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왜 신을 죽였는가
철학자 니체는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한다. 그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였는데, 이 신은 기독교의 신뿐만 아니라, 기존의 종교, 학문적 진리, 도덕과 가치 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때까지 우리가 믿었던 종교와 진리라고 알았던 사실들, 그리고 도덕까지 전부 다 죽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기존의 모든 것을 망치로 때려 부순 것이다. 그는 왜 이런 선언을 했을까?
니체는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약하다고 생각하여 신을 상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인간의 자기비하이고,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인간 자신에 대한 혐오이며 또한 부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죽음은 인간 자신의 삶에 대한 가치를 부정하고 비하하는 데 대한 종결선언이다. ‘신은 죽었다’는 것은 인간을 속박하고 통제하던 존재 즉 모든 종교와 사상과 도덕을 때려 부숴버리고 인간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니체는 도덕 같은 것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도덕이란 어떤 특정한 사실에 대해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어떤 특정한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념이란 것이다. 그리스 시대에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다만 좋고 나쁨이라는 관념만 있었다. 그 좋음과 나쁨이란 것은 주인과 노예의 속성을 대변했는데, 좋은 것은 주인의 속성이 되고 나쁜 것은 노예의 속성이 되었다. 좋음과 나쁨이라는 도덕관념은 주인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예를 부리는 자신의 행동은 좋은 것이고, 노예들은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고 근면하지 않으면 나쁜 것이라는 이념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것이 곧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하여 노예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주인을 악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묵묵히 순종하는 자신들은 선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과 악이라는 도덕관념은 이리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고대 유대민족은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했는데 나중에 기독교가 생기면서 자신들의 특성인 순종과 근면 같은 것을 선으로 규정하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것은 악으로 규정했다. 그러니 노예의 도덕은 주인에 대한 원한으로 생겨난 것이다. 강자의 공격에 대한 약자의 격정인 복수감이다. 그리스도교의 ‘사랑’도 사실은 증오감 복수감의 숨겨진 정신적 태도에 지나지 않으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실천력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것을 상상(想像)의 복수로 갚는 인종(忍從)과 관용의 모럴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이러한 원한(怨恨)과 복수감(復讐感)을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 하였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포도 이야기를 보자. 높이 매달려 있는 포도를 따 먹으려고 여우는 힘을 다해 뛰었지만 포도가 너무 높이 달려 있어서 닿지 않았다. 그래서 여우는 말한다. “저 포도는 아주 실거야. 먹지 않아 다행이다.”
똑같은 여우들이 모여 “포도를 욕심내지 않는 것은 선한 일이야.”하며 도덕이나 교의를 내세우기 시작한다. 딸 수 없는 포도에 르상티망을 느끼고 포도를 원하지 않는 무욕의 삶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열심히 뛰어올라 포도를 따려는 여우를 보고는 욕망에 찬 여우라고 경멸한다. 무욕이 훌륭하다라는 가치관에 빠진다. 니체는 말한다. 이런 것이 바로 노예 도덕이다. 기존의 종교와 도덕 등은 무두 약자의 르상티망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를 옭아매는 이러한 기존 가치들을 중력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이 중력은 우리의 몸을 무겁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중력에서 벗어나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한 ‘힘’을 필요로 한다. 즉, 이 힘이란, 기존 가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힘을 말하며, 또한 이 힘은 우리가 기존 가치를 재평가하여 새로운 가치로 만들어 낼 때 생겨난다. 이러한 것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힘에의 의지’이며, 이를 통해 몸은 가벼워지고 춤출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남이 만들어 놓은 가치들에 지배당하지 말고, 자신이 평가한 자신의 가치를 따르자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그 자체로 창조라고 하였다.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포도를 따 먹으려고 힘차게 뛰어오르고 또 뛰어오르고 하는 것이 힘의 의지다. 힘에의 의지는 바로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의 의지다. 이렇게 강해지고 싶다고 하는 힘에의 의지야말로 인생의 본질이라 생각했다.
니체는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적 도덕에 굴종하여 가식적인 겸손과 사랑으로 외치는 노예 도덕에 망치를 들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기존 도덕에 의해 노예로 사는 이런 가치체계를 모조리 뒤집어엎고는,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가 주인이 되기를 절실히 원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삶에 스스로가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힘에의 의지’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이를 ‘권력 의지’라고 일렀다.
니체는 자기 가치를 창조하는 삶을 위해 낙타, 사자, 아이라는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이야기한다.
낙타가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걸어간다. 낙타는 괴롭기 그지없다. 낙타는 짐을 내려놓으려 한다. 그러나 용이 나타나 짐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이때 사자가 나타나 날카로운 발톱으로 용을 죽인다. 용은 기존의 도덕이나 가치를 가리킨다. 이 용을 죽이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 수가 없다. 그래서 사자가 되어야 한다. 이 사자는 곧 아이가 되려 한다. 아이는 순진무구하다. 아이는 기존의 도덕률에 얽매이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냥 한다. 아이는 기존의 도덕이란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욕구대로 살아간다.
니체는 기존의 것을 버리고 오지 않는 시간을 갈망하는 상태를 넘어서서 스스로의 감각으로, 스스로 사유해서, 스스로 삶을 변화시키는 사람을 ‘초인’이라고 했다. 초인은 허무주의를 넘어
선 사람이라서 사랑, 증오, 미움, 동정 등이 없다. 인간의 삶을 부정하는 그 어떤 것을 극복했으므로 현재를 긍정하는 힘,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능력이 있다. 초인은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창조성이 있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해방된 삶을 살아간다.
강요된 선택이 없으면 그에 따른 부정적인 느낌도 없다. 긍정이란 스스로의 선택이며 즐거움이다. 도덕적 이상과 절대적 가치를 강조할수록 허무주의가 팽배해지고 이러한 허무주의를 경멸해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는 창조적인 사람이 초인이다. 힘에의 의지가 이끄는 대로 강해지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초인이다.
인간은 오랫동안 기존의 권력에 억압당해서 부정적 권력에 감염되었다. 언제나 억누르고 무력화하려는 의지에 복속되어 있었으므로, 그 힘은 외부 세계에 반대하는 반동적인 힘으로 존재했었다. 부정적인 권력을,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며 자신과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긍정적인 의지로 바꿀 때 초인이 되는 것이다.
니체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정열적으로 주장하는 ‘초인(위버멘슈 Übermensch)’은 바로 이 만연한 허무주의를 이겨 내는 인간이다. 초인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존재다. 따라서 초인은 자신에 대한 회피에서 나오는 온갖 허구적 가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며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 내는 존재다.
초인은 모든 사회나 정치적 가치를 다시 평가할 줄 알아야 하고, 내적으로도 완벽하며 진정한 자유인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운명을 아는 진정한 주인이며 강하고 힘 있는 사람이다. 니체가 신을 죽이고 그 자리에 초인을 놓았다고 해서, 초인이 단지 신의 자리를 대신하거나 신이 할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며 신은 더더욱 아니다. 초인은 신처럼 인간을 구원하거나 구제할 수 없다. 초인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앞에 다가올 혹은 놓인 운명을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초인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사랑할 줄 안다. 초인은 이렇게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시간 앞에 놓인 모든 현실을 피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니체는 인간의 생(生)은 원의 형상을 띠며 영원히 반복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영원회귀 하는 것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가 반복되는 곳이다. 니체는 이것을 ‘디오니소스적’이라고 표현한다.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이다. 디오니소스는 어린 시절 거인들에 의해 온몸이 찢겨 죽는다. 그리고 되살아난다. 디오니소스는 죽음을 통해 다시 살아난 신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재탄생한다는 것이다. 한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간다. 소멸과 죽음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며 우주적 원리일 뿐이다. 지금의 자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신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힘에의 의지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18세기 유럽은 절대성과 신에 대한 믿음이 점차 퇴조하여 절대적이라고 믿어졌던 가치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신, 신분 제도, 구원, 진리 같은 것들 말이다. 신이 없다면 언젠가 삶은 죽음으로 끝나버리는데 그러면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후세계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현생에서의 덕을 쌓는 것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절대적인 무의미함 속에서 빠졌다. 어차피 죽으면 끝이니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수동적 허무주의와 기존 가치의 무의미함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항상 동일한 게 되풀이되는 것이 삶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의 삶과 고뇌 및 기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간에 충실한 삶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니체의 영원회귀 이론이다.
첫댓글 즉자적 세계관(내세는 없는 것이어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과 대자적 세계관(내세가 있어서 현실과는 다르지만 어떤 방식으로 사후의 세계에서 살아가게 된다.) 두 가지밖에 없었는데, 니체가 영원 회귀 세계관(내가 죽으면 살았던 평생을 계속 되풀이하며 살게 된다.)을 창시했다고 철학 시간에 배웠습니다. 이것 하나만 해도 굉장한 철학자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 글을 읽으니 니체는 허무주의를 극복해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동물은 종교를 가질 수 없기에 죽음의 공포도 없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있습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에 대한 철학자들의 입장을 한번 해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