雨宿村家<비를 만나 시골집에서 묵다>
曲木爲椽簷着塵 其間如斗僅容身 .
平生不欲長腰屈 此夜難謀一脚伸 .
鼠穴煙通渾似漆 蓬窓茅隔亦無晨 .
雖然免得衣冠濕 臨別慇懃謝主人 .
구부러진 서까래에 처마에는 먼지가 쌓였고, 그 칸이 말(斗)만하여 겨우 몸을 들였네.
평생에 긴 허리를 굽히려 아니했지만, 이 밤에는 다리 하나 펴기도 어렵구나.
쥐구멍으로 연기 들어 칠흙인 양 어둡고, 봉창은 띠(茅)로 막혀 새벽을 몰랐네.
그래도 하룻밤 옷 적시기는 면했으니, 떠나면서 은근히 주인에게 고마워했네.
▶어느 시골집에서 비를 피하며 지은 것으로 궁벽한 촌가의 정경과 선비로서의 기개가 엿보이는 시이다. 누추하지만 나그네에게 비를 피할 수 있도록 베풀어 준 주인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하면서 세속에 굽히지 않으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艱飮野店<주막에서>
千里行裝付一柯 餘錢七葉尙云多 .
囊中戒爾深深在 野店斜陽見酒何 .
천릿길을 지팡이 하나에 맡겼으니, 남은 엽전 일곱 푼도 오히려 많아라.
주머니에 깊이 깊이 두리라 다짐했지만, 석양지는 주막에서 술을 보고 말았으니 이를 어쩌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떠돌아다니는 나그네 길, 어쩌다 생긴 옆전 일곱 닢이 전부지만 저녁놀이 붉게 타는 어스름에 술 한 잔으로 허기를 채우며 피곤한 몸을 쉬어가는 나그네의 모습.
▶行裝: 여행할 때 쓰이는 行具.
▶爾: 엽전을 의인화 하여 ‘너’라고 칭함.
失題<제목을 잃어버린 시>
許多韻字何呼覓 彼覓有難況此覓 .
一夜宿寢懸於覓 山村訓長但知覓 .
수많은 운자 중에 어째 '멱'자를 부르나. 저 '멱'자도 어려웠는데 또 '멱'자를 부르다니.
하룻밤 잠자리가 '멱'자에 달려 있는데, 산골 훈장은 오직 '멱'자만 아네.
▶김삿갓이 어느 산골 서당에 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하니, 훈장이 시를 지으면 재워 주겠다고 하면서 시를 짓기 어려운 '멱'(覓)자 운을 네 번이나 불렀다. 이에 훈장을 풍자하며 재치 있게 네 구절 다 읊었다.
宿農家<농가에서 묵다>
終日緣溪不見人 幸尋斗屋半江濱 .
門塗女媧元年紙 房掃天皇甲子塵 .
光黑器皿虞陶出 色紅麥飯漢倉陳 .
平明謝主登前途 若思經宵口味幸 .
골짜기 따라 종일 가도 사람을 못 보다가, 다행히도 오두막집을 강가에서 찾았네.
문을 바른 종이는 여와 시절 그대로고, 방을 쓸었더니 천황씨 갑자년 먼지일세.
거무튀튀한 그릇들은 순임금이 구워냈고, 불그레한 보리밥은 한나라 창고에서 묵은 것일세.
날이 밝아 주인에게 사례하고 길을 나섰지만, 지난밤 겪은 일을 생각하면 입맛이 쓰구나.
▶女媧: 중국 전설에 나오는 천지를 만들었다는 인물. 인황.
▶天皇氏: 전설에 나오는 고대 중국 임금. 복희
▶緣溪行: 시냇물을 따라서 가다.
還甲宴<환갑잔치>
彼坐老人不似人 疑是天上降眞仙 .
其中七子皆爲盜 偸得王桃獻壽筵 .
저기 앉은 저 노인은 사람 같지 않으니, 아마도 하늘 위에서 내려온 신선일 테지.
여기 있는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이니, 서왕모의 선도 복숭아를 훔쳐다 환갑잔치에 바쳤네.
▶환갑 잔치 집에 들린 김삿갓이 첫 구절을 읊자 자식들이 모두 화를 내다가 둘째구절을 읊자 모두들 좋아하였다. 셋째 구절을 읊자 다시 화를 냈는데 넷째 구절을 읊자 역시 모두들 좋아하였다.
▶王桃(왕도): 서왕모의 仙桃복숭아를 말함. 천년에 한 번 열리며, 이것을 먹으면 불로장생한다고 함.
貧吟(가난을 읊음)
盤中無肉權歸菜 廚中乏薪禍及籬 .
姑婦食時同器食 出門父子易衣行 .
밥상에 고기 없으니 채소가 판을 치고, 부엌에 땔나무 없으니 울타리가 화를 입네.
며느리와 시어미는 한 그릇에 밥을 먹고, 부자가 출입할 땐 옷을 바꾸어 입네.
▶權歸菜: 채소에게 권세가 돌아 감. 밥상위에 채소만 있음을 비유함.
▶禍及籬: 울타리에 재앙이 미침. 울타리를 헐어서 땔감으로 사용함을 비유함.
▶궁핍한 집안 사정을 잘 묘사하였다.
自傷(혼자 상심함)
哭子靑山又葬妻 風酸日薄轉凄凄
忽然歸家如僧舍 獨擁寒衾坐達鷄
청산에 아들 묻고 아내 또한 떠나가니, 바람은 스산하고 날 저물어 더욱 쓸쓸하네.
홀연히 돌아온 집 마치 절과 같아서, 홀로 찬 이불 안고 닭 울도록 앉았네.
▶日薄: 날이 저물다 =日暮
▶轉: 매우. 대단히
▶아들과 아내를 떠나 보내고 상심해 있는 모습을 읊은 시이다.
贈還甲宴老人(환갑 잔치 받는 노인에게)
可憐江浦望 明沙十里連.
令人個個拾 共數父母年.
저 멀리 강포 풍경이 아름다워라, 고운 모래가 십리에 이어져 있네
그 모래알 낱낱이 모두 주워모아, 부모님 연세를 헤아리게 하소서.
▶可憐: 憐=美 두보의 시에 ‘可憐江浦望 不見洛橋人’이 있다.
▶明沙: 맑고 깨긋한 모래.
▶어느 환갑 잔치에 가서 노인의 자식들이 시를 청하자 지은 시이다.
過安樂見忤<안락성을 지나다가 미움받고>
安樂城中欲暮天 關西孺子聳詩肩 .
村風厭客遲炊飯 店俗慣人但索錢 .
虛腹曳雷頻有響 破窓透冷更無穿 .
朝來一吸江山氣 試向人間辟穀仙 .
안락성 안에 날이 저무는데, 관서지방 어린 것들이 시 짓기를 맡기네.
마을 인심이 나그네를 싫어해 밥 짓기는 미루고, 주막 주인의 버릇은 오직 돈만 찾는구나.
빈 배에선 자주 천둥소리가 들리는데, 뚫린 창으로 냉기가 통하니 더 이상 뚫을 곳이 없네.
아침이 되어서야 강산의 정기를 한번 마셨으니, 인간 세상에서 벽곡의 신선이 되려 시험하는가.
▶벽곡은 신선이 되기 위해 곡식을 먹지 않고 수련하는 방법.
▶안락성에서 안락하지 않게 밤을 지냈음을 풍자했다.
▶猶然: 머뭇거리는 모양.
▶玉館: 여관
▶五夜: 오경(五更)으로 오전 3시부터 5시까지이다.
自顧偶吟<나를 돌아보며 우연히 짓다>
笑仰蒼穹坐可迢 回思世路更迢迢 .
居貧每受家人謫 亂飮多逢市女嘲 .
萬事付看花散日 一生占得月明宵 .
也應身業斯而已 漸覺靑雲分外遙 .
푸른 하늘 웃으며 쳐다보니 마음이 더욱 아득하고, 세상길 돌이켜 생각하면 더욱 아득해지네.
가난하게 산다고 집사람에게 핀잔을 듣고, 제멋대로 술 마신다고 시중 여인들에게 놀림 받네.
세상 만사를 꽃을 보며 날을 보내는 데 부치고, 일생을 달로써 밤을 밝히는 데 써버렸네.
내게 주어진 팔자가 이것뿐이니, 청운의 꿈이 분수밖에 있음을 차츰 깨닫겠네.
▶穹: 하늘
▶迢: 멀다. 아득하다.
▶世路: 세상을 살아 온 길
▶謫: 꾸지람.
▶市女: 길거리에서 웃음을 파는 여자.
▶세속의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며 지내는 자신의 생활을 감회에 젖어 읊은 시이다.
是是非非詩<시시비비>
年年年去無窮去 日日日來不盡來 .
年去月來來又去 天時人事此中催 .
是是非非非是是 是非非是非非是 .
是非非是是非非 是是非非是是非 .
이 해 저 해 해가 가고 끝없이 가네. 이 날 저 날 날은 오고 끝없이 오네.
해가 가고 달이 와서 왔다가는 또 가니,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이 가운데 이뤄지네.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이 꼭 옳진 않고,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해도 옳지 않은 건 아닐세.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이것이 그른 것은 아니고,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일세.
人物
多睡婦<잠 많은 아낙네>
西隣愚婦睡方濃 不識蠶工況也農 .
機閑尺布三朝織 杵倦升粮半日舂 .
弟衣秋盡獨稱搗 姑襪冬過每語縫 .
蓬髮垢面形如鬼 偕老家中却恨逢 .
이웃집 어리석은 아낙네는 낮잠에 곯아 떨어졌나니, 누에치기도 모르니 농사를 어찌 알랴?
베틀은 늘 한가해 베 한 자에 사흘 걸리고, 절구질도 게을러 반나절에 피 한 되 찧네.
시아우 옷은 가을이 다 가도록 말로만 다듬질하고, 시어미 버선은 겨울을 넘기며 말로만 바느질하네.
헝클어진 머리에 때 낀 얼굴이 귀신같아서, 해로할 식구들이 잘못 만났다 한탄하네.
▶杵: 공이, 절굿공이
▶舂: 찧다
▶搗: 다듬이질하다.
▶襪(말):버선
▶蓬髮:어지럽게 헝클어진 머리카락
惰婦<게으른 아낙네>
無病無憂洗浴稀 十年猶着嫁時衣.
乳連褓兒謀午睡 手拾裙蝨愛簷暉.
動身便碎廚中器 搔首愁看壁上機.
忽聞隣家神賽慰 柴門半掩走如飛.
병 없고 우환 없는데 목욕하기 더물고, 십 년을 그대로 시집올 때 옷을 입네.
강보의 아기 젖 물린 채로 낮잠을 자려 하고, 치마 걷어 이 잡으려 햇볕 드는 처마로 나왔네.
부엌에서 움직였다 하면 그릇을 깨고, 머리 긁고 한숨지으며 벽 위의 베틀을 바라보네.
이웃집에서 굿한다는 소문만 들으면, 사립문 반쯤 닫고 나는 듯 달려가네.
▶褓: 포대기
▶裙(군): 치마, 속옷
▶蝨(슬): =虱. 이, 半風子
▶便: 곧, 즉시
▶神賽慰: 굿이나 푸닥거리등 구신을 위안하는 일
惰婦(게으른 아낙네)
惰婦夜摘葉 纔成粥一器 .
廚間暗食聲 山鳥善形容 .
게으른 아낙 밤에 나물을 캐서, 겨우 죽 한 그릇을 끓였구나.
부엌에서 몰래 먹는 소리는, 후르륵 산새 나는 소리로다.
▶纔: 막. 방금.
▶善形容: 잘 형용함.
老嫗(노파)
嚥脂粉等買耶否 冬柏香油亦在斯 .
老媾當窓梳白髮 更無一言出門遲 .
연지분등 안 사시려오? 동백기름 향유도 여기 있다오.
노파는 창가에서 희 머리를 빗을 뿐, 대답은커녕 문 열 기색도 없네.
▶嚥脂: 여자들이 볼과 입술에 바르는 붉은 색 화장품
▶買耶否: 사겠는가? 안사겠는가?
▶梳: 빗질하다.
▶연지, 동백기름,향유등이 백발 노파에게 무슨 소용이냐는 뜻의 늙음에의 自虐을 읊었다.
喪配自輓<아내를 장사지내는 輓歌를 짓다.>
遇何晩也別何催 未卜其欣只卜哀 .
祭酒惟餘醮日釀 襲衣仍用嫁時裁 .
窓前舊種少桃發 簾外新巢雙燕來 .
賢否卽從妻母問 其言吾女德兼才 .
창 앞에 심은 복숭아나무엔 꽃이 피었고, 주렴 밖 새 둥지엔 제비 한 쌍이 날아왔는데
그대 심성을 알지 못해 장모님께 물으니, 내 딸은 재덕을 겸비했다고 말씀하시네.
만나기는 왜 그리 늦었고 헤어지기는 왜 그리 빠른지, 기쁨을 알기 전에 슬픔부터 맛보았네.
제삿술은 아직도 초례 때 빚은 것이 남았고, 염습 옷은 시집 올 때 지은 옷 그대로 썼네.
▶시집 온 지 얼마 안 되는 아내의 상을 당한 남편을 대신하여 지은 시이다.
贈妓<기생에게 지어 주다>
却把難同調 還爲一席親.
酒仙交市隱 女俠是文人.
太半衿期合 成三意態新.
相携東郭月 醉倒落梅春.
처음 만났을 때는 어울리기 어렵더니, 이제는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네.
주선(酒仙)이 시은(市隱)과 사귀는데, 이 여협은 문장가일세.
정을 통하려는 뜻이 거의 합해지자, 달그림자까지 합해서 세 모습이 새로워라.
서로 손 잡고 달빛 따라 동쪽 성곽을 거닐다가, 매화꽃 떨어지듯 취해서 쓰러지네.
▶주선(酒仙): 술을 즐기는 김삿갓 자신.
▶시은(市隱): ‘大隱은 隱於市’에서 온 말. 산중에 은둔하기는 쉬워도 시중에 은둔하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음.
▶衿期合: 옷깃이 서로 스치다 , 通情上 비리로 하는 약속
▶成三: 이백(李白)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에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이라고 하여 달, 자신, 자신의 그림자가 모여 셋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意態:情趣와 態度.
▶落梅春:매화꽃 떨어지는 봄.
▶술을 좋아하는 시객(詩客)이 아름다운 기녀와 대작을 하며 시로 화답하고 봄밤의 취흥을 즐기는 풍류 시이다.
戱贈妻妾(아내와 소실에게 장난으로 줌)
不熱不寒二月天 一妻一妾最堪憐 .
鴛鴦枕上三頭並 翡翠衾中六臂連 .
開口笑時渾似品 翩身臥處變成川 .
東邊未了西邊事 更向東邊打玉拳 .
춥도 덥도 않는 이월이라, 마누라와 첩이 남편과 함께 정답게 누워있네
원앙 베개 위에는 머리가 셋 나란하고, 비단 이불 속에는 팔이 여섯 나란하도다.
입을 벌려 웃을 때는 세 입이 品자가 되고, 몸을 돌려 누우면 그 모양 川자로다
동쪽 일 끝나기도 전에 서쪽 일을 벌리고, 이내 동편으로 향하여 옥같은 손목을 쓰다듬네.
▶堪憐: 매우 정답다
▶鴛鴦枕: 원앙새 수가 노인 베개
▶翡翠衾: 비단 이불
▶品: 입 셋을 벌리면 品자와 같다고 야유
▶翩身: 몸을 돌리다
▶川: 세 사람이 옆으로 누우면 그 모양이 川자와 같다
▶어느 산골에 갔더니 한 집 한 방에서 처와 첩을 데리고 사는 사람을 만났다. 金笠 특유의 익살이 발동해서 그들을 놀려 주는 시를 짓고 크게 웃었다.
贈老妓(늙은 기생에게 줌)
萬木春陽獨抱陰 聊將殘愁意惟深 .
白雲古寺枯禪夢 明月孤舟病客心 .
嚬亦魂衰多見罵 唱還啁哳少知音 .
文章到此猶如此 擊節靑樓慷慨吟 .
온갖 나무 좋은 봄날 그대 홀로 침울하니, 묵은 시름 깊이 쌓여 걱정이 깊었도다.
구름 속 고찰의 여윈 선승의 꿈이요, 달밤 조각배의 병든 객 마음이라.
얼굴 찡그려도 혼이 쇠해 핀잔만 많이 받고, 노래 또한 거칠어서 알아주는 이 없도다.
문장을 짓는 것도 이와 같아서, 청루에서 장단 치며 강개하여 읊노라.
▶聊: 조금.
▶殘愁: 노후의 수심.
▶啁哳: 새가 지저귀듯 주절 주절 욈. 哳: 새울 찰 啁: 소리 조, 새소리 주.
▶還: 또, 다시
▶擊節: 무릎을 치며 장단을 맞춤.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의 미녀였던 西施는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하지만, 늙은 기생의 그런 모습은 핀잔을 부를 뿐이다. 그 옛날 갈채를 받던 노랫소리도 이제는 알아주는 이 없다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시이다.
老吟<늙음을 읊다>
五福誰云一曰壽 堯言多辱知如神.
舊交皆是歸山客 新少無端隔世人.
筋力衰耗聲似痛 胃腸虛乏味思珍.
內情不識看兒苦 謂我浪遊抱送頻.
오복 중 누가 장수를 으뜸이라 말했나? 오래 살면 辱이라고 말한 요임금이 귀신같구나.
옛 친구들 모두 다 북망산으로 돌아갔고, 나이 어린 후진들 다른 세상 사람일세.
근력이 떨어져 앓는 소리만 나오고, 위장이 허약해져 진미만 생각하네.
애 보는 괴로움 알지 못하고, 나더러 놀고 있다고 툭하면 아기 안기누나.
▶五福: 유교에서 이르는 다섯 가지 복. 壽, 富, 康寧, 攸好德, 考終命.
▶堯言多辱: “多男子則多懼 富則多事 壽則多辱 是三者 非所以養德也 故辭”(요임금이 세가지를 사양하며 한 말. 莊子 天地篇)
▶新少: 나이 어린 신진
▶衰耗: 쇠하여 다함.
▶虛乏(허핍) : 굶주려서 기운이 없다는 뜻.
▶內情(내정) : 내부의 사정.
老人自嘲<노인의 自嘲>
八十年加又四年 非人非鬼亦非仙 .
脚無筋力行常蹶 眼乏精神坐輒眠 .
思慮語言皆妄侫 猶將一縷線線氣 .
悲哀歡樂總茫然 時閱黃庭內景篇 .
여든 나이에다 또 네 살을 더하니, 사람도아니고 귀신도 아니며 신선 또한 아니로다.
다리에 근력이 없어 걸핏하면 넘어지고, 눈에도 정기가 없어 앉았다 하면 조네.
생각이나 하는 말이 모두가 망령인데, 한 가닥 기운으로 목숨을 이어가네.
희로애락 모든 감정이 아득하기만 한데, 이따금 황정경 내경편을 읽어보노라.
▶김삿갓이 노인의 청을 받아 지은 것으로, 기력이 쇠해서 근근히 살아가면서도 도가(道家)의 경전을 읽으며 허무에 심취한 것을 읊었다.
▶蹶: 넘어지다.
▶黃庭內景篇: 도가의 경서인 黃庭經의 內景經.
佝僂(곱사등이)
人皆平直爾何然 項在胸中膝在肩 .
回首不能看白日 倒身僅可見靑天 .
臥如心字無三點 立似弓形失一鉉 .
慟哭千秋歸去路 也應棺槨用團圓 .
남들은 모두 곧바로 서는데 너는 어찌 그런가? 목은 가슴에 있고 무릎은 어깨에 있구나.
고개를 돌려도 해를 보지 못하고, 몸을 기울여 간신히 푸른 하늘을 보도다.
누우면 心자에 점 셋이 없는 것 같고, 서면 시위 없는 활(弓)과 같구나
아! 천추에 원통한 일은 죽어서 돌아갈 때도, 응당 관을 둥글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네.
▶團圓: 둥글다
嘲幼冠者<갓 쓴 꼬마 신랑을 조롱함>
畏鳶身勢隱冠蓋 何人咳嗽吐棗仁 .
若似每人皆如此 一腹可生五六人 .
솔개를 무서워할 체구 갓에 가려 안 보이니, 누가 기침하다가 내뱉은 대추씨인가?
사람마다 모두 이렇게 작다면, 한 배에서 대여섯 명은 낳을 수 있겠지.
▶13세의 어린 꼬마 신랑이 갓을 쓰고 다님을 조롱한 것이다. 솔개를 무서워할 나이에 몸을 가릴 만큼 큰 갓을 쓰고, 몸집은 대추씨처럼 작은데 벌써 새신랑이 되었음을 재치있게 표현했다.
嘲年長冠者<갓 쓴 어른을 조롱함>
方冠長竹兩班兒 新買鄒書大讀之 .
白晝猴孫初出袋 黃昏蛙子亂鳴池 .
뿔난 관을 쓰고 담뱃대 문 양반님이, 새로 사온 책 [맹자]를 크게 읽누나.
대낮에 갓 태어난 원숭이 새끼 모양이요, 황혼녘 연못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로다.
▶어떤 나이 지긋한 유생(儒生)이 어설프게 의관을 갖추고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 하도 꼴불견이어서 넌지시 조롱해 보았다.
▶長竹:긴 담뱃대
▶鄒書(추서): 추(鄒)나라는 맹자(孟子)가 태어난 곳이기에 책 맹자를 속칭하여 "추서"라고함.
訓戒訓長<훈장을 훈계하다>
化外頑氓怪習餘 文章大塊不平噓 .
盠盃測海難爲水 牛耳誦經豈悟書 .
含黍山間奸鼠爾 凌雲筆下躍龍余 .
罪當笞死姑舍已 敢向尊前語詰거(言+居) .
두메산골 완고한 백성이 괴팍한 버릇 있어, 문장 대가 헐뜯으며 트집을 잡는구나.
종지 그릇으로 어찌 바닷물을 측량하고, 소귀에 경 읽는다고 어찌 글을 깨달으랴.
너는 기장이나 먹는 간교한 산골의 쥐이지만, 나는 붓끝에 구름을 일으키며 오르는 용이라네.
네 죄 매 맞아 죽을 것이나 잠시 용서하노니, 어른 앞에서 버릇없이 말대꾸 하지 말라.
▶김삿갓이 강원도 어느 서당을 찾아갔을 때, 마침 훈장은 학동들에게 고대의 문장을 강의하고 있는데, 주제넘게도 그 문장을 천시하는 말을 하고, 김삿갓을 보자 멸시를 하는 것이었다. 이에 훈장의 허세를 꼬집는 시를 지었다.
▶化外:文化가 미치지 않는 곳.
▶頑氓(완맹):완고한 백성.
▶噓:불다. 뿜다
▶盠盃(리배):아주 작은 술잔 리. 盠(리):표주박
▶黍(서):기장. 수수의 일종
▶詰(힐):따지다. 꾸짖다
▶言+居(거): 말에 법도가 있다(입력불가)
八大詩家(팔대가의 이름으로 쓴 시)
李謫仙翁骨己霜 柳宗元是但垂芳 .
黃山谷裡花千片 白樂天邊雁數行 .
杜子美人今寂寞 陶淵明月久荒凉 .
可憐韓退之何處 惟有孟東野草長 .
이적 선옹의 뼈는 이미 서리가 되었고, 유종은 단지 이름만 드리웠도다.
황산 계곡 속에 낙화 천만잎 흩날리고, 백낙의 하늘가에 기러기 행렬이 지난다.
두자라는 미인도 이젠 고인이 되었고, 도연의 밝은 달 기울어진 지 오랠세.
가련한 한퇴는 어디로 가야 할꼬, 오직 맹동의 들에 풀만 무성하도다.
▶八大詩家: 李白,柳宗元,黃庭堅,白居易,杜甫,陶潛,韓愈,孟郊. 당,송에 걸친 시문의 대가.
▶芳: 향기. 이름이 빛남.
訓長<훈장>
世上誰云訓長好 無烟心火自然生 .
曰天曰地靑春去 云賦云詩白髮成 .
雖誠難聞稱道賢 暫離易得是非聲 .
掌中寶玉千金子 請囑撻刑是眞情 .
세상에서 누가 훈장이 좋다고 했나? 연기 없는 심화가 저절로 나네.
하늘 천 따 지 하다가 청춘이 지나가고, 시와 문장을 논하다가 백발이 되었네.
지성껏 가르쳐도 칭찬 듣기 어려운데, 잠시라도 자리 뜨면 시비하기 일쑤이네.
장중보옥 천금같은 자식을 맡겨 놓고, 매질해 달라는 것은 진정일 테지.
▶김삿갓은 방랑 도중 훈장 경험을 하기도 했는데, 자유분방한 시인에게 훈장이란 가당치도 않았다. 서당 훈장을 마치고 나서며 지은 시이다.
嘲山村學長<산골 훈장을 놀리다>
山村學長太多威 高着塵冠鍤唾排 .
大讀天皇高弟子 尊稱風憲好明儔 .
每逢兀字憑衰眼 輒到巡杯籍白鬚 .
一飯黌堂生色語 今年過客盡楊州 .
산골 훈장 위엄이 지나치더니, 먼지 낀 관 도두 쓰고 가래침을 내뱉네.
천황을 읽는 놈이 수제자요, 풍헌이라고 높여 부르면 좋은 친구라네.
모르는 글자 만나면 눈 어둡다 핑계 대고, 술잔 돌 적에는 백발 빙자을 빙자하네.
밥 한 그릇 내주며 생색내며 하는 말이, 올해 나그네는 모두가 양주 사람이라 하네.
▶學長: 서당의 훈장
▶鍤: 삽, 가래. ▶鍤唾: 한자의 훈을 따서 가래침.
▶排: 침을 뱉다. 배설하다.
▶兀: 무식하다. 무지한 모양
▶風憲: 조선 시대 향직(鄕職)의 하나.
▶籍(자): 빙자하다
▶儔(주): 짝, 무리
▶輒(첩): 번번이
▶黌(횡): 글방
▶楊州: 김삿갓의 고향인 양주를 가리키는 듯.
可憐妓詩<기생 가련에게>
可憐行色可憐身 可憐門前訪可憐 .
可憐此意傳可憐 可憐能知可憐心 .
가련한 행색의 가련한 몸이, 가련의 문 앞에 가련을 찾아왔네.
가련한 이 내 뜻을 가련에게 전하면, 가련이 이 가련한 마음을 알아주겠지.
▶이 시는 가련이라는 기생에게 가련한 정을 호소한 것인데, 기생의 이름과 가련이라는 말이 한데 어울려 있으나 전혀 난잡하지 않고 간곡한 표현이 특이하다고 하겠다.
▶김삿갓은 함경도 단천에서 한 선비의 호의로 서당을 차리고, 3년여를 머무는데 가련은 이 때 만난 기생의 딸이다. 그의 나이 스물 셋. 힘든 방랑길에서 모처럼 갖게 되는 안정된 생활과 아름다운 젊은 여인과의 사랑...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방랑벽은 막을 수 없었으니, 다시 삿갓을 쓰고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을 떠난다.
離別<이별>
可憐門前別可憐 可憐行客尤可憐 .
可憐莫惜可憐去 可憐不忘歸可憐 .
가련의 문 앞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가련한 나그네의 行色이 더욱 가련하구나.
가련아, 가련한 이 몸 떠남을 슬퍼하지 말라. 가련을 잊지 않고 가련에게 다시 오리니.
贈某女<어느 여인에게>
客枕條蕭夢不仁 滿天霜月照吾隣 .
綠竹靑松千古節 紅桃白李片時春 .
昭君玉骨胡地土 貴妃花容馬嵬塵 .
人性本非無情物 莫惜今宵解汝身 .
나그네 베갯머리 쓸쓸해 꿈자리 산란하고, 하늘 가득 차가운 달빛 내 주위를 비추네.
푸른 대와 푸른 솔은 천고의 절개요, 붉은 복사꽃 흰 오얏꽃은 한 때의 봄이로고.
왕소군의 옥같은 자태 오랑캐 땅의 흙이 되고, 양귀비의 꽃 같은 얼굴도 마외파의 티끌이 되었도다.
사람의 성품이 본래부터 무정한 것 아니니, 오늘 밤 그대 옷자락 풀기를 아까워하지 말게나.
▶枕條: 베개.
▶霜月: 겨울의 달. 차가운 달
▶昭君: 왕소군. 한나라 원제(元帝)의 궁녀. 흉노 땅에서 죽음.
▶胡地: 왕소군이 죽은 오랑캐의 땅
▶貴妃: 楊貴妃. 현종의 妃.
▶馬嵬: 馬嵬坡.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양귀비가 피난하다가 마외파에 이르렀는데, 호위하던 군사들이 처형을 요구하여 양귀비가 自盡하였음.
▶김삿갓이 전라도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커다란 기와집을 찾아갔다. 주인은 나오지 않고 계집종이 나와서 저녁상을 내다 주었다. 밥을 다 먹은 뒤에 안방 문을 열어보니, 소복을 입은 미인이 있었는데 독수공방하는 어린 과부였다. 밤이 깊은 뒤에 김삿갓이 안방에 들어가자 과부가 놀라 단도를 겨누었다. 김삿갓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인데 목숨만 살려 달라고 하자 여인이 운을 부르며 시를 짓게 하였다.
자연의 섭리가 일정불변한 것이 없어서, 절세의 미인이었던 왕소군과 양귀비도 한 줌의 흙이 되었음을 상기시키고 한때의 정을 나눔을 애석히 생각지 말라고 표현하고 있다.
街上初見<길가에서 처음 보고>
-金笠詩
芭經一帙誦分明 客駐程詀忽有情 .
虛閣夜深人不識 半輪殘月已三更 .
-女人詩
難掩長程十目明 有情無語似無情 .
踰墻穿壁非難事 曾與農夫誓不更 .
길가는 사람이 많아 눈 가리기 어려우니, 마음이 있어도 말을 못하니 마음이 없는 것 같소.
담 넘고 벽 뚫어 들어오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내 이미 농부와 불경이부 다짐했다오.
그대가 시경 한 책을 줄줄 외우니, 나그네가 길 멈추고 사랑스런 맘 일어나네.
빈 집에 밤 깊으면 사람들도 모를 테니, 삼경쯤 되면 반달이 지게 될 거요.
▶김삿갓이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여인들이 논을 매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미인이 시경을 줄줄 외우고 있어서 김삿갓이 앞 구절을 지어 그의 마음을 떠보았다.
그러자 여인이 뒷 구절을 지어 남편과 다짐한 불경이부(不更二夫)의 맹세를 저버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詠影<그림자>
進退隨儂莫汝恭 汝儂酷似實非儂 .
月斜岸面篤魁狀 日午庭中笑矮容 .
枕上若尋無覓得 燈前回顧忽相逢 .
心雖可愛終無信 不映光明去絶踪 .
들고 날 때 날 따르면서도 날 공경하지 않으며, 네가 나와 비슷하지만 참 나는 아니구나.
달빛 기울 때 언덕에 비치면 도깨비같이 무섭고, 대낮에 뜰에 비치면 난쟁이처럼 우습구나.
침상에 누워 찾아도 보지를 못하다가, 등불 앞에서 돌아보면 갑자기 마주치네.
마음으로는 사랑스러우나 끝내 믿을 수 없으니, 빛이 비치지 않으면 자취를 감추지 않느냐.
▶시의 내용에서 어떤 우수나 비애도 내비치지 않은 냉철한 서술이 있는데, 바로 이런 서술에서 그의 장난스러운 상상력을 얼핏 내보이고 있다.
嘲地官<지관을 놀리다>
風水先生本是虛 指南指北舌飜空 .
靑山若有公侯地 何不當年葬爾翁 .
풍수 선생은 본래 허망한 사람이라, 남이다 북이다 가리키며 부질없이 혀를 놀리네.
청산 속에 만약 명당자리가 있다면, 어찌 네 아비를 묻지 않았느냐?
嘲地師<지사를 조롱함>
可笑龍山林處士 暮年何學李淳風 .
雙眸能貫千峰脈 兩足徒行萬壑空 .
顯顯天文猶未達 漠漠地理豈能通 .
不如歸飮重陽酒 醉抱瘦妻明月中 .
가소롭구나 용산의 임처사여, 늘그막에 어찌하여 이순풍을 배웠나.
두 눈동자 천 봉우리 맥을 꿰뚫고, 두 발은 만 골짜기를 홀로 헤매네.
환하게 드러난 천문도 오히려 모르면서, 보이지 않는 땅 속 일을 어찌 통달했으랴.
차라리 집에 돌아가 중양절 술이나 마시고, 달빛 속에서 취하여 여윈 아내나 안아 주시게.
▶地師:풍수라고 하여 묘지의 地相을 감식하는 사람. 地官
▶李淳風:당나라 사람으로 역산(曆算)에 밝았고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다. 地師의 開祖.
▶重陽酒:9월9일 중양절에 마시는 술.
▶천체의 형상도 모르면서 땅의 이치를 안답시고 명당이라는 곳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누비고 다녔으나 모두 헛수고를 한 것이니,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조롱을 했다.
動物
鷄(닭)
擅主司晨獨擅雄 絳冠蒼距拔於叢 .
頻驚玉兎旋藏白 每喚金烏卽放紅 .
欲鬪努嗔瞳閃火 將鳴奮鼓翅生風 .
名高五德標於世 逈代桃道響徹空 .
새벽임을 알리는 일 수탉에 달려있고, 진홍 벼슬에 푸른 뒷 발톱이 빼어나구나.
달을 놀라게 해서 흰 빛 감추게 하고, 매양 해를 불러 붉은 빛을 발하게 하네.
싸우고자 성낼 때는 눈동자에 불이 번쩍이고, 울며 떨쳐 두드리는 날갯짓에 바람이 이는구나.
五德으로 이름 높아 세상에 指標되고, 먼 옛날 무릉도원에서 하늘에 울렸도다.
▶擅: 제마음대로할 천
▶絳: 짙은 적색
▶距: 닭 며느리 발톱 거
▶閃: 번쩍번쩍할 섬
▶瞋: 눈 부릅뜰 진
▶翅: 날개 시
▶徹: 뚫다
▶玉兎: 달
▶金烏: 태양
▶逈代: 먼 옛날 ▶逈: 멀 형
▶桃都: 무릉도원(武陵桃源)
▶五德.: 한시외전(漢詩外傳)에 닭은 文 武 勇 仁 信의 다섯 가지 덕을 구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닭의 붉은 벼슬은 문관의 기상이요(文), 날카로운 발톱은 무관의 위엄이요(武), 싸움에는 용감하고 (勇), 모이를 보면 서로 불러서 함께 먹는 것은 인 자함이요(仁), 밤중에도 자지 않고 시각을 알리는 것은 신의(信)의 표현이라고 하는데 이들 다섯을 닭의 五德이라 한다.
▶桃道響徹空: 무릉도원에서 방향을 찾지 못할 때 닭울음 소리를 듣고 방향을 잡았다는 것.
狗 (개)
稟性忠於主饋人 呼來斥去任其身 .
跳前搖尾偏蒙愛 退後垂頭却被嗔 .
職察奸偸司守固 名傳義塚領聲頻 .
褒勳自古施帷蓋 反愧無力尸位臣 .
품성이 충성되어 궤인조차 주인 삼고, 부르면 오고 물리치면 가는데에 그 몸을 맡기네.
앞발 들고 꼬리쳐서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물러나 고개 떨구고 꾸지람을 듣는구나.
간사한 도둑을 살펴 굳게 지키는 게 일이지만, 목숨 바쳐 주인을 구한 이름 자주 들리네.
예로부터 공을 기려 휘장을 베풀었나니, 오히려 능력없는 尸位臣이 부끄럽네.
▶饋人: 君王의 食膳을 다스리는 사람. 毒의 유무를 먼저 맛본 후에 군왕에게 올리는데, 궤인은 그것을 개에게 먹여 시험해 봄.
▶義塚: 獒樹[오수]의 개, 불이 난 것을 모르고 잠든 주인을 구했다는 개. 고려의 문인 崔滋가 쓴 補閑集에 그 이야기가 전해진다. 居寧縣[오늘날의 전북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에 살던 金蓋仁은 충직하고 총명한 개를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날 동네 잔치에 다녀오던 김개인이 술에 취해 풀밭에 잠들었는데, 때마침 들불이 일어나 김개인이 누워있는 곳까지 불이 번졌다. 불이 계속 번져오는데도 김개인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나지 않자, 그가 기르던 개가 개울에 뛰어들어 몸을 적신 다음 불 위를 뒹굴어 끄려 했다. 들불이 주인에게 닿지 않도록 여러차례 이런 짓을 반복한 끝에, 개는 죽고 말았으나 김개인은 살았다고 한다. 개 주인은 잠에서 깨어나 개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음을 알고, 몹시 슬퍼하며 개의 주검을 묻어주고 자신의 지팡이를 꽂았다고 하는데 나중에 이 지팡이가 실제 나무로 자라났다고 한다. 훗날 개 獒자와 나무 樹자를 합하여 이 고장의 이름을 '獒樹(오수)‘라 했다.
▶帷蓋: 장악을 치다. 사당에 모시는 것을 말함
▶尸位臣: 尸位素餐의 신하 尸位素餐:직책을 다하지 못하면서 한갓 자리만 차지하고 녹을 받음
蚤<벼룩>
貌似棗仁勇絶倫 半風爲友蝎爲隣 .
朝從席隙藏身密 暮向衾中犯脚親 .
尖嘴嚼時心動索 赤身躍處夢驚頻 .
平明點檢肌膚上 剩得桃花萬片春 .
모습은 대추씨 같지만 용기가 뛰어나, 이(虱)와는 친구 삼고 빈대와는 이웃일세.
아침에는 자리 틈에 은밀히 몸 숨기고, 저녁에는 이불 속에서 다리에 붙는구나.
뾰족한 주둥이로 물어 깜짝 놀라 찾게 하니, 알몸으로 튈 때마다 단꿈이 자주 깨네.
밝은 아침에 피부를 살펴보면, 복사꽃 만발한 봄 경치가 남아 있네.
▶半風: 風을 반으로 자른 모습, 虱(이)를 가리킴.
▶蝎: 빈대
▶嘴(취): 부리
▶嚼(작): 씹다.
▶親: 가까이 하다. 여기서는 벼룩이 다리에 붙음을 뜻함.
▶剩: 남다. 남아 있다.
▶벼룩의 모양과 습성을 묘사하고 벼룩에 물린 사람의 피부를 복숭아꽃이 만발한 봄 경치에 비유한 것이 재미있는 시이다.
猫<고양이>
三百郡中秀爾才 乍來乍去不飛埃 .
行時見虎暫藏跡 走處逢狵每打顋 .
獵鼠主家雖得譽 捉鷄隣里豈無猜 .
南街北巷啼歸路 能怯千村夜哭孩 .
온갖 짐승 중에 네 재주가 뛰어나서, 금방 왔다 금방 가도 먼지 하나 날지 않네
가다가 호랑이를 만나면 잠시 자취를 감추고, 뛰다가 개를 보면 마냥 뺨을 치며 놀리네
쥐를 잡아 주인집 칭찬 들었으나, 닭을 잡으니 이웃집의 미움을 받지 않으랴?
남쪽 북쪽 온 동네 울고 돌아다니며, 밤에 우는 아이들 겁먹게 하는구나.
猫<고양이>
乘夜橫行路北南 中於狐狸傑爲三 .
毛分黑白渾成繡 目狹靑黃半染藍 .
貴客床前偸美饌 老人懷裡傍溫衫 .
那邊雀鼠能驕慢 出獵雄聲若大膽 .
귀한 손님 밥상에서 맛있는 반찬 훔쳐 먹고, 늙은이 품속에서 따뜻한 옷에 달라 붙네.
어디서 참새와 쥐가 교만을 떨쏘냐? 사냥 나가는 우렁찬 소리 대담하구나.
밤에는 남북 길을 횡행하고, 여우와 이리에 끼어 三傑이 되었네.
털은 흑백이 뒤섞여 무늬를 이루고, 눈은 프르고 누른데다 반은 남색일세.
▶傍: 의지하다. 달라붙다
▶雀: 참새
▶김삿갓 시의 특징은 이처럼 예민한 관찰과 기발한 착상을 통해서 표현해 내는 필치의 미묘함에 있다.
魚<물고기>
游永得觀底好時 錦澤斜日綠楊垂 .
銀飜如舞鶯相和 玉躍施潛鷺獨知 .
影醮橫雲嫌罟陷 光況初月似釣疑 .
歸來森列變眸下 畵出心頭一幅奇 .
연못 속에 뛰노는 물고기 환히 보이고, 맑은 못 가에 해 저물고 수양버들 치렁치렁
은빛 비늘 춤추듯 반짝이면 꾀꼬리 화답하고, 옥같이 뛰었다가 금세 잠기면 백로가 홀로 아네.
펴진 구름이 그림자로 어리면 그물인 양 미워하고, 초생달 물 속에 잠기면 낚시인가 의심하네.
돌아와서 두 눈감아도 삼삼히 떠올라서, 마음속에 아름다운 그림 한 폭 떠오르네.
▶醮: 그림자가 물 위에 어리는 모습.
鷹(매)
萬里天如咫尺間 俄從某峀又玆山 .
平林搏兎何雄壯 也似關公出五關 .
아득한 하늘을 지척인 양 날아와, 저 바위구멍에서 나서자 또 이 산에 나타나네.
평평한 숲속에서 토끼를 잡으니 얼마나 장한가, 마치 關羽가 五關을 나오는 듯 하도다.
▶俄: 갑자기. 잠간.
▶峀: 바위구멍
虱(이)
飢而吮血飽而擠 三百昆蟲最下才 .
遠客懷中愁午日 窮人腹上廳晨雷 .
形雖似麥難爲麯 字不成風未落梅 .
問爾能侵仙骨否 麻姑搔首坐天台 .
주리면 피를 빨고 배부르면 떨어지니, 삼백 곤충 중에 그 가장 하등일세.
먼길 가는 나그네 품속에서 낮에는 근심하고, 주린 사람 배 위에서 새벽 우뢰 듣는구나
형상은 비록 보리 같으나 누룩 되기 어렵고, 글자는 風자를 못 이루니 매화를 떨어뜨릴 수 없네.
네게 묻나니 감히 신선도 범할 수 있겠는가? 마고할멈 머리 긁으며 천태산에 앉았구나
▶麻姑: 손톱이 긴 선녀. 마치 이네 물린 곳을 긁기 위해서 손톱이 긴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蛙(개구리)
草裡逢蛇恨不飛 澤中冒雨怨無簑 .
若使世人敎拑口 夷齊不食首陽薇 .
풀 속에서 뱀 만나면 날지 못해 한스럽고, 연못에서 비 만나면 도롱이 없음을 원망하노라.
(개구리같이 말많은) 세인들 입 다물게 했더라면, 夷齊도 수양산 고사리 먹지 않았을 것을.
▶夷齊: 백이 숙제
▶簑: 도롱이
▶箝口(겸구):입을 다물고 말을 못하게 하다.
▶薇: 고사리
▶항상 불평과 불만에 가득차서 남을 헐뜯고 모략하는 것을 개구리의 울어대는 소리에 비유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老牛<늙은 소>
瘦骨稜稜滿禿毛 傍隨老馬兩分槽 .
役車荒野前功遠 牧竪靑山舊夢高 .
健耦常疎閑臥圃 苦鞭長閱倦登皐 .
可憐明月深深夜 回憶平生謾積勞 .
여윈 골격 모질고 털은 빠져 앙상한데, 늙은 말 따라서 구유를 같이 쓰네.
황야에 수레 끌던 옛 功勞는 멀어지고, 목동 따라 청산에서 옛날 꿈 아득하도다.
힘찬 쟁기질도 어려워 채마밭에 누웠고, 채찍 맞으며 언덕길 오르기도 힘들다.
가련해라 밝은 달밤은 깊어만 가는데, 평생 쌓은 헛된 고생을 돌이켜보네.
▶稜: 모질다.
▶禿: 뭉그러지다.
▶槽: 말구유.
▶耦: 쟁기.
▶閱: 지내다. 용납하다. 견디다.
▶謾: 속이다. 여기서는 ‘부질없이’
▶세월의 무상함은 인간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시에서처럼 늙은 소를 보고서 세월이 앗아간 전날의 혈기 넘치고 힘이 세었던 때를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白鷗詩<갈매기>
沙白鷗白兩白白 不辨白沙與白鷗 .
漁歌一聲忽飛去 然後沙沙復鷗鷗 .
모래도 희고 갈매기도 희니, 모래와 갈매기를 분간할 수 없도다.
어부의 노래 한 곡조에 홀연히 날아오르니, 모래는 모래, 갈매기는 갈매기로 구별되누나.
▶바닷가 흰 모래와 갈매기의 흰색이 한데 어우러지니 분간할 수 없음을 직관적으로 읊은 시이다.
鷄<닭>
搏翼天時回斗牛 養塒物性異沙鷗 .
爾鳴秋夜何山月 玉帳寒淚營楚猴 .
날개칠 때 天時는 북두 견우 가리키고, 홰에서 기른 성질 백사장 갈매기와 다르구나.
너는 가을 밤 어느 산의 달을 보고 울어댓기에, 옥장의 초패왕을 눈물짓게 했느냐!
▶楚猴 : 項羽를 가리킴.
영물(詠物)
詠笠<삿갓을 읊음>
浮浮我笠等虛舟 一着平生四十秋 .
牧竪輕裝隨野犢 漁翁本色伴沙鷗 .
醉來脫掛看花樹 興到携登翫月樓 .
俗子依冠皆外飾 滿天風雨獨無愁 .
떠돌아 다니는 내 삿갓 빈 배와 같아, 한번 쓰니 어느덧 사십 평생일러라.
목동이 소치러 들로 갈 때 차림이고, 갈매기 벗삼는 어옹의 본모습일세.
취하면 벗어서 구경하던 꽃나무에 걸고, 흥이 일면 손에 들고 완월루에 오르네.
속인들의 의관이야 겉치장일 뿐이지만, 하늘 가득 비바람 쳐도 나만은 걱정 없네.
▶자신의 조부를 탄핵하고 시작한 방랑 생활, 언제나 벗이 되어 주며 비바람에도 몸을 보호해 주는 삿갓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리해서 '병연'은 그 이름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 시인은 '병연'이란 이름을 스스로 숨기고 잊어 버렸다. 그리고 삿갓을 쓴 이름 없는 시인이 되었다. 그가 읊은 자신의 '삿갓'시는 표연 자적하는 자연과 풍류 속의 자기 운명을 그린 자화상이었다.
簾(발)
最宜城市十街樓 遮却繁華取閬幽 .
三更皓月玲瓏照 一陣紅埃隱映浮 .
漏出琴聲風乍動 覘看山影霧初收 .
林蔥萬類眞顔色 盡入窓櫳半掛釣 .
시가지 네거리의 누각에 제격이니, 번화함을 물리치고 그윽함을 취함이라.
삼경에는 밝은 달이 영롱하게 비추나니, 한바탕 붉은 먼지는 은은히 떠도누나.
거문고 소리 새어 나올 때 바람 잠깐 움직이고, 산 그림자 엿보니 안개도 그쳤더라.
무성한 수풀의 만 가지 모습이 몽땅 창가로 끌려와서 이렇게 매달렸구나.
▶閬(랑): 조용하고 그윽함.
▶埃: 먼지 티끌
▶乍: 잠깐, 별안간
▶覘(첨): 엿보다.
▶初:이미, 벌써.
▶蔥: 무성하다.
▶櫳(롱): 난간
博<장기>
酒老詩豪意氣同 戰場方設一堂中 .
飛包越處軍威壯 猛象蹲前陳勢雄 .
直走輕車先犯卒 橫行駿馬每窺宮 .
殘兵散盡連呼將 二士難存一局空 .
酒客과 詩友가 의기가 통하여, 대청 위에서 한바탕 싸움판을 벌이네.
포가 날아 넘는 곳에 군세가 壯하고, 사나운 상이 웅크리니 陣勢가 웅장하네.
곧장 달리는 경쾌한 車가 졸을 먼저 범하고, 옆으로 달리는 날쌘 馬가 宮을 엿보네.
兵卒들이 다 없어지고 잇달아 장군을 부르자, 두 士가 견디다 못해 장기판을 쓸어버리네.
▶주객(酒客)과 시우(詩友)가 대청마루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모습을 읊었다. 포(包), 상(象), 차(車), 마(馬)의 활약이 잘 묘사된 표현의 묘미를 느길 수 있다.
棋<바둑>
縱橫黑白陳如圍 勝敗專由取舍機 .
四皓閑秤忘世坐 三淸仙局爛柯歸 .
詭謨偶獲擡頭點 誤着還收擧手揮 .
半日輪贏更挑戰 丁丁然響到斜輝 .
흑백이 종횡으로 에워싼 것처럼 진을 치니, 승패는 오로지 때를 잡고 못 잡음에 달렸네.
사호가 은거하여 바둑으로 시국을 잊었고, 삼청 신선들 대국에 도끼자루 다 썩더라.
뜻밖의 속임수로 세력 뻗을 점도 얻고, 잘못 두고 물러 달라 손 휘두르기도 하는구나.
한나절 승부를 걸고 다시금 도전하니, 바둑알 치는 소리에 석양이 빛나네.
▶四皓: 진시황 때 난을 피해 상산(商山)에 숨은 네 은사(隱士).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 ),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녹里先生).
▶秤(칭): 저울. 저울질. 여기서는 바둑승부를 말함.
▶三淸: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으로 신선들이 산다는 궁의이름이다.
▶爛: 썩다
▶柯: 도낏자루
▶擡頭: 세력을 뻗다.
▶輪贏: 승부
▶丁丁: 바둑알 놓는 소리
煙竹(담뱃대)
圓頭曲項又長身 銀飾銅裝價不貧 .
時吸靑煙能作霧 每焚香草暗消春 .
寒燈旅館千愁伴 細雨江亭一味新 .
班竹年年爲爾折 也應堯女泣湘濱 .
둥근 머리 굽은 목에 길기도 한 몸, 은장식 동장식 값도 싸지 않구나.
때때로 푸른 연기 빨면 안개가 자욱하고, 향초를 태울 때마다 봄도 모르게 소멸되네.
쓸쓸한 여관에서 온갖 시름 벗이 되고, 비 내리는 강변 정자에선 그 맛이 새롭구나.
해마다 너를 위해 班竹을 잘라내니, 응당 堯女가 湘江가에서 울리라
▶暗消春: 담배가 풀이므로 풀을 태운다는 것은 곳 봄을 소멸시킨다는 것.
▶담뱃대는 특히 반점이 박힌 대나무로 만든 것이라야 제격이다. 옛날 중국 요임금의 두 딸이었던 娥皇과 女英이 순임금의 와후가 되었다가 순임금이 순수를 나갔다가 창오에서 세상을 뜨자 두 사람도 그 곳으로 가서 瀟湘에서 몸을 던져 죽었고, 그 때 흘린 눈물이 대나무에 뿌려져서 斑竹이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雪景<설경>
飛來片片三月蝶, 踏去聲聲六月蛙.
寒將不去多言雪, 醉或以留更進盃.
흩날리는 눈송이는 춘삼월 나비요, 밟히는 소리는 오뉴월 개구리로다.
추워서 못 간다고 눈을 핑계 대고, 취하면 혹 머무를까 다시 잔을 드누나.
▶설경에 심취하여 춥고 눈이 온다고 핑계를 대고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을 읊었다.
雪(눈)
蕭蕭密密又霏霏 故向斜風滿襲衣 .
澗邊獨鶴愁無語 木末寒鴉凍不飛 .
從見江山颺白影 誰知天地弄玄機 .
强近店婆因問酒 緬然醉臥却忘愁 .
소록소록 내려 쌓이는 함박눈, 바람에 날리어 옷 가득히 파고드누나.
물가의 외로운 학 수심에 잠겨 소리 없고, 나무 끝의 까마귀는 몸이 얼어 날지를 않네.
강산에 날리는 흰 눈을 볼지라도, 누가 천지의 깊은 조화를 알수 있으리오?
가까운 주막 노파에게 술을 청하여, 사색하며 취해 누우니 돌아갈 것을 잊었노라
▶蕭蕭,密密,霏霏: 눈이나 비가 흩날리는 모양
▶颺(양): 날리다
▶强近: 아주 가까운
▶因問: 부탁하다.
▶緬然(면연): 사색하는 모양 緬: 가는 실, 사색하는 모양.
雪(눈)
白屑誰飾亂洒天 雙眸忽爽霽樓前 .
練舗萬壑光斜月 玉削千峰影透烟 .
訪隱人應隨剡掉 懷兄吾亦坐講筵 .
文章大手如逢此 寫景高吟到百篇 .
흰 눈가루를 누가 만들어 세상에 어지러이 뿌렸나! 누각 앞 눈 그치니 두눈이 환해지네.
흰 비단을 골짜기에 펼친 듯 달빛은 빛나고, 옥을 깎은 듯 산봉우리들 안개에 어른거리네.
은사를 만나려면 응당 배를 저어 섬도로 가야하니, 근심 품고 대자리에 앉아 강론이나 해야겠네.
문장의 대가가 이러한 설경을 만난다면, 소리 높여 경치 읊음이 백 편은 되리라
▶屑: 가루
▶洒(쇄): 뿌리다.
▶爽: 밝다.
▶剡: 地名. 剡溪
▶掉: 배를 젓다
▶兄: 근심. 민망함
▶筵: 대자리
▶大手: 大家
▶王子猷(王徽之의 자)가 산음현에 살고 있을 때, 밤에 큰 눈이 내렸다. 잠에서 깨어나 방문을 열고 술을 가져오라 했는데 사방이 온통 은빛이었다. 그래서 일어나 배회하면서 左思(250?-305)의 「招隱詩(은자를 부르는 시)」를 읊조렸다. 이 때 왕자유가 읊었던 시는 이랬다. “지팡이 짚고 隱士를 찾아 나서니, 황량한 길은 예나 지금이나 가로질러 있네. 바위 동굴엔 번듯한 집도 없는데, 언덕에선 거문고 소리 울리네. 흰 눈은 그늘진 산등성이에 쌓여 있고, 붉은 꽃은 햇볕 드는 숲에서 빛나네.” 시를 읊던 왕자유는 갑자기 戴安道(戴逵) 생각이 났다. 당시 대안도는 섬현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곧장 그 밤으로 작은 배를 타고 그를 찾아 나섰다. 하룻밤이 지나서 비로소 도착했는데, 대문까지 갔다가 들어가지 않은 채 돌아갔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왕자유가 말하기를: “본래 흥이 올라서 왔다가 흥이 다해서 돌아간 것이니, 어찌 반드시 대안도를 만나야만 하리오!”라고 했다. < 『세설신어』 >
▶흔히들 왕휘지가 눈 내린 겨울 밤 감상에 젖어 대규를 그리워하여 길을 떠났다고 여기지만, 『세설신어』의 위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면 왕휘지는 그 날 밤 좌사의 ‘초은,’ 즉 ‘은자를 찾아 나서는’ 흥취를 추구한 것이지 벗을 만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규는 당시 七絃琴의 명수였고 글과 서화로도 이름났던 은자였다. 좌사의 시에 등장하는 ‘은사’와 ‘거문고 소리’가 왕휘지로 하여금 대규를 떠올리게 하였던 것이다. 흥취를 좇아 먼 길을 가서 대규를 만나지도 않고 돌아온 엉뚱한 행위, 이는 왕휘지의 거리낌 없이 방종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분방했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雪景(설경)
送月開簾小碧峰 滿庭疑是玉人逢 .
冥魂灑入孤江釣 冷意添牽暮寺鐘 .
却訪梅花淸我興 能令蓓屋素其封 .
個邊頗有精神竹 助合詩腸動活龍 .
지는 달를 보려 발을 걷으니 푸른 봉우리는 자그마하고, 뜰에 흰 눈 가득하니 玉人을 만난 듯하도다.
어두운 영혼 씻어내고 강에 외로이 낚시하니, 맑은 생각에 절간의 저녁 종소리 어울리누나.
매화 찾아 바라보니 내 흥취 살아나고, 눈 덮인 마을 집엔 부자 가난 차별 없네.
그 옆에 절개 높은 대나무 솟아 있어서, 내 시흥을 돋구어 活龍(활용)되게 하도다.
▶碧峰: 옥을 깎아 세운 듯한 산봉우리.
▶玉人: 雕琢玉器的工人。옥을 가공하는 사람
▶蓓屋: 햇볕이 들지 않도록 가려 있는 집, 빈민의 집
▶素封: 관록이나 봉토는 없지만 풍족한 부자집을 말한다
雪景(설경)
雪日常多晴日或 前山旣白後山亦.
推窓四面琉璃壁 分咐寺童故掃莫.
눈 오는 날 많은 중에 어쩌다 맑아, 앞산은 이미 희고 뒷산도 하얗구나.
창문을 밀쳐 보니 사방이 유리벽이라, 아이 불러 쓸지 말라 당부하네.
▶김삿갓이 함양 땅 어느 절에 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청하자 중이 거절했다. 김삿갓이 절을 나가려 하자 혹시 김삿갓이 아닌가 생각하고 시를 짓게 했다. 혹(或), 역(亦), 벽(壁), 막(莫) 같은 어려운 운을 불러 괴롭혔지만 이 시를 짓고 잠을 자게 되었다.
錢<돈>
周遊天下皆歡迎 興國興家勢不輕 .
去復還來來復去 生能死捨死能生 .
천하를 두루 다니며 어디서나 환영받고, 나라와 집안을 흥성케 하니 위세가 가볍지 않네.
갔다가 다시 오고 왔다가는 또 가고, 산 것은 능히 죽이고 죽은 것도 살리네.
伐木(벌목)
虎踞千年樹 龍顚一夕空 .
杜楠前後無 桓斧古今同 .
影斷三更月 聲虛十里風 .
出門無所見 搔首望蒼穹 .
호랑이가 걸터 앉은 듯한 천년 고목이, 용이 넘어지듯 하루 저녁에 없어졌구나.
「杜甫」의 남목은 前無後無하지만, 「桓魋」의 도끼는 옛날이나 다름없네.
삼경 달에 지는 그림자도 사라지고, 십리 바람에 나무 스치는 소리도 없구나.
문을 나서도 보이는 것 없으니 머리를 긁적이며 푸른 하늘만 바라보노라.
▶杜楠: 두보(杜甫) 정원에 있던 녹나무. 두보가 외출했을 때 그의 정원에 있던 녹나무를 다른 사람이 몰래 벌목하자 이를 탄식해서 楠木雨中所拔嘆이라는 시어 지어 이를 한탄했다는 고사 에서 나온 말.
▶桓魋: 중국 춘추시대 宋의 대부(大夫). 向魋(향퇴)란 별명이 있으며 도끼질을 잘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음. 공자가 송에 가서 제자와 함께 큰 나무 밑에서 禮의 연습을 할 때 이들을 죽이려고 그 나무를 도끼로 찍어서 넘어뜨렸다는 고사가 있음.
竹詩<대나무 시>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
飯飯粥粥生此竹 是是非非付彼竹 .
賓客接待家勢竹 市井賣買歲月竹 .
萬事不如吾心竹 然然然世過然竹 .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대로 맡기리라.
손님 접대는 家勢대로 하고, 시정의 매매는 시세대로 하세.
萬事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만 못하니,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지나세.
▶한자의 훈(訓)을 빌어 절묘한 표현을 하였다.
木枕(목침)
撑來偏去伴燈斜 做得黃梁向粟誇 .
爲體方圓經匠巧 隨心轉側作朋嘉 .
五更冷夢同流水 一劫前生謝落花 .
兩兩鴛鴦雙畵得 平生合我一鰥家 .
목침을 끌어당겨 등잔옆에 비스듬히 베고 누우니, 기장이 조를 향하여 자랑하는 것 같구나.
생김새는 목수의 솜씨로 모나고 둥그나, 마음대로 굴러서 베니 좋은 친구 되었도다.
새벽의 어지러운 꿈은 물같이 흐르나니, 오랜 전생의 일들은 지는 꽃처럼 아름답더라
양편에 한쌍의 원앙의 그려 놓으면, 평생에 나같은 홀아비 집에 합당하도다.
▶黃梁: 메조. 옛날 盧生이 邯鄲에서 기장(黃粱)으로 밥을 짓는 동안 도사 呂翁의 베개를 빌어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고사가 있다
溺缸<요강>
賴渠深夜不煩扉 令作團隣臥處圍 .
醉客持來端膽膝 態娥挾坐惜衣收 .
堅剛做體銅山局 灑落傳聲練瀑飛 .
最是功多風雨曉 偸閑養性使人肥 .
네가 있어 깊은 밤에도 사립문 번거롭게 아니하고, 사람과 이웃하여 잠자리 벗이 되었구나.
취객이 너를 가져다 단정히 무릎 꿇고, 아름다운 여인은 널 끼고 앉아 살며시 옷을 걷누나.
단단한 그 모습은 구리산 형국이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소리는 비단폭포를 닮았구나.
비바람 치는 새벽에 가장 공이 많으니, 한가한 성품 기르며 사람을 살찌게 하네.
▶渠: 개천. 여기서는 溺缸
▶態娥: 교태스럽고 어여쁨
▶惜: 애석하다, 아까와 하다. 여기서는 ‘조심스럽게’
▶灑: 물을 뿌리다. 여기서는 용변볼 때 나는 소리를 한자음 그대로 읽어서 의성어로 씀
▶練瀑:비단폭포
▶김삿갓의 시는 이처럼 그 詩題에 있어서 다른 사람이 시도하지 않았고 시도하기를 꺼렸던 것까지도 포함해,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을 소재로 택해서 세밀히 관찰하고 재치있게 표현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저속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사서삼경을 읽고 과거에도 급제한 사람이었다. 그는 단지 종래의 한시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풍격의 시를 이끌어 낸 선각자인 것이다.
筆<붓>
四友相須獨號君 中書總記古今文 .
銳精隨世昇沈別 尖舌由人巧拙分 .
畵出蟾烏照日月 模成龍虎動風雲 .
管城歸臥雖衰禿 寵擢當時最有勳 .
四友가 어울린 중에 홀로 君서이라 불리니, 중서의 고금문장을 기록하게 하는구나.
精銳함에 따라 출세와 침체가 구분되고, 뾰족한 혀끝으로 사람의 巧拙이 구분되누나.
두꺼비와 까마귀를 일월아래 그려내고, 용호를 그리면 풍운이 일어난다.
할 일을 다하고 몽당붓이 되었으나, 총애로 발탁되었을 때 공훈 가장 크도다
▶四友: 文房四友(종이, 붓, 먹, 벼루) 당나라의 韓愈(한유)가 처음 부른데서 비롯되었음
▶中書: 궁중의 문서나 조칙을 맡는 곳. 中書君, 붓의 별명. 한유의 毛穎傳 참조
▶昇沈: 출세와 침체.
▶巧拙: 공교로움과 졸렬함.
▶管城: 管城子, 붓을 일컷는 말. 한유의 모영전 참조
▶禿: 닳아서 몽당 붓이 됨.
硯(벼루)
腹埋受磨額凹池 拔乎凡品不磷奇.
濃硏每値工精日 寵任常從興逸材.
楮老敷容知漸變 毛公炎舌見頻滋 .
元來四友相須力 圓會文房似影隨.
배는 갈려 패이고 이마는 오목한 연못이 되었으니, 펑범한 돌일 뿐, 진기한 옥돌은 아니라네.
짙게 갈리는 동안 필력이 날로 정교해지니, 은혜로운 그 책임은 언제나 인재를 만드는 것일세.
넓은 종이가 점점 변하는 것 알겠고, 붓끝이 자주 적셔짐을 보겠네.
본시 네 친구가 모름지기 서로 협력하는 것이, 문방의 둘레에 모여 그림자 따르듯 하네
▶磷: 광채있는 옥돌
▶敷容: 넓은 얼굴.
▶毛公: 붓을 의인화함
▶炎舌: 붓끝을 가리킴
紙(종이)
闊面藤牋木質情 舖來當硯點毫輕 .
耽看蒼籙千編積 誕此靑天萬里橫 .
華軸僉名皆後進 文房列座獨先生 .
家家資爾糊窓白 永使圖書照眼明 .
면 넓은 등나무 종이는 본래 나무지만, 벼루 옆에 펴놓고 가벼이 점을 찍도다.
오래된책 즐겨보아 천 편이 되었으니, 이것을 청천에 펴면 만 리까지 뻗으리라.
華軸의 모든 이름 후세사람을 위한 것이고, 문방에 벌여 앉아 홀로 선생되네.
집집마다 너를 취해 창을 희게 바르고, 길이 책을 만들어 文盲을 밝혀 준다.
▶闊: 넓을 활
▶牋: 종이 전
▶舖: 펼 포
▶硯: 벼루 연
▶毫: 가늘고긴 호
▶耽: 즐기다
▶蒼: 사물이 오래 된 모양
▶籙(록): 서적을 말함
▶誕: 펴다. 펼치다
▶華軸: 10장 정도로 묶은 작은 책
▶僉: 다, 모두
▶先生: 한유가 <毛穎傳>에서 종이를 楮先生이라고 한데서 유래함.
▶眼明.... 문맹을 없앤다
落花吟<낙화를 읆음>
曉起飜驚滿山紅 開落都歸細雨中 .
無端作意移粘石 不忍辭枝倒上風 .
鵑月靑山啼忽罷 燕泥香逕蹴全空 .
繁華一度春如夢 坐嘆城南頭白翁 .
새벽에 일어나 온 산이 붉은 걸 보고 놀랐네. 피었다가 지는 것이 모두 가랑비 때문이네.
끝없이 살고 싶어 바위 위에도 달라붙고, 가지를 차마 떠나지 못해 바람 타고 오르기도 하네.
두견새는 푸른 산에서 슬피 울다가 그치고, 제비는 진흙에 붙은 꽃잎을 차다가 그저 올라가네.
번화한 봄날이 한차례 꿈같이 지나가자, 머리 흰 성남의 늙은이가 앉아서 탄식하네.
▶초목과 꽃이 풍성한 봄이 지나감을 아쉬워하여 읊은 작품이다.
落葉吟(낙엽을 읊음)
蕭簫瑟瑟又齊齊 埋谷埋山或沒溪
如鳥以飛還上下 隨風止自各東西
綠其本色黃猶病 霜是仇緣雨更凄
杜宇爾何情薄物 一生何爲落花啼
쓸쓸히 우수수 떨어지니, 산에도 쌓이고 골짜기에도 쌓이고 시냇물에도 빠지누나.
새처럼 아래위로 흩날리고, 바람 따라 저마다 동과 서로 흩어지네.
본시는 푸르지만 누렇게 병이 드니, 서리가 원수요 비에 더욱 처량하다.
두견아 너는 어이 그리도 박정하여, 일생을 낙화를 위해서만 우는가?
雪中寒梅<눈 속의 차가운 매화>
雪中寒梅酒傷妓 風前槁柳誦經僧 .
栗花落花尨尾短 榴花初生鼠耳凸 .
눈 속에 핀 차가운 매화는 술에 취한 기생 같고, 바람 앞에 마른 버들은 불경을 외는 중 같구나.
떨어지는 밤꽃은 삽살개의 짧은 꼬리 같고, 갓 피어나는 석류꽃은 뾰족한 쥐의 귀 같구나.
落葉(낙엽)
盡日聲乾啄啄鴉 虛庭自屯減空華 .
如戀故査徘徊下 可恨餘枝的歷斜 .
夜久堪聽燈外雨 朝來忽見水西家 .
知君去後惟風雪 怊悵離情倍落花 .
온종일 목쉰 까마귀 소리 내며 떨어지는 낙엽, 빈 뜰에 쌓이니 아름답던 공간이 좁아졌도다.
옛 살던 나무 못 잊어 맴돌며 떨어져, 가지가 그리워 한탄하다가 선명하게 비끼누나.
지난 밤 오래도록 등불 저편에 비 소리 들리더니, 아침이 되자 문득 강 건너 집이 보이네.
그대 간 뒤 눈보라 몰아칠 것이니, 이별의 애절한 정 낙화보다 더하네.
▶啄啄: 나무 같은 것을 쪼는 소리
▶屯: 모이다
▶怊悵: 서글프다.
太(콩)
字在天皇第一章 穀中此物大如王 .
介介全黃蜂轉蜜 團團或黑鼠瞋眶 .
新抽臘甑盤增菜 潤入晨廚鼎滅糧 .
當時若漏周家栗 不使夷齊餓首陽 .
글자는 天皇 제 1 장에 있고, 곡식 가운데 제일 커서 王과 같도다.
알알이 모두 누르니 벌이 꿀에 굴렸고, 둥글둥글한 몸의 검은 점은 부릅뜬 쥐눈알이라.
섣달 시루에 길러 뽑으면 반상의 나물이 늘고, 불려서 부엌에 가져가면 솥의 양식을 던다.
만일 周나라 곡식이 아니었다면, 伯夷叔齊가 首陽山에서 굶주리지 않았으리라
▶瞋: 눈을 부릅뜨다.
▶眶: 눈자위
▶臘: 12월
▶甑: 시루
▶天皇第一章: <史略>초권의 제 1장 <천황장>에 “太古伏羲神農...”이라는 구절이 있음.
▶漏周家栗: 콩이 주나라 곡식에서 빠져 있었다면 백이숙제가 콩을 먹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
眼鏡<안경>
江湖白首老如鷗 鶴膝烏精價易牛 .
環若張飛蹲蜀虎 瞳成項羽沐荊猴 .
霎疑濯濯穿籬鹿 快讀關關在渚鳩 .
少年多事懸風眼 春陌堂堂倒紫騮 .
강호의 늙은이가 갈매기처럼 늙었는데, 검은 알 흰 테에 소 한 마리 값일세.
고리눈은 장비와 같아 촉나라 범이 웅크린 듯하고, 눈동자는 항우처럼 겹이 되니 목욕한 형주 원숭이일세.
언뜻보아도 반짝거려 울타리를 빠져 나가는 사슴이 잘 보이고, 시경 관저편도 빠르게 읽네.
소년들이 멋으로 눈에 걸치는 일 많으니, 봄 언덕에 당나귀 거꾸로 타고 당당히 다니는 격이네.
▶각 행의 끝나는 글자들이 동물 이름이다. 갈매기 구(鷗), 소 우(牛), 범 호(虎), 원숭이 후(猴), 사슴 록(鹿), 비둘기 구(鳩), 눈 안(眼), 당나귀 류(류)
▶鶴膝: 접을 수 있는 안경다리가 두루미 무릎을 닮았다고 해서 학슬(鶴膝)이라 불렀다.
▶烏精: 거무스름한 안경알을 가리킨다.
▶荊[형]: 모형나무 형, 나라이름, 楚[초]나라의 별칭.
▶濯[탁]: 씻을 탁, 빛나다.
▶關關[관관]: 시경 국풍의 關關渚鳩
▶騮(류) : 월따말, 갈기가 검고 털빛이 붉은 말. 당나귀
磨石<맷돌>
誰能山骨作圓圓 天以順還地自安 .
隱隱雷聲隨手去 四方飛雪落殘殘 .
누가 산 속의 바윗돌을 둥글게 만들었나? 하늘만 돌고 땅은 그대로 있네.
은은한 천둥소리가 손 가는 대로 나더니, 사방으로 눈싸라기 날리다 잔잔히 떨어지네.
山川樓臺
賞景<경치를 즐기다>
一步二步三步立 山靑石白間間花 .
若使畵工模此景 其於林下鳥聲何 .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가다가 서니, 산 푸르고 바윗돌 흰데 틈틈이 꽃이 피었네.
화공으로 하여금 이 경치를 그리게 한다면, 숲 속의 새소리는 어떻게 하려나?.
▶그에게 있어 자연은 단순히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었다. 방랑의 동반자요 거처가 되었으니 발길 닿은 산천경개는 모두 그의 노래가 되었다. 화가가 아름다운 봄의 경치는 그릴 수 있겠지만 숲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는 어떻게 그려낼 수 있겠는가.
淮陽過次<회양을 지나다가>
山中處子大如孃 緩著粉紅短布裳 .
赤脚踉蹌羞過客 松籬深院弄花香 .
산 속 처녀가 어머니만큼 커졌는데, 짧은 분홍 베치마를 느슨하게 입었네.
나그네에게 붉은 다리를 보이기 부끄러워, 소나무 울타리 깊은 곳에서 꽃잎만 매만지네.
▶踉蹌:走路歪斜不稳(비틀거리다, staggering)
▶김삿갓이 물을 얻어먹기 위해 어느 집 사립문을 들어 가다가,울타리 밑에 핀 꽃을 바라보고 있는 산골 처녀를 발견했다. 처녀는 나그네가 있는 줄도 모르고 꽃을 감상하고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짧은 치마 아래 드러난 다리를 감추려는 듯 울타리 뒤에 숨었다.
過寶林寺<보림사를 지나며>
窮達在天豈易求 從吾所好任悠悠 .
家鄕北望雲千里 身勢南遊海一漚 .
掃去愁城盃作箒 釣來詩句月爲鉤 .
寶林看盡龍泉又 物外閑跡共比丘 .
빈궁과 영달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쉽게 구하랴. 내가 좋아하는 대로 유유히 지내리라.
북쪽 고향 바라보니 구름 천 리 아득한데, 남쪽에 떠도는 내 신세는 바다의 물거품일세.
술잔을 빗자루 삼아 시름을 쓸어버리고, 달을 낚시 삼아 시를 낚아 올리네.
보림사를 다 보고나서 용천사에 찾아오니, 속세 떠나 한가한 발길이 비구승과 한가지일세.
▶漚(구): 담그다. 거품
▶愁城: 愁苦的境地(시름)
▶寶林寺: 전남 장흥 가지산에 있는 절,
▶龍泉寺: 전남 함평 무악산에 있는 절이다.
吉州明川<길주명천>
吉州吉州不吉州 許可許可不許可 .
明川明川人不明 漁佃漁佃食無漁 .
길주 길주 하지만 길하지 않은 고장이고, 허가 허가 하지만 허가하는 것은 없네.
명천 명천 하지만 사람은 밝지 못하고, 어전 어전 하지만 밥상에는 고기 없네.
▶佃(전): 밭을 갈다. 소작인. 사냥하다.
▶어전은 함경도 명천군 기남면 어전리이다. 길주는 허가가 많이 살지만 나그네를 재워주지 않는 풍속이 있어 잠자도록 허가해 주지 않고, 어전(漁佃)은 물고기 잡고 짐승을 사냥한다는 뜻인데 이 동네밥상에는 고기가 오르지 않음을 풍자한 시이다.
落民淚<낙민루>
宣化堂上宣火黨 樂民樓下落民淚 .
咸鏡道民咸驚逃 趙岐泳家兆豈永 .
선정을 펴야 할 宣化堂에서 화적 같은 정치를 펴니, 樂民樓 아래에서 백성들이 눈물 흘리네.
함경도 백성들이 다 놀라 달아나니, 趙岐泳의 집안이 어찌 오래 가랴.
▶구절마다 동음이의어를 써서 함경도 관찰사 조기영의 학정을 풍자했다.
▶宣化堂(선정을 베푸는 집. 관찰사가 집무하는 관아) 宣火黨(화적 같은 도둑떼)
▶樂民樓(백성들이 즐거운 집) 落民淚(백성들이 눈물 흘리다)
▶咸鏡道(함경도) 咸驚逃(모두 놀라 달아나다)
▶趙岐泳(조기영) 兆豈永(조짐이 어찌 오래 가겠는가)
金剛山(금강산)
萬二千峰歷歷遊 春風獨上衆樓隅 .
照臨日月圓如鏡 覆載乾坤小似舟 .
東壓大洋三島近 北撑高沃六鰲浮 .
不知無極何年闢 太古山形白老頭 .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두루두루 유람하고, 춘풍에 홀로 여러 누각 모퉁이를 오르네.
일월이 내리비추니 둥글기가 거울 같고, 천지가 널려 있으니 작기가 조각배 같네.
동쪽으로 대양에 닿아 삼도가 가깝고, 북으론 높고 기름진 땅을 받쳐 여섯 자라 떠 있도다.
모를레라, 천지 우주가 어느 해 열렸나, 태고 산형이 저렇게 늙어 흰머리가 된 것을!
金剛山(금강산)
長夏居然近素秋 脫巾抛襪步寺樓 .
波聲通野巡墻滴 靄色和煙繞屋浮 .
酒到空壺生肺喝 詩猶餘債上眉愁 .
與君分手芭蕉雨 應相歸家一夢幽 .
긴 여름 그대로 가을에 이르니, 망건 버선 모두 벗고 맨발로 절간 누각 거니노라.
시냇물 소리는 들을 통해 담장 돌아 들려오고, 구름의 색깔은 연기와 함께 집을 에워 떳도다.
다 마셔 빈 빈 술병은 폐에 갈증만 부르는데, 詩는 오히려 밀려 있어 눈썹에 근심을 올리네.
그대와 이별하는데 파초우 내리니, 마땅히 집에가면 그윽한 꿈 꾸리라.
▶居然: 그냥 그대로
▶素秋: 가을은 오색중 흰색에 해당함
▶抛襪(포말): 버선을 벗음
▶波聲: 시냇물 소리
▶靄色: 구름이 피어 오르는 색깔
▶繞: 감기다. 두르다.
金剛山(금강산)
江湖浪跡又逢秋 約伴詩朋會寺樓 .
小洞人來流水暗 古龕僧去白雲浮 .
薄遊少答三生願 豪飮能消萬種愁 .
擬把淸懷書柿葉 臥聽西園雨聲幽 .
세상을 떠다니다 다시금 가을을 만나, 시우(詩友)와 더불어 약속한 절간 누각에 모였도다.
작은 골짜기에 사람 오니 흐르는 물 어둡고, 옛 절로 스님이 가니 흰 구름 떠오르네.
조금 유람하여 삼생의 소원 약간은 풀렀고, 실컷 술을 마셔 만 가지 시름 모두 잊네.
맑은 감회를 헤아려 감 잎에 적어놓고, 누운 채 서원의 빗소리 들으니 그 더욱 그윽하네.
▶江湖: (조정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세상.
▶龕: 감실. 절을 의미함.
▶三生: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 이승, 저승을 말함
▶擬: 추측하다, 헤아리다.
金剛山(금강산)
矗矗金剛山 高峰萬二千.
遂來平地望 三夜宿靑天.
우뚝 솟은 금강산, 높은 봉우리만 만이천.
평지를 보며 내려오나니, 사흘 밤을 푸른 하늘에서 묵어야 했도다.
▶矗矗: 우뚝 솟은 모양
▶우뚝 솟아 있는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는 하도 높아서 평지를 향해 내려오는 데만도 무려 3일 밤을 푸른 하늘에서 잠을 자야 할 만큼 높다고 읊었다.
金剛山(금강산)
松松栢栢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를 돌아드니,
물과 물 산과 산 곳곳이 기이하네.
金剛山(금강산)
泰山在後天無北 大海當前地盡東 .
橋下東西南北路 杖頭一萬二千峰 .
큰 산이 뒤에 있으니 하늘엔 북쪽이 없고, 큰 바다 앞에 있으니 땅엔 동쪽으로 끝이네.
다리 아래 길은 사방으로 통해있고, 지팡이 위에는 일만이천봉일세.
金剛山立石峯下庵子詩僧共吟<시승과 함께 읊다>
朝登立石雲生足 暮飮黃泉月掛唇.
아침에 입석대에 오르니 구름이 발 밑에서 일고,
저녁에 황천샘 물을 마시니 달이 입술에 걸리누나.
▶立石..... 立石峰(입석봉), 금강산에 있는 봉우리 이름
▶黃泉..... 黃泉潭(황천담), 셈 이름
潤松南臥知北風 軒竹東傾覺日西.
시냇가의 소나무 남쪽으로 누우니 북풍이 부는 줄 알겠고,
난간의 대나무 그림자 동쪽으로 기우니 해 저무는 것을 알겠구나.
絶壁雖危花笑立 陽春最好鳥啼歸.
절벽이 비록 위태로우나 꽃은 웃으며 서 있고,
봄볕이 아무리 좋아도 새는 울며 돌아가도다.
天上白雲明日雨 岩間落葉去年秋.
하늘에 흰 구름을 보니 내일은 비가 오겠고,
바위 틈에 낙엽을 보니 작년의 가을을 알겠네.
▶去年: 작년, ‘지난해 가을이 지나감’으로 해석하는 곳이 많은데 이렇게 하면 明日과 對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兩姓作配己酉日最吉 半夜生孩亥子時難分.
남녀가 짝을 짓는데는 己酉日이 가장 좋고,
밤중에 아이를 낳는데는 亥子時가 최고로다.
▶作配: 배필을 만든다
▶生孩: 아기를 낳는다.
▶難分: 어느것이 나은지 분별하기 어렵다.
▶己酉: 두 글자를 합하면 配자가 된다.
▶亥子: 두 글자를 합하면 孩자가 된다.
影浸綠水衣無濕 夢踏靑山脚不苦.
그림자가 녹수에 잠겼으되 옷은 젖지 않고,
꿈속에 청산을 걸었지만 다리는 아프지 않도다.
群鴉影裡千家夕 一雁聲中四海秋.
까마귀 떼 나는 그림자에 모든 집들이 저물고,
외기러기 우는 소리에 온 세상은 가을일세.
假僧木折月影軒 眞婦采美山姙春 .
가죽나무 부러지니 달그림자 난간에 어리고,
참미나리나물 맛이 좋으니 산은 봄을 배었도다.
▶假僧木: 가죽나무. 假(가) 僧(중) 木(나무)
▶眞婦菜: 참미나리 나물, 眞(참) 婦(며느리) 菜(나물)
石轉千年方倒地 峰高一尺敢摩天.
돌은 천년을 굴러야 땅에 떨어지겠고
산봉우리는 한 자만 높았더라면 하늘에 닿겠구나.
靑山買得雲空得 白水臨來魚自來 .
청산을 사들이니 구름은 공짜로 따라오고,
맑은 물에 이르니 고기가 절로 오는구나.
秋雲萬里魚鱗白 枯木千年鹿角高.
가을 구름 만리에 펼쳐지니 고기 비늘처럼 희고,
마른 나무 천년을 묵으니 사슴뿔처럼 높도다.
雲從樵兒頭上起 山入漂娥手裡鳴.
구름은 나무하는 아이 머리 위에서 일고,
산은 빨래하는 아낙네 손 안에서 우는구나.
登山鳥萊羹 臨海魚草餠.
산에 오르니 새들이 [쑥국 쑥국] 울어대고,
바다에 이르니 물고기가 [풀떡 풀떡] 뛰노누나.
▶萊羹: 새가 우는 소리 [쑥국]으로 해석한다. 萊(쑥래)는 쑥, 羹(국갱)은 국으로 읽음.
▶草餠: 고기가 뛰는 소리인 [풀떡]으로 해석한다. 草(풀초)와 餠(떡병)을 우리말로 읽는다.
水作銀杵舂絶壁 雲爲玉尺度靑山 .
물은 은절구공이가 되어 절벽을 찧고,
구름은 옥으로 만든 자가 되어 청산을 재도다.
月白雪白天地白 山深夜深客愁深 .
달도 희고 눈도 희니 천지가 모두 희고.
산도 깊고 밤도 깊으니 나그네의 시름도 깊네.
燈前燈後分晝夜 山南山北判陰陽 .
등불을 켜고 끔으로써 밤과 낮을 구분하고
산 남쪽과 북쪽으로 음지와 양지를 판단한다.
▶금강산에 대해 스님이 먼저 읊고 [삿갓]이 대구를 읊은 식으로 모두 16구를 읊었다. 절묘한 스님의 시도 놀랍지만 구마다 묘한 대구를 하는 金笠의 재주는 사람 같지 않다.
누가 이기고 지고가 없다.실로 유쾌한 일이다. 이 16의 대구로서 금강산의 전경이 모두 읊어졌다. 스님과 삿갓은 오랜만에 마음이 통하는 상대를 만나 그저 즐겁기만 했다.
▶속설에, 金笠이 금강산에서 시를 잘하는 스님을 만나 시짓기 내기를 하게 되었다. 지는 사람은 이가 뽑히는 벌을 받기로 하고, 내기 결과 삿갓이 이겨 시승의 이를 뺏다는 말이 있으나, 시승의 명구가 없었던들 삿갓의 훌륭한 대구도 없었을 것으로 미루어 무승부가 아닌가 한다.
入金剛<금강산에 들어가다>
緣靑碧路入雲中 樓使能詩客住笻.
龍造化含飛雪瀑 劒精神削揷天峰.
仙禽白幾千年鶴 澗樹靑三百丈松.
僧不知吾春睡腦 忽無心打日邊鐘.
푸른 길 따라서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누각이 시인의 지팡이를 멈추게 하네.
용의 조화로 눈 내리는 듯한 폭포가 생기고, 칼의 예리함이 하늘에 솟은 봉우리를 깎았도다.
신선이 타는 백학은 몇 천 년을 살았는가? 시냇가 청송은 삼백 길이 되겠네.
스님은 내가 봄잠에 빠진 줄 모르고, 무심하게 한낮에 종을 치고 있구나.
▶봄날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주위에 펼쳐진 경치의 아름다움을 읊었다.
金剛山景<금강산의 경치>
若捨金剛景 靑山皆骨餘 .
其後騎驢客 無興但躊躇 .
금강산에서 경치를 빼 놓는다면, 청산은 모두 뼈대만 남을 것이네.
그 후엔 나귀 탄 길손들, 흥이 없어 주저할 것이네.
▶驢: 당나귀 려
答僧金剛山詩<스님에게 금강산 시를 답하다>
-僧
百尺丹岩桂樹下 柴門久不向人開 .
今朝忽遇詩仙過 喚鶴看庵乞句來 .
백 척 붉은 바위 계수나무 아래 암자가 있어, 사립문을 오랫동안 사람에게 열지 않았소.
오늘 아침 우연히 시선이 지나간다기에, 타고 가는 학을 암자로 불러 시 한 수를 청하오.
-笠
矗矗尖尖怪怪奇 人仙神佛共堪凝.
平生詩爲金剛惜 及到金剛不敢詩.
우뚝우뚝 뾰족뾰족 기기괴괴한 가운데, 인선(人仙)과 신불(神佛)이 함께 엉겼소.
평생 금강산 위해 시를 아껴 왔지만, 금강산에 이르고 보니 감히 시를 지을 수가 없소.
▶한 승려의 청으로 금강산을 읊으려 하나, 너무나 장엄하고 기이한 산세에 압도되어 시를 짓지 못하겠다는 내용이다.
妙香山詩<묘향산>
平生所欲者何求 每擬妙香山一遊 .
山疊疊千峰萬仞 路層層十步九休 .
평생소원이 무엇이었던가. 묘향산에 한번 노니는 것이었지.
산 첩첩하여 千峯이 만 길이요, 길 층층하여 열 걸음에 아홉 번은 쉬네.
▶평소에 한번 와 보고 싶었던 묘향산의 겹겹이 둘러싸인 산세와 산봉우리의 빼어남을 노래하였다.
九月山峰<구월산>
昨年九月過九月 今年九月過九月 .
年年九月過九月 九月山光長九月 .
지난해 구월에 구월산을 지났는데, 올해 구월에도 구월산을 지나네
해마다 구월에 구월산을 지나니, 구월산 풍경은 늘 구월일세.
登咸興九天閣(함흥 구천각에 올라)
人等樓閣臨九天 馬渡長橋踏萬歲 .
山疑野狹遠遠立 水畏舟行淺淺流 .
山意龍盤虎踞形 樓閣鸞飛鳳翼勢 .
(尾聯 缺落)
사람이 누각에 오르니 구천에 임하였고, 말이 긴 다리 건너니 만세토록 밟겠네.
산은 들이 좁아할까봐 멀찌감치 서 있고, 물은 배 다니는 것이 두려워 얕게 얕게 흐르네.
산세는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형상이고, 누각은 난새(鸞)가 날고 봉이 날개 편 형상일세
(尾聯 缺落)
▶九天: 하늘의 가장 높은 곳. 여기서는 구천각.
▶萬歲: 긴 세월. 여기서는 만세교
▶疑: ~인가 의심하여 ~하다
▶意: 形勢.
▶盤: 서리다. 어정거리다
▶鸞: 난새. 전설상의 상서로운 새.
▶함흥의 구천각 앞을 흐르는 강은 城川江인데 수심이 얕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安邊飄然亭(안변 표연정)
一城踏罷有高樓 覓酒題詩問幾流 .
古木多情黃鳥至 大江無恙白鷗飛 .
英雄過去風煙盡 客子登臨歲月悠 .
宿債關東猶未了 慾隨征雁下長洲 .
성을 한 바퀴 돌아보니 높은 누각이 있어, 술을 찾고 시를 쓰며 강이 몇인가 묻노라.
고목은 정이 많아 꾀꼬리 찾아 들고, 大江은 시름없어 白鷗가 날아가네.
영웅이 가버리니 좋은 경치 다했고, 나그네 누각에 오르니 세월은 유연하네.
아직도 관동지방 구경을 못다 했는데, 기러기 가는 곳 따라 「장주」땅으로 가볼거나
▶踏罷: 걸어 다니다. 罷는 어조사
▶黃鳥: 꾀꼬리의 별칭
▶大江: 南大川을 가리킴
▶恙: 근심하다.
▶風煙: 풍경
大洞江練光亭(대동강 연광정)
截然乎屹立高門 碧萬頃蒼波直翻 .
一斗酒三春過客 千絲柳十里江村 .
孤丹鶩帶來霞色 雙白鳩飛去雪痕 .
波上之亭亭上我 坐初更夜月黃昏 .
깎아지른 절벽 위에 고루의 문이 서 있고, 만경창파 대동강엔 푸른 물결 출렁이네.
나그네 한 말 술에 삼춘을 다 보내고, 千萬絲 수양버들은 십리강촌에 푸르도다.
외로운 붉은 따오기 노을 색을 띠고 오며, 한 쌍의 백구가 눈인 양 날아 가네.
물결 위에 정자 있고 정자 위에 이 몸 있어, 초저녁에 앉았다가 달빛이 어둡도다.
▶截然: 칼로 자른 듯한 모양
▶屹(흘): 산이 우뚝한 모양.
▶直翻: (물이)출렁거리는 모양.
▶三春: 봄의 석달. 맹춘,중춘,계춘
▶鶩(목): 따오기. 집오리
▶霞: 노을.
登廣寒樓(광한루에 올라)
南國風光盡此樓 龍城之下鵲橋頭 .
江空急雨無端過 野濶餘雲不肯收 .
千里筇鞋孤客到 四時笳鼓衆仙遊 .
銀河一脈連蓬島 未必靈區入海求 .
남녁의 경치가 이 누각에서 다하였으니, 용성(龍城) 밑 鵲橋 머리맡이라.
물 없던 강에 소나기 오니 유유히 물 흐르고, 넓은 들에 뜬 구름 떠나지 않노라.
천 리를 지팡이와 짚신으로 나그네 찾아오고, 사계절 피리와 북으로 신선들이 노니네.
은하수 한 줄기가 蓬島와 닿았으니, 靈區를 반드시 바다에서 찾을 것이 아니로다.
▶南國: 三南지방. 충청,전라,경상도
▶鵲橋: 오작교
▶筇: 대 지팡이
▶笳: 버들피리
▶濶: 闊과 같음, 넓을 활
▶靈區: 신성한 토지, 신과 부처가 사는 땅, 龍宮(용궁)
▶蓬島: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바다의 섬
▶江空: 강에 물이 흐르지 않음.
▶未必: 「반드시 ~하는 것은 아니다」 부분부정
暮投江齋吟(저물어 강가 서재에 묵으며)
滿城春訪讀書家 雜木疎篁暎墨花 .
鶴與淸風橫遊浦 鴻因落日伴平沙 .
江山有助詩然作 歲月無心酒以過 .
獨倚乾坤知己少 强將纖律和高歌 .
봄기운 가득한 성안에서 글 읽는 집 찾으니, 잡목과 성긴 대나무 墨花에 어리더라.
학은 맑은 바람과 더불어 갯벌에서 놀고, 기러기는 해가 지니 모래밭을 벗삼네.
강산의 도움 받아 그런대로 시도 짓고, 세월이 무심하니 술로서 지내도다.
홀로 천지에 의지하여 아는 이 적으므로, 애써 보잘것없는 시 지어 높이 노래 부르리라.
▶篁: 대나무 숲
▶纖: 섬세한, 가느다란, 여기서는 ‘보잘것없는’의 뜻으로 쓰임.
寒食日登北樓吟<한식날 북루에 올라 읊다>
十里平沙岸上莎 素衣靑女哭如歌 .
可憐今日墳前酒 釀得阿郞手種禾 .
십 리 모래 언덕에 사초꽃이 피었는데, 소복 입은 젊은 여인이 노래처럼 곡하네.
가련해라 지금 무덤 앞에 부은 술은, 남편이 심었던 벼로 빚었을 테지.
▶莎: 莎草(바닷가 모래땅에서 자라는 풀)
▶김삿갓이 원산에 이르러 명사십리(明沙十里)를 지나다가, 정자에 올라 쉬고 있는데 근처에서 어린 과부가 남편 무덤 앞에 술잔을 올리며 내는 곡소리가 슬픈 노래처럼 들려 왔다.
開城(개성)
故國江山立馬愁 半千王業一空邱 .
煙生廢墻寒鴉夕 葉落荒臺白雁秋 .
石狗年深難轉舌 銅臺陁滅但垂頭 .
周觀別有傷心處 善竹橋川咽不流 .
고국 강산에 말 멈추니 시름하노니, 오백년 왕업이 한갓 빈 언덕이로다.
연기는 허물어진 담장에서 나고 까마귀 슬피 우는 쓸쓸한 저녁이고, 나뭇잎은 황폐한 臺위에 떨어지고 흰 기러기 나는 가을이로다
石狗는 해가 오래 되어 혀를 굴리기 어렵고, 銅臺는 무너져 내려 머리 숙이고만 있구나.
둘러보아 특별히 가슴 아픈 곳은, 선죽교 개울물이 목메어 흐르지 않네.
▶寒: 쓸쓸하다.
▶石狗: 돌로 만든 개의 像.
▶銅臺: 구리로 만든 돈대.
▶陁滅: 허물어져 내림. 陁: 비탈지다 타. 무너지다 치. 기운 모양 이
看山<산을 구경하다>
倦馬看山好 執鞭故不加 .
岩間纔一路 煙處或三家 .
花色春來矣 溪聲雨過耶 .
渾忘吾歸去 奴曰夕陽斜 .
게으른 말을 타야 산 구경하기가 좋아서, 채찍질 멈추고 천천히 가네.
바위 사이로 겨우 길 하나 있고, 연기 나는 곳에 두세 집이 보이네.
꽃 색깔 고우니 봄이 왔음을 알겠고, 시냇물 소리 크게 들리니 비가 왔나 보네.
멍하니 서서 돌아갈 생각도 잊었는데, 해가 진다고 하인이 말하네.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 했으니 산을 구경하기에는 빨리 달리는 말보다 게으른 말이 좋다는 것이다.
遊山吟(산에서 놀며)
一笠茅亭傍小松 衣冠相對完前客 .
橫籬蟬蛻凉風動 藥圃蟲鳴夕露濃 .
秋雨纔晴添脫暑 暮雲爭出幻奇峰 .
悠悠萬事休提說 未老須謨選日逢 .
띠로 지붕인 모정이 작은 솔 옆에 있어, 의관을 마주 대하니 앞의 나그네와 같도다.
난간 울타리의 매미 허물 벗고 시원한 바람 부르고, 藥圃에 벌레 우니 저녁 이슬 짙도다.
가을 비 겨우 개니 늦더위 저젖 더하고, 저녁 구름 다투어 이니 기이한 봉우리 달라지누나
걱정스레 만사를 끌어 말하지 말라, 아직 젊으니 날을 가려 만날 것을 꾀하여 보세.
▶橫: 난간
▶籬: 울타리.
▶蛻(태): 허물, 허물을 벗다.
▶藥圃: 약초를 재배하는 밭.
▶脫暑: 늦더위
▶幻: 달라지다. 변화하다.
▶悠悠: 걱정하는 모양.
▶茅로 지붕을 해 인 정자가 마치 삿갓을 쓴 자신의 모습과 같음을 읊었다.
力拔山(역발산)
(甲童) 南山北山神靈曰 項羽當年難爲山 .
(乙童) 右拔左拔投空中 平地往往多新山 .
(金笠) 項羽死後無將士 誰將拔山投空中 .
남산 북산의 산신령들이 말하기를, 항우가 있을 때는 산 노릇하기 어려웠더라.
오른쪽 산 왼쪽 산 공중으로 마구 뽑아 던지니, 평지에는 새로운 산 마냥 생겨나더라.
항우가 죽은 뒤에 장사가 없으니, 누가 산을 뽑아 공중으로 던질까?
▶金笠이 어느 서당에 들렸더니 훈장이 「力拔山」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으라고 하는데 학동들의 글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이를 본 金笠은 크게 놀라 슬그머니 자기도 한 수 지어놓고 나와버렸다. 마지막 聯만 삿갓이 지은 것이다.
▶垓下歌(項羽)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人生有感
秋夜偶吟(가을밤에 우연히 읊음)
白雲來宿碧山亭 夜氣秋懷兩杳冥 .
野水精神通室白 市嵐消息入簾靑 .
生來杜甫詩爲癖 死且劉怜酒不醒 .
欲識吾儕交契意 勿論淸濁謂刎頸 .
흰 구름 와서 푸른 산 정자에 머무니, 밤기운과 가을 회포 모두 깊고 아득하네.
들물의 정기 방에 스며들어 서늘하고, 市井의 잡다한 소식 발에 들어 서늘하네.
「두보」는 나면서부터 시 짓는 버릇 있었고, 「유영」은 죽어서도 술 깨지 않았도다.
나와 교제할 뜻 알고자 한다면, 청탁(淸濁)은 물론이고 문경지교라 이르리.
▶嵐: 폭풍 람, 아지랑이 람
▶劉怜: 중국 서진(西晉)의 사상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장자(莊子)의 사상을 실천하였음. 신체를 土木으로 간주하여 意慾의 자유를 추구했으며 술을 매우 좋아했음.
▶杳冥: 묘명, 깊고 아득함
▶癖: 버릇 벽
▶儕: 함께 제, 짝 제
▶契: 언약할 계
▶刎頸: 刎頸之交(문경지교), 벗을 위해서라면 목이 잘려도 한이 없을만큼 친밀한 사이. 史記의 廉頗閵相傳에 나오는 말.
泛舟醉吟<배를 띄우고 취해서 읊다>
江非赤壁泛舟客 地近新豊沽酒人 .
今世英雄錢項羽 當時辯士酒蘇秦 .
강은 적벽강이 아니지만 배를 띄웠지. 땅은 신풍에 가까워 술을 살 수 있네.
지금 세상에 영웅으론 돈이 바로 항우이고, 이 시대의 변사로는 술이 바로 소진이지.
▶新豊: 한대(漢代)의 현(縣) 이름으로 신풍미주(新豊美酒)라 하여 좋은 술이 나왔다고 함.
▶項羽: 초(楚)나라를 세워 한나라 유방과 함께 진나라를 멸망시킨 영웅.
▶蘇秦: 중국 전국시대에 말 잘하던 유세객(遊設客)이다.
▶지금 김삿갓이 놀고 있는 강은 소동파가 적벽부(赤壁賦)를 읊었던, 그 적벽강은 아니지만 땅은 맛있는 술이 나왔던 신풍과 닮았다. 오늘날의 세상은 돈만 있으면 항우 같은 힘을 낼 수도 있고, 술에 취하면 말 잘하는 소진도 될 수 있다.
嶺南述懷 <영남술회>
超超獨倚望鄕臺 强壓覇愁快眼開 .
與月經營觀海去 乘花消息入山來 .
長遊宇宙餘雙履 盡數英雄又一杯 .
南國風光非我土 不如歸對漢濱梅 .
높다란 망향대에 나 홀로 기대서서, 나그네 시름을 억누르고 사방을 둘러보았네.
달을 따라 드나드는 바다도 둘러보고, 꽃 소식 알고 싶어 산 속으로 들어왔네.
오랫동안 세상 떠돌다 나막신 한 짝만 남았는데, 영웅들을 헤아리며 술 한 잔을 다시 드네.
남국의 자연이 아름다워도 내 고장 아니니, 한강으로 돌아가 매화꽃이나 보는 게 낫겠네.
▶超超: 高高在上貌. 우뚝 높은 모양
▶覇愁: 고향이나 사람을 그리는 마음.
▶아무리 남쪽 지방의 경치가 좋다한들 집으로 돌아가 물가에 핀 매화 보는 것만 못하니 망향대에 올라 고향을 떠난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읊고 있다.
聽曉鐘(새벽 종소리를 들으며)
霖雨長安時孟秋 蟜南歸客獨登樓 .
吼來地上雷霆動 擊送人間歲月流 .
鳴吠俱淸千戶裡 乾坤忽肅九街頭 .
無窮四十年間事 回首今소宵又一悲 .
장마지는 장안에 때는 맹추라, 영남에서 돌아온 나그네 홀로 누각에 오르노라.
우렁차게 지상에 와서 땅을 뒤흔들고, 쳐서 세상에 보내 세월이 흐르게 하도다.
닭 울고 개 짖는 소리 온갖 집에 맑더니, 천지는 모든 거리에서 고요하다.
무궁한 40년의 일들을, 돌이켜 생각하니 오늘밤 더욱 슬프도다.
▶霖雨: 장마비
▶孟秋: 음력7월. 초가을
▶蟜南: 영남. 경상남,북도를 가리킴.
▶吼: 범 우는 소리. 여기서는 종치는 소리를 가리킴
▶霆(정): 천둥소리
▶九街頭: 많은 거리
偶吟(우연히 읊음)
抱水背山隱逸鄕 時遊農圃又書堂 .
檠花野雪兩全色 岸柳江梅二獨陽 .
日謀閑趣從棋友 心却繁華遠媚觴 .
人物擧皆無不用 捨其所短取其長 .
물을 안고 산을 업은 시골에 묻혀, 때로 논밭도 둘러보고 서당에도 가보네.
경화와 들에 쌓인 눈은 둘 다 흰색인데, 언덕 위 버들과 강가의 매화는 볕을 독차지하네.
날마다 한가한 취미를 꾀해 바둑친구 따르니, 마음속에 번잡한 마음 가시고 술의 유혹 멀어지네.
사람과 물건은 저마다 쓰일 바 있으니,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하리.
▶檠花: 화을 만드는 데 쓰이는 나무의 꽃
▶繁華: 번화, 마음이 번잡한 것
▶擧皆: 거개, 거의 모두
偶吟(우연히 감회에 젖어)
劒思徘徊快馬鳴 聞鷄黙坐數前程 .
亂山經歷多花事 大海觀歸小水聲 .
歲月皆賓猶率忽 煙霞是世自昇平 .
黃金滿袖擾擾子 送我爐邊半市情 .
칼날같은 생각 배회하니 쾌마가 울고, 새벽 닭 소리 들으며 고요히 앉아 앞날을 헤아린다.
많은 산천 떠돌아 다녔기에 꽃다운 일도 많았고, 큰 바다 보고 왔으니 물소리 작게 들린다.
세월은 모두가 나그네처럼 총총히 지나가고, 연기와 노을 같은 이 세상 스스로 태평을 쫓고 있네.
옷 소매에 가득히 돈을 넣고 다니는 사람들, 爐邊에서 날 전송하는 말 반은 겉치레일 뿐이네.
▶劒思: 칼처럼 날카로운 이상과 희망에 불타는 생각, 혹은 문인의 생각.
▶數: 헤아리다.
▶大海觀歸小水聲: 이 구절은 <孟子> <盡心章>의 “登泰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難爲水” 구절을 생각하여 지은 것으로 보임.
▶昇平: 평화스러움.
▶擾: 길들다. 따르다.
卽吟<즉흥적으로 읊다>
坐似枯禪反愧髥 風流今夜不多兼 .
燈魂寂寞家千里 月事蕭條客一簷 .
紙貴淸詩歸板粉 肴貧濁酒用盤鹽 .
瓊琚亦是黃金販 莫作於陵意太廉 .
내 앉은 모습이 선승 같으니 수염이 부끄러운데, 오늘 밤에는 풍류가 많지 않도다.
등불아래 사람의 혼은 적막하고 집은 천리인데, 처마를 비추는 달빛에 나그네가 쓸쓸하도다.
종이도 귀해 분판에 시 한 수 써놓고, 안주 없으니 쟁반의 소금으로 탁주를 마시네.
훌륭한 시는 황금을 받고 파나니, 오릉땅 진중자의 청렴만을 내세우지는 않으리라.
▶髥(염): 구레나룻. 수염
▶兼: 증가하다.모이다
▶蕭條: 쓸쓸한 모양.
▶瓊琚: 훌륭한 詩文
▶陳仲子: 제나라 오릉(於陵)에 살았던 청렴한 선비.
自詠<스스로 읊다>
寒松孤店裡 高臥別區人 .
近峽雲同樂 臨溪鳥與憐 .
錙銖寧荒志 詩酒自娛身 .
得月卽帶憶 悠悠甘夢頻 .
하찮은 세상 일로 어찌 내 뜻을 꺾으랴. 시와 술로써 내 몸을 즐겁게 하리라.
달이 뜨면 옛 생각도 하며, 호젓하게 단꿈에 자주 젖으리라.
소나무 한 그루 외로운 주막에, 한가롭게 누웠으니 별세상 사람일세.
골짜기 가까이서 구름과 같이 노닐고, 개울가에서 새와 함께 연민하네.
▶錙銖(치수): 보잘 것 없는
▶悠悠: 호젓하게, 한가하게
▶세속에 물들지 않고 시와 술로 근심을 잊으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풍류객의 모습을 그렸다.
破字詩(파자시)
仙是山人佛不人 鴻惟江鳥鷄奚鳥 .
氷消一點還爲水 兩木相對便成林 .
신선은 산 사람이고 부처는 사람이 아니네, 기러기는 강의 새이지만, 닭은 어찌 새이겠는가?
얼음(氷)에 점하나 사라지면 다시 물이 되고, 나무 두 그루 마주 보면 수풀이 되네.
譬世(세상에 비유함)
富人困富貧困貧 飢飽雖殊困則均 .
貧富俱非吾所願 願爲不富不貧人 .
부자는 부유함으로 곤란을 받고, 빈자는 가난해서 시달리니, 주리고 배부름은 다를망정 곤란하긴 마찬가지일세.
가난함과 부유함 모두 내 바라는 바 아니니,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사람이 되고저.
山所訟出(무덤에 대한 소송)
掘去掘去彼隻之恒言, 捉來捉來本守之例題.
今日明日 乾坤不老月長在,
此頉彼頉 寂莫江山今百年.
파간다 파간다 함은 저쪽에서 항상 하는 말이요,
잡아오라 잡아오라 함은 미치라고 하는 말일세.
오늘 내일 하다 보니 천지는 늙지 않지만 세월은 오래 가고,
이 탈 저 탈 하다 보니, 적막강산이 금세 백년일세.
▶김삿갓이 어느 산골 마을 앞을 지나다 보니 어떤 중년 여인이 슬피 울고 있었고, 자녀들은 우는 모친을 위로하고 있었다. 사연인즉 울고 있는 여인의 남편 묘 앞에 어떤 사람이 투장(偸葬, 暗葬)을 하였다는 것이다. 당장 파 가라고 호통을 쳤으나 그 집(‘저쪽’, 彼隻 )에서 ‘파간다 파간다’고 대답만 할 뿐 차일피일 미루고 파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고을 사또(‘밑지’, 本守 )에게 탄원을 하였으나 사또 또한 ‘잡아오라 잡아오라’ 말만 앞세울 뿐 일을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삿갓이 이 딱한 사정을 듣고, 탄원서를 다시 작성해 사또에게 보냈더니 사또가 이 명문(名文)의 탄원서를 보고 감탄하여 그토록 오랫동안 끌어오던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었다고 한다.
▶彼隻: 저 피. 외 척(쪽)
▶本守: 사또(본관 수령) 밑 본, 지킬 수 미치다
出塞(변방에 나가)
獨坐計君行復行 始知千里馬蹄輕 .
綠江斜日東封盡 白塔浮雲北陸平 .
公子出疆仍幕府 詩人到塞便長城 .
倦遊搖落空吟雪 歲暮誰憐病馬卿 .
홀로 앉아 그대 가고 또 가는 것을 세나니, 천 리에 말발굽 가벼운 줄 비로소 알겠네.
푸른 강에 해 기우니 동쪽 경계 다하였고, 흰 탑에 뜬 구름 머무니 북쪽 땅이 평화롭네.
공자가 변방에 나가니 곧 幕府요, 시인이 변방에 다다르니 곧 長城이네.
한가로이 거닐다가 하늘에서 흩날리는 눈을 읊으니, 해 저무는데 병든 말 뉘 가엾게 여기랴?
思鄕<고향 생각>
西行已過十三州 此地猶然惜去留 .
雨雪家鄕人五夜 山河逆旅世千秋 .
莫將悲慨談靑史 須向英豪問白頭 .
玉館孤燈應送歲 夢中能作故園遊 .
서쪽으로 이미 열세 고을을 지나왔건만, 이곳에서는 떠나기 아쉬워 머뭇거리네.
눈비 내리는 한밤중에 고향을 생각하니, 산하를 여관삼아 일 평생이 천년일세.
지난 역사를 이야기하며 비분강개하지 마세. 영웅과 호걸들 다 백발이 되었네.
여관의 외로운 등불 아래서 또 한 해를 보내니, 꿈속에서나 고향 동산에 노닐어 보네.
思鄕(고향생각)
皇州古路杳如天 日下芳名動小年 .
嬉笑文章蘇學士 風流詞曲柳屯田 .
遊情薊樹浮煙海 別語灣燈明玉盞 .
未識今宵能憶我 寒梅老屋坐蕭然 .
황주 옛길이 하늘같이 아득한데, 지난 날 꽃다운 이름 소년의 마음을 움직이네.
웃음을 일으키던 문장은 蘇學士 같고, 풍류의 詞曲은 柳屯田과 같도다
노니는 정은 안개 바다에 계수가 뜬 듯 하고, 이별의 말은 나루터 등불이 옥잔을 비추듯 하누나.
오늘밤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외로운 매화 옛집네 쓸쓸히 피어 있으리니.
▶皇州: 천자가 있는 곳. 京都
▶日下:지난 날. 옛날.
▶芳名: 이름을 빛내다.
▶小年: 김삿갓 자신을 말함.
▶嬉笑:웃음을 불러 일으키다
▶蘇學士: 蘇東坡, 즉 蘇軾
▶詞曲: 운문 형태의 노래.
▶柳屯田: 柳宗元. 13년 동안 변경에 유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屯田이라고 부른 듯.
▶薊樹(계수): 계문연수(薊門煙樹)의 준말로, 연경(燕京)의 팔경(八景) 가운데 하나이다.
▶灣: 배 대는 곳, 나루터
秋吟(가을을 읊음)
邨裡重陽不記名 故人書到喜平生 .
登樓便有登山意 送馬還勝送酒情 .
病起黃花今歲色 秋深落木異鄕聲 .
快賞前宵獨月明 此來相見爲佳節 .
시골이라 重陽이라는 이름을 잊고 지내다, 옛 사람 글에서 대하니 평생의 기쁨이네.
누각에 오르니 문득 산에 오를 생각 드는데, 말을 보내주니 술 보내는 정보다 낫도다.
앓다가 일어나 보니 노란 국화가 한창이요, 가을 깊어 낙엽소리가 마치 별천지 같구나
전날 밤 홀로 밝은 달 흔쾌히 구경하고, 지금은 아름다운 가을풍경 보려 하노라.
▶邨: =村
▶重陽: 음력 9월 9일. 이때는 시인, 묵객들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하루를 보내는 중양놀이를 함.
求鷹判題(매(鷹)를 잃고 호통치는 태수를 조롱함)
得於靑山 失於靑山
問於靑山 靑山不答
靑山卽刻捉來.
청산에서 얻어서 청산에서 잃었으니,
청산에게 물어보고 청산이 대답 않거든,
청산을 즉시 잡아 오렷다.
▶지방 태수가 매를 잃고 아전들에게 찾아오라고 호통을 치고 있었다. 金笠이 「본래 청산에서 잡은 것인데 청산에서 잃 었으니 청산에게 물어보고 청산이 대답 하지 않으면 청산을 잡아 대령하라」하며 태수를 야유하는 글을 지었다.
破格詩<파격시>
天長去無執 花老蝶不來 .
菊樹寒沙發 枝影半從池 .
江亭貧士過 大醉伏松下 .
月利山影改 通市求利來 .
하늘은 멀어서 가도 잡을 수 없고, 꽃은 시들어 나비가 오지 않네.
국화는 찬 모래밭에 피어나고, 나뭇가지 그림자가 반이나 연못에 드리웠네.
강가 정자에 가난한 선비가 지나가다가, 크게 취해 소나무 아래 엎드렸네.
달이 기우니 산 그림자 바뀌고, 시장을 통해 이익을 얻어 오네.
▶이 시는 모든 글자를 우리말 음으로 읽어야 한다.
▶천장 거무(미)집 / 화로 접불래(짚불내)
▶국수 한 사발 / 지영 반종지
▶강정 빈 사과 / 대취(추) 복송하(복숭아)
▶월리(워리) 사냥개 / 통시 구리내(구린내)
▶지영: 지렁(간장)
▶월리: 워리(개를 부를 때 의성어)
▶통시: 변소
與詩客詰䛯(시객과 더불어 서로 꾸짖음)
石上難生草 房中不起雲 .
山間是何鳥 飛來鳳凰群 .
我本天上鳥 常留五綵雲 .
今宵風雨惡 誤落野鳥群 .
돌 위에 풀 나기 어렵고, 방안에서 구름 일지 않는데
산간의 이 무슨 새가, 봉황의 무리에 날아왔느냐?
나는 본래 하늘의 새로서, 항상 오색 구름에 머물다가
오늘 밤 비바람 모질어, 들새 무리에 잘못 떨어졌노라.
▶김삿갓이 금강산에 들어가던 어느날, 마을 정자에서 시문답하며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이 있기에 술 한 잔 얻어먹을 겸 끼이려 하자, 김삿갓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한 선비가 시 한 수로 뜻을 던지니, 김삿갓이 받아쳐 응수한 詩라 합니다.
濁酒來期(탁주 내기)
主人呼韻太環銅 我不以音以鳥熊 .
濁酒一盆速速來 今番來期尺四蚣 .
주인이 운을 부르느데 너무 고리고 구리니, 나는 음으로 하지 않고 새김으로 해야겠네.
탁주 한 동이 속히속히 가져 오게 이번 내기는 자네가 지네.
▶어느 주막에서 주인과 시 짓기 내기를 하게 되었다. 주인은 운자로 銅 熊 蚣 세 자를 불렀다. 金笠은 특유의 재치를 발휘해서 새김으로 재미있는 시를 지었다.
▶來期: 우리말 「내기」를 한자로 적은 것
▶環: 고리 환, 우리말 새김으로 「고리다」로 해석
▶銅: 구리 동, 우리말 새김으로 「구리다」로 해석
▶鳥熊: 조웅, 우리말 새김으로 「새곰」즉 「새김」으로 해석
▶尺四: 척사, 우리말 새김으로 「자넷」즉 「자네」로 해석
▶蚣: 지네 공, 우리말 새김으로 「지네」로 해석
▶盆: 동이 분
扶餘妓生共作詩(부여 기생과 함께 지은 시)
金笠 白馬江頭黃犢鳴 妓生 老人山下少年行 .
金笠 離家正初今三月 妓生 對客初更復三更 .
金笠 澤裡芙蓉深不見 妓生 園中桃李笑無聲 .
金笠 良宵可興比誰於 妓生 紫午山頭月正明 .
백마강 강가에 누런 송아지가 울고 있네 (삿갓)
노인산 아래에는 소년이 지나가네 (기생)
정초에 집을 떠나 어느새 삼월이네 (삿갓)
초저녁에 손님을 만났는데 벌써 삼경이라오 (기생)
연못 속에 연꽃은 물이 깊어 볼 수가 없네 (삿갓)
뜰 안에 핀 복사꽃은 웃어도 소리가 없사와요 (기생)
이같이 좋은 밤의 흥겨움 어디에 비기리요 (삿갓)
「자오산」 산마루에 달이 한창 밝사와요 (기생)
부여에서 삿갓은 글 잘하는 어여쁜 기생을 만났다.
▶백마강이 굽어보이는 기생 집에서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밤 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시흥에 취했다. 나그네 외로운 심정을 은근히 호소하자 「자오산」 산마루에 비친 달처럼 부드러운 기생의 정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이심전심으로 삿갓의 청을 들어준다.
自嘆<스스로 탄식하다>
嗟乎天地間男兒 知我平生者有誰 .
萍水三千里浪跡 琴書四十年虛詞 .
靑雲難力致非願 白髮惟公道不悲 .
驚罷還鄕夢起坐 三更越鳥聲南枝 .
슬프다 천지간 남자들이여, 내 평생을 아는 이 그 누구인고?
물위의 부평초로 삼천리를 유랑하니, 거문고와 책으로 보낸 사십 년이 虛詞로세.
청운의 꿈은 힘으로 되지 않으니 바라지 않거니와, 백발도 정한 이치이니 슬퍼하지 않노라.
고향 가던 꿈을 꾸다 놀라 일어나 앉으니, 삼경에 越鳥 울음이 남쪽 가지에서 들리네.
▶越鳥: 남쪽 지방의 새인데 다른 지방에 가서도 고향을 그리며 남쪽 가지에 앉는다고 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七言詩는 4字+3字로 구성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는 5字+2字로 구성하였다.
불상ㅁ
與趙雲卿上樓(조운경과 함께 누각에 올라)
也知窮達不相謀 思樂橋邊幾歲周 .
漢北文章今太守 湖西物望舊荊州 .
酒誡狂藥常爲病 詩亦風流可與酬 .
野笠殆嫌登政閣 抱琴獨倚海山秋 .
궁하고 영달함이 어울릴 수 없음이야 잘 알지만, 사락교 주변에서 몇 해를 어울렸던가?
漢北에서도 문장가로 이름난 그대 이제 太守가 되니, 호서지방의 물망 옛날 형주목사 같도다.
술은 진실로 미치게 하는 약이라고 항상 일깨워주고, 시는 역시 풍류라 함께 주고 받았도다.
삿갓 쓴 야인이라 정각에 오르기 싫으니, 거문고 안고 홀로 가을의 산과 바다 벗삼으리라.
▶金笠과 마음이 통하는 조운경이 안변 군수로 임명되어 임지 로 떠날 때 송별의 시로 지은 글.
▶窮達: 궁핍하고 영달함.
▶周: 구하다. 여기서는 친교를 맺다.
▶漢北: 都城을 가리킴.
▶湖西:충청도 지방.
▶物望: 사람들이 높이 우러러 보아 드러난 이름.
▶荊州: 중국 華中지구의 북부 湖北省 남부에 있는 현의 옛 명칭. 중국 고대 9주의 하나 형산의 남쪽.
▶誡: 경계할 계
▶病: 근심하다.
▶酬: 권하다, 주고 받다.
▶政閣: 정당이나 정치
▶殆: 자못.
▶野: 벼슬하지 않은 사람.
諷刺와 逸話
松餠<송편>
手裡廻廻成鳥卵 指頭個個合蚌脣 .
金盤削立峰千疊 玉箸懸燈月半輪 .
손에서 뱅뱅 돌려 새알이 만들고, 손가락 끝으로 낱낱이 눌러 조개 같은 입술을 맞추네.
금 쟁반에 천봉우리를 첩첩이 쌓아 올리고, 등불을 매달고 옥 젓가락으로 반달 같은 송편을 집어 먹네.
▶새알을 만들고 조개 같은 입술을 맞추고 반달 같은 송편을 먹는 묘사에서 시인의 관찰력과 재치를 볼 수 있다.
雪日<눈 오는 날>
雪日常多晴日或 前山旣白後山亦 .
推窓四面琉璃壁 分咐寺童故掃莫 .
늘 눈이 내리더니 어쩌다 개니, 앞산이 희어지고 뒷산도 희구나.
창문을 밀쳐 보니 사면이 유리벽, 아이에게 시켜서 쓸지 말라고 하네.
▶김삿갓이 어느 절에 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청하자 중이 거절했다. 김삿갓이 절을 나가려 하자 혹시 김삿갓이 아닌가 생각하고 시를 짓게 했다. 혹(或), 역(亦), 벽(壁), 막(莫) 같은 어려운 운을 불러 괴롭혔지만 이 시를 짓고 잠을 자게 되었다.
雪<눈>
天皇崩乎人皇崩 萬樹靑山皆被服 .
明日若使陽來弔 家家첨前淚滴滴 .
천황씨가 죽었나 인황씨가 죽었나, 나무와 청산이 모두 상복을 입었네.
밝은 날에 해가 찾아와 조문한다면, 집집마다 처마 끝에서 눈물 뚝뚝 흘리겠네.
▶천황씨와 인황씨는 고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임금이다.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을 임금의 죽음을 슬퍼하여 흘리는 눈물에 비유하였다.
元生員<원생원>
日出猿生原 猫過鼠盡死 .
黃昏蚊簷至 夜出蚤席射 .
해 뜨자 원숭이가 언덕에 나타나고, 고양이 지나가자 쥐가 다 죽네.
황혼이 되자 모기가 처마에 이르고, 밤 되자 벼룩이 자리에서 쏘아대네.
▶김삿갓이 북도지방의 어느 집에 갔다가 그곳에 모여 있던 마을 유지들을 놀리며 지은 시이다. 구절마다 끝의 세 글자는 원생원(元生員), 서진사(徐進士), 문첨지(文僉知), 조석사(趙碩士)의 음을 빌려 쓴 것이다.
難避花<피하기 어려운 꽃>
靑春抱妓千金開 白日當樽萬事空 .
鴻飛遠天易隨水 蝶過靑山難避花 .
청춘에 기생을 안으니 천금이 초개같고, 대낮에 술잔을 대하니 만사가 부질없네.
먼 하늘 날아가는 기러기는 물 따라 날기 쉽고, 청산을 지나가는 나비는 꽃을 피하기 어렵네.
▶김삿갓이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청년들이 기생들과 놀고 있었다. 김삿갓이 부러워하여 한자리에 끼어 술을 얻어 마신 뒤 이 시를 지어 주었다.
妓生合作<기생과 함께 짓다>
平壤妓生何所能 (삿갓) 能歌能舞又詩能 (기생)
能能其中別無能 (삿갓) 月夜三更呼夫能 (기생).
평양 기생은 무엇에 능한가? 노래와 춤 다 능한 데다 시까지도 능하다오.
능하고 능하다지만 별로 능한 것 없네. 달 밝은 한밤중에 지아비 부르는 소리에 더 능하다오.
▶평양감사가 잔치를 벌이면서 능할 능(能)자 운을 부르자, 김삿갓이 먼저 한 구절을 짓고 기생이 이에 화답하였다.
嚥乳章三章<젖 빠는 노래>
父嚥其上 婦嚥其下 上下不同 其味卽同 .
父嚥其二 婦嚥其一 一二不同 其味卽同 .
父嚥其甘 婦嚥其酸 甘酸不同 其味卽同 .
시아비는 위를 빨고 며느리는 아래를 빠네. 위와 아래가 같지 않지만 맛은 한가지일세.
시아비는 둘을 빨고 며느리는 하나를 빠네. 하나와 둘이 같지 않지만 맛은 한가지일세.
시아비는 단 곳을 빨고 며느리는 신 곳을 빠네. 달고 신 것이 같지 않지만 맛은 한가지일세.
▶어느 선비의 집에 갔는데 그가 "우리 집 며느리가 유종(乳腫)으로 젖을 앓기 때문에 젖을 좀 빨아주어야 하겠소."라고 했다. 김삿갓이 망할 놈의 양반이 예의도 잘 지킨다고 분개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
沃溝金進士<옥구 김진사>
沃溝金進士 與我二分錢 .
一死都無事 平生恨有身 .
옥구 김 진사가, 내게 돈 두 푼을 주었네.
한번 죽어 없어지면 이런 꼴 없으련만, 육신이 살아 있어 평생에 한이 되네.
▶김삿갓이 옥구 김 진사 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기를 청하자, 돈 두 푼을 주며 내쫓았다. 김삿갓이 이 시를 지어 대문에 붙이니, 김 진사가 이 시를 보고 자기 집에다 재우고 친교를 맺었다.
窓<창>
十字相連口字橫 間間棧道峽如巴 .
隣翁順熟低首入 稚子難開擧手爬 .
십(十)자가 서로 이어지고 구(口)자가 빗겼는데, 사이사이 험난한 길이 있어 파촉(巴蜀)가는 골짜기 같네.
이웃집 늙은이는 순하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지만, 어린 아이는 열기 어렵다고 손가락으로 긁어대네.
▶눈 오는 날 김삿갓이 친구의 집을 찾아가자 친구가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고 창(窓)이라는 제목을 내며 파촉 파(巴)와 긁을 파(爬)를 운으로 불렀다.
兩班論<양반을 논함>
彼兩班此兩班 班不知班何班 .
朝鮮三姓其中班 駕洛一邦在上班 .
來千里此月客班 好八字今時富班 .
觀其爾班厭眞班 客班可知主人班 .
네가 양반이면 나도 양반이다. 양반이 양반을 몰라보니 양반은 무슨 놈의 양반.
조선에서 세 가지 성만이 그중 양반인데 김해 김씨가 한 나라에서도 으뜸 양반이지.
천 리를 찾아왔으니 이 달 손님 양반이고, 팔자가 좋으니 금시 부자 양반이로되,
이 양반을 보니 진짜 양반을 싫어해, 손님 양반이 주인 양반을 알 만하구나.
▶김삿갓이 어느 양반 집에 갔더니 양반입네 거드름을 피우며 족보를 따져 물었다. 집안 내력을 밝힐 수 없는 삿갓으로서는 기분이 상할 수밖에. 주인 양반이 대접을 받으려면 행실이 양반다워야 하는데, 먼 길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니 그따위가 무슨 양반이냐고 놀리고 있다.
暗夜訪紅蓮<어두운 밤에 홍련을 찾아가다>
探香狂蝶半夜行 百花深處摠無情 .
欲採紅蓮南浦去 洞庭秋波小舟驚 .
향기 찾는 미친 나비가 한밤중에 나섰지만, 온갖 꽃은 깊은 곳에 모두들 무정하네.
홍련을 찾으려고 남포로 내려가다가, 동정호 가을 물결에 작은 배가 놀라네.
▶동정(洞庭)은 두보의 '등악양루'(登岳陽樓)의 배경이 된 중국 호남성에 있는 동정호(洞庭湖)를 말한다.
▶홍련을 만나려고 여러 여인들이 자는 기생방을 한밤중에 찾아갔는데 어둠 속에서 얼결에 추파라는 기생을 밟고는 깜짝 놀랐다.
諺文風月<언문풍월>
靑松듬성담성立이요 人間여기저기有라.
所謂엇뚝삣뚝客이 平生쓰나다나酒라.
푸른 소나무가 듬성듬성 섰고, 인간은 여기저기 있네.
엇득빗득 다니는 나그네가, 평생 쓰나 다나 술만 마시네.
▶서당에서 유(有)자와 주(酒)자를 운으로 부르자 언문과 한자를 조합하여 지었다.
開春詩會作<봄을 시작하는 시회>
데각데각 登高山하니 시근뻘뜩 息氣散이라.
醉眼朦朧굶어觀하니 욹읏붉읏 花爛漫이라.
데걱데걱 높은 산에 오르니, 씨근벌떡 숨결이 흩어지네.
몽롱하게 취한 눈으로 굶주리며 보니, 울긋불긋 꽃이 만발했네.
▶산에서 시회가 열린 것을 보고 올라갔는데 시를 지어야 술을 준다고 하자 이 시를 지었다. 사람들이 언문풍월도 시냐고 따지니 다시 읊조렸다.
諺文眞書석거作하니 是耶非耶皆吾子라.
언문과 진서를 섞어 지었다고, 옳으니 그르니 하면 모두 내 자식이다.
犢價訴題<송아지 값 고소장>
四兩七錢之犢을 放於靑山綠水하야
養於靑山綠水러니 隣家飽太之牛가
用其角於此犢하니 如之何卽可乎리요.
넉 냥 일곱 푼짜리 송아지를, 푸른 산 푸른 물에 놓아서
푸른 산 푸른 물로 길렀는데, 콩에 배부른 이웃집 소가
이 송아지를 뿔로 받았으니, 어찌하면 좋으리까.
▶가난한 과부네 송아지가 부잣집 황소의 뿔에 받혀 죽자, 이 이야기를 들은 김삿갓이 이 시를 써서 관가에 바쳐 송아지 값을 받아 주었다.
辱說某書堂<서당 욕설시>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네, 방 안에 모두 귀한 분들일세.
생도는 모두 열 명도 못 되고, 선생은 와서 뵙지도 않네.
▶추운 겨울날 서당에 찾아가 재워주기를 청하나 훈장은 미친 개 취급하며 내쫓는다. 인정 없는 훈장을 욕하는 시. 소리 나는 대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辱孔氏家<공씨네 집에서>
臨門老尨吠孔孔 知是主人姓曰孔 .
黃昏逐客緣何事 恐失夫人脚下孔 .
문 앞에서 늙은 삽살개가 콩콩 짖으니, 주인의 성이 공가인 줄 알겠네.
황혼에 나그네를 쫓으니 무슨 까닭인가? 아마도 부인의 아랫구멍을 잃을까 두려운 거지.
▶구멍 공(孔)자를 공공(개 짖는 소리), 공가(성), 구멍이라는 세 가지 뜻으로 썼다.
虛言詩<허언시>
靑山影裡鹿抱卵 白雲江邊蟹打尾 .
夕陽歸僧繫三尺 樓上織女囊一斗 .
푸른 산 그림자 속에 사슴이 알을 품었고, 흰 구름 지나가는 강변에서 게가 꼬리를 치는구나.
석양에 돌아가는 중의 상투가 석 자나 되고, 나락에서 베를 짜는 계집의 불알이 한 말이나 되네.
▶사슴이 알을 품고 게가 꼬리를 치며, 중이 상투를 틀고 계집에게 불알이 있을 수 있으랴. 허망하고 거짓된 인간의 모습을 헛된 말 장난으로 그림으로써, 당시 사회의 모순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繫(계): 매다. 상투
▶樓: 다락
胡地花草<오랑캐 땅의 화초>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다지만 오랑캐 땅이라고 화초가 없으랴.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더라도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랴.
▶호(胡)자에 '오랑캐'라는 명사와 '어찌'라는 부사의 뜻이 있다.
科詩
蘭皐平生詩<난고평생시>
鳥巢獸穴皆有居 ; 顧我平生獨自傷 .
芒鞋竹杖路千里 ; 水性雲心家四方 .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어 거처할 곳이 있건만, 내 평생을 돌아보니 홀로 괴롭구나.
짚신에 대지팡이로 천 리 길 다니며, 물처럼 구름처럼 사방을 내 집으로 여겼지.
尤人不可怨天難 ; 歲暮悲懷餘寸腸 .
初年自謂得樂地 ; 漢北知吾生長鄕 .
남을 탓할 수도 없고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어, 섣달 그믐엔 서글픈 마음이 가슴에 넘쳤지.
초년엔 즐거운 세상 만났다 생각하고, 한양이 내 생장한 고향인 줄 알았지.
簪纓先世富貴人 ; 花柳長安名勝庄 .
隣人也賀弄璋慶 ; 早晩前期冠蓋場 .
집안은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꽃 피는 장안 명승지에 집이 있었지.
이웃 사람들이 아들 낳았다 축하하고, 조만간 출세하기를 기대했었지.
髮毛稍長命漸奇 ; 灰劫殘門翻海桑 .
依無親戚世情薄 ; 哭盡爺孃家事荒 .
머리가 차츰 자라며 팔자가 기박해져, 가문이 멸족되어 뽕나무밭이 변해 바다가 되더니,
의지할 친척도 없이 세상인심 박해지고, 부모상까지 마치자 집안이 쓸쓸해졌네.
終南曉鍾一納履 ; 風土東邦心細量 .
心猶異域首丘狐 ; 勢亦窮途觸藩羊 .
남산 새벽 종소리 들으며 신끈을 맨 뒤에, 동방 풍토를 향해 길떠날 것을 결심했네.
마음은 아직 타향에서 고향 그리는 여우같건만, 울타리에 뿔 박은 양처럼 형세가 궁박해졌네.
南州從古過客多 ; 轉蓬浮萍經幾霜 .
搖頭行勢豈本習 ; 絜口圖生惟所長 .
남녘 지방은 예부터 나그네가 많았다지만, 부평초처럼 떠도는 신세가 몇 년이나 되었던가?
머리 굽실거리는 행세가 어찌 내 본래 버릇이랴만, 입 놀리며 살 길 찾는 솜씨만 늘었네.
光陰漸向此中失 ; 三角靑山何渺茫 .
江山乞號慣千門 ; 風月行裝空一囊 .
이 가운데 세월을 차츰 잊어 버려, 삼각산 푸른 모습이 아득하기만 해라.
강산 떠돌며 구걸한 집이 천만이나 되었건만, 풍월시인 행장은 빈 자루 하나뿐일세.
千金之子萬石君 ; 厚薄家風均試嘗 .
身窮每遇俗眼白 ; 歲去偏傷鬢髮蒼 .
천금 자제와 만석군 부자, 후하고 박한 가풍을 고루 맛보았지.
신세가 궁박해져 늘 백안시당하고, 세월이 갈수록 머리 희어져 가슴 아프네.
歸兮亦難佇亦難 ; 幾日彷徨中路傍 .
돌아가려도 어렵지만 그만두려도 어려워, 중도에 서서 며칠 동안 방황하네.
▶蘭皐: 김삿갓의 호이다.
▶尤: 탓하다.
▶芒鞋: 미투리 짚신
▶簪纓: 비녀와 갓끔. 벼슬이 높은 사람.
▶花柳: 아름다운
▶庄: 농막, 일반 백성의 집
▶弄璋慶: 弄璋之慶. 아들을 낳은 경사
▶冠蓋場: 과장에서 관을 쓴다.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功名을 이룸.
▶稍: 조금, 점점
▶殘門: 멸문된 가문
▶翻海桑: 桑田碧海의 뜻으로 세상의 변화가 뽕나무 밭이 변하여 바다가 되듯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름을 나타냄.
▶爺孃: 부모의 속칭
▶首丘狐: 首丘初心이라는 故事의 意譯으로 여우가 죽을 때는 자기가 살던 언덕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죽는다고 함.
▶觸藩羊: 저양촉번(羝羊觸藩)의 준말이다. 『주역(周易)』 대장괘(大壯卦) 상육(上六)에, “수양이 울타리를 대질러서 물러가지도 못하고 나아가지도 못한다[羝羊觸藩 不能退 不能遂].” 하였는데, 저양의 뿔이 울타리에 걸리어 진퇴유곡이 되었다는 뜻으로, 만용을 부려 저돌하다가 도리어 실패함을 비유한 말이다.
▶經幾霜: 서리가 몇 번 내렸나, 즉 세월이 몇 년이나 지나감.
▶搖頭: 구걸할 때 머리를 굽실거리는 동작을 가리킴.
▶絜(혈): 헤아리다.
▶蒼: 흰 털, 백발
▶佇: 우두커니 서다. 머물러 있다
▶이 시는 김삿갓이 만년에 자기의 일 평생을 회고하며 지은 長詩로서, 科詩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과시는 과거시험 때에 유일한 시험과목으로 채택되었다. 따라서 短詩에 비해서 길이가 길고, 내용에 있어서 복잡하고 난해하다. 이 시는 중국의 고사나 고전을 많이 인용하고 있어서 김삿갓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정가산의 충절사를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사무침을 탄식함)
日爾世臣金益淳 鄭公不過卿大夫 .
將軍桃李隴西落 烈士功名圖末高 .
詩人到此亦慷慨 撫劍悲歌秋水涘 .
宣川自古大將邑 比諸嘉山先守義 .
淸朝共作一王臣 死地寧爲二心子 .
升平日月歲辛未 風雨西關何變有 .
尊周孰非魯仲連 輔漢人多諸葛亮 .
同朝舊臣鄭忠臣 抵掌風塵立節死 .
嘉陵老吏揚名旌 生色秋天白日下 .
魂歸南畝伴岳飛 骨埋西山傍伯夷 .
西來消息慨然多 問是誰家食祿臣 .
家聲壯洞甲族金 名字長安行列淳 .
家門如許聖恩重 百萬兵前義不下 .
淸川江水洗兵波 鐵瓮山樹掛弓枝 .
吾王庭下進退滕 背向西城凶賊脆 .
魂飛莫向九泉去 地下猶存先大王 .
忘君是日又忘親 一死猶輕萬死宣 .
春秋筆法爾知否 此事流傳東國史 .
세록지신(世祿之臣) 김익순은 듣거라! 정공(鄭公)은 경대부(卿大夫)에 불과했지만,
농서의 장군 이능(李陵)처럼 항복하지 않아, 열사로서 공과 이름 서열 중에 으뜸이로다.
시인도 이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노니, 칼을 어루만지며 이 가을날 강가에서 탄식하노라.
선천은 옛적부터 대장(大將)의 읍지(邑地)러니, 가산 땅에 비하자면 먼저 충의로써 지킬 땅이로되,
청명한 조정에 모두 한 임금의 신하로서, 죽을 때는 어찌 두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태평세월이었던 신미년(辛未年)에, 비바람 서관에 몰아치니 이 어인 변고인고?
주(周)나라 받드는 데 노중련 같은 충신 없었고, 한(漢)나라 보좌하는 데 제갈량 같은 자 많았노라.
우리 조정에도 또한 정충신 있어서, 맨손으로 병란 막아 절개 지키고 죽었도다.
늙은 관리로서 구국(救國)의 기치 든 가산의 명성은, 맑은 하늘에 빛나는 태양 같았노라.
혼은 남쪽 밭이랑으로 돌아가 악비와 벗하고, 뼈는 서산에 묻혔어도 백이(伯夷)의 곁이어라.
서쪽에서 매우 슬픈 소식 들려 오나니, 묻건대 너는 누구의 녹을 먹는 신하이더뇨?
가문은 으뜸가는 장동(壯洞) 김씨요, 이름은 장안에서도 떨치는 순(淳)자 항렬이구나.
너희 가문이 이처럼 성은(聖恩)을 중히 입었으니, 백만 대군 앞이라도 의(義)를 저버려선 안 되리라.
청천강(淸川江) 물결에 무기를 씻고, 철옹산 나무로 만든 활을 메고서는,
임금의 어전에 나아가 무릎꿇듯이, 서성의 흉악한 도적에게 무릎꿇었구나.
네 혼은 황천에도 가지 못할 것이고, 땅에 묻히려도 선왕(先王)들께서 허락지 않으리라.
이제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육친을 버렸으니, 한 번은 오히려 가벼우니 만 번 죽어야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너는 아느냐? 너의 일 동국사에 기록하여 천추만대에 전하리라.
▶김삿갓이 23살 때 영월 도호부(寧越都護府)에서 개최한 백일장(白日場,향시鄕試)에 참가하여 壯元及第한 科詩
▶조부(祖父)인 선천부사(宣川府使)겸 방어사(防禦使) '김 익순(金益淳)'을 역적(逆賊)으로 비난한 글이 되어버린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조상(祖上)을 욕되게 한 자신은 하늘을 바로 쳐다 볼 수 없는 죄인이라며 삿갓을 쓰고 방랑(放浪)길에 오르게 됨.
▶科試: 과거(科擧) 볼 때 짓는 시(詩).
▶鄭嘉山: 평안도(平安道) 가산 군수(嘉山郡守) 정공(鄭公).
▶金益淳: '김 병연(金炳淵:김립金笠·김삿갓)'의 조부(祖父). 평안도(平安道) 선천 부사(宣川府使)를 지냄.
▶桃李: 중국 '한무제(漢武帝)' 때 흉노족과의 전투에 많은 공(功)을 세운 '이능(李陵)' 장군을 일컫는 것으로 보임.
▶隴西: 중국 한(漢)나라의 명장(名將) '이광(李廣)'과 손자 '이능(李陵)' 등 대대로 武人血統을 이어온 집안의 지명(地名).
▶宣川: 평안도(平安道) 선천군(宣川郡).
▶嘉山: 평안도(平安道) 가산군(嘉山郡).
▶西關: 관서 지방(關西地方). '마천령(摩天嶺)' 서쪽의 지방. 곧, 평안도.
▶魯仲連: 주(周)나라의 충신(忠臣).
▶諸葛亮: 촉한(蜀漢)의 황제 '유비(劉備)'를 도운 정치가이며 전략가.
▶岳飛: 남송(南宋) 초기의 학자(學者)이자 무장(武將).
▶伯夷: 殷나라의 臣下局 '고죽군(孤竹君)'의 아들. 儒家에서 淸節之士로 推仰 받는 인물.
▶淸川江: 평안북도와 평안남도의 경계를 이루며 서해로 흐르는 강.
▶鐵甕山: 철옹성(鐵瓮城·鐵甕城). 철옹 산성(鐵瓮山城).
▶鐵瓮山城: 썩 튼튼히 둘러싼 것의 비유.
▶凶賊: 반란(叛亂)을 일으킨 '홍경래(洪景來)'의 역도(逆徒)를 일컬음.
▶春秋筆法: 대의 명분(大義名分)을 밝혀 세우는 사필(史筆)의 논법.
▶東國史: 우리 나라의 역사. 동국:중국에 대한 우리 나라의 호칭.
▶忠節死(충절사): 충성스러운 절의(節義)와 절개(節槪)를 지키다 죽음.
▶世臣(세신): 대대로 한 가문이나 왕가를 섬기는 신하. 세록지신(世祿之臣).
▶世祿之臣(세록지신): 대대(代代)로 녹을 받는 신하(臣下). (준) 세신(世臣).
▶秋水(추수): 가을철에 맑게 흐르는 물. 번쩍거리는 칼빛의 비유. 사람의 안색이 맑고 깨끗함의 비유.
▶輔弼之臣(보필지신): 보필(輔弼)하는 신하(臣下).
▶風塵(풍진): 비바람에 날리는 티끌. 세상의 속된 일. 병진(兵塵).
▶老吏(노리): 늙은 아전(衙前). 아전(衙前):조선 왕조 때 '서리(胥吏)'의 딴 이름.
▶生色(생색): 낯이 나도록 하는 일. 생색(이)나다:낯이 나다. 체면(體面)이 서다.
▶白日(백일): 쨍쨍하게 비치는 해. 대낮. 백일하(白日下)에 드러나다.
▶南畝(남묘): 남쪽 밭이랑.
▶畝(mu): 이랑 묘·무, 묘. (토지 면적의 단위). 1묘(畝)=60평방 장(平方丈).
▶食祿(식록): 녹봉(祿俸). 녹을 받음.
▶名字(명자): 이름 자(字). 세상에 소문난 평판(評判).
▶行列(항렬): 혈족의 방계(傍系)에 대한 대수(代數) 관계를 표시하는 말.
▶王廷(왕정): 임금이 친히 다스리는 조정(朝廷).
▶西域(서역): 서쪽. (역) 중국(中國) 역사상, 서쪽의 투르키스탄 곧 지금의 신강성(新疆省)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이름.
▶脆(cui): 무를 취, 부서지기 쉽다. 무르다. 바삭바삭하다. 연약(軟弱)하다. 약하다.
▶脆弱(취약): 취약(脆弱)하다. 연약(軟弱)하다.
▶九天(구천): 가장 높은 하늘. 하늘을 아홉 방위로 나눈 일컬음.
▶九泉(구천): 죽은 뒤에 넋이 돌아간다는 곳. 구천 지하(九泉地下). 황천(黃天).
▶黃泉(황천): 저승. 황천객(黃泉客):죽은 사람. 황천길:죽어서 저승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