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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
오스트리아의 폰 트랩 일가의 가족에 관한 소설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사운드 오브 뮤직>은 뮤지컬과 영화로 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견습 수녀 마리아가 퇴역 함장인 트랩 남작의 아이들 가정교사로 파견된 후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녀는 트랩 가의 가정교사로 채용되어 긍정적이며 따뜻한 마음씨를 바탕으로 아이들과 트랩 남작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전 세계 영화 팬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 영화의 감독 로버트 와이즈는 뮤지컬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을 비롯해서 여러 영화에 탁월한 연출력을 발휘해온 명장이다. 그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춤과 음악, 연기력, 영화의 정서적 표현 등에서 나무랄 데 없는 주옥같은 작품으로 빚어냈다.
함께 작업한 뮤지컬의 거장 콤비인 리처드 로저스와 해머슈타인 주니어의 탁월한 솜씨가 영화 전편에 녹아있다.
풀밭에서 아이들과 함께 부르는 ‘The Sound Of Music’, 음악의 발랄한 표현을 다룬 ‘Do Re-Mi Song’, 여주인공 마리아의 초상이 담긴 ‘Maria’, 그리고 오스트리아인들의 애국적인 정서가 담긴 ‘Edelweiss 등 영원히 잊지 못할 명곡들을 탄생시켰다.
제작 당시 주인공 마리아의 캐스팅에서 약간의 난항을 겪었는데, 오래전부터 영화 제작사인 파라마운트사는 오드리 헵번을 마리아 역으로 캐스팅해 이 작품을 영화화할 계획이었지만, 오드리 헵번이 거절하였다고 한다. 이후 와이즈 감독은 인기 브로드웨이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로 스타덤에 오른 줄리 앤드루스를 마리아 역에 캐스팅했다. 오드리 헵번은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주인공으로 열연했다.
여배우 줄리 앤드류스의 풍부한 연기력과 가창력은 당시 절정에 있었으며, 에델바이스를 부르는 트랩 남작역의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엄격한 듯 하면서도 내심 다정다감한 표현력과 가창력도 관객들에게 뛰어난 인상을 남겼다.
이 영화는 세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가족들과 함께 즐겁고 볼 수 있는 최고의 가족영화로서 자리매김을 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음향상, 편집상, 편곡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했다.
[ 폰 트랩 일가의 실제 이야기 ]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마리아 아우구스타 쿠츠쉐라는 1905년 1월 26일 오스트리아 티롤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8세 되던 해인 잘츠부르크에 있는 1926년에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견습 수녀로 있다가 해군 폰 트랩 대령의 일곱 자녀들을 돌봐 달라는 청을 받는다. 폰 트랩 대령의 아내 아가다는 1923년에 성홍열을 앓다가 사망했다.
결국 마리아는 이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마리아가 그의 자녀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지 알게 된 폰 트랩 대령은 마리아에게 청혼을 한다. 갑자기 부담을 느낀 마리아는 수녀원으로 도망을 쳤으나 원장 수녀는 마리아에게 그녀가 폰 트랩 대령과 결혼하게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조언한다. 결국 마리아는 폰 트랩 가족에게 돌아가서 폰 트랩 대령의 청혼을 허락한다.
마리아와 폰 트랩은 1927년 11월 26일에 결혼했다. 마리아가 3명의 자녀를 추가로 낳으면서 모두 폰 트랩 가의 아이들은 10명으로 늘어났다. 애들이 점차 성장하면서 트랩 대령의 절친이었던 프란츠 바스너 신부가 아이들에게 음악 레슨을 하면서 폰 트랩 일가의 음악 경력이 시작된다.
이때 이들 일가와 친하게 지냈던 소프라노 롯테 레만이 폰 트랩 가족이 노래하는 것을 듣고 콘서트를 제안한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쿠르트 슈쉬니그가 라디오에서 트랩 일가의 노래를 듣고 폰 트랩 일가를 비엔나로 초청하여 공연하게 한다. 이후 폰 트랩 일가는 점차 인기를 더하면서 순회공연까지 나서게 된다.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합병된 1938년 3월, 폰 트랩 대령에게 독일 해군에 입대할 것을 명령서가 내려온다. 이때 폰 트랩 가족은 뮌헨을 공연차 방문하였다가 한 식당에서 히틀러를 만나기도 했다. 그해 9월 가족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탈출한 후 미국으로 떠났다. 트랩 가족은 "폰 트랩 합창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미국과 캐나다에서 공연하기 시작했다.
10명의 자녀들이 노래하는 가족 합창단은 인기를 더하여 북미 순회공연을 계속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트랩 가족 오스트리아 구호 기금'을 설립하여 전후 오스트리아에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과 옷을 보내 주기도 했다. 1940년 폰 트랩 가족은 미국 동북부 버몬트 주 스토우에 정착하였다. 순회공연이 없을 때에는 그곳에서 음악 캠프를 열었다. 폰 트랩은 1947년 폐암으로 눈을 감았다.
트랩 가족 합창단은 1957년까지 순회공연을 지속하다 해산되었다. 그 후 마리아와 다른 세 자녀들은 남태평양에서 가톨릭 선교사로 활동을 했다. 1965년에 버몬트로 돌아온 마리아는 트랩 가족 산장을 운영하다가 심부전으로 1987년 3월 28일 버몬트에서 저 세상으로 떠났다.
[ 줄리 앤드류스 이야기 ]
영국 출신인 줄리 앤드류스는 할리우드 영화 진출 이전에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의 주연배우 엘라이제 역으로 활발한 뮤지컬 활동을 하고 있었다. 유년시절 부터 뛰어난 가창력과 연기력을 지니고 있었던 줄리의 재능은 '별들의 전쟁터'라는 브로드웨이 에서도 여전히 유효했던 것이다.
연일 흥행 신기록을 세울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던 <마이 페어 레이디>는 결국 영화로 까지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여주인공으로는 단연 줄리 앤드류스가 1순위로 꼽힐 줄 알았지만 <마이 페어 레이디> 제작사 쪽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줄리가 뮤지컬로 큰 성공을 거뒀다고 해도 할리우드가 알아주는 스타파워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제작사는 <로마의 휴일>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오드리 헵번과 줄리 앤드류스를 놓고 저울질하기에 이른다. 줄리는 자신에게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모두 물리칠 정도로 <마이 페어 레이디> 에 목숨을 걸었으나 폭발적인 스타성을 지닌 헵번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결국 줄리는 그토록 사랑했던 작품인 <마이 페어 레이디>를 헵번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다.
물론 헵번은 <마이 페어 레이디>를 성공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줄리와는 또 다른 캐릭터를 창조시키는 등 큰 성과를 거뒀다. 다만 헵번은 가창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뮤지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는 모두 대역을 쓸 수 밖엔 없었다고 한다.
<마이 페어 레이디>의 주연 자리를 놓친 줄리는 2순위로 밀어두고 있던 <메리 포핀스>로 할리우드 행을 결정한다. 줄리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실패를 또 다시 재현하고 싶지는 않았다. 줄리는 <메리 포핀스> 를 성공시키기 위해 악착 같이 연기했다. 이미 줄리의 꿈은 브로드웨이를 넘어 세계 영화의 중심지 할리우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줄리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까. <메리 포핀스>는 헵번의 <마이 페어 레이디> 못지않은 엄청난 흥행성적을 거뒀고 작품성까지도 커다란 호평을 받게 된다. 물론 여주인공을 맡았던 줄리 앤드류스의 이름이 언론을 떠들썩하게 한 것도 이 때부터이다. 언론은 연일 이 대단한 여배우를 집중 조명했고 줄리는 이렇게 할리우드 데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낸다.
<메리 포핀스>는 오스카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고 음악상을 비롯해 5개의 상을 수상한다. 그 중 줄리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상은 아마 '여우주연상'이었을 것이다. 할리우드에 갓 데뷔한 배우가 단박에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줄리는 이 외에도 골든 글러브,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까지 휩쓰는 기염을 토한다.
줄리의 이런 수상실적에 비해 <마이 페어 레이디>의 헵번은 대히트에도 불구하고 오스카에 노미네이트되지도 못했는데 이유는 뮤지컬 영화에서 목소리 더빙을 했기 때문이었다고... 이 사실을 안 줄리 앤드류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사진, <메리 포핀스>에서)
"오드리 헵번은 정말 엄청난 배우다. 그녀는 비록 더빙을 했지만 나보다 더 잘했고 나보다 더 위대했다. 그녀가 오스카의 지명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대단한 유감이다." 천성이 이렇게 착했던 줄리였다.
<메리 포핀스>를 성공으로 이끈 1년 뒤, 줄리 앤드류스의 배우 인생에 가장 큰 영광을 가져다 줄 영화가 탄생한다. 바로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가 명절 때만 되면 재방에 재방을 거듭할 정도로 유명한 이 영화는 줄리 앤드류스가 지니고 있는 최상의 가치를 마음껏 뽑아내 준 작품이었다.
사실 65년 당시 극 중 마리아의 나이가 20살이었던 것에 반해 줄리의 나이는 30세였다. 젊고 생기발랄한 마리아를 표현해 내기 위해서는 줄리의 피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상황이던 것이다. "너무 나이 든 것 아니냐"는 일각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줄리는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영화 전반을 휘어잡았고 영화의 이미지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야말로 줄리 앤드류스의 영화였던 <사운드 오브 뮤직>은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전 세계적인 흥행 역사를 다시 썼고 뮤지컬 영화 중 가히 최고봉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위세를 떨쳤다. 영화 개봉과 함께 브로드웨이 극 <사운드 오브 뮤직>은 할리우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으로 이미지가 바뀌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사진,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수익을 많이 올리는 영화' 50위권 안에 꾸준히 그 이름을 올렸을 정도로 대 히트를 친 <사운드 오브 뮤직>은 아카데미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고 5개상을 수상하는 위엄을 떨쳤으나 정작 주인공인 줄리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이유는 1년 전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라고...
재밌는 사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 실제 주인공 마리아가 카메오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극 중 줄리 앤드류스가 수녀원에서 나와 본 트랩 대령의 집으로 향할 때 탔던 버스 안에서 줄리의 뒤편, 2명의 여성이 앉아 있는데 왼쪽의 여성이 바로 마리아 폰 트랩 여사였다.
<사운드 오브 뮤직> 의 엄청난 대 성공 이후, 줄리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뤄야 했다. 마리아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강했던 탓일까. 줄리는 마리아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기 위해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역할에도 도전해 봤지만 크게 실패했고 배우로서 길고 긴 슬럼프를 맞게 된다. 2천 500만 달러를 투자했던 <모던 밀리>가 고작 8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대실패를 하는 등 줄리 앤드류스의 연기 인생에 있어 가장 암울한 슬럼프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줄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다른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이든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오히려 마리아 의 밝고 상큼한 이미지를 역 이용하며 착한 캐릭터로 다시 돌아왔다. 그 성공작이 바로 82년 <빅터/빅토리아>였다. 남장 여자로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빅터/빅토리아>는 줄리에게 화려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줬고 다시 한 번 오스카의 레드 카펫을 밟는 영광까지 돌려준다. (아래 사진, <빅터/빅토리아>에서)
이후, <사랑 도박>, <듀 엣 포 원> 등의 영화에 모습을 드러내며 활발한 활동을 지속한 줄리 앤드류스는 95년, 60세의 나이로 본 고장인 브로드웨이로 돌아온다. 뮤지컬 <빅터/빅토리아>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엄청난 가창력과 무대 매너를 뽐내는 줄리에게 관객들은 열화와 같은 찬사를 보냈고 평단의 극찬도 연일 높아져만 간다.
슬럼프 뒤에 찾아온, 그야말로 화려한 재기였다. 이제는 마리아의 상큼함이 사라진 60세에 그녀는 실력 하나만으로 전 세계를 감동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고통 뒤에 연륜이 뒤따른다는 옛말이 절로 실감이 난다.
이렇듯 뮤지컬 배우로서 활발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던 줄리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바로 '성대 종양' 이었다. 뮤지컬 <빅터/빅토리아>의 강행군 속에서 결국 목이 견뎌내지 못하고 일이 터진 것이다. 줄리는 급하게 병원을 찾아 수술을 받았지만 성대 수술 후 그녀는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한 평생을 노래와 함께 했던 줄리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노래의 잃어버림은 곧 줄리의 종말과도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줄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노래를 할 수 있는 선물을 잃어버린 것은 대단한 절망이지만,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라며 자신을 위로했고 곧 또 다른 인생을 설계한다.
이즈음 한 가지 감동스러운 일화가 있었다. 노래를 잃어버렸지만 항상 뮤지컬을 즐겨 보던 줄리 앤드류스가 후배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한 공연장을 찾았다고 한다. 수천 명의 관객들이 밀집한 극장에 줄리가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관객들이 하나 둘씩 웅성대며 그녀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줄리를 알아 본 관객들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 손을 잡았다.
그리고 노래를 잃어버린 줄리를 위해 큰 목소리로 합창을 했다. 바로 그 노래가 <사운드 오브 뮤직>의 '에델 바이스'였다. 줄리 앤드류스는 그러한 관객들의 성원에 감동받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줄리가 우는 모습을 보자 관객들 역시 크게 흐느꼈다고 한다.(사진, 오드리 헵번과)
이후 줄리는 아동 출판 쪽에 손을 대 큰 성공을 했고 봉사활동과 에이즈 퇴치 운동을 통해서 영국 작위를 수여받는 영광을 안게 된다. 그 뿐인가. 2004년 그녀는 <슈렉 2>에서 왕비 목소리를 맡았고 <프린세스 다이어리2>에서도 역시 왕비 역을 맡아 ‘Your crowning glory’라는 노래까지 직접 부른다.
비록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보여줬던 그 폭발적인 가창력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낼 수 있는 한 옥타브의 영역 아래서 줄리는 마음껏 노래 불렀고 열정을 불태웠다. 이렇듯이 줄리 앤드류스는 대단한 배우다. 그녀는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배우였고 영국과 미국이 가장 사랑하는 배우 중 한명이기도 하다.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발한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일이다.
젊은 시절 그녀는 착하고 귀여웠으며 지금의 그녀는 우아하고 품위 있게 보인다. 항상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변함없는 열정과 노력으로 끊임 없는 도전을 하고 있는 줄리 앤드류스는 지금도 많은 영화팬들에게 존경과 갈채를 받고 있다.(사진, 오늘날의 줄리 앤드류스)
두 번 결혼한 그녀는 슬하에 3자녀를 두고 있는데 두 번째 결혼한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에드워즈 감독은 줄리와 록 허드슨 주연의 <밀애>, <빅터/빅토리아>와 오드리 헵번 주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연출한 바 있는 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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