俗離山에서/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을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시 읽기> 俗離山에서/나희덕
나희덕은 수행과 수련을 하는 마음으로 시를 쓰는 시인입니다. 그런 시인답게 그는 흠잡을 데 없는 모범생 같고, 알아서 자신을 먼저 둥글게 다듬고 돌보고자 하는 종교인 같습니다. 그런 그를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그의 시를 보면 반항과 파격과 일탈의 후련함은 느낄 수 없으나, 반성과 다짐과 사색의 진지함에서 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의 세 번째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속에 들어 있는 위 시도 이런 나희덕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위 시를 읽으면서, 아니 그 시를 다 읽고 난 후에, 우리는 시인을 따라 수행과 수련의 길을 성실하게 통과해 나온 것처럼, 우리의 내면이 차분하고 고요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수직으로 솟구쳤던 마음이 수평으로 차분히 내려앉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위 시의 제목인 ‘속리산俗離山’에 가보셨는지요? ‘속리산’은 그 한자를 새겨볼 때 이름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속세를 떠난 산’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니까요. 산의 입장에서 보면 산에 무슨 이름이 필요하겠습니까? 산은 그저 즉자적 존재로서 거기에 그렇게 무심히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그의 삶의 방식이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인간들은 산에다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이름이 붙여짐으로써 산은 인간화되고, 문화화되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일 뿐, 시비를 속단할 사항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산의 명칭을 보면 인간들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위 시의 시인은 ‘속리산’에 갔습니다. 이름은 속리산이지만 위 시의 내용으로 보건대 그는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등산登山’을 하러 간 것 같습니다. 등산이란 얼마나 인간중심주의적인 행위이고 용어인가요? 산을 마나지 않고 그것을 오르다니요? 산은 여기서 도구와 같은 존재로 변하고 맙니다. 산을 높이의 상징으로 설정하고 그 앞에 서 있는 산과 마주하여 그것의 정상에 오르고, 마침내는 산을 정복하겠다는 욕구가 이 말 속에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여성 산악인 남난희 씨가 그의 저서 『낮은 산이 낫다』에서 조용히 들려준 말이 떠오릅니다. 여성으로서 백두대간을 최초로 종주하고 히말라야의 강가프르나를 비롯한 세계의 고봉을 정복한 그가 모든 등산의 여정 후에, ‘등산’보다는 ‘입산入山’이 낫고, 높은 산보다는 낮은 산이 낫다는 말을 한 것은 참으로 새겨들을 만합니다. 그가 넘어서고자 했던 등산과 높은 산은 우리를 욕망의 존재로 만들지만, 입산과 낮은 산은 우리를 부드러운 수행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전자에선 수직성의 뜨거움이 빛나지만, 후자에선 수평선의 따스함이 환기됩니다.
위 시에서 시인은 그의 의도와 달리, 속리산이 보여주는 순하디순한 수평성의 모습 앞에서 당황스러워합니다. ‘가파른 비탈’과 같은 세계를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오르고 정복하는 것만이 대단한 삶의 표상이라고 지금까지 은연중 내면화한 그에게, 속리산은 그의 기대와 달리 순하디순한 길만을, 가도 가도 평평한 길만을 보여주면서 그의 내면화된 선입견을 깨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 시에서 시인은 그의 의도와 달리, 속리산이 보여주는 순하디순한 수평성이 모습 앞에서 당황스러워합니다. ‘가파른 비탈’과 같은 세계를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올고 정복하는 것만이 대단한 삶의 표상이라고 지금까지 은연중 내면화한 그에게, 속리산은 그의 기대와 달리 순하디순한 길만을, 가도 가도 평형한 길만을 보여주면서 그의 내면화된 선입견을 깨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그토록 높이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았을까요? 그리고 지배와 정복의 쾌감만을 편견처럼 극단적으로 발달시키고 말았을까요? 명민한 나희덕은 속리산의이런 산길을 보면서, 얼른 내적인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그가 깨달은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
말할 것도 없이 ‘오르는 것’과 ‘들어가는 것’, 이 두 가지가 모두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오를 때의 가파른 긴장만큼, 들어갈 때의 부드러운 인내심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편견에 기대어 굳이 말한다면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희덕은 진정한 삶이란 이처럼 가도 가도 평평한 제자리 같은 길을 걸어 입산의 진면목을 맛보는 것이라고 깨달은 후에도, 그에게 뿌리 깊이 박힌 세속의 습관과 편견을 다 벗어버리지 못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자기진단 속에서 그는 산(속리산)이 전해주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편견을 다시 한 번 깨뜨리고자 합니다. 산이 그에게 자신의 높은 어깨를 낮추며 속삭이듯 전해주었다는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가 산을 넘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산을 넘는 것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을 넘는 것이라는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산에 와서 가파른 비탈을 넘어보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상 세속에서 밥을 끓여 먹고 사는 하루하루의 일상이란 그보다 더 가파른 비탈과 같다는 내용입니다.
산을 넘는 것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을 넘는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저는 그것을 인내심, 자기수련, 자아조절, 평상심의 회복 등과 같은 미덕이 체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도 가도 평평한 길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가는 일, 그런 산이 보여주는 길을 그대로 포용하고 동행하는 일은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의 체화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산행을 하는 일보다 세속에서 밥을 끓여먹고 사는 나날의 일상이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는 말은 보다 쉽게 이해되고 공감도 가는 내용입니다. 일상은 쉽고 시시한 것 같지만 우리 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므로 일상이 행복하면 우리의 생애 대부분이 행복합니다. 산행은 그것이 등산이든 입산이든 여가의 목록에 들어 있기 일쑤지만, 일상은 도저히 그 목록에 넣을 수 없는 필수적인 현실입니다. 그리고 산행은 잠시의 이벤트와 같은 것일 수 있지만, 일상은 나날의 원천이자 밑자리입니다. 그런 점에서 산행이 제 아무리 어려운 비탈과 마주하는 것 같이 여겨졌을 지라도, 그것의 강도는 일상의 그것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산이 전해주는 이런 말은 산을, 그것도 탈속의 이름을 갖고 있는 속리산을 찾아온 시인으로 하여금 오히려 산행보다 일상이 지닌 성스러움과 소중함 그리고 어려움을 재발견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산에 대한 고착된 환상과 편견을 버리고, 산보다 더 많은 진실을 품은 일상 속으로 재입국하도록 합니다. 등산보다 입산이 낫고, 높은 산보다 낮은 산이 낫다면, 속리산俗離山보다 속진俗塵의 일상이 한 수 위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은자 가운데 최고의 은자가 시속時俗에서 조용히 표내지 않고 살아가는 은자라면, 속리는 산에서 이루어진다기보다 세속과 일상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은자 가운데 최고의 은자가 시속時俗에서 조용히 표내지 않고 살아가는 은자라면, 속리는 산에서 이루어진다기보다 세속과 일상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희덕은 위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속리산은/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숨에 오를 수 있는 산도, 그리고 그와 같은 삶도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단숨에 오를 수 있는 높이이자 그런 대상이라면, 그것은 속리의 길을 배울 만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의미도 이 말 속엔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일상처럼 단조롭게 보이나 실은 깊이, 멀리 들어감으로써 그 깊이와 거리가 역으로 가파름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속리산의 내면이고 그것을 충분히 소화하였을 때, 비로소 속리의 진경이 펼쳐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속리산에 한번 가보시오. 속리산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이끌리는 산에 한번 가보십시오. 그리고 그 속리산이 아니 우리가 찾아간 그 산들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속리의 길을 깨닫고 인식하고 재발견하게 하는지 몸소 체험해보십시오. 그러면서 세속과 탈속의 드라마가 우리들의 내부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살펴보십시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