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본문 : 전도서 4:7-16】
7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 임이라
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13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14 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음이니라
15 내가 본즉 해 아래에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다음 자리에 있다가 왕을 대신하여 일어난 젊은이와 함께 있고
16 그의 치리를 받는 모든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말씀나눔】
우리나라 1인 가구의 비중이 4인 가구의 비중을 넘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요즘은 혼자라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여행가고 혼자서 캠핑도 합니다. 요즘은 경차를 개조하여 평상시는 출․퇴근용으로 주말에는 차박용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것만큼이나 현대인들은 고독합니다. 얼굴보고 대화하는 시간은 급격히 줄고, 대부분의 소통은 가상공간에서 이루어 집니다. 심지어 함께 앉아서 대화를 톡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 혼자 사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신경 쓸 일도 없고 덜 벌고 덜 쓰니 더 좋은 것 아닌가?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세대들에게 나 혼자 사는 것은 익숙해 보입니다. 이들에게 일중독과 같은 현상은 없을 것처럼 생각됩니다. 대부분 가족 부양의 책임감이 많은 기혼에서 일 중독증의 위험이 높고 여성보다는 남성이 일중독 위험이 높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통계에 따르면 미혼, 이혼이나 사별로 혼자 있는 사람들이 일에 몰두하는 시간적인 여력이나 경제적인 필요가 많아서 일중독 위험이 높다고 합니다.
흔히 40대가 가장 위험한 계층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20대에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일자리나 일거리 상실이라는 불안정한 상황으로 인해서 일중독이 심화되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전도자는 자식도 형제도 없는 사람이 끝도 없이 수고하다 보면, 결국 ‘어찌하여 나는 즐기지도 못하고 사는가? 도대체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수고를 하는가?’자문하며 후회하는 날이 반드시 온다고 말합니다.
그가 쌓아 놓은 재물로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일만 하는 것을 두고 불행한 노고 라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원어를 보면 개역개정의 기록보다 더 강한 어조로 비판합니다. 불행한 노고가 아니라 ‘악한 일’로 정의합니다. 단순히 의미가 없다거나 가치가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악한 일로 정의합니다. 왜냐하면 일중독은 냉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자리에 ‘일’이 자리 잡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우상이 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혼자가 아니라 연합함의 행복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붙들어 줄 수 있는 동료가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합니다. 특히, 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라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인생이 워낙 짧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잠언에서는 넘어지는 사람은 ‘악한 자’또는 지혜가 없는 자, 굽은 길로 행하는 자 등으로 지목하며 인과응보적인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짧은 인생에는 인과응보의 원리에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의인의 넘어짐도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의인의 넘어짐도 인과응보의 원리에 포함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유한한 인간은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 함께 연합하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나만 생각하고, 내 가정만 잘 살고, 내 교회만 잘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너도 잘 살고 나도 잘사는 방법을 택하여야 합니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 다른 이를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이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렇게 선순환이 되면 너와 나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가정교회의 정신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전도자는 연합의 행복뿐만 아니라 또 다른 유익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이라는 표현입니다. 전도자의 시절에는 가난은 무지와 게으름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지혜롭고 가난한 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늙음과 나이 많음은 지혜를 상징합니다. 특히 왕은 모든 지혜자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늙고 우둔한 왕은 당시에 가지고 있는 규범에 반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어린 아이와 우둔한 늙은 왕은 당시의 가치관에서는 받아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이 왕이 되고, 왕이었던 이는 이 젊은이에게 밀려서 사람들에게 잊혀지며 그가 한 일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전도자가 이렇게 파격적인 설정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요?
13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신하의 직언을 듣지 않는, 왕은 어리석다. 그보다는 가난할지라도 슬기로운 젊은이가 더 낫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차이는 경청에 있는 것입니다.
경청이 주는 행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혼자보다 연합함으로 기쁨을 누리는데 연합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경청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경청함으로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경청해야 할까요?
성도들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습니다.
즉 성도들이 연합하기 위해서 우선 경청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전도자가 우리를 향해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수고하고 있는가?
즉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하루를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루를 살아내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묵상 - 하살깨묵】
1. 어제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으로 결심한 결단과 실천 사항은 무엇이었습니까?
2. 어제 결단한 실천 사항을 생활 속에서 적용한 결과는 어떻게 평가 할 수 있습니까?
3. 오늘 하루 중에 기억에 남는 사건(일) 한 가지를 기록해 보세요.
그 사건에 대한 나의 마음이 어떤 느낌인지 적어 보세요.
4. 오늘 기억에 남는 사건과 오늘 본문에서 문제는 어떤 유사점을 가지고 있나요?
5. 오늘 사건을 중에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행동을 원하셨을까요?
6. 오늘 본문은 나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하여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7.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으로 기도문 적기 & 실천 사항 적기
【추천 찬송가】
221장 주 믿는 형제들
【은혜의 찬양】
우리 때문에 : https://youtu.be/JgbHO5qxuKE
그가 오신 이유: https://youtu.be/6MCaECq6Czg
출처: 윤자영. 「일 중독 측정과 실태」, 산업노동연구 24권 1호, 2018; 229~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