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0:16~23
설교말씀: 주님을 증거하는 전도현장
본문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증거하는 전도현장이 어떤 곳인가 다시한번 확인을 해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영광이고 특권이며 참 좋은 일이고 은혜로운 일입니다. 모든 좋은 말을 다해도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 천국 가는 행진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5장~7장의 산상설교의 근본이신 말씀을 주시고 8장과 9장에서 예수님이 메시아의 능력으로 어떻게 사역하시는지 예수님의 권세와 권능으로 눈먼자와 병든자를 고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10장에서 모든 사건을 지켜 보시고 임상실습의 전도현장으로 제자들을 내어 보내시며 저들이 가는 곳이 어떤 곳이고 무슨 일을 행하야 하는지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전도 현장이 얼마나 험하고 핍박이 있으며 저들을 죽음가운데 몰아 넣을 수도 있는 위험한 현장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안전하게 보내 주시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예수님은 불의 현장 가운데 직접 들어가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보내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러한 세대에 살면서 나만 잘 믿기만하면 되는지요. 주님의 기대는 그것만이 아니라 현장에서 증인이 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면서나 친구들 사이에서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려면 환영만 받게되는 것이 아니다. 인정 받고 영광을 받는 것보다 많은 핍박을 받게 되고 괴로움을 당하고 수치를 당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시고 있습니다.
(16) 본문 말씀 첫 시작이 “보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의 그 단어는 특정한 사실을 강조하고 새로운 교훈을 시작할 때에 쓴 말로 헬라어 ‘이두’(idou; 보라, 명령법으로 사용됨)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현장을 숨기지 않고 어떤 곳이라는 것을 말하실 때 좀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양을 이리가운데 보냅니까? 반드시 해를 입게 되는 현장이라는 것을 아시면서 보내는 것입니다.
(17~19) 어떻게 보면 복음 전도자에게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말해야 할 것 같지만 전도 여행을 보내면서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시는 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머물러 있기를 원하고 같이 그 시간을 즐겨야 할 것 같은데요. 사람이 호랑이 보다 더 무섭다는 옛말이 생각이 납니다. 사람이 믿음직하고 서로간에 행복을 주기도 하지만 사람을 잘못 만나면 얼마나 무서운지요. 세상이 어떻게 적대적으로 나올 수 있는지 예수님이 아시기 때문에 전도 현장에 나가는 제자들을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사람들을 삼가야 하는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 때문에 당할 일들을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이방인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과 저를 우리가 원하는 상황가운데 보내실 뿐아니라 환영하지 않고 적대시하는 사람들에게도 보내는데 그 이유가 ‘증거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을 생각해 보면 호조건의 때일 수도 있고 가장 나쁜 상황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데 왜 이러한 어려움을 주시는가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 처한 것도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사 가운데서도 능력 있게 예수님이 증거 되는 때는 대적의 공격을 받을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들이 원하는 대로 행복하게 살 때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가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질 때 예수님을 증거하는 기회가 될 것 같지만 자기 행복에 도취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지요. 어렵고 핍박이 있는 때에 신앙을 정금과 같이 유지할 수 있고 교회를 단단히 세우는 때가 되는 것이고 태평 성대할 때에 교회가 성장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쇠퇴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힘이 있을 때에, 원하는 것이 이루어 질 때에 조심해야 하고 그런 때가 영적으로 실족해서 타락의 길로 가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핍박이 있을 때 대응책
(16) 하필이면 증오해야만 하는 뱀을 예로들어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씀을 하셨는가 제 마음 가운데 그것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1 뱀에 대한 말씀에 뱀의 속성이 표현되어 있는데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 보다 간교한(more crafty)것 이라고 했습니다. Crafty는 공작품등을 만들 때에 아주 정교하고 섬세하다는 것을 말하지요. “뱀이 그 간계(cunning)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고후 11:3)” 뱀이 이와를 꿸때에 미혹하게 한 것같이 아주 교활한 그런 성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뱀의 특징이 아주 정교하고 섬세하고 교활하며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으니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것입니다. 뱀이 나오는 영상물을 보면 뱀이 얼마나 신중히 움직이는지요. 먹이를 낚아챌 때에도 보호색을 쓰면서 소리도 내지 않고 자신을 숨겨서 잘 움직여가면서 접근하다가 딱 잡아채는 것을 봅니다. 세심하게 관찰하다가 능히 못당할것 같으면 꼬리를 숨기고 자취를 감추어 버리기도 합니다. 전도할 때에 한가지 배워야 하는 것은 이런 신중성과 분별력을 가지고 상황 파악을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지혜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서 순수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면 교활한 것입니다. 교활한 사람들 보면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상황 판단을 잘 하고 남을 세워주고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일을 위해서 대응하면 지혜로운 것이 되는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면 교활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텔레비젼의 사극을 볼 때에도 충신과 간신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들이 말하는 것을 기가 막히게 하고 감정 표현을 잘합니다. 간신과 충신이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를 교활하게 사용하면 배반이 되고 간신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것만 말씀하시지 않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뱀같기만 하다면 자기 꾀에 넘어가게 됩니다. 세상은 그렇게 발달해가고 있지만 사회에서도 그런사람은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순결은 섞인 것이 아닌 것이 순결입니다. 부패하지 않은 상태, 거짓이 없는 순전함 비둘기 하면 순결의 상징입니다. 성경 가운데서도 호세아7:11에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비둘기는 섞인 것은 없고 순수하기는 한데 어리석고 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인들이 병행해야 하는 것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전함이 함께 갈 수 있는 성품이 필요한 것입니다. 전도생활 할 때에도 판단을 잘해야 하는 것이 이 말을 해야 하는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할 때가 많이 있는데 그러한 판단이 잘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이나 북한에 가서 그곳의 법도 모르고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순전함과 지혜가 결합하지 않으면 무모하게 되어 결국 핍박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뱀같이 지혜로와서 그런 어려움 모면하고 증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가정도 직장도 사역도 마찬가지인데 신중한 분별력 가지고 행동하고 동시에 순전함을 지키고 섞이지 않은 믿음 가지고 핍박 받을 때에도 이 믿음으로 십자가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욕을 먹더라도 예수님이 나타나야 할 때에는 순전함으로 섬기고 그때가 아닐 때에는 뱀처럼 지혜롭게 피한다는 것입니다.
(19~20) 항상 주님의 말씀 속에 거하며 주님의 지혜를 요청하는 기도하며 우리의 지혜로 해결할 수 없을 때에 주님의 지혜 구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며 성령님 의지하는 삶을 살면 성령 감동으로 할 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 생활도 부부간에도 지혜 없는 말 한마디 때문에 서로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말씀 가운데 거하면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 것 지키면서 달란트를 쓰임 받으면 예수를 증거하는 큰 일군이 될 것입니다. 지혜와 순전함이 삶에서 온전히 나타나는 축복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