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현실세계의 또 다른 모습이다
앞서 보았듯이 정신분석학의 탄생은 무의식의 발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야말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의식과 달리 우리 자신도 모르는 곳에서 은밀하게 우리를 조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의식은 말 그대로 인간이 스스로 인지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무의식은 그러한 통제를 벗어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우리의 행동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조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의식은 한편으로 우리가 그곳을 탐사할 수 없는 심연의 세계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이러한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우리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프로이트가 주목한 대표적인 무의식의 세계는 바로 꿈이다. 그는 꿈 연구를 집대성한 책 《꿈의 해석》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의 핵심은 꿈에 대한 해석이 과학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꿈에 관한 기존의 학설을 매우 꼼꼼하게 검토하면서 이들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기존의 학설은 꿈을 수면이라는 생리학적 현상과 결합시켜 이해하든가 혹은 매우 초자연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방식으로 그것에 접근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꿈을 수면 활동과 연관 짓는다는 것은 이미 수면 활동이라는 생리적인 현상과 결합시켜서 꿈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는 꿈을 전적으로 심리적인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과는 대치된다.
여기에는 수면 활동에서 이루어지는 꿈의 세계는 깨어 있는 현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세계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이에 대한 가장 집약적인 표현은 부르다흐(Karl Friedrich Burdach, 1776~1847) 등이 표현한 “꿈꾸는 사람은 깨어 있는 동안의 의식세계에 등을 돌린다.”라는 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이 활동하지 않는 공상의 세계가 바로 꿈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프로이트에 앞서서 이러한 무의식의 특성을 암시적으로 거론한 사람은 인간의 기억을 축음기에 비유한 심리학자 조제프 델뵈프(Joseph Delboeuf, 1831~1896)였다. 그는 인간의 뇌를 축음기에 비유하였는데, 인간의 뇌는 마치 축음기가 주변의 소음을 모두 다 기록하는 것처럼 자신이 지각하는 모든 것을 기록한다. 이 모든 것이 마치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자료처럼 뇌 속에 저장되어 있지만, 인간은 그것을 꺼낼 수 없을 따름이다.
그런데 델뵈프에 따르면 이렇게 뇌 속에 저장되었지만 망각된 기억들이 가끔씩 꿈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1862년 어느 날 꾸었던 꿈의 사례를 통하여 이를 설명한다. 꿈속에서 그는 눈 덮인 자신의 집 뜰에서 눈 속에 파묻힌 반쯤 언 도마뱀 두 마리를 보았다. 그는 도마뱀들의 몸을 녹여주고 양치류 잎을 주었다. 꿈에서 그 식물의 이름은 ‘아스플레니움 루타뮤랄리스’라는 학명으로 등장하였다.
꿈에서 깬 후에 그 식물의 이름이 기억났지만 그것은 결코 그가 알고 있던 이름이 아니었다. 그런데 식물도감을 찾아본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다름 아닌 그 식물명이 실제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16년 후에야 그는 이 꿈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데, 그 꿈을 꾸기 2년 전 한 식물표본집에 자신이 아스플레니움이라는 글씨를 적어놓는 것을 발견했다. 말하자면 자신도 잊고 있었던 기억이 꿈속에서 떠오른 것이다.
델뵈프는 꿈이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지만, 여전히 꿈이 어떻게 현실과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못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왜 잊고 있던 아스플레니움이라는 단어가 갑작스럽게 꿈에서 떠올랐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하였다. 프로이트의 관심은 바로 꿈의 현상이 어떻게 현실과 관련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얻은 결론은 꿈이란 ‘현실의 좌절된 욕망의 성취’라는 사실이다.
가령 아침잠에 쫓기는 회사원이 세수를 하는 꿈을 꾼다면 이는 곧 이미 세수를 했을 경우 준비 시간을 줄이고 잠을 더 잘 수 있다는 현실적 욕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다음 날 달리기 시합을 앞둔 학생이 발이 떨어지지 않는 꿈을 꾸는 것도 욕망의 성취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제기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발이 떨어지지 않음으로써 달리기 시합에서 질 수 있다는 불안한 결과를 사전에 합리화하고자 하는 방어기제로 볼 수 있다.
물론 꿈이 현실에서 좌절된 욕망의 성취라고 했을 때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꿈이 앞에서 든 예처럼 단순한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꿈은 매우 난해한 형태로 나타나서 거의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이유는 꿈속에서도 검열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이란 주로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것과 관련이 있다. 가령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시체 확인이나 근친상간 등과 같은 행위는 우리의 의식이 행동뿐만 아니라 상상하는 것조차 통제한다. 수면 상태에서는 우리 의식의 통제와 검열이 현실보다 느슨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현실에서 억압된 자신의 욕망을 표출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꿈속에서 전혀 검열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꿈속에서 우리의 무의식은 의식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교묘하게 위장하여 표출한다.
의식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꿈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장치가 ‘압축(Verdichtung)’과 ‘전치(Verschiebung)’이다. 압축이란 욕망의 대상을 은폐시키기 위해서 여러 개의 유사한 것들을 압축시켜서 변형하는 장치이다. 가령 현실에서 금기시된 대상을 인물을 꿈에서 성적으로 욕망할 경우 그 인물을 명확하게 알아볼 수 없게 하기 위해서 여러 인물과 뒤섞어놓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압축의 과정은 매우 교묘하고 복잡하게 발생하므로 꿈속의 표상이 정확하게 어떤 대상을 나타내는지 해석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한편 ‘전치’란 욕망하는 대상을 매우 사소한 부분으로 나타내어 그 대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피하는 장치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인물을 그 인물이 신고 있던 구두의 끈이 색깔만 살짝 대체되어 표상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심지어 구두끈 색깔로만 대체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의 표상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꿈의 해석이 어렵다고 해서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프로이트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경우든 간에 꿈의 표상은 현실에서 좌절된 무의식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꿈은 무의식의 세계로 통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 무의식의 세계는 우리의 의식이라는 가면이 벗겨진, 보다 순수한 내면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초현실주의자들이 현실보다 무의식의 세계, 즉 초현실의 세계에 집착한 것은 무의식의 세계야말로 현실의 가식이 제거된 본래의 모습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꿈은 현실세계의 또 다른 모습이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