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꽃 결혼식
/김상호
작년 봄에는 마당에 삼십 년 이상 키워왔던 아름드리 목련과 외래종 관엽식물인 헤데라며 담장 위의 슬픈 능소화를 잘라내었다. 세 트럭이나 되던 나무의 주검들을 힘겹게 땔감으로 실어다 주고 그 자리에 텃밭을 일구었다.
먼저 목련과 헤데라를 잘라낸 세 평 남짓한 동쪽 마당의 담장 아래엔 대나무를 쪼개어 비닐하우스 뼈대처럼 만들어 방울토마토 줄기를 올리고, 그 아래에는 대파를 심고 담장에는 호박을 올렸다. 오래 키워왔던 구기자도 베어내었는데 열매를 앙증맞게 키워 선물하는 마(山藥)는 그냥 두었다.
마당 남쪽 단풍나무와 남천촉(南天燭) 군락 사이의 다섯 평가량 화단(花壇)에는 고추와 들깨, 옥수수, 파, 고구마를 조금씩 심었다. 나머지 시멘트 포장된 마당에는 커다란 화분을 갖다 두고 고구마와 파를 심었다. 맨 먼저 농사의 즐거움을 준 것은 호박이었다.
국수를 좋아하는 나의 식성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애호박인데, 그 새파랗고 윤이 반질거리는 애호박을 드는 칼로 얇게 썰어 기름에 볶아 마늘 깨소금 새우젓에 소금 간을 하여 만든 호박 나물과 참기름 파 깨 마늘 양파 등이 듬뿍 들어간 간장에 미리 삶아 냉장시켜 둔 멸치 육수, 거기다. 메밀국수 한 사리를 풀면 세상 부러운 것 없는 여름 한 끼가 해결된다.
그 싱싱하고 부드러운 넝쿨손을 도전적으로 내뻗으며 위로 위로 타고 오르는 생명의 신비가 놀랍기도 하지만, 넝쿨 마디마디 잎자루 사이 수꽃 속에 어쩌다가 하나씩 돋아 나오는 작은 암꽃 아래 호박의 자태는 어린아이의 새로 나온 젖니처럼 귀엽고 반가웠다.
작은 콩알만 한 호박이 하루 이틀 사이에 방울토마토 크기로, 또 한 이틀 사이에 탱자만 하게 커지는 양이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호박이 밀감만 한 크기가 되면 호박꽃이 피는데, 어찌 된 일인지 어떤 놈은 잘 자라지만 어떤 녀석은 어린 호박과 함께 그냥 시들어 떨어지고 마는 것이어서, 맛있는 호박 나물을 고대하며 지켜보는 내겐 여간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거름도 충분하고 모든 게 다 좋은데 열매가 빠지는 이유는 벌이 찾지 않아 호박꽃이 제대로 수정이 되지 않은 거라 판단하고, 암꽃이 열리기만 하면 가장 큼직한 잘생긴 수꽃을 신랑감으로 삼아 결혼을 시켜 주었다.
그렇게 꽃들의 혼사를 치러주고 보니 나도 잘 익은 꽃 속에서 하룻밤 자고 난 듯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젠 그 윤기 반질거리는 맛있는 애호박을 몇 개나 먹게 생겼다고 속으로 기뻐하며.
며칠 지나고 보니 과연 효험이 있었던지 호박은 잘 자라주었다. 문제를 해결하고 생각해 보니 무척 즐거웠다. 날마다 새벽이면 일어나자마자 호박이 몇 개나 더 열렸는지 넝쿨을 뒤져가며 세어보고, 새로 신부가 나타나면 얼른 잘생긴 배필을 찾아 혼례를 치러주는 그것이 큰 즐거움이 되었다. 담장 너머 달린 애호박은 손을 타 서리 맞을지 걱정되어 애써 잎으로 숨기기도 하고, 주차를 하면서 차로 가리기도 하였다.
그렇게 호박꽃 결혼식에 재미를 붙이다 보니 나중엔 신부가 어려서 꽃잎이 다 열리기도 전에 졸갑증이 나서, 아직은 닫혀 있는 꽃잎을 강제로 조금 찢어서 그 속으로 신랑을 들여보내게 되었다. 어찌 보면 강제 결혼이다. 그 이틀 뒤였다. 놀랍게도 잘 자라줄 거라 기대했던 그 어린 신부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시들하던 그녀는 곧이어 다음날 노리끼리한 색으로 변하여 무참하게 땅바닥으로 떨어져 죽어버리는 게 아닌가?
참으로 미묘하고 섬세한 존재들이었다. 못생긴 사람을 호박꽃이라 부르지만 그건 호박이 얼마나 곱고 예쁜지 애호박을 사랑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큼직한 잘생긴 신랑을 골라 애써 결혼을 시켜 주었건만 왜 잘 살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일까?
이제 막 생겨나는 어린 신부는 연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우악스레 완력으로 강제 결혼을 시키니 그 여린 생명을 바쳐 죽음으로 항거하는 꽃의 모습은 경외 그 자체였다. 그렇게 욕심으로 몇몇 어린 신부들의 실패를 맛본 뒤에는 그들이 다 자라기 전엔 결코 혼사를 치르지 않게 되었다.
충분한 호박을 거두려면 거름이 시원치 않으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오래전엔 어느 집이든 호박구덩이에 거름으로 흔한 인분을 넣었는데 날이 가물면 애써 질통을 메고 매일 물을 날라야 했다.
지금은 유기질비료를 사들여 호박에 주기도 하거니와, 마당에 서 있는 수도꼭지를 틀기만 하면 가뭄은 해결되니 텃밭 호박 농사는 예전의 어려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올해 호박 농사도 잘 지어서 여름내 애호박을 실컷 즐기고, 가을이면 커다란 누렁둥이 호박을 거두어 호박죽을 해 먹을 생각을 하면 또다시 행복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날이 너무 더워 그런지 여태 호박이 달리질 않는다. 며칠 전 태풍이 오던 날은 비는 오고 입은 궁금하여 생각해 낸 것이 파전이었다. 잔파를 좀 뽑고 들깻잎도 몇 장 보태고 거기다 땡초를 썰어 넣고 비장의 새우살과 조갯살 등 해물 두어 가지를 더하고 튀김가루 반죽을 덧씌워 파전을 구워내니 빠질 수 없는 것이 탁주였다.
그날 점심은 파전에 탁주 한 병이 전부였는데, 양철지붕에 비가 떨어져 바람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나무들과 함께 전원교향곡을 연주하고, 푸른 작물들은 비에 젖어 신명이 나서 목젖이 보이도록 깔깔 웃어대며 무럭무럭 자라는 게 보였다. 하얀 탁주 한 사발은 첫 잔부터 알딸딸한데 톡 쏘는 땡초와 새우며 조갯살, 싱싱한 파와 들깻잎의 향미가 튀김가루 식감에 어우러져 기가 막혔다.
거의 매일 마당에서 방울토마토를 하루 먹을 분량 이상 수확하고 그것에 꿀을 부어 고루 섞어 먹고 있지만 호박이 자라주지 않으니 기다리다 못해 어제는 호박 잎사귀에 생각이 미쳤다.
호박 잎사귀를 밥솥에 쪄서 마당에서 딴 땡초 몇 개를 넣고 짜작하게 끓인 조선된장찌개와 함께 쌈을 싸 먹어보니 어머님이 해주시던 어린 시절 맛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방금 쪄낸 뜨거운 호박잎에 더운 보리밥을 한 숟갈 얹고, 땡초 맛이 아릿한 된장찌개를 한 술 듬뿍 올려 얼른 싸서 손가락에 번져 나오는 된장 국물을 느끼며 입에 넣어 씹어 보았다. 과연 호박잎쌈은 구수한 조선된장과 땡초 맛에, 부드러운 호박 잎사귀 뒤편의 자잘하게 솟은 작은 바늘들이 입안 여기저기 가스랑거리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거의 숨도 안 쉬고 밥 한 공기를 두텁이 파리 삼키듯 후딱 먹어치우고 보니 더 먹고 싶은 욕심에 망설임이 가득하였지만 참았다. 성인이 논어(論語) 학이편에 이르기를 군자는 배부름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내일은 보리쌀을 삶아서 꽁보리밥을 삼베를 깐 대소쿠리에 담아내고 시커먼 조선된장에 청량초를 더하여, 그 보리밥을 차고 시원한 우물물로 씻어 물에 말아 된장에 고추를 찍어 점심으로 더위를 이겨볼 작정이다. 오늘이 벌써 입추(立秋)다. 끝.
첫댓글
어서오세요 오심을 반가움으로
마중을 드리고 고마움에
인사로 같이한답니다
기쁨에 시간 시간 되시길 같이하구
좋은 시간 보내시구요
감사에 마음을 많이 드린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 감사합니다
잘 감상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