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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위령기도] (7) 선교 방법으로서 장례 봉사와 위령기도
교우의 장례를 내 일처럼 함께하는 모습에 선교 열매 맺기도
천주교의 장례봉사
오늘날 한국교회의 장례 봉사는 곳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개 본당 연령회와 해당 지역 교우들을 중심으로 수행한다. 박해시대의 조선교회는, 어려운 일을 만나면 서로 돕고 함께 헤쳐 나가는(患難相救), 주님 안에서 형제적 사랑으로 살았으므로 이웃 교우가 선종하면 그 장례는 남이 아닌 바로 내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로 알고 함께 모여 위령기도를 바치고 장례에 필요한 모든 일에 힘을 모았다.
그래서 천주교와 천주교 신자에 관한 편견과 불편이 여전한 상황에서도 개종자까지 생길 정도로 외교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텬쥬셩교례규」 ‘상장규구’의 “교우의 장사를 만나매… 시체는 이 오주 예수의 지체(肢體)이요 성신(聖神)의 궁전이었음을 깊이 생각할 것이니라”와 “교우 죽으매 각처 교우들이 다 인애(仁愛)하는 덕을 채우고, 또 성교회의 실(實)됨을 널리 펴기로 마땅히 많이 모일 것이요, 각각 형세(形勢)대로 상가에 긴히 쓸 것을 가지고 와 부조(扶助)함이 좋으니라”는 규정을 따라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시신을 정성껏 모셨으며, 교우 장사에 최선을 다해 봉사하였다. 또한 “모여 공번되이 송경(誦經)할 때에 상가에 모인 교우는 일제히 와 한가지로 송경할 것이요, 하나(라)도 밖에 따로 있어 외교인과 같이 담배 먹으며 웃으며 지껄이지 못할 것이니…”라는 규정도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상여계, 상장계로부터 연령회까지
1886년 한불조약을 계기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에 지역교회가 시행한 장례 사업이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91년경에는 전주 전동본당에 연령회가 조직되었다. 1910년대의 교회 상장례와 관계된 상여계(喪輿契)나 상장계(喪葬契) 같은 단체는 금전적인 부조나 기도, 미사 봉헌 등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선 사업과 봉사 활동도 함께하였다. 1912년에 발족한 천주교중보험회(天主敎中保險會)는 오늘날의 보험처럼 회원을 모집하여 회비를 거둔 뒤에 회원 가운데 상을 당한 이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해 주었다. 몇몇 본당 연령회는 해마다 회비를 적립하여 회원이 선종하였을 때 그리고 매년 그의 기일(忌日)에 미사를 봉헌하였다. 1920~1930년대의 대부분 본당 연령회는 상가 봉사와 금전적인 부조, 위령 기도와 미사 봉헌 등 오늘날 본당 연령회의 모습과 비슷하지만, 전 교회 차원의 보편적인 단체로까지 확산되지는 못했다.(방상근, 「연령회」, 교회와 역사, 2001년 1월호 참조)
1970년대가 되면 대도시에 인구가 급증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도 갑자기 늘어났다. 대도시 본당들은 급격하게 늘어난 신자들을 감당할 수 없어 부득이 본당을 분할해야 했고, 자본당(子本堂)들은 교회 묘지를 확보하는 문제와, 여러 지방에서 새로 유입되어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교우들의 장례를 감당해야 하는 문제 등이 심각하게 부각됐다. 본당들은 기존 연령회를 활성화하거나 새로 연령회를 조직하여 교우들이 선종했을 때 수행해야 할 갖가지 업무들을 본격적으로 맡기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연령회는 지난날의 연령회와 겉모습은 어느 정도 비슷해 보이지만 역할은 더 많아지고 전문화하였다. 임종 전부터 하관 이후까지 바쳐야 할 기도, 예식 준비와 참여 같은 신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은 물론 경황이 없는 유족을 대신하여 상가등(喪家燈)을 설치하는 것과 같은 뒤치다꺼리와 장례 기간에 필요한 업무 처리, 장의사(葬儀社)가 취급하던 염습까지 손수 하는 등 오늘날 상조회사의 업무보다 훨씬 많고 다양한 일들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일정한 시기까지는 염습이나 사후 행정 처리와 같은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는 일이 연령회원들의 중심 업무였기 때문에 염습을 능숙하게 하는 이를 우대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대부분 고인이 살던 집이 아닌 장례식장이나 요양원에서 장례를 거행하고, 매장보다 화장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을 정도로 장례 환경이 달라졌다. 따라서 연령회원들은 이전의 장례 실무보다는 위령 기도, 예식 준비와 참여, 환자 호스피스, 진정한 형제애에서 우러나오는 유족 돌봄 등과 같은 신앙적이고 내면적인 역할을 우선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여전히 복음 전파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장례봉사, 신앙 선조들의 선교는 말보다 행동으로
이처럼 오늘날 장례 봉사와 위령기도는 거의 연령회가 전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과연 주님 안에서 같은 형제자매들에 대한 장례 봉사와 위령기도가 이들만의 몫일까? 물론 현대 사회는 잠시도 틈을 낼 수 없을 만큼 바쁘게 일해도 살기 어렵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한 시간 정도 상가에서 위령기도를 바치거나, 장례미사를 봉헌할 틈마저 낼 수 없을까? 값싼 관도 구입하지 못하는 이웃을 위해 몇 푼도 부조할 수 없을까? 신앙의 선조들은 극심한 박해 때도 목숨 걸고 교우들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가난한 교우의 장례는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돈을 모아 유족들이 부끄럽지 않게 정성껏 치러 주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선교는 말보다 행동, 그보다 불굴의 신앙과 끝없이 넘쳐 나는 주님과 이웃 사랑 정신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크고 단단한 선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위령기도] (8 · 끝) 위령기도의 보존과 계승의 문제점
한국 정서 담긴 전통음악 특성 그대로 악보에 옮겨야
위령기도의 전승과 보존 문제
위령기도는 정화 중에 있는 영혼들을 위하여 가톨릭신자들이 드리는 기도이며, 그 공로를 통하여 상호간에 구원을 얻게 된다는 믿음이다. 서양에서 비롯되었지만, 한국 실정에 맞는 가락과 문화, 예식, 언어로 정착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전승되었다.
반면, 위령기도의 악보화는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 구전되어오던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각 교구별이나 본당별로 차별화되던 연도의 특성을 잃고 통일화를 가져왔다.
오늘날은 성경의 다른 해석과 예식의 간소화로 인하여 위령기도의 기도문과 악보 수정 작업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이다. 이번 시간에는 위령기도의 악보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살펴보고 올바른 보존과 계승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악보가 실제를 충실하게 반영해야
위령기도의 악보는 실제 노래와 다르기 때문에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첫째, 위령기도가 가지고 있는 호소력과 간절함을 내포하는 시김새는 악상기호로서 반드시 표기되어야 한다. 수직적인(화성) 서양음악에 악상기호가 필요한 것처럼 수평적인(단성부) 한국음악에는 시김새(꾸밈음) 및 악상기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국음악 중에도 자신의 감정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민속악보다는, 파스카의 신비와 통공에 대한 믿음이 정악의 계면조에 적합하다.
시김새는 한박이나 두박의 정확한 길이로 표기되는 것이 아니라 앞꾸밈음이나 뒤꾸밈음의 장식음으로 표기 되어야 하며, 규칙적인 시김새 표시가 바람직하다. 정확한 시가의 음이 시김새로 주장되는 사례가 있지만, 시김새는 음을 꾸며주는 악상기호이다.
현행 악보에는 시김새 표기가 없지만, 실제 노래에서는 흔들어주는 요성(搖聲, 〰), 흘러내리는 퇴성(退聲,◝), 밀어 올리는 추성(推聲, ◞)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지역별 가창자별로 가장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시김새이기 때문에, 긴 시가의 최저음에는 요성(〰), 낮은음에서 높은 음으로 올라갈 때는 추성(◞), 높은음에서 낮은음으로 내려갈 때는 퇴성(◝)이 표기되어야 한다.
둘째, 음표 위에 표기된 셋잇단음표는 삭제하고 음절에 맞는 리듬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말붙임은 첫 음에 강세가 들어가므로, 대부분의 전통노래는 첫 박을 강하게 부르고, 마디 단위가 아닌 장단 단위로서 중간에 중간 강이 들어간다. 위령기도 역시 정확한 언어전달을 위한 기도문이며, 우리의 고유한 노래이기에 첫 박을 강하게 부르고, 중간에 “하느님”, “그리스도님”등 문단의 주제어를 강하게 부르면 된다.
그러나 현행 음표 위의 표기(﹇)는 음악의 강약을 서양식인 강약약(3박)이나 강약 중간약(2박) 등으로 혼돈스럽게 부르도록 조장하고 있으며, 리듬 역시 변형이 많아 가창하기 어렵다.
기도문은 음절에 따라 1음절은 장, 2음절은 단장, 3음절은 1음절+2음절(장 단장) 혹은 2음절+1음절(단장 장), 4음절은 2음절+2음절(단장 단장) 등으로 반복 되어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언어를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사람에게 익숙한 3소박의 표기로 수정되어야한다. 즉, 장은 점4분음표(♩.), 단장은 8분음표(♪)와 4분음표(♩) 등 박자에 맞게 표기해서 해결되어야 한다.
다양함을 반영하여 위령기도의 변질을 막아야
이상의 제안은 200여 년 넘게 이어오는 위령기도가 다양한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어 변질되는 것을 막고 전통의 방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상장예식」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만든 것이기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해적판을 만들어 사용하거나 개인 취향에 따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현행 악보는 위에 열거한 문제점 이외에도 많은 문제점을 지녔기에 교구별, 지구별, 본당별로 다양한 해적판이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의 해석이 바뀌고, 상장예식이 간소화된 현실에서는 기도문과 악보의 수정 작업이 시급하다. 기도문은 2005년 이후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발행된 「성경」을, 예식은 2017년 주교회의 결정을, 그리고 악보는 위에서 제안된 내용이 함께 반영되길 기대해 본다.
위령기도는 천주교를 넘어 우리의 문화유산
유네스코(UNESCO) 세계 문화 위원회는 세계적으로 우수하고 가치 있는 각국의 문화유산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 발표하였는데, 불국사의 석굴암, 종묘, 훈민정음 등 문화유산과 기록유산은 물론, 무형유산에 종묘제례 및 제례악, 판소리, 강릉단오제가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제례음악인 종묘제례악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인의 관심을 끄는 것과 같이 각 지방의 위령기도 역시 문화재로 지정된다면 우리 민족의 예술성이나 국민성을 드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기존의 위령기도는 문화재로 지정하고 다양한 기도문을 활용한 위령기도는 전례음악으로 보급하여 미사전례뿐 아니라 한국전통음악에도 뿌리를 내려야 할 것이다.
[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성탄절이면 생각나는 꽃들과 식물들
짙은 녹색 식물들 그리고 그 사이에 붉거나 흰 꽃들을 놓아두기만 해도 성탄 분위기는 한층 더 살아난다. 성탄 즈음에는 아름다운 상징성과 의미로 그 정취를 돋우는 꽃들이며 식물들이 떠오른다. 포인세티아, 크리스마스로즈, 호랑가시나무, 크리스마스선인장, 겨우살이, 아이비 등이다.
포인세티아(Poinsettia)
포인세티아는 한눈에 보아도 성탄절의 식물이다.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기온이 떨어지는 성탄 무렵이면 포인세티아 상단부의 포엽(苞葉)들이 선명한 빨간색으로 변한다. 더러는 순백색이나 얼룩무늬를 띤 분홍색이 되기도 한다. 또 어떤 것은 별 모양으로 생겨서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베들레헴의 별을 연상시킨다. 멕시코 산악지대 원산의 상록 관목인 이 식물을 고대 아즈텍 인(멕시코 인디언)들은 정결과 순수함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멕시코의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의 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멕시코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리아라는 어린 소녀와 남동생 파블로가 포인세티아를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한다. 두 아이는 너무나 가난해서 성탄 전야에 열리는 잔치에 가져갈 예물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아기 예수님께 빈손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성당으로 가던 오누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길섶의 풀들을 뜯어 다발을 엮었다. 그들이 성당에 도착하자, 잡초를 뜯어 묶은 초라한 다발을 보고 다른 아이들이 오누이를 놀려댔다. 그런데 두 아이가 풀 다발을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 발치에 놓아 드리는 순간, 그 다발의 포인세티아에서 색깔도 선명한 빨간 꽃이 피어났다.
크리스마스로즈(Christmas Rose)
크리스마스로즈는 유럽의 산악지대에서 한겨울에 꽃이 피는 까닭에 유럽에서는 널리 알려진 성탄절 꽃이다. 이 식물은 이름과는 다르게 장미가 아니라 미나리아재비과의 식물이다. 하지만 꽃잎의 바탕은 희고 그 끄트머리는 분홍인 이 야생화의 모습이 들장미처럼 생기기는 했다.
유럽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크리스마스로즈는 마델론이라는 양치기 소녀가 발견했다고 한다. 몹시 추운 어느 겨울 밤, 산기슭에서 양들을 돌보던 마델론은 동방박사들과 목동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릴 예물을 들고서 지나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손에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그리고 과일이며 꿀, 비둘기 등을 들려 있었다. 마델론은 새로 태어난 왕에게 드릴 것이라곤 하다못해 작은 꽃조차도 없다는 생각에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는 쌓인 눈을 걷어냈다. 그러자 눈에 덮여 있던 크리스마스로즈의 앙증맞은 모습이 드러났다. 마델론은 그 꽃송이들을 아기 예수님께 선물로 드리기 위해 잘라 모았다.
크리스마스선인장(Christmas Cactus, 가재발선인장, 게발선인장)
크리스마스선인장 또한 성탄절의 식물로 인기가 많다. 우리에게는 가재발선인장 또는 게발선인장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이 선인장과 다육식물은 브라질을 비롯한 남아메리카의 열대 지역이 원산지다. 낮이 짧은 겨울에 분홍색이며 빨간색 꽃들이 피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선인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분홍과 빨강 외에 자주, 주황, 자홍, 미색 등 꽃의 색깔이 다양하다. 치렁치렁 늘어진 줄기들이며 거기에 달려서 피는 꽃들은 성탄절에 트리에 달아 놓은 선물 바구니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회 선교사인 호세 신부가 볼리비아 밀림 지대의 원주민들에게 성경과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여 애써서 가르쳤는데, 그들은 성경과 교리의 개념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호세 신부를 신뢰하지도 신임하지도 않았다. 어느 해인가 호세 신부는 의기소침한 채로 외롭게 성탄 전야를 맞았다. 그럼에도 제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서 원주민들을 올바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 멀리서 자신이 가르친 성가를 흥겹게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고, 호세 신부는 몸을 돌려 성당 안으로 열을 지어 들어오는 마을 어린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저마다 밀림에서 꺾어 모은 꽃들을 품에 한가득 안고 있었다. 아기 예수님께 드릴 꽃들이었다. 이때부터 이 꽃은 크리스마스선인장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호랑가시나무(Holly)
상록 관목인 호랑가시나무는 가장자리에 뾰족한 가시들이 돋친 녹색 잎, 작고 흰 꽃, 성탄 무렵에 맺는 빨간 열매로 성탄절을 상징하는 식물이다. 유럽 원산의 호랑가시나무(Ilex aquifolium)와 아메리카 원산의 호랑가시나무(Ilex opaca)가 다르고, 한국과 중국에서 자라는 호랑가시나무(Ilex cornuta)가 또한 다르다. 유럽에서 처음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그곳의 호랑가시나무를 보면서 고향인 유럽의 호랑가시나무를 생각했고, 이내 성탄절 장식용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고대 켈트 인들은 이 식물을 영생의 상징으로 여겼다.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이 의미를 받아들이면서, 여기에 영원한 삶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이라는 상징성을 덧붙였다. 호랑가시나무의 녹색 잎은 영원한 삶을, 잎의 가시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통을, 빨간 열매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교회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린 목동이 아기 예수님께 드릴 왕관이라며 호랑가시나무로 엮은 화관을 가져왔다고 한다. 목동은 화관을 아기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 드리면서 자신의 예물이 하찮다는 생각에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목동의 눈물을 본 아기 예수님이 그 화관을 어루만졌는데, 그 순간 호랑가시나무의 잎들이 반들거리기 시작했고, 희던 열매들이 빨간색으로 변했다.
겨우살이(Mistletoe)
사람들은 성탄절을 맞아 흔히 겨우살이 가지로 집안을 장식하거나 현관에 걸어 둔다. 예전에 켈트의 사제들은 겨울 축제에 겨우살이를 사용했다. 추운 계절에 뿌리가 없는 채로 녹색을 유지하는 것을 보고 숭배한 것이다.
유럽에는 겨우살이 나무 아래에서 입을 맞추는 전통이 있는데, 이는 노르웨이 신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광명의 신이자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신인 발드르가 겨우살이 가지로 만든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흘린 눈물이 화살에 떨어져서 하얀 열매로 변했는데, 이 열매로 발드르의 상처가 아물었고 발드르는 되살아났다.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며 겨우살이 나무를 축복했고, 그 아래를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키스해 주겠노라고 맹세했다.
아이비(Ivy)와 상록수들
녹색은 오래전부터 영원한 삶(생명)과 하느님의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성을 상징해 왔다. 이런 면에서 겨우살이도 마찬가지지만, 겨울에도 녹색을 유지하는 아이비 또한 영원한 삶과 불사(不死)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죽음을 극복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신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때에 아이비는 특히 건물 외부를 장식하는 데 쓰인다.
그리고 소나무, 삼나무, 가문비나무 같은 상록수들은 오래전부터 치유력을 가진 마술의 나무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한겨울이 지나가고 낮의 길이가 차츰 길어지는 시기에 태양의 귀환과 생명의 소생을 기리며 지내는 고대인들의 축제와 의식에 상록수 가지들이 사용되곤 했다. 이러한 상징성이 그리스도교에도 받아들여져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되는 새로운 삶 또는 영원한 삶을 기원하며 상록수 가지로 화환을 엮어 문에 걸어 두게 되었다.
성탄절에는 빨간색, 흰색, 녹색, 황금색 그리고 은색처럼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색들이 어울린다. 그리고 이 색깔들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된 상징성 때문에 성탄절의 색이 되었다. 이를테면, 흰색은 정결과 순수(무구)와 평화를, 빨간색은 그리스도의 피를, 녹색은 영원한 삶(생명), 황금색 또는 은색은 (동방박사들을 안내한) 베들레헴의 별을 나타낸다. 그리고 사람들은 성탄절이 오면 이러한 상징성에 걸맞은 색의 꽃과 식물들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러한 식물들을 통해서 성탄의 의미와 기쁨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포인세티아의 눈부신 빨간색이든, 호랑가시나무의 따가운 가시든, 겨우살이의 낭만적인 매력이든 간에, 성탄 무렵이면 으레 떠오르는 꽃들이며 식물들로 해서 우리의 성탄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전례의 숲] 전례 기도와 개인 기도
기도를 가리키는 말들은 많습니다. “하느님과 대화” 또는 “하느님과 만남”이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기도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합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활동하는 믿음”입니다. 믿음 없는 기도는 빈 쭉정이이며, 기도 없는 믿음은 사그라지는 재입니다(J. 라칭거). 기도는 믿는 이들의 영혼이며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하느님께서 먼저 움직이십니다. 보기를 들면, 시간전례(성무일도)는 주님께 올리는 간구로 시작합니다. “주님, 제 입술을 열어주소서. 제 입이 당신 찬미를 전하오리다.”(시편 51). 기도의 바탕에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깨달음입니다. 실제로 기도하도록 입술을 열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비잔틴 시간전례는 이 진리를 더 구체적으로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침대에서 잠에서 일으키시어 제 지성과 제 마음을 밝히시고 제 입술을 열어주시어 제가 당신을 찬양하게 하시나이다. 아, 거룩한 삼위 하느님이시여!”
또한 어떤 기도도, 혼자 하는 기도도, 홀로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벗어나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홀로 기도할 때도 천사들 성인들 세상의 교우들도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바오로 사도는 이 가르침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 17-19). 쉬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명령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기도, 성모송, 묵주의 기도, 십자가의 길과 같은 정해진 기도를 계속하거나 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일까요? 그러한 방식은 가능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으며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사람은 일하고 쉬고, 다른 이들과 소통도 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공식 기도인 시간전례(성무일도)는 하루의 특정 시간들을 축성함으로써 하루의 모든 시간을 거룩하게 만들고 하느님께 속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이름 없는 순례자”처럼 호흡에 맞추어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익힐 수 있습니다. 또한 자주 짧은 화살기도로 하루의 순간순간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하루 동안 “기도의 정신을 간직하는 것, 곧 언제나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의식하며 하느님과 일치 안에 머물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F. 아린체). 기도는 입으로만 하지 않고. 머리로만 하지도 않습니다. 인격 전체로 기도합니다.
전례 기도는 교회의 공식 기도로 공적인 기도
기도는 전례 기도와 신심기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례 기도, 공동 기도, 개인 기도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전례 기도는 공동기도의 근원이고 최고의 형태입니다. 공동 기도에는 전례 기도와 신심기도가 있고, 신심 기도는 공동으로도 개인으로도 바칠 수 있습니다.
전례 기도는 교회의 공식 기도로 공적인 기도입니다. 미사와 시간전례(성무일도)가 대표적입니다. 공적이고 공식적인 기도이기 때문에 교회가 규정한 본문과 예식을 따라야 합니다. 전례 기도 밖에도 신자들이 공동으로 바치는 기도가 있습니다. 묵주 기도, 십자가의 길, 성체 조배,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묵상, 구일 기도, 성모님과 성인들께 바치는 기도와 같이 여러 신심기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들은 신자들이 성당이나 다른 곳에 함께 모여 바치지만 아무데서나 개인적으로도 바칠 수도 있습니다. 홀로 바치는 신심기도(개인 기도)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감사와 찬양, 탄원과 전구 같은 정감을 더욱 깊이 표현할 수 있고, 침묵 안에 더 길게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 기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신자들의 영성 생활은 전례에만 참여해서 끝나지 않는다. 신자는 공동 기도에 불림을 받지만 또한 골방에 들어가 아버지께 홀로 기도해야 한다.”(전례 12항)
전례는 모든 기도의 샘이며 정점입니다. 전례는 기도를 가르치는 학교이기도 합니다. 교육자는 성령이십니다(교리서 1091). 전례는 기도를 순수하고 올바르고 품위 있게 표현합니다. 무엇보다도 개인 기도의 내용과 형식에 끊임없이 풍요로운 영감을 줍니다. 전례에서 말씀을 들음, 관상과 침묵, 경배, 찬미, 감사, 봉헌, 간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전례 체험을 자신의 기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전례에게 감동을 요구하거나 자기 필요를 채워주기를 바라기보다는 그 안에서 울려나오는 영적인 영향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를 벗어나 하느님께 되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례 안에서 침묵은 예식의 장식품이 아니라 구성 요소
전례 기도에는 세 가지 요소들이 움직입니다(G. 보셀리). 하느님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을 내면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목소리로 해석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실 성경은 하느님을 말씀으로, 대화로, 관계로 체험합니다.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7, 23) 이러한 체험은 “들어라, 이스라엘아”(쉐마 이스라엘; 신명 6, 4) 기도로 변합니다. 이는 유다교 전통에서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바치는 가장 중요한 기도입니다.
둘째는 들은 말씀을 내면으로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요한 카시아노는 이집트 수도원에서 수도승들이 시편 바치는 방식을 전합니다. 이에 따르면 먼저 선창자가 노래하는 시편을 모두 앉아서 듣습니다. 이어서 시편들 사이에는 침묵 기도의 여백이(interiectio orationis) 뒤따릅니다. 이 침묵은 영적인 깨달음을 지향합니다(1코린 14, 15). 이는 미사나 시간전례에서 성경 말씀을 듣고 잠깐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해석 활동입니다. 해석은 문자의 뜻을 넘어 다른 의미, 곧 살아 있는 의미를 밝히는 활동입니다. 듣고 새긴 말씀을 이제 자기 말로 표현합니다. 이렇게 같은 시편을 낭송하면서 늘 “새로운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전례는 관상의 큰 스승입니다. 관상은 기도 가운데 가장 단순한 형태로서 전례의 한 부분이자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올바른 관상은 전례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전례로 돌아갑니다. 전례의 말씀과 기도와 성사는 관상의 불씨입니다. “지금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로 응답하며, 성사로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관상에서 중요한 것은 침묵입니다. “침묵이 없으면 기도가 없습니다. 침묵은 말하지 않는 것을 넘어 마음을 다해 듣는 것입니다.”(M. 드브렐). 전례는 침묵에 예식의 품위를 줍니다. 다시 말하여, 전례 안에서 침묵은 예식의 장식품이 아니라 구성 요소입니다. 침묵은 표지의 중개가 더 이상 필요 없이 직접 그분과 만나도록 이끌어줍니다. 전례는 이렇게 체험합니다.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주님,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내려왔나이다.”(성탄 팔일 축제 입당송; 지혜 18, 14-15).
전례는 가장 훌륭한 찬미는 침묵이라고 가르칩니다. (히브리) 시편 65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침묵은 당신께 찬미이옵니다.”(Tibi silentium laus). 우리가 말과 생각을 멈추고 침묵 속에 감동하고 놀랄 때, 나아가 침묵만 남을 때 하느님은 찬미를 받으십니다. 사실 하느님과 만나는 경험은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신비스러운 만남은 자주 침묵으로 표현됩니다.
[한국의 위령기도] (7) 선교 방법으로서 장례 봉사와 위령기도
교우의 장례를 내 일처럼 함께하는 모습에 선교 열매 맺기도
천주교의 장례봉사
오늘날 한국교회의 장례 봉사는 곳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개 본당 연령회와 해당 지역 교우들을 중심으로 수행한다. 박해시대의 조선교회는, 어려운 일을 만나면 서로 돕고 함께 헤쳐 나가는(患難相救), 주님 안에서 형제적 사랑으로 살았으므로 이웃 교우가 선종하면 그 장례는 남이 아닌 바로 내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로 알고 함께 모여 위령기도를 바치고 장례에 필요한 모든 일에 힘을 모았다.
그래서 천주교와 천주교 신자에 관한 편견과 불편이 여전한 상황에서도 개종자까지 생길 정도로 외교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텬쥬셩교례규」 ‘상장규구’의 “교우의 장사를 만나매… 시체는 이 오주 예수의 지체(肢體)이요 성신(聖神)의 궁전이었음을 깊이 생각할 것이니라”와 “교우 죽으매 각처 교우들이 다 인애(仁愛)하는 덕을 채우고, 또 성교회의 실(實)됨을 널리 펴기로 마땅히 많이 모일 것이요, 각각 형세(形勢)대로 상가에 긴히 쓸 것을 가지고 와 부조(扶助)함이 좋으니라”는 규정을 따라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시신을 정성껏 모셨으며, 교우 장사에 최선을 다해 봉사하였다. 또한 “모여 공번되이 송경(誦經)할 때에 상가에 모인 교우는 일제히 와 한가지로 송경할 것이요, 하나(라)도 밖에 따로 있어 외교인과 같이 담배 먹으며 웃으며 지껄이지 못할 것이니…”라는 규정도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상여계, 상장계로부터 연령회까지
1886년 한불조약을 계기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에 지역교회가 시행한 장례 사업이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91년경에는 전주 전동본당에 연령회가 조직되었다. 1910년대의 교회 상장례와 관계된 상여계(喪輿契)나 상장계(喪葬契) 같은 단체는 금전적인 부조나 기도, 미사 봉헌 등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선 사업과 봉사 활동도 함께하였다. 1912년에 발족한 천주교중보험회(天主敎中保險會)는 오늘날의 보험처럼 회원을 모집하여 회비를 거둔 뒤에 회원 가운데 상을 당한 이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해 주었다. 몇몇 본당 연령회는 해마다 회비를 적립하여 회원이 선종하였을 때 그리고 매년 그의 기일(忌日)에 미사를 봉헌하였다. 1920~1930년대의 대부분 본당 연령회는 상가 봉사와 금전적인 부조, 위령 기도와 미사 봉헌 등 오늘날 본당 연령회의 모습과 비슷하지만, 전 교회 차원의 보편적인 단체로까지 확산되지는 못했다.(방상근, 「연령회」, 교회와 역사, 2001년 1월호 참조)
1970년대가 되면 대도시에 인구가 급증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도 갑자기 늘어났다. 대도시 본당들은 급격하게 늘어난 신자들을 감당할 수 없어 부득이 본당을 분할해야 했고, 자본당(子本堂)들은 교회 묘지를 확보하는 문제와, 여러 지방에서 새로 유입되어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교우들의 장례를 감당해야 하는 문제 등이 심각하게 부각됐다. 본당들은 기존 연령회를 활성화하거나 새로 연령회를 조직하여 교우들이 선종했을 때 수행해야 할 갖가지 업무들을 본격적으로 맡기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연령회는 지난날의 연령회와 겉모습은 어느 정도 비슷해 보이지만 역할은 더 많아지고 전문화하였다. 임종 전부터 하관 이후까지 바쳐야 할 기도, 예식 준비와 참여 같은 신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은 물론 경황이 없는 유족을 대신하여 상가등(喪家燈)을 설치하는 것과 같은 뒤치다꺼리와 장례 기간에 필요한 업무 처리, 장의사(葬儀社)가 취급하던 염습까지 손수 하는 등 오늘날 상조회사의 업무보다 훨씬 많고 다양한 일들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일정한 시기까지는 염습이나 사후 행정 처리와 같은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는 일이 연령회원들의 중심 업무였기 때문에 염습을 능숙하게 하는 이를 우대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대부분 고인이 살던 집이 아닌 장례식장이나 요양원에서 장례를 거행하고, 매장보다 화장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을 정도로 장례 환경이 달라졌다. 따라서 연령회원들은 이전의 장례 실무보다는 위령 기도, 예식 준비와 참여, 환자 호스피스, 진정한 형제애에서 우러나오는 유족 돌봄 등과 같은 신앙적이고 내면적인 역할을 우선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여전히 복음 전파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장례봉사, 신앙 선조들의 선교는 말보다 행동으로
이처럼 오늘날 장례 봉사와 위령기도는 거의 연령회가 전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과연 주님 안에서 같은 형제자매들에 대한 장례 봉사와 위령기도가 이들만의 몫일까? 물론 현대 사회는 잠시도 틈을 낼 수 없을 만큼 바쁘게 일해도 살기 어렵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한 시간 정도 상가에서 위령기도를 바치거나, 장례미사를 봉헌할 틈마저 낼 수 없을까? 값싼 관도 구입하지 못하는 이웃을 위해 몇 푼도 부조할 수 없을까? 신앙의 선조들은 극심한 박해 때도 목숨 걸고 교우들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가난한 교우의 장례는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돈을 모아 유족들이 부끄럽지 않게 정성껏 치러 주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선교는 말보다 행동, 그보다 불굴의 신앙과 끝없이 넘쳐 나는 주님과 이웃 사랑 정신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크고 단단한 선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위령기도] (8 · 끝) 위령기도의 보존과 계승의 문제점
한국 정서 담긴 전통음악 특성 그대로 악보에 옮겨야
위령기도의 전승과 보존 문제
위령기도는 정화 중에 있는 영혼들을 위하여 가톨릭신자들이 드리는 기도이며, 그 공로를 통하여 상호간에 구원을 얻게 된다는 믿음이다. 서양에서 비롯되었지만, 한국 실정에 맞는 가락과 문화, 예식, 언어로 정착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전승되었다.
반면, 위령기도의 악보화는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 구전되어오던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각 교구별이나 본당별로 차별화되던 연도의 특성을 잃고 통일화를 가져왔다.
오늘날은 성경의 다른 해석과 예식의 간소화로 인하여 위령기도의 기도문과 악보 수정 작업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이다. 이번 시간에는 위령기도의 악보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살펴보고 올바른 보존과 계승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악보가 실제를 충실하게 반영해야
위령기도의 악보는 실제 노래와 다르기 때문에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첫째, 위령기도가 가지고 있는 호소력과 간절함을 내포하는 시김새는 악상기호로서 반드시 표기되어야 한다. 수직적인(화성) 서양음악에 악상기호가 필요한 것처럼 수평적인(단성부) 한국음악에는 시김새(꾸밈음) 및 악상기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국음악 중에도 자신의 감정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민속악보다는, 파스카의 신비와 통공에 대한 믿음이 정악의 계면조에 적합하다.
시김새는 한박이나 두박의 정확한 길이로 표기되는 것이 아니라 앞꾸밈음이나 뒤꾸밈음의 장식음으로 표기 되어야 하며, 규칙적인 시김새 표시가 바람직하다. 정확한 시가의 음이 시김새로 주장되는 사례가 있지만, 시김새는 음을 꾸며주는 악상기호이다.
현행 악보에는 시김새 표기가 없지만, 실제 노래에서는 흔들어주는 요성(搖聲, 〰), 흘러내리는 퇴성(退聲,◝), 밀어 올리는 추성(推聲, ◞)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지역별 가창자별로 가장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시김새이기 때문에, 긴 시가의 최저음에는 요성(〰), 낮은음에서 높은 음으로 올라갈 때는 추성(◞), 높은음에서 낮은음으로 내려갈 때는 퇴성(◝)이 표기되어야 한다.
둘째, 음표 위에 표기된 셋잇단음표는 삭제하고 음절에 맞는 리듬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말붙임은 첫 음에 강세가 들어가므로, 대부분의 전통노래는 첫 박을 강하게 부르고, 마디 단위가 아닌 장단 단위로서 중간에 중간 강이 들어간다. 위령기도 역시 정확한 언어전달을 위한 기도문이며, 우리의 고유한 노래이기에 첫 박을 강하게 부르고, 중간에 “하느님”, “그리스도님”등 문단의 주제어를 강하게 부르면 된다.
그러나 현행 음표 위의 표기(﹇)는 음악의 강약을 서양식인 강약약(3박)이나 강약 중간약(2박) 등으로 혼돈스럽게 부르도록 조장하고 있으며, 리듬 역시 변형이 많아 가창하기 어렵다.
기도문은 음절에 따라 1음절은 장, 2음절은 단장, 3음절은 1음절+2음절(장 단장) 혹은 2음절+1음절(단장 장), 4음절은 2음절+2음절(단장 단장) 등으로 반복 되어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언어를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사람에게 익숙한 3소박의 표기로 수정되어야한다. 즉, 장은 점4분음표(♩.), 단장은 8분음표(♪)와 4분음표(♩) 등 박자에 맞게 표기해서 해결되어야 한다.
다양함을 반영하여 위령기도의 변질을 막아야
이상의 제안은 200여 년 넘게 이어오는 위령기도가 다양한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어 변질되는 것을 막고 전통의 방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상장예식」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만든 것이기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해적판을 만들어 사용하거나 개인 취향에 따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현행 악보는 위에 열거한 문제점 이외에도 많은 문제점을 지녔기에 교구별, 지구별, 본당별로 다양한 해적판이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의 해석이 바뀌고, 상장예식이 간소화된 현실에서는 기도문과 악보의 수정 작업이 시급하다. 기도문은 2005년 이후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발행된 「성경」을, 예식은 2017년 주교회의 결정을, 그리고 악보는 위에서 제안된 내용이 함께 반영되길 기대해 본다.
위령기도는 천주교를 넘어 우리의 문화유산
유네스코(UNESCO) 세계 문화 위원회는 세계적으로 우수하고 가치 있는 각국의 문화유산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 발표하였는데, 불국사의 석굴암, 종묘, 훈민정음 등 문화유산과 기록유산은 물론, 무형유산에 종묘제례 및 제례악, 판소리, 강릉단오제가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제례음악인 종묘제례악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인의 관심을 끄는 것과 같이 각 지방의 위령기도 역시 문화재로 지정된다면 우리 민족의 예술성이나 국민성을 드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기존의 위령기도는 문화재로 지정하고 다양한 기도문을 활용한 위령기도는 전례음악으로 보급하여 미사전례뿐 아니라 한국전통음악에도 뿌리를 내려야 할 것이다.
[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성탄절이면 생각나는 꽃들과 식물들
짙은 녹색 식물들 그리고 그 사이에 붉거나 흰 꽃들을 놓아두기만 해도 성탄 분위기는 한층 더 살아난다. 성탄 즈음에는 아름다운 상징성과 의미로 그 정취를 돋우는 꽃들이며 식물들이 떠오른다. 포인세티아, 크리스마스로즈, 호랑가시나무, 크리스마스선인장, 겨우살이, 아이비 등이다.
포인세티아(Poinsettia)
포인세티아는 한눈에 보아도 성탄절의 식물이다.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기온이 떨어지는 성탄 무렵이면 포인세티아 상단부의 포엽(苞葉)들이 선명한 빨간색으로 변한다. 더러는 순백색이나 얼룩무늬를 띤 분홍색이 되기도 한다. 또 어떤 것은 별 모양으로 생겨서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베들레헴의 별을 연상시킨다. 멕시코 산악지대 원산의 상록 관목인 이 식물을 고대 아즈텍 인(멕시코 인디언)들은 정결과 순수함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멕시코의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의 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멕시코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리아라는 어린 소녀와 남동생 파블로가 포인세티아를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한다. 두 아이는 너무나 가난해서 성탄 전야에 열리는 잔치에 가져갈 예물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아기 예수님께 빈손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성당으로 가던 오누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길섶의 풀들을 뜯어 다발을 엮었다. 그들이 성당에 도착하자, 잡초를 뜯어 묶은 초라한 다발을 보고 다른 아이들이 오누이를 놀려댔다. 그런데 두 아이가 풀 다발을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 발치에 놓아 드리는 순간, 그 다발의 포인세티아에서 색깔도 선명한 빨간 꽃이 피어났다.
크리스마스로즈(Christmas Rose)
크리스마스로즈는 유럽의 산악지대에서 한겨울에 꽃이 피는 까닭에 유럽에서는 널리 알려진 성탄절 꽃이다. 이 식물은 이름과는 다르게 장미가 아니라 미나리아재비과의 식물이다. 하지만 꽃잎의 바탕은 희고 그 끄트머리는 분홍인 이 야생화의 모습이 들장미처럼 생기기는 했다.
유럽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크리스마스로즈는 마델론이라는 양치기 소녀가 발견했다고 한다. 몹시 추운 어느 겨울 밤, 산기슭에서 양들을 돌보던 마델론은 동방박사들과 목동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릴 예물을 들고서 지나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손에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그리고 과일이며 꿀, 비둘기 등을 들려 있었다. 마델론은 새로 태어난 왕에게 드릴 것이라곤 하다못해 작은 꽃조차도 없다는 생각에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는 쌓인 눈을 걷어냈다. 그러자 눈에 덮여 있던 크리스마스로즈의 앙증맞은 모습이 드러났다. 마델론은 그 꽃송이들을 아기 예수님께 선물로 드리기 위해 잘라 모았다.
크리스마스선인장(Christmas Cactus, 가재발선인장, 게발선인장)
크리스마스선인장 또한 성탄절의 식물로 인기가 많다. 우리에게는 가재발선인장 또는 게발선인장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이 선인장과 다육식물은 브라질을 비롯한 남아메리카의 열대 지역이 원산지다. 낮이 짧은 겨울에 분홍색이며 빨간색 꽃들이 피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선인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분홍과 빨강 외에 자주, 주황, 자홍, 미색 등 꽃의 색깔이 다양하다. 치렁치렁 늘어진 줄기들이며 거기에 달려서 피는 꽃들은 성탄절에 트리에 달아 놓은 선물 바구니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회 선교사인 호세 신부가 볼리비아 밀림 지대의 원주민들에게 성경과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여 애써서 가르쳤는데, 그들은 성경과 교리의 개념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호세 신부를 신뢰하지도 신임하지도 않았다. 어느 해인가 호세 신부는 의기소침한 채로 외롭게 성탄 전야를 맞았다. 그럼에도 제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서 원주민들을 올바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 멀리서 자신이 가르친 성가를 흥겹게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고, 호세 신부는 몸을 돌려 성당 안으로 열을 지어 들어오는 마을 어린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저마다 밀림에서 꺾어 모은 꽃들을 품에 한가득 안고 있었다. 아기 예수님께 드릴 꽃들이었다. 이때부터 이 꽃은 크리스마스선인장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호랑가시나무(Holly)
상록 관목인 호랑가시나무는 가장자리에 뾰족한 가시들이 돋친 녹색 잎, 작고 흰 꽃, 성탄 무렵에 맺는 빨간 열매로 성탄절을 상징하는 식물이다. 유럽 원산의 호랑가시나무(Ilex aquifolium)와 아메리카 원산의 호랑가시나무(Ilex opaca)가 다르고, 한국과 중국에서 자라는 호랑가시나무(Ilex cornuta)가 또한 다르다. 유럽에서 처음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그곳의 호랑가시나무를 보면서 고향인 유럽의 호랑가시나무를 생각했고, 이내 성탄절 장식용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고대 켈트 인들은 이 식물을 영생의 상징으로 여겼다.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이 의미를 받아들이면서, 여기에 영원한 삶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이라는 상징성을 덧붙였다. 호랑가시나무의 녹색 잎은 영원한 삶을, 잎의 가시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통을, 빨간 열매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교회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린 목동이 아기 예수님께 드릴 왕관이라며 호랑가시나무로 엮은 화관을 가져왔다고 한다. 목동은 화관을 아기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 드리면서 자신의 예물이 하찮다는 생각에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목동의 눈물을 본 아기 예수님이 그 화관을 어루만졌는데, 그 순간 호랑가시나무의 잎들이 반들거리기 시작했고, 희던 열매들이 빨간색으로 변했다.
겨우살이(Mistletoe)
사람들은 성탄절을 맞아 흔히 겨우살이 가지로 집안을 장식하거나 현관에 걸어 둔다. 예전에 켈트의 사제들은 겨울 축제에 겨우살이를 사용했다. 추운 계절에 뿌리가 없는 채로 녹색을 유지하는 것을 보고 숭배한 것이다.
유럽에는 겨우살이 나무 아래에서 입을 맞추는 전통이 있는데, 이는 노르웨이 신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광명의 신이자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신인 발드르가 겨우살이 가지로 만든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흘린 눈물이 화살에 떨어져서 하얀 열매로 변했는데, 이 열매로 발드르의 상처가 아물었고 발드르는 되살아났다.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며 겨우살이 나무를 축복했고, 그 아래를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키스해 주겠노라고 맹세했다.
아이비(Ivy)와 상록수들
녹색은 오래전부터 영원한 삶(생명)과 하느님의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성을 상징해 왔다. 이런 면에서 겨우살이도 마찬가지지만, 겨울에도 녹색을 유지하는 아이비 또한 영원한 삶과 불사(不死)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죽음을 극복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신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때에 아이비는 특히 건물 외부를 장식하는 데 쓰인다.
그리고 소나무, 삼나무, 가문비나무 같은 상록수들은 오래전부터 치유력을 가진 마술의 나무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한겨울이 지나가고 낮의 길이가 차츰 길어지는 시기에 태양의 귀환과 생명의 소생을 기리며 지내는 고대인들의 축제와 의식에 상록수 가지들이 사용되곤 했다. 이러한 상징성이 그리스도교에도 받아들여져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되는 새로운 삶 또는 영원한 삶을 기원하며 상록수 가지로 화환을 엮어 문에 걸어 두게 되었다.
성탄절에는 빨간색, 흰색, 녹색, 황금색 그리고 은색처럼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색들이 어울린다. 그리고 이 색깔들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된 상징성 때문에 성탄절의 색이 되었다. 이를테면, 흰색은 정결과 순수(무구)와 평화를, 빨간색은 그리스도의 피를, 녹색은 영원한 삶(생명), 황금색 또는 은색은 (동방박사들을 안내한) 베들레헴의 별을 나타낸다. 그리고 사람들은 성탄절이 오면 이러한 상징성에 걸맞은 색의 꽃과 식물들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러한 식물들을 통해서 성탄의 의미와 기쁨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포인세티아의 눈부신 빨간색이든, 호랑가시나무의 따가운 가시든, 겨우살이의 낭만적인 매력이든 간에, 성탄 무렵이면 으레 떠오르는 꽃들이며 식물들로 해서 우리의 성탄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전례의 숲] 전례 기도와 개인 기도
기도를 가리키는 말들은 많습니다. “하느님과 대화” 또는 “하느님과 만남”이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기도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합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활동하는 믿음”입니다. 믿음 없는 기도는 빈 쭉정이이며, 기도 없는 믿음은 사그라지는 재입니다(J. 라칭거). 기도는 믿는 이들의 영혼이며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하느님께서 먼저 움직이십니다. 보기를 들면, 시간전례(성무일도)는 주님께 올리는 간구로 시작합니다. “주님, 제 입술을 열어주소서. 제 입이 당신 찬미를 전하오리다.”(시편 51). 기도의 바탕에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깨달음입니다. 실제로 기도하도록 입술을 열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비잔틴 시간전례는 이 진리를 더 구체적으로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침대에서 잠에서 일으키시어 제 지성과 제 마음을 밝히시고 제 입술을 열어주시어 제가 당신을 찬양하게 하시나이다. 아, 거룩한 삼위 하느님이시여!”
또한 어떤 기도도, 혼자 하는 기도도, 홀로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벗어나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홀로 기도할 때도 천사들 성인들 세상의 교우들도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바오로 사도는 이 가르침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 17-19). 쉬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명령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기도, 성모송, 묵주의 기도, 십자가의 길과 같은 정해진 기도를 계속하거나 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일까요? 그러한 방식은 가능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으며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사람은 일하고 쉬고, 다른 이들과 소통도 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공식 기도인 시간전례(성무일도)는 하루의 특정 시간들을 축성함으로써 하루의 모든 시간을 거룩하게 만들고 하느님께 속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이름 없는 순례자”처럼 호흡에 맞추어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익힐 수 있습니다. 또한 자주 짧은 화살기도로 하루의 순간순간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하루 동안 “기도의 정신을 간직하는 것, 곧 언제나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의식하며 하느님과 일치 안에 머물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F. 아린체). 기도는 입으로만 하지 않고. 머리로만 하지도 않습니다. 인격 전체로 기도합니다.
전례 기도는 교회의 공식 기도로 공적인 기도
기도는 전례 기도와 신심기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례 기도, 공동 기도, 개인 기도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전례 기도는 공동기도의 근원이고 최고의 형태입니다. 공동 기도에는 전례 기도와 신심기도가 있고, 신심 기도는 공동으로도 개인으로도 바칠 수 있습니다.
전례 기도는 교회의 공식 기도로 공적인 기도입니다. 미사와 시간전례(성무일도)가 대표적입니다. 공적이고 공식적인 기도이기 때문에 교회가 규정한 본문과 예식을 따라야 합니다. 전례 기도 밖에도 신자들이 공동으로 바치는 기도가 있습니다. 묵주 기도, 십자가의 길, 성체 조배,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묵상, 구일 기도, 성모님과 성인들께 바치는 기도와 같이 여러 신심기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들은 신자들이 성당이나 다른 곳에 함께 모여 바치지만 아무데서나 개인적으로도 바칠 수도 있습니다. 홀로 바치는 신심기도(개인 기도)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감사와 찬양, 탄원과 전구 같은 정감을 더욱 깊이 표현할 수 있고, 침묵 안에 더 길게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 기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신자들의 영성 생활은 전례에만 참여해서 끝나지 않는다. 신자는 공동 기도에 불림을 받지만 또한 골방에 들어가 아버지께 홀로 기도해야 한다.”(전례 12항)
전례는 모든 기도의 샘이며 정점입니다. 전례는 기도를 가르치는 학교이기도 합니다. 교육자는 성령이십니다(교리서 1091). 전례는 기도를 순수하고 올바르고 품위 있게 표현합니다. 무엇보다도 개인 기도의 내용과 형식에 끊임없이 풍요로운 영감을 줍니다. 전례에서 말씀을 들음, 관상과 침묵, 경배, 찬미, 감사, 봉헌, 간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전례 체험을 자신의 기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전례에게 감동을 요구하거나 자기 필요를 채워주기를 바라기보다는 그 안에서 울려나오는 영적인 영향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를 벗어나 하느님께 되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례 안에서 침묵은 예식의 장식품이 아니라 구성 요소
전례 기도에는 세 가지 요소들이 움직입니다(G. 보셀리). 하느님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을 내면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목소리로 해석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실 성경은 하느님을 말씀으로, 대화로, 관계로 체험합니다.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7, 23) 이러한 체험은 “들어라, 이스라엘아”(쉐마 이스라엘; 신명 6, 4) 기도로 변합니다. 이는 유다교 전통에서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바치는 가장 중요한 기도입니다.
둘째는 들은 말씀을 내면으로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요한 카시아노는 이집트 수도원에서 수도승들이 시편 바치는 방식을 전합니다. 이에 따르면 먼저 선창자가 노래하는 시편을 모두 앉아서 듣습니다. 이어서 시편들 사이에는 침묵 기도의 여백이(interiectio orationis) 뒤따릅니다. 이 침묵은 영적인 깨달음을 지향합니다(1코린 14, 15). 이는 미사나 시간전례에서 성경 말씀을 듣고 잠깐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해석 활동입니다. 해석은 문자의 뜻을 넘어 다른 의미, 곧 살아 있는 의미를 밝히는 활동입니다. 듣고 새긴 말씀을 이제 자기 말로 표현합니다. 이렇게 같은 시편을 낭송하면서 늘 “새로운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전례는 관상의 큰 스승입니다. 관상은 기도 가운데 가장 단순한 형태로서 전례의 한 부분이자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올바른 관상은 전례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전례로 돌아갑니다. 전례의 말씀과 기도와 성사는 관상의 불씨입니다. “지금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로 응답하며, 성사로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관상에서 중요한 것은 침묵입니다. “침묵이 없으면 기도가 없습니다. 침묵은 말하지 않는 것을 넘어 마음을 다해 듣는 것입니다.”(M. 드브렐). 전례는 침묵에 예식의 품위를 줍니다. 다시 말하여, 전례 안에서 침묵은 예식의 장식품이 아니라 구성 요소입니다. 침묵은 표지의 중개가 더 이상 필요 없이 직접 그분과 만나도록 이끌어줍니다. 전례는 이렇게 체험합니다.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주님,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내려왔나이다.”(성탄 팔일 축제 입당송; 지혜 18, 14-15).
전례는 가장 훌륭한 찬미는 침묵이라고 가르칩니다. (히브리) 시편 65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침묵은 당신께 찬미이옵니다.”(Tibi silentium laus). 우리가 말과 생각을 멈추고 침묵 속에 감동하고 놀랄 때, 나아가 침묵만 남을 때 하느님은 찬미를 받으십니다. 사실 하느님과 만나는 경험은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신비스러운 만남은 자주 침묵으로 표현됩니다.
교우의 장례를 내 일처럼 함께하는 모습에 선교 열매 맺기도
천주교의 장례봉사
오늘날 한국교회의 장례 봉사는 곳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개 본당 연령회와 해당 지역 교우들을 중심으로 수행한다. 박해시대의 조선교회는, 어려운 일을 만나면 서로 돕고 함께 헤쳐 나가는(患難相救), 주님 안에서 형제적 사랑으로 살았으므로 이웃 교우가 선종하면 그 장례는 남이 아닌 바로 내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로 알고 함께 모여 위령기도를 바치고 장례에 필요한 모든 일에 힘을 모았다.
그래서 천주교와 천주교 신자에 관한 편견과 불편이 여전한 상황에서도 개종자까지 생길 정도로 외교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텬쥬셩교례규」 ‘상장규구’의 “교우의 장사를 만나매… 시체는 이 오주 예수의 지체(肢體)이요 성신(聖神)의 궁전이었음을 깊이 생각할 것이니라”와 “교우 죽으매 각처 교우들이 다 인애(仁愛)하는 덕을 채우고, 또 성교회의 실(實)됨을 널리 펴기로 마땅히 많이 모일 것이요, 각각 형세(形勢)대로 상가에 긴히 쓸 것을 가지고 와 부조(扶助)함이 좋으니라”는 규정을 따라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시신을 정성껏 모셨으며, 교우 장사에 최선을 다해 봉사하였다. 또한 “모여 공번되이 송경(誦經)할 때에 상가에 모인 교우는 일제히 와 한가지로 송경할 것이요, 하나(라)도 밖에 따로 있어 외교인과 같이 담배 먹으며 웃으며 지껄이지 못할 것이니…”라는 규정도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상여계, 상장계로부터 연령회까지
1886년 한불조약을 계기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에 지역교회가 시행한 장례 사업이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91년경에는 전주 전동본당에 연령회가 조직되었다. 1910년대의 교회 상장례와 관계된 상여계(喪輿契)나 상장계(喪葬契) 같은 단체는 금전적인 부조나 기도, 미사 봉헌 등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선 사업과 봉사 활동도 함께하였다. 1912년에 발족한 천주교중보험회(天主敎中保險會)는 오늘날의 보험처럼 회원을 모집하여 회비를 거둔 뒤에 회원 가운데 상을 당한 이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해 주었다. 몇몇 본당 연령회는 해마다 회비를 적립하여 회원이 선종하였을 때 그리고 매년 그의 기일(忌日)에 미사를 봉헌하였다. 1920~1930년대의 대부분 본당 연령회는 상가 봉사와 금전적인 부조, 위령 기도와 미사 봉헌 등 오늘날 본당 연령회의 모습과 비슷하지만, 전 교회 차원의 보편적인 단체로까지 확산되지는 못했다.(방상근, 「연령회」, 교회와 역사, 2001년 1월호 참조)
1970년대가 되면 대도시에 인구가 급증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도 갑자기 늘어났다. 대도시 본당들은 급격하게 늘어난 신자들을 감당할 수 없어 부득이 본당을 분할해야 했고, 자본당(子本堂)들은 교회 묘지를 확보하는 문제와, 여러 지방에서 새로 유입되어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교우들의 장례를 감당해야 하는 문제 등이 심각하게 부각됐다. 본당들은 기존 연령회를 활성화하거나 새로 연령회를 조직하여 교우들이 선종했을 때 수행해야 할 갖가지 업무들을 본격적으로 맡기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연령회는 지난날의 연령회와 겉모습은 어느 정도 비슷해 보이지만 역할은 더 많아지고 전문화하였다. 임종 전부터 하관 이후까지 바쳐야 할 기도, 예식 준비와 참여 같은 신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은 물론 경황이 없는 유족을 대신하여 상가등(喪家燈)을 설치하는 것과 같은 뒤치다꺼리와 장례 기간에 필요한 업무 처리, 장의사(葬儀社)가 취급하던 염습까지 손수 하는 등 오늘날 상조회사의 업무보다 훨씬 많고 다양한 일들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일정한 시기까지는 염습이나 사후 행정 처리와 같은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는 일이 연령회원들의 중심 업무였기 때문에 염습을 능숙하게 하는 이를 우대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대부분 고인이 살던 집이 아닌 장례식장이나 요양원에서 장례를 거행하고, 매장보다 화장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을 정도로 장례 환경이 달라졌다. 따라서 연령회원들은 이전의 장례 실무보다는 위령 기도, 예식 준비와 참여, 환자 호스피스, 진정한 형제애에서 우러나오는 유족 돌봄 등과 같은 신앙적이고 내면적인 역할을 우선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여전히 복음 전파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장례봉사, 신앙 선조들의 선교는 말보다 행동으로
이처럼 오늘날 장례 봉사와 위령기도는 거의 연령회가 전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과연 주님 안에서 같은 형제자매들에 대한 장례 봉사와 위령기도가 이들만의 몫일까? 물론 현대 사회는 잠시도 틈을 낼 수 없을 만큼 바쁘게 일해도 살기 어렵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한 시간 정도 상가에서 위령기도를 바치거나, 장례미사를 봉헌할 틈마저 낼 수 없을까? 값싼 관도 구입하지 못하는 이웃을 위해 몇 푼도 부조할 수 없을까? 신앙의 선조들은 극심한 박해 때도 목숨 걸고 교우들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가난한 교우의 장례는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돈을 모아 유족들이 부끄럽지 않게 정성껏 치러 주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선교는 말보다 행동, 그보다 불굴의 신앙과 끝없이 넘쳐 나는 주님과 이웃 사랑 정신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크고 단단한 선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위령기도] (8 · 끝) 위령기도의 보존과 계승의 문제점
한국 정서 담긴 전통음악 특성 그대로 악보에 옮겨야
위령기도의 전승과 보존 문제
위령기도는 정화 중에 있는 영혼들을 위하여 가톨릭신자들이 드리는 기도이며, 그 공로를 통하여 상호간에 구원을 얻게 된다는 믿음이다. 서양에서 비롯되었지만, 한국 실정에 맞는 가락과 문화, 예식, 언어로 정착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전승되었다.
반면, 위령기도의 악보화는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 구전되어오던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각 교구별이나 본당별로 차별화되던 연도의 특성을 잃고 통일화를 가져왔다.
오늘날은 성경의 다른 해석과 예식의 간소화로 인하여 위령기도의 기도문과 악보 수정 작업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이다. 이번 시간에는 위령기도의 악보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살펴보고 올바른 보존과 계승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악보가 실제를 충실하게 반영해야
위령기도의 악보는 실제 노래와 다르기 때문에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첫째, 위령기도가 가지고 있는 호소력과 간절함을 내포하는 시김새는 악상기호로서 반드시 표기되어야 한다. 수직적인(화성) 서양음악에 악상기호가 필요한 것처럼 수평적인(단성부) 한국음악에는 시김새(꾸밈음) 및 악상기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국음악 중에도 자신의 감정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민속악보다는, 파스카의 신비와 통공에 대한 믿음이 정악의 계면조에 적합하다.
시김새는 한박이나 두박의 정확한 길이로 표기되는 것이 아니라 앞꾸밈음이나 뒤꾸밈음의 장식음으로 표기 되어야 하며, 규칙적인 시김새 표시가 바람직하다. 정확한 시가의 음이 시김새로 주장되는 사례가 있지만, 시김새는 음을 꾸며주는 악상기호이다.
현행 악보에는 시김새 표기가 없지만, 실제 노래에서는 흔들어주는 요성(搖聲, 〰), 흘러내리는 퇴성(退聲,◝), 밀어 올리는 추성(推聲, ◞)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지역별 가창자별로 가장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시김새이기 때문에, 긴 시가의 최저음에는 요성(〰), 낮은음에서 높은 음으로 올라갈 때는 추성(◞), 높은음에서 낮은음으로 내려갈 때는 퇴성(◝)이 표기되어야 한다.
둘째, 음표 위에 표기된 셋잇단음표는 삭제하고 음절에 맞는 리듬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말붙임은 첫 음에 강세가 들어가므로, 대부분의 전통노래는 첫 박을 강하게 부르고, 마디 단위가 아닌 장단 단위로서 중간에 중간 강이 들어간다. 위령기도 역시 정확한 언어전달을 위한 기도문이며, 우리의 고유한 노래이기에 첫 박을 강하게 부르고, 중간에 “하느님”, “그리스도님”등 문단의 주제어를 강하게 부르면 된다.
그러나 현행 음표 위의 표기(﹇)는 음악의 강약을 서양식인 강약약(3박)이나 강약 중간약(2박) 등으로 혼돈스럽게 부르도록 조장하고 있으며, 리듬 역시 변형이 많아 가창하기 어렵다.
기도문은 음절에 따라 1음절은 장, 2음절은 단장, 3음절은 1음절+2음절(장 단장) 혹은 2음절+1음절(단장 장), 4음절은 2음절+2음절(단장 단장) 등으로 반복 되어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언어를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사람에게 익숙한 3소박의 표기로 수정되어야한다. 즉, 장은 점4분음표(♩.), 단장은 8분음표(♪)와 4분음표(♩) 등 박자에 맞게 표기해서 해결되어야 한다.
다양함을 반영하여 위령기도의 변질을 막아야
이상의 제안은 200여 년 넘게 이어오는 위령기도가 다양한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어 변질되는 것을 막고 전통의 방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상장예식」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만든 것이기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해적판을 만들어 사용하거나 개인 취향에 따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현행 악보는 위에 열거한 문제점 이외에도 많은 문제점을 지녔기에 교구별, 지구별, 본당별로 다양한 해적판이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의 해석이 바뀌고, 상장예식이 간소화된 현실에서는 기도문과 악보의 수정 작업이 시급하다. 기도문은 2005년 이후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발행된 「성경」을, 예식은 2017년 주교회의 결정을, 그리고 악보는 위에서 제안된 내용이 함께 반영되길 기대해 본다.
위령기도는 천주교를 넘어 우리의 문화유산
유네스코(UNESCO) 세계 문화 위원회는 세계적으로 우수하고 가치 있는 각국의 문화유산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 발표하였는데, 불국사의 석굴암, 종묘, 훈민정음 등 문화유산과 기록유산은 물론, 무형유산에 종묘제례 및 제례악, 판소리, 강릉단오제가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제례음악인 종묘제례악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인의 관심을 끄는 것과 같이 각 지방의 위령기도 역시 문화재로 지정된다면 우리 민족의 예술성이나 국민성을 드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기존의 위령기도는 문화재로 지정하고 다양한 기도문을 활용한 위령기도는 전례음악으로 보급하여 미사전례뿐 아니라 한국전통음악에도 뿌리를 내려야 할 것이다.
[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성탄절이면 생각나는 꽃들과 식물들
짙은 녹색 식물들 그리고 그 사이에 붉거나 흰 꽃들을 놓아두기만 해도 성탄 분위기는 한층 더 살아난다. 성탄 즈음에는 아름다운 상징성과 의미로 그 정취를 돋우는 꽃들이며 식물들이 떠오른다. 포인세티아, 크리스마스로즈, 호랑가시나무, 크리스마스선인장, 겨우살이, 아이비 등이다.
포인세티아(Poinsettia)
포인세티아는 한눈에 보아도 성탄절의 식물이다.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기온이 떨어지는 성탄 무렵이면 포인세티아 상단부의 포엽(苞葉)들이 선명한 빨간색으로 변한다. 더러는 순백색이나 얼룩무늬를 띤 분홍색이 되기도 한다. 또 어떤 것은 별 모양으로 생겨서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베들레헴의 별을 연상시킨다. 멕시코 산악지대 원산의 상록 관목인 이 식물을 고대 아즈텍 인(멕시코 인디언)들은 정결과 순수함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멕시코의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의 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멕시코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리아라는 어린 소녀와 남동생 파블로가 포인세티아를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한다. 두 아이는 너무나 가난해서 성탄 전야에 열리는 잔치에 가져갈 예물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아기 예수님께 빈손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성당으로 가던 오누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길섶의 풀들을 뜯어 다발을 엮었다. 그들이 성당에 도착하자, 잡초를 뜯어 묶은 초라한 다발을 보고 다른 아이들이 오누이를 놀려댔다. 그런데 두 아이가 풀 다발을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 발치에 놓아 드리는 순간, 그 다발의 포인세티아에서 색깔도 선명한 빨간 꽃이 피어났다.
크리스마스로즈(Christmas Rose)
크리스마스로즈는 유럽의 산악지대에서 한겨울에 꽃이 피는 까닭에 유럽에서는 널리 알려진 성탄절 꽃이다. 이 식물은 이름과는 다르게 장미가 아니라 미나리아재비과의 식물이다. 하지만 꽃잎의 바탕은 희고 그 끄트머리는 분홍인 이 야생화의 모습이 들장미처럼 생기기는 했다.
유럽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크리스마스로즈는 마델론이라는 양치기 소녀가 발견했다고 한다. 몹시 추운 어느 겨울 밤, 산기슭에서 양들을 돌보던 마델론은 동방박사들과 목동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릴 예물을 들고서 지나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손에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그리고 과일이며 꿀, 비둘기 등을 들려 있었다. 마델론은 새로 태어난 왕에게 드릴 것이라곤 하다못해 작은 꽃조차도 없다는 생각에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는 쌓인 눈을 걷어냈다. 그러자 눈에 덮여 있던 크리스마스로즈의 앙증맞은 모습이 드러났다. 마델론은 그 꽃송이들을 아기 예수님께 선물로 드리기 위해 잘라 모았다.
크리스마스선인장(Christmas Cactus, 가재발선인장, 게발선인장)
크리스마스선인장 또한 성탄절의 식물로 인기가 많다. 우리에게는 가재발선인장 또는 게발선인장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이 선인장과 다육식물은 브라질을 비롯한 남아메리카의 열대 지역이 원산지다. 낮이 짧은 겨울에 분홍색이며 빨간색 꽃들이 피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선인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분홍과 빨강 외에 자주, 주황, 자홍, 미색 등 꽃의 색깔이 다양하다. 치렁치렁 늘어진 줄기들이며 거기에 달려서 피는 꽃들은 성탄절에 트리에 달아 놓은 선물 바구니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회 선교사인 호세 신부가 볼리비아 밀림 지대의 원주민들에게 성경과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여 애써서 가르쳤는데, 그들은 성경과 교리의 개념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호세 신부를 신뢰하지도 신임하지도 않았다. 어느 해인가 호세 신부는 의기소침한 채로 외롭게 성탄 전야를 맞았다. 그럼에도 제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서 원주민들을 올바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 멀리서 자신이 가르친 성가를 흥겹게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고, 호세 신부는 몸을 돌려 성당 안으로 열을 지어 들어오는 마을 어린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저마다 밀림에서 꺾어 모은 꽃들을 품에 한가득 안고 있었다. 아기 예수님께 드릴 꽃들이었다. 이때부터 이 꽃은 크리스마스선인장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호랑가시나무(Holly)
상록 관목인 호랑가시나무는 가장자리에 뾰족한 가시들이 돋친 녹색 잎, 작고 흰 꽃, 성탄 무렵에 맺는 빨간 열매로 성탄절을 상징하는 식물이다. 유럽 원산의 호랑가시나무(Ilex aquifolium)와 아메리카 원산의 호랑가시나무(Ilex opaca)가 다르고, 한국과 중국에서 자라는 호랑가시나무(Ilex cornuta)가 또한 다르다. 유럽에서 처음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그곳의 호랑가시나무를 보면서 고향인 유럽의 호랑가시나무를 생각했고, 이내 성탄절 장식용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고대 켈트 인들은 이 식물을 영생의 상징으로 여겼다.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이 의미를 받아들이면서, 여기에 영원한 삶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이라는 상징성을 덧붙였다. 호랑가시나무의 녹색 잎은 영원한 삶을, 잎의 가시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통을, 빨간 열매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교회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린 목동이 아기 예수님께 드릴 왕관이라며 호랑가시나무로 엮은 화관을 가져왔다고 한다. 목동은 화관을 아기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 드리면서 자신의 예물이 하찮다는 생각에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목동의 눈물을 본 아기 예수님이 그 화관을 어루만졌는데, 그 순간 호랑가시나무의 잎들이 반들거리기 시작했고, 희던 열매들이 빨간색으로 변했다.
겨우살이(Mistletoe)
사람들은 성탄절을 맞아 흔히 겨우살이 가지로 집안을 장식하거나 현관에 걸어 둔다. 예전에 켈트의 사제들은 겨울 축제에 겨우살이를 사용했다. 추운 계절에 뿌리가 없는 채로 녹색을 유지하는 것을 보고 숭배한 것이다.
유럽에는 겨우살이 나무 아래에서 입을 맞추는 전통이 있는데, 이는 노르웨이 신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광명의 신이자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신인 발드르가 겨우살이 가지로 만든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흘린 눈물이 화살에 떨어져서 하얀 열매로 변했는데, 이 열매로 발드르의 상처가 아물었고 발드르는 되살아났다.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며 겨우살이 나무를 축복했고, 그 아래를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키스해 주겠노라고 맹세했다.
아이비(Ivy)와 상록수들
녹색은 오래전부터 영원한 삶(생명)과 하느님의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성을 상징해 왔다. 이런 면에서 겨우살이도 마찬가지지만, 겨울에도 녹색을 유지하는 아이비 또한 영원한 삶과 불사(不死)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죽음을 극복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신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때에 아이비는 특히 건물 외부를 장식하는 데 쓰인다.
그리고 소나무, 삼나무, 가문비나무 같은 상록수들은 오래전부터 치유력을 가진 마술의 나무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한겨울이 지나가고 낮의 길이가 차츰 길어지는 시기에 태양의 귀환과 생명의 소생을 기리며 지내는 고대인들의 축제와 의식에 상록수 가지들이 사용되곤 했다. 이러한 상징성이 그리스도교에도 받아들여져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되는 새로운 삶 또는 영원한 삶을 기원하며 상록수 가지로 화환을 엮어 문에 걸어 두게 되었다.
성탄절에는 빨간색, 흰색, 녹색, 황금색 그리고 은색처럼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색들이 어울린다. 그리고 이 색깔들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된 상징성 때문에 성탄절의 색이 되었다. 이를테면, 흰색은 정결과 순수(무구)와 평화를, 빨간색은 그리스도의 피를, 녹색은 영원한 삶(생명), 황금색 또는 은색은 (동방박사들을 안내한) 베들레헴의 별을 나타낸다. 그리고 사람들은 성탄절이 오면 이러한 상징성에 걸맞은 색의 꽃과 식물들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러한 식물들을 통해서 성탄의 의미와 기쁨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포인세티아의 눈부신 빨간색이든, 호랑가시나무의 따가운 가시든, 겨우살이의 낭만적인 매력이든 간에, 성탄 무렵이면 으레 떠오르는 꽃들이며 식물들로 해서 우리의 성탄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전례의 숲] 전례 기도와 개인 기도
기도를 가리키는 말들은 많습니다. “하느님과 대화” 또는 “하느님과 만남”이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기도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합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활동하는 믿음”입니다. 믿음 없는 기도는 빈 쭉정이이며, 기도 없는 믿음은 사그라지는 재입니다(J. 라칭거). 기도는 믿는 이들의 영혼이며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하느님께서 먼저 움직이십니다. 보기를 들면, 시간전례(성무일도)는 주님께 올리는 간구로 시작합니다. “주님, 제 입술을 열어주소서. 제 입이 당신 찬미를 전하오리다.”(시편 51). 기도의 바탕에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깨달음입니다. 실제로 기도하도록 입술을 열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비잔틴 시간전례는 이 진리를 더 구체적으로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침대에서 잠에서 일으키시어 제 지성과 제 마음을 밝히시고 제 입술을 열어주시어 제가 당신을 찬양하게 하시나이다. 아, 거룩한 삼위 하느님이시여!”
또한 어떤 기도도, 혼자 하는 기도도, 홀로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벗어나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홀로 기도할 때도 천사들 성인들 세상의 교우들도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바오로 사도는 이 가르침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 17-19). 쉬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명령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기도, 성모송, 묵주의 기도, 십자가의 길과 같은 정해진 기도를 계속하거나 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일까요? 그러한 방식은 가능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으며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사람은 일하고 쉬고, 다른 이들과 소통도 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공식 기도인 시간전례(성무일도)는 하루의 특정 시간들을 축성함으로써 하루의 모든 시간을 거룩하게 만들고 하느님께 속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이름 없는 순례자”처럼 호흡에 맞추어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익힐 수 있습니다. 또한 자주 짧은 화살기도로 하루의 순간순간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하루 동안 “기도의 정신을 간직하는 것, 곧 언제나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의식하며 하느님과 일치 안에 머물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F. 아린체). 기도는 입으로만 하지 않고. 머리로만 하지도 않습니다. 인격 전체로 기도합니다.
전례 기도는 교회의 공식 기도로 공적인 기도
기도는 전례 기도와 신심기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례 기도, 공동 기도, 개인 기도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전례 기도는 공동기도의 근원이고 최고의 형태입니다. 공동 기도에는 전례 기도와 신심기도가 있고, 신심 기도는 공동으로도 개인으로도 바칠 수 있습니다.
전례 기도는 교회의 공식 기도로 공적인 기도입니다. 미사와 시간전례(성무일도)가 대표적입니다. 공적이고 공식적인 기도이기 때문에 교회가 규정한 본문과 예식을 따라야 합니다. 전례 기도 밖에도 신자들이 공동으로 바치는 기도가 있습니다. 묵주 기도, 십자가의 길, 성체 조배,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묵상, 구일 기도, 성모님과 성인들께 바치는 기도와 같이 여러 신심기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들은 신자들이 성당이나 다른 곳에 함께 모여 바치지만 아무데서나 개인적으로도 바칠 수도 있습니다. 홀로 바치는 신심기도(개인 기도)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감사와 찬양, 탄원과 전구 같은 정감을 더욱 깊이 표현할 수 있고, 침묵 안에 더 길게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 기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신자들의 영성 생활은 전례에만 참여해서 끝나지 않는다. 신자는 공동 기도에 불림을 받지만 또한 골방에 들어가 아버지께 홀로 기도해야 한다.”(전례 12항)
전례는 모든 기도의 샘이며 정점입니다. 전례는 기도를 가르치는 학교이기도 합니다. 교육자는 성령이십니다(교리서 1091). 전례는 기도를 순수하고 올바르고 품위 있게 표현합니다. 무엇보다도 개인 기도의 내용과 형식에 끊임없이 풍요로운 영감을 줍니다. 전례에서 말씀을 들음, 관상과 침묵, 경배, 찬미, 감사, 봉헌, 간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전례 체험을 자신의 기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전례에게 감동을 요구하거나 자기 필요를 채워주기를 바라기보다는 그 안에서 울려나오는 영적인 영향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를 벗어나 하느님께 되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례 안에서 침묵은 예식의 장식품이 아니라 구성 요소
전례 기도에는 세 가지 요소들이 움직입니다(G. 보셀리). 하느님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을 내면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목소리로 해석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실 성경은 하느님을 말씀으로, 대화로, 관계로 체험합니다.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7, 23) 이러한 체험은 “들어라, 이스라엘아”(쉐마 이스라엘; 신명 6, 4) 기도로 변합니다. 이는 유다교 전통에서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바치는 가장 중요한 기도입니다.
둘째는 들은 말씀을 내면으로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요한 카시아노는 이집트 수도원에서 수도승들이 시편 바치는 방식을 전합니다. 이에 따르면 먼저 선창자가 노래하는 시편을 모두 앉아서 듣습니다. 이어서 시편들 사이에는 침묵 기도의 여백이(interiectio orationis) 뒤따릅니다. 이 침묵은 영적인 깨달음을 지향합니다(1코린 14, 15). 이는 미사나 시간전례에서 성경 말씀을 듣고 잠깐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해석 활동입니다. 해석은 문자의 뜻을 넘어 다른 의미, 곧 살아 있는 의미를 밝히는 활동입니다. 듣고 새긴 말씀을 이제 자기 말로 표현합니다. 이렇게 같은 시편을 낭송하면서 늘 “새로운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전례는 관상의 큰 스승입니다. 관상은 기도 가운데 가장 단순한 형태로서 전례의 한 부분이자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올바른 관상은 전례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전례로 돌아갑니다. 전례의 말씀과 기도와 성사는 관상의 불씨입니다. “지금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로 응답하며, 성사로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관상에서 중요한 것은 침묵입니다. “침묵이 없으면 기도가 없습니다. 침묵은 말하지 않는 것을 넘어 마음을 다해 듣는 것입니다.”(M. 드브렐). 전례는 침묵에 예식의 품위를 줍니다. 다시 말하여, 전례 안에서 침묵은 예식의 장식품이 아니라 구성 요소입니다. 침묵은 표지의 중개가 더 이상 필요 없이 직접 그분과 만나도록 이끌어줍니다. 전례는 이렇게 체험합니다.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주님,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내려왔나이다.”(성탄 팔일 축제 입당송; 지혜 18, 14-15).
전례는 가장 훌륭한 찬미는 침묵이라고 가르칩니다. (히브리) 시편 65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침묵은 당신께 찬미이옵니다.”(Tibi silentium laus). 우리가 말과 생각을 멈추고 침묵 속에 감동하고 놀랄 때, 나아가 침묵만 남을 때 하느님은 찬미를 받으십니다. 사실 하느님과 만나는 경험은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신비스러운 만남은 자주 침묵으로 표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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